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부터 2001년까지 삼성전자 기흥사업장에서 발암물질로 알려진 납 등을 다루며 LCD를 만들었던 한혜경 씨(33)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또박또박 발음하려고 애썼다. 19살에 입사했던 한 씨는 퇴사 후 뇌종양 수술을 받고 지체장애, 시력장애, 언어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
▲ 한혜경 씨. ⓒ프레시안(김다솜)
한혜경 씨가 자신의 병이 직업병임을 인정해 달라며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의 2차 공판이 25일 서울 행정법원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는 삼성전자가 고용한 법무법인 광장 출신 변호사가 피고 보조 참가인으로 나왔다. 법무법인 광장은 인수합병(M&A) 법률자문 시장에서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 법률사무소를 누르고 처음 1위에 오른 바 있는 대형 로펌이다.
삼성전자는 법무법인 광장에서 송평근, 주완, 김인수, 유원규, 오석훈, 설동근, 한상미, 박금당, 송현석 변호사 등 9명의 변호사를 고용했다. 주완 변호사는 오세훈 서울시장과 함께 법무법인 지성에서 공동대표를 맡은 바 있다. 송평근 변호사는 서울 북부지방법원 부장판사 출신이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이 행정소송은 사업주의 과실 책임을 묻는 민사소송과는 달리 국가를 상대로 하는 소송인데, (삼성의 개입이) 산재 보장 제도의 취지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며 "거대 로펌을 고용한 삼성전자가 모든 사건에 개입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반올림은 "삼성전자가 '삼성 백혈병' 소송에 이어 '삼성 직업병 2차 행정 소송 3건' 모두에 대해 보조참가인 신청을 한 날은 14일이었다"며 "이날은 공단이 항소하겠다고 발표하고, 삼성전자가 인바이런사를 통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무조건 삼성 반도체 백혈병은 업무와 무관하다는 재조사 결과를 발표한 날과 같다"고 덧붙였다.
한혜경 씨의 어머니 김시녀 씨는 "지난 4년이란 세월이 힘들었다"며 "우리같이 힘없는 사람이 어디서 의지하고 살아야 하나 막막하다"고 말했다. 김 씨는 "산재보험 공단 이사장에게 항소를 취하하라고 호소하려는 피해자 가족들을 공단 직원이 개 끌듯이 끌어와 비 오는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뺨을 때리고 멱살을 잡아 끌어냈다"며 "그런 공단이 또 어디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김 씨는 또한 "우리는 산재를 인정받아 돈 걱정 없이 치료받으려는 거지, 호의호식하려는 것이 아니다"라며 "삼성은 그 많은 돈을 주고 그 비싼 로펌을 고용해 개미만도 못한 노동자와 싸우려 한다"고 비판했다.
반올림에서 활동하는 이종란 노무사도 "우리가 삼성전자라면 '1990년도에는 화학물질 규제도 없고 회사도 잘 몰라서 안전조치에 소홀했다. 정말 미안하다. 최소한 산재보험이라도 받을 수 있도록 돕겠다'라고 협조했을 것"이라며 "그러나 4년 내내 이런 삼성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 노무사는 "거대기업이 초대형 로펌을 동원해 적극적으로 산재 인정을 방해하고자 한다면 소송에서 질 수도 있는데 그 결과는 결국 한혜경 씨의 치료권과 생존권에 대한 박탈"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공판이 끝나자 김시녀 씨는 휠체어에 탄 한혜경 씨를 데리고 삼성전자 측 변호사에게 가서 "이런 애랑 싸우는 게 부끄럽지 않으세요? 돈이면 다가 아니에요"라고 따져 물었다. 삼성전자 측 변호사들은 아무 말 없이 법원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