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옥사와 정여립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은 조선시대의 인물 중에서 가장 첨예한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한 사람이다. 그렇게 된 핵심적 원인은 그가 조선시대 당쟁의 중심적 사건인 기축옥사(己丑獄事, 1589, 선조 22년)를 불러온 장본인이었지만, 여러 의문을 남긴 채 사망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 결과 기축옥사는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조작과 진실의 양론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중년에 와서 급변했다. 1584년(선조 17년) 수찬이 된 뒤 이이ㆍ성혼ㆍ박순(朴淳) 등 서인의 주요 인물을 비판하고 동인으로 돌아선 것이다.
이런 급변의 원인은 확실치 않다. 그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그의 직정적(直情的)인 성격을 문제 삼아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설명과 이런 그의 기질이 동인의 영수인 이발(李潑, 1544∼1589)과 좀더 잘 맞았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아무튼 그는 갑자기 당파를 바꿨고, 선조는 그것을 비판했다. 그러자 정여립은 즉시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이런 행보는 그가 직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는 판단을 뒷받침해 준다.
그러나 같이 피신했던 아들 정옥남(鄭玉男)은 체포되어 문초를 받은 끝에 길삼봉(吉三峯)이 주모자이고, 해서 출신 김세겸(金世謙)ㆍ박연령ㆍ이기(李箕)ㆍ이광수(李光秀)ㆍ변숭복 등이 공모했다고 자백했다.
옥사는 계속 확대되었다. 동인의 영수 이발은 정여립의 집에서 자신이 보낸 편지가 발견되어 고문을 받다가 사망했고, 그의 형제와 노모 ㆍ자식까지 모두 죽음을 당했다. 호남의 대표적인 처사(處士)였던 최영경(崔永慶, 1529∼1590)은 길삼봉으로 지목되어 고문 끝에 옥사했다.
그 뒤 3년 동안 옥사로 사망한 사람은 무려 1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런 대규모의 희생을 겪으면서 동인과 서인은 화해할 수 없이 결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