처음 죽음을 마주한 게 초등학생 때였습니다.
아직도 그 친구의 이름을 기억하는, 같은 박 학우였죠.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심장이 원래 좋지 않은 친구였습니다.
그러다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상태가 안좋아져서 입원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개학을 했음에도 그 친구의 얼굴을 볼 수 없었죠.
마침 그때 외삼촌이 그 친구가 입원한 병원의 심혈관센터에서 레지던트를 하고 있었는데,
저는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그 친구에게 우리 삼촌이 대학병원 의사라는 걸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친구 병문안을 갔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네요.
그런 것도 모르고 담임 선생님은 제가 참 착하다며 칭찬해주셨는데 부끄러움을 모르는 나이여서 그랬는지,
아니면 나란 사람이 그렇게 생겨 먹어서였는지 저는 또 그렇게 칭찬 받는 게 싫지 않고 좋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 친구는 결국 그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졌습니다.
그 친구 부모님이 천주교인이었는지 동네 성당에서 장례 미사를 치뤘고
우리 반 전원이 성당미사에 참여 했습니다.
평소 좋아했던 여학생 역시 천주교인이었는지 머리 위에 하얀 수건을 썼는데 그 모습이 정말 예뻐 몰래몰래 훔쳐봤던 기억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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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3학년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한국전쟁 때 이등병으로 입대하셔서 전쟁이 끝날무렵 대위로 전역하셨습니다.
그리고 군무원이 되셔서 격동의 세월 비교적 편하게 사셨습니다.
29년생이신 저희 할머니가 할아버지 덕택에 지금도 연금으로 노년을 자식들에게 손 안벌리고 잘 사시는 이유기도 합니다.
유독 저를 예뻐하셨고,
아침이면 우면산 약수터를 다녀오셨던 건강하셨던 분.
나이 일흔에 운전면허를 취득하셔서 92년형 엘란트라를 뽑아 할머니와 여기저기 여행하셨던 멋쟁이셨습니다.
이렇게 할아버지를 떠올리니 너무 보고 싶네요. 우리 할아버지...
본인은 99살까지 살다 가실 거라 하셨는데
어느 날 소화가 되지 않아 병원에 갔더니 췌장암 말기라는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온 가족이 패닉에 빠졌습니다.
그렇게 몇개월만에 할아버지는 병원에서 항암치료 중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 우리 엄마 아빠 연세가
지금 저보다 3-4살 위였던 거 같은데
만약 3-4년 뒤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신다고 생각하면
저는 이 세상 살아갈 자신이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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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살 때 입니다.
고등학교때부터 친했던 녀석이랑 같은 대학 같은 과를 입학해 매일 바보짓 하며 청춘을 대책없이 허비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친구는 건강상의 문제로 현역 입대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공익 판정을 받았고 기초 훈련을 위해 훈련소 입소를 했습니다.
한 1주일 지났는지,
갑자기 나타나서는 '면제 받았다'며 너무 좋아하는 친구를 마주하고 '세상에 이런 일도 있나' 싶었습니다.
이미 현역 판정을 받고 언제 입대해야 하나 고민만 하던 저는 그런 녀석이 세상 얄미웠죠.
그렇게 면제 받고 좋아하던 친구는 당시 유행하던 대학생 해외봉사 프로그램을 다녀오겠노라 몽골로 떠났고,
출국 며칠 후 사고사를 당해 싸늘한 주검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님이 아버지와 별거 중이셨고
외동아들이었습니다.
고등학교때부터 우리 집에서 식구처럼 지냈던 친 형제 같던 녀석이 허망하게 세상을 등졌지요.
사망 전 벌어졌던 그 일련의 사건의 고리 중 하나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런 결과는 없지 않았을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봤지만 모두 부질 없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닥터 스트레인지가 아니니까요.
몇년이 흐르고 버터플라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이 친구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나에게 코피를 흘려가면서 바꾸고 싶은 과거가 있느냐 누가 묻는다면 이 해 여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습니다.
화장 후 하얀 뼈조각이 되어 나온 친구의 유골을 모아 어머님 품에 드렸습니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머님은 몇년 전 암투병 끝에 그리운 아들을 보러 훌훌 하늘로 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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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테는 큰 형같은 목사님이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 막 공군을 대위로 전역 후 신학 공부 중이셨던 전도사님으로 우리 교회를 오셨는데, 우리 형제와 제 친구들과 유독 가깝게 지냈죠. 같은 교회에서 전도사-강도사-목사 안수까지 받아 부목사 생활까지 쾌 오래 하시다 작은 교회를 개척하러 나가셨습니다.
제 동생은 그 목사님을 따라 교회를 옮기기도 했고요.
첫 부임 당시 성가대에서 피아노를 치던 누나가 있었는데 키도 크고 얼굴도 예뻐 교회 내 인기가 많았습니다.
저보다 4-5살 위였는데 목사님은 그 누나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과 막역하게 지냈기 때문에 당연히 누나, 그리고 목사님 아들 딸들과도 친하게 지냈죠.
그런데 그 누나가 지난 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녀들은 이제 대학생이 되었고,
목사님의 머리는 이제 검은 머리보다 흰머리가 더 많은,
장년에 접어들었는데 말입니다.
여전히 남의 죽음을 마주하는 건 참 어려운 일입니다.
어렸을 때는 그 공백의 무게를 가늠할 수 없었고,
이제는 그 무게를 알기에 뭐라 섣불리 뭐라 말할 수 없어
그냥 고개를 돌리게 되거나 마음을 보이지 못합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배워야 할 지혜는 다름 아닌 위로하는 법인 것 같습니다.
위로는 그 사람의 처지를 다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어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하고 싶어서 건내는 거라 생각합니다.
'내가 그 마음 다 알어'가 아니라,
너가 조금 덜 슬펐으면 좋겠어.
동시에 아직 살아계신 우리 엄마 아빠
그리고 건강한 내 동생과 제수씨
또 이제 막 태어나 한없이 눈부신 우리 조카
정말 고맙습니다. 이들 때문에 오늘도 행복합니다.
언젠가 또 다른 얼굴로 찾아 올 죽음
그리고 나에게도 찾아오겠지만
그 과정과 결말이 너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또한 평안과 행복의 또 다른 미지의 얼굴이었으면 합니다.
첫댓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네요. 잘읽었습니다
죽음은 인간이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숙명적인 것이라 생명이 떠나간다는 것에서 숙연해지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살고 싶은 이 하루를 더 의미있게 보내야겠네요. 기운내십시오.
저도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싶고 제대로된 위로를 해주고 싶습니다..(정말 행복해 보이시는군요..!!)
까마득히 잊고만 있었는데 저도 초등학교 친구 생각이 나네요 ,얼굴은 또렷히 기억이 안나지만 머리가 굉장히 곱슬곱슬했던 친구였는데 ,,1학년때 생일 초대 받아서 집에 한번 놀러간 뒤로 친해져서 ,그 아이 집에서 자주 놀았던 기억이 생생히 납니다 ,마당이 넓은 집이었는데 거기서 막 뛰어놀다가 친구 어머니의 꾸지람을 듣고 ,그 친구가 마루에 앉아서 쉬다가 ,나 몸이 아퍼서 곧 병원에 치료받으러 가야되 라고 얘기 하더군요 ,,그래서 당분간 집에 못올거라고 ,,몇밤 자고 오냐고 물어보고 그랬던거 같은데 ,,결국 그날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심장판막증 ,,저 어렸을때 아이들에게 공포의 병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가끔 한번씩 생각나곤 했는데 ,,글보고 정말 오랫만에 떠올랐네요 ,,
중학교때 친구녀석이 한놈 있었죠..꽤나 공부도 잘하고 밝은 성격이라 여자들한테 인기도 있고 학급임원도 지내면서 농구에 미쳐있었던 친구들과 함께 잘못하지만 열심히 뛰는 그런 놈이 고등학교는 다른학교로 진학하여 못보다가 대학교 올라가서 오랜만에 만나니 키도 180이 훌쩍넘고 얼굴이 무슨 연예인처럼 이목구비가 뚜렷해졌더군요 피부도 하얘서 대학신입생때 인기가 어마어마 했습니다 이놈이 친구들중 제일 먼저 군대를 가게 됐고 100일휴가 나오는 도중 사고를 당해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당시 휴가를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 모두 그자리에서 아무말도 못하고 벙쪄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잘지내냐 오랜만에 니생각 난다~
가슴에 부딪히면서 글이 다가오네요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오늘 하루하루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 할것 같아요
죽음을 마주했던 저의 기억들도 생각나 참 많은 공감이 되었습니다. 가슴이 먹먹하네요ㅠ
사람은 태어나면 언젠가는 다 죽게 되있죠 가족이나 지인들이 한두명씩 떠난다고 생각하면 무섭고 두렵습니다 언젠가는 저에게도 일어날일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