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날 고향엔 해마다 폭설이 내렸다. 집에서 또렷하게 바라보이는 추풍령이 북으로 넘어갈 구름의 흐름을 막은 때문이었다. 놀이기구나 놀이터라곤 없었던 그 시절 우리 꼬마들은 강아지들만큼이나 눈밭을 좋아하여 함께 그 속을 뒹굴었다. 어쩌면 하얀색을 좋아하게 된 것도 어릴 때의 눈에서 비롯되었지 싶다.
백두산에서 기를 쓰고 설경을 카메라에 담은 것은 나처럼 눈을 좋아하는 인터넷카페 사람들을 생각해서였다. 눈을 좋아하지만 겨울이 와도 눈다운 눈을 만나지 못하는 한반도 남녘에 사는 노인들이다. 나 한 사람 고생하면 많은 사람들이 폰만 들고도 백두산 설경을 접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백두산을 덮은 눈은 이틀 전 내렸지만 바로 기온이 급강하하여 녹지 못하고 그대로 쌓인 채로 우리를 맞았다. 우리가 오른 날도 영하 28℃를 기록했다. 백두산 여행을 앞두고 새로 구입한 캐논카메라는 주인을 잘못 만나 호된 신고식을 치러야만 했다. 얼고 녹기는 수십 차례나 반복했지 싶다. 품속에서 꺼내 두 번만 셔터를 누르고 나면 말을 듣지 않았다. 손가락이 뻣뻣하게 굳는데도 촬영은 멈추질 않았으니 카메라가 주인을 원망했을 건 불문가지가 아니겠는가.
혹한에도 장백폭포를 찾은 인파는 엄청났다. 피부색으로 봐서 서양인이나 중동 쪽 사람들은 거의 보이질 않고 동양인들뿐이었다. 그 중 대부분은 자국 중국인들이었다. 일본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걸로 봐서 외국인이라면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전부인 것 같았다.
백두산 들머리라는 이도백하에서도 북파산문까진 30여km나 된다. 아침 일찍 숙소인 이도백하를 출발하여 북파매표소에 당도했지만 섣부른 기대는 접어야만 했다. 실내체육관만큼이나 큰 대합실이 꽉 찰 때까지 1시간 넘게 아까운 시간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중국이란 나라의 공산체제 후진성을 보여주는 단면이 아닐 수 없었다.
20여 년 전 대련공항에선 연길공항으로 가는 항공기가 고장 났다며 반나절을 기다렸던 악몽이 떠올랐다. 그때 조선족 보따리장사꾼 말로는 이러다가도 정권 쪽 실세만 나타나면 비행기는 금세 뜬다고 했다.
백두산 오르는 버스와 지프차 요금도 거리에 비해선 엄청난 바가지였다. 입장료 100元 장백폭포 버스요금 85元 천지로 오르는 지프차요금 85元 도합 270元 우리 돈 50,000원이었다.
영상에서 눈 폭풍이 몰아치는 것처럼 보이는 희뿌연 장면은 온천수가 흐르면서 뿜어내는 수증기다. 증기를 대하면서 얼어붙은 몸에게 사우나 물속에 들었다는 체면을 걸어보지만 먹힐 리 없었다. 만약 온천수로 뿜어내지 못하고 막힌다면 어떻게 될까. 천지 바닥에서 솟구치는 물은 계속 불어나 고봉들 높이로 올라갈 것이고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나머지 상상할 수 없는 큰 재난을 불러올 수도 있을 터이다.
새천년을 앞둔 1999년 여름엔 장백폭포 밑을 범람한 흙탕물이 홍수처럼 흘러내려 접근할 수 없었는데 이제 깨끗한 산책로를 만들어 상전벽해를 느끼게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결빙된 산에서 발생할 수 있는 안전사고를 우려해서 5월부터 10월까지만 입산을 허용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11월 중순을 지나서도 올랐으니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중이 고기 맛을 알면 절에 빈대가 살아남지 못한다고 했던가. 돈 맛을 본 중국이 입장료를 비롯하여 관광지 곳곳에서 바가지 상혼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사드보복이니 한한령이니 따질 것도 없는 질 낮은 나라가 중국인이란 생각이 든다. 중국은 절대로 남을 배려할 줄 모르니 관광지에도 자기 나라 어려운 글자로만 안내문을 붙여놓고 있다.
말 나온 김에 김일성이 백두산을 중국에 갖다 바친 스토리도 잠시 들여다보자. 간도협약으로 간도지방은 분실되었지만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영토였다. 그런데도 6.25동란을 일으켜 남침했다가 혼쭐이 난 김성주 즉 가짜 김일성을 도와준 중공은 1950년 말에 이르러 참전 대가로 백두산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957년 주은래는 참전대가로 백두산 영토 250㎞를 중국에 할양할 것을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58년 천문봉에 기상대를 설치했고 2년 후에는 백두산 전역을 장백산 자연보호구로 지정했다. 그렇게 해도 북한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주은래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독대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선의 국경수비대원들과 일부 조선주민들의 불법월경으로 긴장상태가 조성되어 양국 간에 시비가 벌어진다면 이것은 옳지 못하니 조치를 취해 주시오." 이 말에 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화답한다. "동무들이 원한다면 우리는 평양도 나누어 가질 수 있소. 양국 간에 존재하는 것은 영원한 혁명적 동지애뿐이며 남조선에서 미제가 물러나는 날 우리는 진정 하나가 될 수도 있소." 그리고 1968년 12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중국 측은 백두산 전역에서 북한 국경수비대와 일반주민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결국 김일성은 북위 42도선을 경계로 백두산을 중국에 할양할 것을 승인하고 "조중우호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것이 심지어 조선의 영토이든 바다이든 피로 나눈 혁명적 동지애로 맺어진 조중우의보다 위에 설 수는 없다"고 말한다. 김일성이나 주은래나 다 지구를 떠났지만 이런 날강도들의 농간에 민족의 영산 백두산이 사라졌으니 얼마나 원통하고 절통한 노릇인가. 가짜 김일성인 김성주란 자는 이완용보다 더한 매국노가 아닌가 싶다.
백두산 오른 김에 가장 높은 봉우리 병사봉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다. 병사봉을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바꾼 장군봉으로 부른다. 김정일은 1963년 8월 백두산 방문에서 최고봉 이름이 병사봉임을 알고 수령님은 백두산이 낳은 장군님이신데 제일 높은 봉우리가 병사봉일 수는 없으니 장군봉으로 고치라고 말했다. 그런데 백두산의 병사봉은 兵士가 아니라 지금의 사단장이나 군단장 급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줄여 부른 것이었다.
폭포를 내려오자 스스로를 <아가리방송>이라 부르는 마흔 가까운 연변동포 여행가이드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온천수에 삶은 따뜻한 계란을 2개씩 나눠주는데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짧은 3일간의 여행에서 그는 무려 일곱 군데의 매장을 앞장서 안내하며 과잉친절을 보였다. 예정에 든 여행코스를 한두 곳 빼먹더라도 또 식사시간이 다소 늦어지더라도 그가 목표로 한 매장을 떠날 줄 몰랐다. 드디어 중년남자 서넛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이드는 공식적으로 들르도록 돼있다는 말로 고집을 꺾지 않았다. 여행객 중 상늙은이가 입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의 충고에도 그는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공개적으로 나무란 탓인지 마지막 날 공항에서 헤어지기 전 연락처를 물어도 핑계를 대며 알려주지 않았다. 함께 웃으면서 찍은 사진도 있었는데 자신이 저지른 무리수의 뒷감당이 걱정되었는지 메일주소도 폰 번호도 밝히질 못했다. 10여 명이 단체로 온 할매들이 차안에서 시끄러울 때면 가이드는 자신의 아가리방송을 틀어댔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하시라도 관광객들의 지갑을 뺄 수 있는 위인이었다. 그로 인해 백두산관광은 뒷맛까지 씁쓸한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