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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적 유대인, 이면적 유대인
롬 2:25-29
25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26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28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롬 2:25-29 / 만일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다면 유대인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가치가 있겠지만 지키지 않는다면 이방인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26) 비록 이방인일지라도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킨다면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에게 주려고 계획하신 모든 권리와 명예를 그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27) 사실 그런 이방인은 하나님에 대해 많은 것을 알면서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 유대인보다 훨씬 나은 사람입니다. 28) 그러므로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든가 유대인이 받는 할례를 받았다는 것만으로 누구나 참유대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29) 참유대인이란 그 마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여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표면적으로 할례를 받아 몸의 일부를 잘라 낸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이 완전히 변화된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의 생활이 변화된 사람이야말로 비록 사람들에게는 칭찬받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의 칭찬을 받게 됩니다.
앞 단락에서는 율법대로 살지 않는 유대인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욕을 먹는다고 하였습니다. 이어 본 단락은 형식적인 할례의 무익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네가 율법을 행하면(25-27) 바울은 유대인들의 가장 큰 자랑거리인 율법과 함께 또 다른 자랑거리인 할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시키는 유일한 기준은 율법과 할례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 자체가 의의 조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할례가 어떤 의식보다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유대인들의 형식적인 할례가 무할례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형식적인 할례보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유대인들이 율법과 할례의 특권을 가졌다고 해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율법을 지키는 무할례자로부터 판단과 정죄를 당할 것입니다. 그들이 이방인들에게 정죄를 받는다는 것은 충격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도 마지막 때에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과 솔로몬을 찾아온 남방 여인이 유대인들을 정죄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2:41-42).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예수를 거절한 유대인들은 정죄에 이르게 되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좇아 예수를 믿는 이방인들은 세세무궁토록 왕 노릇을 하게 될 것입니다(계 22:5).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28-29) 표면적 유대인이 있고, 이면적 참 유대인 있습니다. 또한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있고, 마음의 참 할례가 있습니다. 혈통적인 면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태어난 표면적 유대인은 참 유대인이 아닙니다. 외면적으로 할례의 표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참 할례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육신의 할례보다 마음의 할례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자신들이 유대인임을 증명할 수 있는 표가 바로 율법과 할례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겉으로는 율법을 가졌으나 율법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할례의 표식이 있었으나 표면적인 것뿐이었습니다. 참 유대인은 율법을 지키는 데 있고, 할례를 마음에 받는 데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자들에게는 사람으로부터 칭찬이 아닌 하나님의 칭찬이 있게 될 것입니다.
적용: 유대인들은 율법과 할례만 있으면 하나님 백성으로서 특권을 누리는 줄로 착각하였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와 같이 오해하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서로 나누어 봅시다.
누구나 머리카락을 걷어내면 민머리가 나온다.-수전 맥헨리.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을 때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모습으로 누군가를 평가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친밀한 사이가 되면 겉으로 보지 못했던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사람에 대한 진솔한 평가는 외적 모습이 아닌 내적 모습으로 이뤄집니다. 겉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듯한 유대인이지만, 율법을 범하여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을 하고 있는 모습에서 혹시 우리도 표면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봅니다.
호크마 주석
=====2:25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 바울은 유대인들의 가장 큰 자랑거리인 율법과 함께 또 다른 자랑거리인 할례의 문제로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자신이 의도한 복음의 본질에 한 걸음 더 접근하고 있다.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시키는 유일한 기준은 율법이지만 표식은 할례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지금까지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들어 논리를 전개해 왔지만, 이제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의 자랑거리요 표식인 할례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더욱더 유대인들이 변명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여기서 '율법을 행한다'는 것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하나님의 편에 서 있을 때 유대인들의 할례가 그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형식적인 할례 의식에 그치며 이는 그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계속 유지시킬 수 있는 신적인 힘을 상실케 하고 만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하나님이 능히 이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고 경고했던 것이다.
네 할 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 유대인들은 할례 자체가 의의 조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으로 오해했다. 실제로 유대교의 전승에 따르면 '게헨나(지옥) 문 옆에 앉았을지라도 할례받은 사람은 아무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아브라함이 책임을 져 준다'는 내용의 교훈이 있다(Harrison). 이와 같이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할 례가 다른 어떤 의식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형식적인 유대인들의 할례는 무할례와 같다고 선포한 것은 혁명적인 선언이었다. 이러한 바울의 선포로 인해 유대인의 자랑은 쓸모없는 것으로 변하게 되며 형식적인 신앙에서 실제적인 신앙으로의 결단이 요구되고 있다.
앞장에서 바울은 본서의 핵심인 복음과 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의(義)에 관한 대주제를 내걸고 장황한 논증을 시작하였다. 먼저 그는 죄의 문제를 논하였거니와 앞장에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의 죄를 적나라하게 폭로하였고 이어 본장에서는 선민(選民) 유대인의 죄를 다루고 있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은 그 특권에도 불구하고 형식적 율법주의의 오류를 범하였음으로 여지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신랄한 비판이 가해지고 있다. 본장의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문맥상의 유의점. 바울의 기독교 강론은 앞장에서 이미 시작되었거니와 바울은 먼저 인간의 죄 문제를 다루었다. 인간에세 왜 복음이 필요한가를 설명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악된 상황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그는 복음이야말로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정의하였던 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존재라면 구원이라는 말은 필요 없을 것이다. 이에 바울은 구원의 당위성을 설파(說破)하기 위해 인간의 죄를 집중적으로 파헤쳐 고발하였고 이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죄인된 자신의 정체를 깨닫게 하고자 하였다.
앞장에서 바울은 이방인의 참람한 죄악상을 폭로하였거니와(1:18-32) 본장에서는 유대인의 죄악상을 낱낱이 폭로하고 있으며 이는 다음 장까지 계속된다(1절-3:8). 바울은 본장에서 율법 없는 이방인도 죄인이고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은 유대인도 똑같이 죄인임을 증명하므로 모든 인간은 죄인이고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은 유대인도 똑같이 죄인임을 증명하므로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3:9-20).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이 바울의 인간 이해의 출발점이다. 이렇듯 바울은 로마교회에 자신의 기독교 신앙 체계를 알리고자 함에 있어서 죄론(罪論)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으니 이는 앞장 18절에서 다음 장 20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 뒤부터는 바울의 구원론이 펼쳐지게 될 것이다.
(2) 내용과 구조 및 문체상의 특징. 본장은 내용과 구조면에서 앞장 후반부(1:18-32)와 병행을 이룬다. 내용상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인간의 부당성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단지 앞장에서는 이방인의 죄성(罪性)에 초점을 두었으며 본장에서는 타락한 유대인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 두 부분에서는 각각 이방인과 유대인의 죄에 대한 일반적인 묘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뒤따라 매우 구체적인 죄목들이 열거되고 있다(1:16, 17-29;1:18-23, 16-32).
한편 바울은 본장을 기록함에 있어서 특수한 문체를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소위 '디아트리베'(* , '가정')라고 하는 문체로서 당시 고대인(古代人)들이 자주 사용하던 문체였다. 즉 가상적인 비판자를 설정해 두고 그로부터 나올 듯한 질문이나 반론에 대답하는 방식이다. 본장에서 바울은 누군가를 향해서 계속 그의 죄를 고발하고 있거니와 처음에는 그 대상이 누구인지 전혀 암시를 주지 않지만, 차츰 그 대상이 유대인들이라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이로써 앞장에서 바울의 설교를 열심히 듣고 있던 상상의 인물 또한 바로 유대인들이었음이 밝혀진다. 바울은 본장에서 유대인의 죄를 지적하기 위하여 먼저 이방인의 죄를 언급하였던 것이다. 바울은 동족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유대인의 민족적인 속성(屬性)을 잘 지적하면서 무엇보다도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향한 논증(論證)을 전개함에 있어서 호칭과 물음 등의 생생한 대화체의 논술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1, 3, 4, 21절). 또한 바울은 본장에서 법적인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는 바(5, 12, 15, 16절), 이는 앞장(1:18-32)과는 달리 묵시 문학적 종말 사상과 결합되어 나타난다. 즉 세상 역사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각사람의 행한대로 심판하신다는 선언이다. 바울은 본장을 통하여 단순히 유대인들을 향한 엄한 책망에 머물지 않고 나아가 유대인의 회개를 강렬하게 호소하고 있으니 그의 동족(同族)에 대한 복음 전도의 열정을 발견할 수 있으며 또한 기독교 신앙을 체계화시키는 데 있어서 탁월한 그의 수사학적(修辭學的) 재능을 엿볼 수 있다 하겠다.
(3) 본장의 강조점. 본장의 논증을 통하여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게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 없는 이방인이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이나 똑같은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심판은 공정하여 대상의 여하를 막론하고 행위대로 판단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율법과 할례의 의미를 새롭게 계시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남달리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고 할례까지 받은 자들이었으나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과 진리는 더 잘 이해하고 행하기는 커녕 오히려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불의를 행하였다. 이방인의 사악한 세계를 심판하는 경건한 유대인들조차 허구로 가득하였으며 율법과 할례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과 우월의식 또한 허구와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처럼 외형에 치중하는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라 오직 이면적(裏面的)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 것이라는 바울의 선언(19절)은 본장의 핵심을 잘 나타내 준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을 때에는 율법이나 할례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복음의 관점에서 평가할 때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존재들이었다. 이로써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심판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사상은 당시 민족주의(民族主義) 감정이 고조되어가고 있던 유대인들의 극심한 반대와 핍박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동족 유대인을 향한 바울의 뜨거운 열정은 그들의 온갖 환난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하게 하였다.
한편 본장의 내용은 네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문단은 기본 명제로서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외모(外貌)는 중요하지 않음을 강조하였고(1-11절), 둘째 문단에서는 율법을 소유하고 있는 것에 근거하여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유대인의 생각을 부인하며(12-16절), 셋째 문단에서는 유대인들으 율법 위반, 즉 죄악상을 폭로하고 있으며(17-24절), 마지막 문잔에서는 할례의 특권을 박탈함과 동시에 그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고 있다(25-29절).
끝없이 물어야 할 질문
김병삼 목사 / 롬 2:25-29
오늘날 데살로니키(Thessaloniki)로 불리는 성서의 데살로니가(Thessalonica)는 현재 그리스의 살로니카(Salonika) 만에 있는 옛 마게도냐의 중요 항구 도시입니다. 데살로니가는 알렉산더 대왕 사후 치열한 권력 쟁탈전에서 승리한 가산더(Cassander) 장군이 승리 후 잃은 인심을 수습하기 위해 세운 도시입니다. 그리고 자기 처의 이름을 따라 데살로니가라고 지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이 이곳에 도착하여 전도하자 많은 교인이 생기지만, 핍박도 일어났다고 기록합니다. 바울 일행에게 숙소를 제공했던 야손 일가는 변을 당했고,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를 예배하지 않고 예수라는 다른 왕을 섬기는 자들이라고 고발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교인들은 바울과 실라의 신변을 걱정한 나머지 밤중에 다른 곳으로 피신시켰습니다(행17:1~10).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간 것은 50-51년경의 제2차 전도 여행 때였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적어도 몇 달을 머물렀으며, 이곳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게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등을 돌리자 하는 수 없이 이방인들에게로 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그러자 몇몇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바울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았으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경험했던 사역과 수난이 직접 연관된 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 선교를 위해 방문했던 지역마다 유대인들이 모여 있는 회당을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말씀을 전하고 근거지를 만들기 위해서였지요. 그리고 유대인 중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생겨났죠. 물론 사도 바울과 당시의 사도들 역시 유대인으로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었고요.
그들에게 있어 조상 적부터 믿고 따랐던 전통을 지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고, 예수를 믿는 것이 큰 결단이기도 했지만, 유대교 전통을 가지지 않았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 참 힘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택하신 민족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이 왜 이방인도 구원해야 하는지 이해하기가 참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문제보다는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을 힘들게 했던 것은 바로 이런 내부적 갈등의 문제였던 것이죠.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은 ‘할례’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시는 징표로 할례를 명령하셨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할례를 받은 택하신 족속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생각, 즉,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시각으로 복음을 이해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런 논쟁에 대한 사도 바울의 신앙적 견해를 보여줍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사랑과 평화보다는 반목과 질시 적대감이 팽배해 있었죠. 아무리 생각해도 복음의 본질과는 벗어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 본문으로 말씀을 나누어야 하는 이유는 이러한 갈등과 반목의 문제가 단순히 할례냐 아니냐의 범주를 넘어서서 우리의 삶에도 아주 보편적으로 퍼져 있다는 것이죠. 아니 복음을 먼저 받아들이고 택함을 받았다는 자들이 범하기 쉬운 우를 우리에게 다시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죠.
지난주에 어떤 교인이 저에게 보내준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도 같이 맞춰보세요.
일명 “닭 시리즈”인데요.1.세상에서 제일 빠른 닭은? 후다닥2.제일 섹시한 닭은? 홀딱3.제일 망한 닭은? 쫄딱4.죽은 닭은? 꼴까닥5.그럼 미친 닭은? 헷가닥▶몇 번이나 웃으셨어요?이런 닭...저런 닭이 있어도 역시 최고의 닭은 '토닭 토닭'입니다그리고 살다보니 최고로 멋진 사람은 늘 곁에서 격려해주며 토닥토닥 격려해주는 사람입니다. 목사님~ 조크를 넘 재밌게 잘하시지만, 이것도 유치하지만 재밌죠? 젊은이보다 어르신들이 좋아하시는 유머코드입니다^^
저에게 제일 맘에 드는 말이 “토닥토닥”입니다. 이게 그 닭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사실 믿음의 공동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서로 토닥토닥 격려하고 사랑해주는 모습인데 말입니다. 우리는 나의 신앙의 전통과 다르다는 이유로 반목하고 질시할 때가 참 많습니다.
우리는 늘 신앙의 이름으로라고 하지만, 사실은 내 속에 굳어진 지극히 율법적인 이유일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 신앙의 전통이 참 아름다운 것이고, 우리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것이죠. 그러나 어떤 전통도 신앙의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전통이 하나님의 진리를 앞서는 것을 “율법적”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영원히 경계해야 할 부분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가장 자랑스러운 전통인 ‘할례’가 복음의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혹시 복음의 장애가 되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셨나요?
오늘 이 부분을 데살로니가에서 겪었던 사도 바울의 논쟁을 통해 짚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율법적 교만과 함정
할례는 눈에 보이는 그 무엇을 의미합니다. 할례는 유대인들에게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의식입니다. 창세기 17장을 근거로 보면, 이스라엘 남자들이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참여한다는 상징입니다. 태어난 지 8일째 이루어지는 이 가입식을 통해 하나님이 이 사내아이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셨으며, 그 아이는 “약속의 아들”이 되어야 함을 상기시키는 시각적 장치입니다.
늘 우리 신앙의 문제는 어느 순간에 본질을 잃어버리고 외적인 장치에 연연하게 된다는 것이죠. 왜 시각적 효과가 필요합니까? 그것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할례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분을 닮아가고 율법을 지킴으로서 그분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육체적 할례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우리가 얼마든지 행할 수 있는 종교적 의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경계하는 것은 바로 이 형식적 종교의식입니다. 이 종교의식에 얽매이게 될 때, 사람들이 얼마나 이중적이 될 수 있는지 말입니다. 본문 25-27절입니다.
"25.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26.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아무리 할례를 받았어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는 소용이 없죠. 하지만 할례를 받지 않고도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면 할례를 받은 사람보다 낫죠. 결국, 할례가 문제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느냐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유대인으로 살아가면서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면 뭘 합니까? 말씀대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영원한 숙제가 아닌가요? 교회를 다닌다고 우리가 다 교인입니까?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서도 훨씬 더 복음적인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가 그들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말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지금 복음의 탁월성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복음이 아닌 우리의 삶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우리가 듣고 알아도 그것이 형식적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결혼을 하면 그 징표로 반지를 교환합니다. 반지를 끼고 있으면 그 사람이 누군가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지를 끼고 안 끼고는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반지를 끼는 것이 아니라 반지를 낀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고 나서 반지를 낌으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다른 짓을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결국,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반지를 끼도 다니면서 다른 짓을 하는 게 낫습니까? 반지를 끼지 않더라도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옳습니까? 반지를 끼기 때문에 절대로 신실해지지 않습니다. 신실한 사람이 반지를 껴야 합니다. 만일 그 반지가 효과가 있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나요?
마치 할례를 받음으로 율법을 지킨다고 생각하는 율법적 교만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보셨나요?
반지가 효력을 가진 것이라면, 나쁜 짓을 할 때는 반지를 빼놓고, 집에 돌아오면서 반지를 낍니다.
율법이 마치 그렇습니다.
율법을 기억할 때는 율법을 지킵니다. 남이 보는 곳에서는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되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율법을 적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곳에서는 멋대로 살아갑니다. 율법적이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아닙니다.
제가 좀 잘못된 생각일지 모르지만, 요즘 하나님이 계속 그런 도전을 주십니다.
주일에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 얼마나 율법적인가? 혹시 우리 중에 교회를 다니면서 이방인들과 구별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교회를 다니면서 의무를 다하고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는 율법적 형식주의자들은 아닌가?
요즘 우리 교인들이 주일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기보다는 흩어져서 섬기는 일을 많이 합니다. 율법적으로는 우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 옳지만, 성경의 진리에서 보면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어떻게 신실한 예배를 드리느냐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결국은 장소와 형식을 벗어난 ‘참 할례’가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
저에게도 참 어려운 일이지만, 진정으로 이 교회에서 복음을 들은 자들이 이 교회를 떠나는 것, 그것이 건물을 떠난다는 의미가 아니죠, 복음의 진리를 떠난다는 것이 아니죠,
진정한 예배자가 되어 이곳저곳에서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 참된 예배자가 아닐까라는 생각 말입니다.
지난주에도 우리 청년들이 제천에서 어려운 교회를 섬기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의 빈자리를 안타까워하시기보다는 하나님의 기쁨이 충만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마도 사도 바울의 고민이 이런 것도 포함하는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착각하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내가 놀러 가서 아무 곳에서나 예배를 드려도 좋다! 인터넷이 있으니 장소를 벗어난 모든 곳이 예배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참 멋대로죠.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마음과 우리의 헌신이 있어야 드려지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형식을 파괴하는 것, 전통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죠. 아마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그런 것을 염려하다 전통주의에 빠졌을 것 같기도 합니다. 형식을 잃어버리면 내용도 잃어버릴 수 있는 인간들의 약함 때문에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절대로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으며 형식을 지킨다고 진정한 크리스천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 새로워진 사람은 새롭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할례의 가장 큰 의미는 우리의 삶을 바꾸었다는 표식입니다. 그리고 그 수술의 형식이 “순종”이라는 삶을 통해 나타나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로마서에서 강변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 언어로 풀어보면, 우리가 믿는 신앙이 언제부터인가 종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집사님을 만났습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하라는 것은 다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내 일을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조금 그 말을 수정했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이 다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시키는 일이 다 하나님이 시키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목사에게 있어서도 늘 고민되는 것이 제가 하는 일이 교회의 일인지 하나님의 일인지를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을 하고도 제가 참 힘들게 산다고 생각합니다.
교인들에게 권위를 가지고 목사가 하라면 해야 축복을 받는다고 가르치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진리가 아닌 것을 가르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편하게 사는 것보다 쉽게 사는 것보다 진리를 향해 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종교가 짓는 무서운 죄들을 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자들이 종교꾼이 될 때 얼마나 무서운 일들이 일어납니까? 그리고 그곳을 구별하지 못하는 자들이 얼마나 쉽게 넘어갑니까?
목사가 뭔데 교인들에게 막말을 하고 협박을 하는 겁니까? 그런데 교인들이 그런 말을 들으며 무서워합니다. 진리에서 벗어난 것은 목사가 아니라 목사 할아버지가 해도 잘못된 것입니다.
중세시대 가장 흉악한 범죄는 교회의 이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매한 교인들이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벗어난 일에 집단으로 참여했습니다.
십자군 전쟁!
성지를 탈환한다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이 전쟁터로 나갔고, 성지에서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는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는 일을 했습니다. 실상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치적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자들에 의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들의 피가 하나님께 대한 적개심을 만들었습니다.
실상 그곳 성지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는데, 하나님을 따른다는 자들은 그 “성지”를 탈환하겠다고 수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장 비 신앙적인 일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름으로!” 외쳐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은 진리가 아닙니다.
요즘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각종 모임을 봅니다. 그런데 그 모임을 하기 전에 하는 일들이 꼭 있습니다. 예배와 기도입니다.
그런데 종종 예배를 빨리 해치우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하는 것을 봅니다.
종교마다 교권을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하는 자리에서, 그리고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는 자리에서도 어김없이 종교의식이 거행됩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행해지지 않는 곳에 절대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하나님이 계셔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형식적이고 잘못된 신앙에 대하여 맹목적이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반면, 진정한 교회에서는 진리 안에서 얼마든지 야단치고 혼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채찍을 드셨던 것처럼 매서운 질책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영혼을 바라보는 마음 때문입니다. 제대로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때로 무리한 일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라면 순종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영혼이 잘 되는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분별하기 위해서 말씀을 배우고 가르쳐야 합니다.
중세 교회가 타락한 것은 무조건 순종하는 교인들을 만들려고 성직자들 외에는 말씀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들만 볼 수 있도록 성서를 라틴어와 헬라어 히브리어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가장 큰 종교개혁의 역사는 당시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한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접하게 되자 무너질 수 없을 것 같았던 교권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교권이 무너진다고 하나님의 나라가 무너지지 않습니다.
잘못된 교회가 무너진다고 하나님의 뜻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무서운 일이지만, 어쩌면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를 보며 무너지지를 기다리지 않을까? 어쩌면 말씀을 벗어난 신앙이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핍박의 시간을 지나가도록 하시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무섭지만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이 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벗어난 교회가 교회가 아니다!
형식적으로 교회를 다니는 자들이 크리스천들이 아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아 복음을 사는 진정한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사람이다!
이제는 "교회를 다닌다고 다 크리스천입니까?"라는 말이 아니라 "교회를 다닌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라는 말을 회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표면적 유대인이 이면적 유대인이 되어야 하지요.
교회를 출석하는 형식적인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진정한 크리스천이어야 하지요.
찰스 스윈돌이 쓴 로마서 주석에 의하면 형식적 신앙이 “종교”가 되어버리면 적어도 세 가지 양상이 나타난다고 쓰고 있습니다.
첫째, 종교는 영적인 것보다 물질적인 것을 강조한다. 종교는 경건한 행위와 겉으로 드러나는 희생적인 수고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종교는 사람을 기진맥진할 때까지 바쁘게 만들고, 사람들에게 보이고 칭송받기 위해 하는 선행을 강조한다.
둘째, 종교는 본질적인 문제는 간과하고 부차적인 문제를 강조한다. 상징, 전통, 의식이 교회의 실제 사명이나 교인들의 본질적이고 참된 성숙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외부로 드러난 모습이 진지한 믿음이나 순전한 복종보다 더 관심을 받는다.
셋째, 종교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기심을 조장한다. 정말이다. 종교적 열심은 자기 자신을 염두에 둔 것이다. 무엇을 하건 그 사람의 동기는 남들에게 보이고 알려지기 원하는 마음이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남의 이목을 끌려고 하지 않는 태도는 그 사람의 사고방식으로는 생경한 일이다. 종교는 점점 더 권력과 명성이 우위를 차지하려는 교만을 조장한다.
참된 그리스도인 되기
오늘 본문의 핵심은 형식적인 유대인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8-2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28.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외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 아니라 내적으로 형성된 사람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이름에 대한 자부심이 아주 강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의도는 그들의 신앙적 전통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통과 유대인이라는 이름값을 못하는 것에 대한 질책입니다.
얼마 전에 읽은 책 제목이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 책 서문에 보면 “이름값을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할 때,
위로하시는 하나님,
기쁨이 되시는 하나님,
여호와 닛시 하나님, 성실하신 하나님,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
용서하시는 하나님,
나를 살피시고 격려하시는 하나님 등등.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그분은 그 이름에 합당하게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인 것, 우리가 예배하기에 합당하신 분인 것은 그분의 이름에 걸맞게 행하시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가 살아가면서 신앙의 문제는 하나님의 이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믿는 우리에게서 믿는 자의 능력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 때문에 실망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단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그 이름값을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하나님 됨이 드러난다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리라는 것이지요.
“유대인”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신앙의 전통이 귀하고, 율법을 지키려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전통을 가지고 있어도 이름뿐인 “표면적 유대인”의 삶은 능력이 없습니다. 가장 불쌍한 것은 이름은 있는데 능력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누구다!”라고 말하지만, 상대방에게 무시당할 때 얼마나 무안합니까?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없으신가요? 자신을 소개했는데 상대방의 반응이 냉담할 때.
할례받은 자로, 유대인으로 그들은 최선을 다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정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심각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우리는 신앙에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라는 말을 참 자주 합니다.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만을 신경 쓰면, 사람들도 우리를 주목해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 기대를 가지고 말입니다.”
정말로 신기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만을 신경 쓰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하지 않으면 세상도 우리를 무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것이 있죠.
“저 사람에게는 포스가 있어, 저 사람에게는 아우라가 있어!”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인정은 하나님을 닮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일이기 때문이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내가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열심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하죠.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은, 우리의 열심을 신앙이라 생각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열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정에 우리가 순종할 때 일어납니다.
오늘날 교회에 얼마나 많은 예배가 드려지고, 많은 사람을 도우며, 멋진 건물이 들어서고 있습니까? 교회에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멋진 것들입니까?
그런데 오히려 그런 일들로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습니다. 우리가 열심을 내면 낼수록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고 있다면 뭔가 잘못되어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부분이 율법적 종교와 진정한 믿음이 구별되는 점입니다. “이면적 유대인” 그리고 “마음의 할례”를 받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진리를 소유해야 합니다.
진리가 무엇일까요? 여러분에게 여러 가지 답이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진리는 변하지 않는 가치와 기
복음이 힘을 잃는다는 것은 진리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장 1-2절에 “참다운 예배”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영적 예배”란 세상을 본받지 않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진리가 드러나면 그것을 보고 따라와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믿는다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우리의 삶의 방식, 우리가 믿는 것을 따라오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길로 인도하면 모두를 어둠과 사망으로 인도할 수도 있기에 말입니다.
“이면적 유대인,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들은 진리로 이끄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이 교회가 진리를 드러내는가?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는가?
누군가 우리를 따라온다면 진정한 소망이 있는가?
진리가 선포되는 곳에는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더럽게 곯은 상처를 드러내는 날카로움 같은 것들 말입니다.
저도 설교를 하면서 누군가의 얼굴을 보면 참 힘들 때가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저 사람의 마음이 아플 텐데. 그런데 진리는 누구의 상태를 고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그냥 선포되고,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진리 앞에서 누군가는 결단해야 하고, 아파해야 하고 그렇게 따라가야 합니다.
둘째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는 독특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드러나야 합니다.
로마서 5장 1절 말씀을 보세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화평을 누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동안 교회에서 가르쳐온 것들 하나님을 믿으면 축복을 받고, 건강해진다는 복음입니까? 과연 물질적인 풍요함이, 건강이 회복되는 것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습니까? 아니지요.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회복됩니다. 그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을 신뢰함을 보여줍니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표면적 교인이 아니라 내면적 교인입니다. 교인 같은 사람, 하나님과의 관계가 분명한 사람입니다. 누가 보아도 그 사람을 보면 하나님과 관계있는 사람인 것이 드러나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참 힘들지만, 도전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적어도 제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관계는 인격적이고 발전적입니다.
지난주 영성훈련을 하면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하신 분은 인격적 만남이 아닌 신뢰 관계에 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이 어떤 기도를 하던 쉽게 들어주실 겁니다. 아직 인격적 관계로 나아가기보다는 믿음의 관계를 원하시기 때문이지요. 지금은 하나님께서 안 된다 하시면 떠나갈 것 같아 많은 기적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적이 보이지 않는 때가 오고, 우리의 기도에 침묵하시는 때가 오고, 우리의 소원을 꺾으시는 때가 틀림없이 옵니다. 이제는 올바른 관계를 맺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옳고 그름의 기준에서, 진리의 잣대로 우리의 삶이 인도함 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힘들어지는 때를 지나가며 인격의 성숙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제는 겉으로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깊은 내면의 신앙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자라나야 하고, 성숙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알게 되면서 같이 마음 아파해야 할 일들이 있어야 합니다.
지난주 예배를 마치고 기도를 부탁했던 청년의 눈물이 오랜 잔상으로 남았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아플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마음을 주십니다. 내 신앙을 지키고, 내 법을 지키고, 내 할 도리를 하면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 말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사도 바울이 참 마음 아팠던 것은 지극히 이기적인 교인들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과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지.
자기 교회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고,
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 상처를 입고.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워지는 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특권과 의무
롬 2:28-29 / 이대성 목사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그리스도인의 특권과 의무”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그리스도인의 특권과 의무” 설교 제목이 좀 딱딱하지요? 그래서 제가 부제목을 좀 달았습니다. 다같이 따라해 볼까요? “예수 잘 믿어라!”
여러분! 반말이라서 좀 기분이 언짢으십니까? 오해하지 마십시오. “예수 잘 믿어라!” 이 말은 저의 아버지께서 살아생전 마지막 투병 중에 저에게 주신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이목사! 예수 잘 믿어라!”
이제 며칠 후면 추석명절이 시작됩니다. 추석 명절에는 어김없이 온 가족이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아버지 말씀과 축복 기도를 받고는 어머니가 야심차게 준비한 갈비찜 등 맛있는 음식을 먹곤 했었는데 이젠 그 부모님을 뵈올 수가 없네요... 많이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에 언젠가 저 천국에서 사랑하는 부모님을 다시금 만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의 핵심 진리는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말씀으로”
그런데 여러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이신칭의’라고 합니다. 이를 좀더 풀어 말하자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함을 인정받는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이 사실을 잘 이해하질 못합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잘 믿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말은 어찌 보면 공짜로 구원받는 것처럼 그렇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음으로 우리 모두는 구원받습니다. 이는 일점일획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진짜 중요한 것은 정말로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느냐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 믿는다면 그 사람 말에 온전히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 말대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흔히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말들 합니다. 그렇습니다. 믿으면 순종하게 되고, 순종하면 믿게 됩니다. 그렇다면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말씀에 순종한다는 말이 과연 무슨 뜻입니까? 말씀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믿으면 그 말씀대로 살게 되고, 그 말씀대로 살다보면 온전히 믿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함은 별개가 아니라, 하나인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엊그제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 청문회가 하루 종일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이토록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까?
그 이유는 지금까지 정의와 평등을 부르짖으면서 많은 국민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었던 조국 후보자의 말과 행동에 있어 차이가 발견되어 많은 국민들이 크게 실망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말과 행동의 차이!’
그런데 여러분? 이는 예수 믿는 우리 신앙인들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말씀 따로 삶 따로가 아닌, 말씀대로 살아야 진정 참된 믿음을 가진 자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 따로 행함 따로가 아닌, 믿음과 행함은 늘 항상 같이 가야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모습을 우리는 너무나도 쉽사리 목격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 21세기의 바리새인이 되어 있음을 깨닫고는 깜짝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말로는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하면서 인간적인 방법에 의한 교회 성장을 추구하는 속물적인 모습, 돈과 이성과 명예욕에 끌려 다니는 세속적인 모습, 겉으론 웃고 있지만 속으론 이를 갈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모습 등등...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날의 한국인들 눈에 비친 기독교는 그렇게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종교 선호도를 보더라도 천주교 40%, 불교 37%에 비해 기독교는 22%에 그치고 있습니다. 아니 이보다 훨씬 더 낮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원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제 시대는 물론이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단연 기독교에 대한 선호도가 으뜸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인들이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보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한국인은 기독교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인들 때문에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우리 기독교인들이 총체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다른 사람이 아닌 저와 여러분부터 이런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바꾸어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독교인들이 사는 모습을 보니 나도 예수 믿고 싶구나!” 뭐 이렇게 말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더 이상 “너나 예수 잘 믿어라!”는 조롱을 들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그 답을 우리는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직 가본 일이 없는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장차 선교여행의 도움을 얻기 위해 이 편지를 썼습니다. 여기에 자기 소개를 하면서 특히 자기가 전파하고 있는 복음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부분은 이방인들에게는 물론이지만, 유대인들에게도 반드시 복음이 필요하다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만이 아니라,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의 잘못된 문제의식을 예리하게 지적해 나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서 마땅히 해야 할 하나님 백성으로써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백성이란 특권을 누리고 자랑하는 데에만 열을 올리다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선택받은 백성의 의무는 까맣게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와 유사한 문제가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구원 받은 성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부심에 사로잡혀서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는 등한히 한 채 특권만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자기들도 잘 못하면서 남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손가락질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오히려 그들로부터 ‘너나 예수 잘 믿어라!’고 되레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특권과 의무를 명확히 파악함으로써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특권과 의무 첫 번째는 회개의 특권과 의무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의 특권과 의무” 로마서 2장 1절 말씀 다같이 함께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여러분!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이방인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이방인들을 정죄하고 있지만, 자기들도 똑같은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까운 농장에서 버터를 사오곤 하던 제빵업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눈에 띠지는 않지만 언제부터인가 버터의 크기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이상하게 여긴 제빵업자가 사온 버터를 저울에 올려놓고 달아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버터의 무게가 이전보다 많이 줄어 있었습니다. 화가 치민 제빵업자는 그 농장 주인을 고발했습니다. 그래서 농장 주인이 급기야 재판을 받게 되었지요.
판사가 "집에서 어떤 저울을 사용하고 있습니까?"라고 묻자 농장 주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저울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버터의 무게를 잽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1파운드짜리 빵의 무게와 같게 만듭니다."
"그 1파운드짜리 빵은 어디에서 사옵니까?" 그러자 농장 주인은 고소인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우리는 늘 언제나 저 제빵업자한테서 사 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이 바로 이 제빵업자와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와 허물에 대해서는 예리하게 비판하고 문제를 삼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죄와 허물에 대해서는 눈이 멀어 있습니다. 비판하지도 못하고 문제 삼지도 못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유대인들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4절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들이 죄를 범한다고 해도 인자하게 용납해 주시고 참아주신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회개하지 않고 계속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죄와 허물을 참아주시고 기다려 주십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특권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그 사실을 깨닫고 빨리 회개하고 그 죄와 허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백성으로써의 의무입니다. 유대인들의 문제는 특권은 누리고 있으면서도 의무는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곧바로 징계하시거나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인자와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참아주시고 기다려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누리는 특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빨리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인자를 베푸시고 오래 참아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그냥 없던 것으로 덮지 않으십니다. 죄는 회개 없이는 용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회개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 우리의 뜨거운 눈물의 회개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다 토설하고 철저히 회개함으로써 죄사함의 기쁨과 감격을 맛보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특권과 의무 두 번째는 말씀의 특권과 의무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의 특권과 의무” 여러분? 12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는 달리 율법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결국엔 율법 없는 이방인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두쇠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돈을 버는 데만 몰두한다는 점입니다. 돈을 많이 모아 부자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거지처럼 살고 있다는 겁니다. 돈은 벌 줄도 알아야 하지만 잘 쓸 줄도 알아야 합니다.
돈은 가지고 있는 것보다 쓸 때 그 힘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이 바로 이 구두쇠 거지와 같습니다.
율법을 소중히 간직합니다. 열심히 외웁니다. 열심히 공부합니다. 생명처럼 소중하게 율법을 보존합니다. 그러나 그 율법대로 살지 않습니다. 그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삶 속에서 말씀의 능력이 발휘되지 못합니다.
이들의 문제를 13절은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13절 말씀도 다같이 함께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여러분!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 하나님 말씀을 간직하는 것! 그것만으로는 온전하지 않다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달리 율법을 듣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없는 말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분명 남다른 특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들은 사람은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 말씀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유대인의 문제는 율법을 소유하는 특권은 누리려 하면서도, 그 율법을 실천하려는 의무는 등한히 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도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님 말씀을 읽는 데는 꽤 열심입니다.
여기 저기에서 성경통독 사경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2019년 성경통독 대행진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성경을 필사하는 분까지 계십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일에도 나름 열심입니다.
성경을 날마다 묵상하는 사람들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분명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특권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말씀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 말씀의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말씀은 있으나 말씀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오늘날 이 시대 사람들의 질책이 계속 쏟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너나 예수 잘 믿어라!”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23절 말씀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우리 주님은 분명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말일까요? 아니지요? 예수를 진짜로 믿으라는 겁니다. 예수를 진짜로 믿으면 저절로 그 예수님처럼 행동이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말로만 주여 주여 하니까 거짓 신자, 삯군 목자가 나올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특히 이 부분이 제 가슴을 후벼 팠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많은 주의 종들이 주여 주여 주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면서 선지자 노릇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더 이상 ‘주여 주여!’ 주의 이름만 부르는 21세기의 바리새인들이 되지 마시고, 주님 말씀대로 온전히 실천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특권과 의무 세 번째는 신앙생활의 특권과 의무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의 특권과 의무” 28절과 29절 말씀 다같이 한 목소리로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여러분!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았다는 것을 자랑하지만, 그 할례는 단지 육신에 받은 할례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진정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지금 유대인들이 육신의 할례만을 자랑하면서 실제로는 마음의 할례는 받지 못한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악어의 눈물”(Crocodile Tears)이라는 말은 영어권 사람들에게는 “거짓 눈물”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익숙한 관용어구입니다. 특히 ‘오델로’와 같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악어가 큰 먹이를 잡아먹을 때 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이는 마치 “나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동물을 잡았지만, 죽어가는 동물을 생각하면 너무나 불쌍해서 눈물이 나온다.”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전문가들 이야기에 따르면 악어가 큰 먹이를 삼키려고 입을 크게 벌리는 순간, 자동적으로 눈물샘을 자극하게 되어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겁니다.
결국 악어의 눈물은 속마음과 전혀 관계없는 육체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마음이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단지 생리적인 현상으로 흘리는 눈물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유대인의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오직 육체적인 할례만 받은 채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모두가 다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을 맺으시면서 명하셨기에 유대인들은 태어나자마자 8일이 되면 다 할례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은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고, 하나님 백성으로써 신앙생활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주신 특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할례를 받은 사람은 마음에도 할례를 받아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감으로써 진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의무입니다.
29절에 보면 유대인의 문제를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유대인들이 특권만 주장하면서 사람들에게 칭찬만 받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정작 그리스도인으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칭찬은 간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사람들의 칭찬에 지나치게 신경을 씁니다.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사람들에게 유명해지는 것에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입니다.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겠지만, 사람들에게 칭찬 받으려 하다보면 자칫 칭찬 받기 위해서 위선적인 행동을 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마치 악어의 눈물처럼 슬프지도 않은데 슬퍼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억지로 눈물을 흘릴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총알택시를 아십니까? 저는 직장 다닐 때 툭하면 늦게 끝나서 집이 인천 부평이기에 종종 총알택시 신세를 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빨리 달리는 지 정신이 번쩍 번쩍 납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도무지 잠을 자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한 목사님과 총알택시 기사가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죽었답니다. 그런데 총알택시 기사는 곧바로 천국으로 가고 목사님은 잠깐만 기다려 보라고 하면서 저승에서 대기 중 신호가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기가 막힌 목사님이 그 이유를 따져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렇게 명확하게 대답해 주셨다고 합니다. "너는 설교할 때마다 늘 사람들을 졸게 했지만, 총알택시 기사는 사람들을 늘 기도하게 했느니라!"
이는 분명 사람들이 지어낸 유우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사람들이 목사님이 설교할 때는 졸고만 있을까요? 그 말씀에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단지 말씀일 뿐, 생명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자기 자신이 신앙의 모델이 아닌 목회자는 설교자라기보다는 떠벌이요, 의사라기보다는 돌팔이에 불과하다.”라는 윌리엄 펜의 경고를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늘 언제나 하나님의 칭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내 스스로 만족한 신앙생활에 머물러서는 아니 됩니다.
사람들의 칭찬에 초점을 맞춘 신앙생활을 해서도 아니 됩니다. 하나님께서 칭찬하실 그런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여전히 사람들의 칭찬에만 관심을 기울일 때 이런 질책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쏟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너나 예수 잘 믿어라!” 여러분! 오늘날 세상 많은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크게 실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잘못 때문에 기독교 아니 예수님 자체를 좋아하지 않게 된 겁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저와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아니 예수님을 좋아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독교인의 특권을 주장하기 보다는 기독교인의 의무를 성실히 감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제발 우리 모두 예수 잘 믿으십시다! 아니 저 이대성 목사부터 예수 잘 믿겠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죄와는 피 흘리기까지 싸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애쓰고 힘쓰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 모든 삶의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 중심,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당당히 펼쳐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제 후로는 참된 그리스도인답게 우리들 삶 속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모습이 밝히 드러남으로써 영혼 구원의 통로로 온전히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
박봉수 목사
유대인이라는 말은 원래 유대교를 신봉하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자신들을 구별하기 위해 스스로 붙인 이름입니다. 그리고 자기들과 다른 사람들 즉 유대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비유대인이라는 뜻으로 이방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저들의 눈에는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유대인이고 다른 하나는 이방인입니다. 자기들 눈에 진정한 종교인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과 헛된 우상을 섬기거나 아예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 즉 이방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한 배경에 선민사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만을 특별히 선택하셨다는 사상입니다. 자기들만을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하셨고, 자기들만을 구원하셨다는 믿음입니다. 이 사상은 저들로 하여금 남다른 정체성과 자부심을 가지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유대인은 이 선민사상을 바탕으로 실제 종교생활에서도 그 누구도 따라 올 수 없을 정도의 열심이 있었습니다. 율법과 구전이 유대인들의 종교생활의 경전일 뿐 아니라 저들의 실제 생활의 법이요 지침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율법을 지키는 일에 생명을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저들을 기뻐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책망하셨고 외면하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과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열심으로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겼으나 정작 하나님께서 물리치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그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문제의 핵심을 짚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살피면서 예수를 믿어도 제대로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맹목적인 열심, 잘못된 헌신은 정말 헛수고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지적되고 있는 유대인의 문제를 살펴보면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우리가 힘써야 할 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믿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2: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을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바울은 지금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죄를 지적하면서 실상은 자기들도 같은 죄를 범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특별하게 구별해 주셨고, 자기들을 특별하게 대해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신념과 달리 저들의 삶이 구별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말로는 자기들이 이방인들과 다르다고 하지만 삶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종교행위에서는 거룩한 척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이방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평생을 신앙생활 잘 해 오신 할아버지가 계셨습니다. 교회에서는 존경 받고 많은 봉사를 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교회에 나오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목사님과 장로님이 심방을 가셨습니다.
목사님이 “할머니 이제 교회에 나오시죠” 말씀하셨습니다. 할머니가 반문하셨습니다. “교회 나가 예수 믿으면 천국 가죠?” “그럼요” “그래서 안나가는 거예요. 지금도 지긋지긋한데 죽어서도 저 영감태기하고 같이 있을 생각을 하니 끔찍해요. 천국이고 뭐고 다 싫어요. 저런 영감태기하고 빨리 헤어지고 싶을 뿐이예요”
오늘 이렇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없지 않아 있습니다. 마치 저 유대인들이 믿은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달라서 하나님께 책망 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잘못된 신앙생활을 보이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소명과 사명의 분리 때문입니다.
소명이란 하나님께서 남달리 구별해서 부르신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아주 특별하게 대해 주신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소명 받은 사람들은 남다른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는 특권, 그리고 장차 저 천국에 갈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명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명이란 하나님께서 소명을 주신 실제적인 이유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대해주시는 이유를 말합니다.
창 12:1-4을 보면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 평범하게 남과 다를 바 없이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남다른 특권을 주셨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고, 복을 주셔서 이름이 창대하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소명입니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닙니다. 이렇게 남달리 그를 부르신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그 받은바 복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섬겨서 그들도 아브라함이 받아 누리는 복의 자리로 이끌어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명입니다.
유대인들의 문제는 소명만 생각했고 사명을 잊어버렸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남달리 택하시고 부르시고 복을 주신 것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왜 자기들을 그렇게 남달리 택하시고 부르시고 복을 주셨는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믿음과 생활이 분리되는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부르신 것 남달리 복을 주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왜 자기들을 부르셨는지, 남달리 복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있는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르니까 삶이 뒷받침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과 삶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은 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왜 나를 택하셨는지, 왜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2. 깨달은 대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2:23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바울은 유대인이 율법의 사람들이라고 자랑하면서 실제로는 그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점이 또 다른 유대인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그들의 가장 큰 자랑거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자기들에게만 율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율법이 자기들이 선민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 가운데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율법을 어린 시절부터 부지런히 가르쳤습니다. 집집마다 메주자라 하여 문설주에 말씀함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테필란이라 하여 율법 말씀을 기록해서 팔에 그리고 미간에 붙이고 다녔습니다. 늘 말씀을 암송했습니다. 한 마디로 저들은 율법의 백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21-22입니다.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말씀을 알고 가르치면서 정작 그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학교 수업시간에 생뚱맞은 질문을 던져봅니다. “성경을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달달 외우는 사람이 있다고 해 봅시다. 그 사람이 신앙은 참 좋겠죠?,교회학교 아이들이 공과공부를 잘해서 연말에 시험을 봤는데 100점을 맞았다고 해 봅시다. 그 학생은 신앙이 참 좋겠죠?” 학생들이 선뜻 그렇다고 대답을 못합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암송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아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했으면 거기서 멈추지 말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으면 거기서 멈추지 말고 깨달은 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깨달은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을까요? 한 마디로 말씀이 내 자아 속에 스며들어와 나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것을 말씀의 성육화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들어오셔서 말씀의 역사를 일으켜 주셨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아내와 이혼하기로 결심한 분이 있었습니다. 이 여자를 만나서 내 인생이 이토록 불행하게 됐다고 결론을 내리고 이제라도 행복하려면 이 여자와 어서 헤어져야 한다고 결심했습니다.
마지막이다 싶어서 부부성장 프로그램에 아내와 함께 참여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는데 하나님께서 돕는 배필을 친히 준비해 주셨다고,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그 배필과 한 몸을 이루라고 배웠습니다. 그 말씀은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머리로 인정한 그 말씀을 마음으로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몸으로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고민이 됐습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일주일 내내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기로 했습니다. 기도할 때 성령께서 이분의 마음을 계속해서 두드리셨습니다. 4일째 되던 날 이분의 마음이 열려서 그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 말씀이 이분의 마음속에서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분의 눈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가 불쌍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여자가 나를 만나 정말 고생을 많이 했구나. 내가 힘 든 것보다 이 여자가 더 힘들었겠구나”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용기를 내서 아내의 손을 잡았습니다. 아내의 눈에 맺힌 눈물이 보였습니다. 입이 열렸습니다. “여보 미안해! 우리 앞으로 잘해 보자...”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깨달았으면 깨달은 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3. 새 사람된 대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바울은 유대인들의 또 하나의 자랑거리인 할례에 대해 공격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8일에 할례를 거행합니다. 요즘말로 포경수술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그 아이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몸에 흔적을 남기는 것으로 이방인과 자기들을 구별하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증거라고 자랑해온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았지만 할례 받은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있는 점을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신학적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두 종류의 유대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표면적(outwardly) 유대인이고 다른 하나는 이면적(inwardly) 유대인입니다. 여기서 표면적 유대인이라는 것은 할례를 받아서 겉모양으로 유대인이라는 표시가 확실한 사람을 말합니다. 반대로 이면적 유대인이라는 것은 그 마음에 할례를 받아서 속사람이 유대인이 된 사람을 말합니다.
표면적 유대인은 겉 사람에 할례 표시가 있어서 자기가 유대인이라고 착각하고 살지만 그 마음은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어서 유대인으로 살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이면적 유대인이 되는 것인데 이것은 마음의 할례를 받아서 그 마음이 진정한 유대인으로 변화되어 유대인답게 살 수 있게 된 것을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세례도 받았습니다. 집사 직분도 받았습니다. 성수주일도 잘하고, 교회 봉사도 잘합니다. 겉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문제가 없습니다. 훌륭합니다. 그러나 그 삶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표면적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면적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전 3:1을 보면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신령한 자’이고 다른 하나는 ‘육신에 속한 자’입니다. 원어성경을 보면 신령한 자는 ‘프뉴마티코스’ 곧 영적인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사르키코스’ 곧 육적인 사람을 말합니다. 표준 새번역을 보면 신령한 자는 영에 속한 사람이고 육신에 속한 자는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표면적 그리스도인은 바로 육에 속한 사람이고 이면적 그리스도인은 영에 속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육에 속한 사람은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산다는 것이고, 영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도 성령을 체험한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주로 시인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의 삶을 지탱하고 이끌고 가는 것은 성령이 아니시고 자기의 자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물론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성령이 주도적으로 자기의 삶을 이끌어가십니다. 자아는 철저하게 성령께 순종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새 사람이 되었다가 새 사람을 유지하지 못하고 옛 사람의 모습을 다시 드러냅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옛사람으로 돌아간 것은 아닙니다. 겉모습은 그리스도인다움을 유지해 갑니다. 그러나 속사람은 그리스도인다움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새 사람 되었으면 그 새 사람됨을 유지해 가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중요한 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수영을 하지 못하는 분이 물에 들어가면 가슴 정도 물이 찰 때까지 자기 맘대로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물이 차면 이제 자기 맘대로 할 수 없습니다. 물이 자기를 조종합니다. 성령 충만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하면 새사람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요즘 조화를 보면 생화보다 더 생화같습니다. 그러나 조화에는 생명이 없고 향기가 없습니다. 오늘 조화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참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려면 믿은 대로 살아야 합니다. 깨달은 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 뿐 아니라 새 사람된 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롬 2:25-29 / 배 혁목사
바울이 교회에 쓴 편지들은 신약성경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떤 교회에 문제가 있거나, 권면한 일이 있을 때 편지를 써서 그들을 복음으로 잘 지도하고자 힘썼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편지를 마칠 때에는 주로 서로의 안부를 물으면서 축복하면서 편지를 끝냅니다. 그런데 오늘 갈라디아서는 좀 다릅니다. 그는 축복의 인사를 하기 전,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도 없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일어난 일로 인해서 얼마나 괴롭힘을 당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가장 괴로워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왜곡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편지 첫부분에 갈라디아교회를 이상하다고 말합니다. 1:6-7절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교인들은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복음을 온전히 지키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떠난 후 교회안에 나타난,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말을 듣고 그들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들은 갈라디아교인들에게 왜곡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갈라디아교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했습니다. 율법도 지켜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다른 것은 몰라도 육체의 할례를 행하는 것이 필수라고 가르쳤습니다.
여러분, 구원을 받기에 율법을 지키고, 무엇보다 할례가 조건이 됩니까? 여러분들 할례받으셨나요? 그렇지 않은 것이지요. 율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할례를 받으므로 그 자손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내는 몸의 표징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나면서 8일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드러내는 아주 중요한 몸의 표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하나님께는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실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모든 죄인을 구원하셨고,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곧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상관없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 구원을 얻도록 하나님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며,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함께 따라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사도 바울에 대해서도 비하했습니다. 거짓교사들은 바울이 진정한 사도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이 부르신 사도는 12제자들인데 바울은 예수님이 부르시지도 않아고, 도리어 교회를 박해한 자이기에 그는 사도도 아니라고 바울의 권위를 깎아 내렸습니다. 그러니 갈라디아교인들이 그들의 말에 현혹되어서, 바울의 가르침을 떠나 거짓된 가르침을 따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얼마나 속상하고 괴로웠겠습니까? 바울이 고난가운데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는데 그 교회가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에 넘어가서,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흔적이 무엇일까요?
그런데 바울만 예수의 흔적을 가진 자들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예수의 흔적을 가진 자들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바울이 말한 예수의 흔적이 무엇인지를 살펴 보면서,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바울은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몸에 할례의 흔적이 있다고 말하는데, 이에 반박하며 바울은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의 흔적이라고 할 때 쓰인 단어는 ‘스티그마’입니다. 이 스티그마는 그 당시 노예나 가축의 소유주들이 자신의 것으로 표시하고자 남긴 흔적을 말합니다. 주인은 쇠로 자신이 주인임을 나타내는 글씨나 모양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쇠를 불에 달군 후에, 노예나 짐승의 몸을 이 쇠로 지져서 자신의 소유로 표식을 합니다. 그러니 노예나 짐승은 누구의 스티그마를 받았느냐에 따라 그들이 누구의 소유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자신은 예수님의 스티그마, 흔적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곧 예수님이 자신의 주인이시고,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 소유물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주인이 바뀌게 되면 내 삶도 바뀌게 됩니다. 바울이 예수의 흔적을 몸에 지닐 때에 그에게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그는 말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여러분,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 자랑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장 많이 자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재물을 자랑하고, 자녀를 자랑합니다. 건강을 자랑합니다. 많이 배운 것을 자랑합니다. 각자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들,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바울을 괴롭게 하던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육체에 할례받은 것을 자랑을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에 대해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표가 할례이기 때문에 할례받은 것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들은 할례가 마치 구원의 증표인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사실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육체의 할례를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바울도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이고, 베냐민 지파고, 경건한 바리새파이고, 그당시 유력한 랍비로부터 율법을 배운 것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여겼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 후에, 그 자랑거리가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을 경험한 후, 구원은 사람이 아무리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킨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데 사람의 행위, 공로는 전혀 소용이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구원에 이르게 됨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그 어떤 자신의 행위나 공로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자신을 구원할 유일한 것임을 깨달았기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도의 십자가 만을 자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십자가가 정말 자랑할 만한 것입니까? 그 당시에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십자가는 가장 흉악한 죄인이나, 로마제국에 대적하는 사람들이 달리는 사형도구였습니다. 십자가는 죄의 상징이고, 저주의 상징입니다.
바울도 갈라디아서 3: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난 후로는 오직 그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제 십자가는 더 이상 저주와 죽음의 상징이 아니라, 구원과 생명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최고의 자랑거리로 삼고, 이를 증거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최고의 자랑거리는 무엇입니까? 어떤 분들은 자식을 자랑하고, 어떤 분들은 자신의 재물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외모나 재능을 자랑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랑하는 세상의 어떠한 것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수도 없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우리를 옮겨 놓을 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죄의 죽음에서부터 구원해 주시는 유일한 능력인 줄로 믿습니다.
바울과 같이 예수의 흔적을 가진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를 깨달은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자랑스럽게 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예수의 흔적을 가진 이들은 새 사람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진 자들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이고, 예수님이 자신의 주인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예수의 흔적인 가진 사람은 주인이신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고자 합니다. 바울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16절에,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흔적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해서 주인의 뜻을 따라 새롭게 지어져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의 흔적을 지닌 사람으로 새로 지으심을 받기 위해서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로 인해, 세상이 나에게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세상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의 죄악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서 바울에게 아무 영향력도 끼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새로 지음받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9:23절에, 예수님은 무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에 속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세상의 흔적을 몸에 지니고 세상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세상적인 생각, 가치관, 유행, 문화를 따라서 세상을 닮아갑니다. 세상이 자신을 만들도록 내어 맡깁니다.
그런데 예수의 흔적을 지닌 이들은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새롭게 지으시도록 주님께 맡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의 새롭게 지어주심을 기대하며, 주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인되신 주님의 뜻을 살아갈 때에,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존재로 지어지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흔적을 지닌 우리는 주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존재로 날마다 변화되는 것입니다.
3. 그러기에 예수의 흔적을 지닌 사람은 그 흔적의 주인인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몸에 흔적이 있으셨습니다. 십자가의 흔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에,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손과 발의 못자국과 허리의 창자국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에 난 상처, 흔적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순종의 삶을 살았던 아들의 흔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죄인된 사람들을 살리고자 죽으신 사랑의 흔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도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자랑스럽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다가 보니, 그의 몸에도 예수님과 같이 흔적이 생겼습니다. 루스드라같은 곳에서는 예수님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서 죽을 뻔했습니다. 곤장을 맞기도 했습니다.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로 인해 고통과 수치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바울도 그의 몸에 예수의 흔적이 생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그 청년 바보의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33세 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크리스챤 ‘안수현 의사’의 이야기를 담은 글입니다. 그의 장례식이 영락교회에서 치러졌는데 이 때 4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참석했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 많은 분들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이 안수현 의사에 대해서 한 이야기들이 모아져서 나온 책이 ‘그 청년 바보의사’ 입니다. 안수현 의사는 돈이 없어서 검사를 받지 못하는 조선족 할아버지 검사비를 대신 내 주었습니다. 치료하던 환자가 숨지면 장례식에 찾아가 가족들을 붙잡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실의에 빠진 환자들의 말동무가 되어주고, 죽음을 앞둔 환자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베푼 수 많은 선행과 희생들이 그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친구들에게 메일을 쓸 때마다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스티그마 안수현’
안수현 의사는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 스티그마가 있음을 깨닫고 산 사람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의 삶을 통해서 예수의 흔적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성도와 교회를 비판하는 이유가 우리에게 예수의 흔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은 아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과 같은 세속적인 흔적들이 많기에 조롱당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성도는 예수의 흔적을 가진 자들이어야 합니다. 성도가 스스로 높아지고 강해지고 부해지려고 할 때, 우리는 예수의 흔적을 점점 잃어 버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나에게 흔적을 주시고 나의 주인이 되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낮아지고 손해보고 헌신하면서 살아갈 때에, 우리에게 있는 예수의 흔적은 더욱 선명해질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것이라고 스티그마, 흔적을 찍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로, 예수님이 주인되신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흔적을 가진 성도는 날마다 주인의 뜻으로 살아가다 보니 새롭게 지은 받은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예수 흔적이 있는 이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세상의 흔적을 지닌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의 자신의 부귀와 영화를 자랑하며 삽니다. 하지만 성도는 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자랑하며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흔적을 가진 이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보여주신 십자가를 지는 삶,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부인하며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를 당신의 것이라고 도장을 찍으신 주님께서는, 바울과 같이, 우리의 삶에 주님을 나타내는 새사람의 모습이 나타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속의 물결이 강하게 성도를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는 세상의 흔적을 가진 자가 아니라, 예수의 흔적을 가진 자임을 상기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는 삶을 세상에 드러내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특권과 의무
롬 2:28-29 / 이대성목사(광성교회)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그리스도인의 특권과 의무”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그리스도인의 특권과 의무” 설교 제목이 좀 딱딱하지요? 그래서 제가 부제목을 좀 달았습니다. 다같이 따라해 볼까요? “예수 잘 믿어라!”
여러분! 반말이라서 좀 기분이 언짢으십니까? 오해하지 마십시오. “예수 잘 믿어라!” 이 말은 저의 아버지께서 살아생전 마지막 투병 중에 저에게 주신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이목사! 예수 잘 믿어라!”
이제 며칠 후면 추석명절이 시작됩니다. 추석 명절에는 어김없이 온 가족이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아버지 말씀과 축복 기도를 받고는 어머니가 야심차게 준비한 갈비찜 등 맛있는 음식을 먹곤 했었는데 이젠 그 부모님을 뵈올 수가 없네요... 많이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에 언젠가 저 천국에서 사랑하는 부모님을 다시금 만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의 핵심 진리는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말씀으로”
그런데 여러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이신칭의’라고 합니다. 이를 좀더 풀어 말하자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함을 인정받는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이 사실을 잘 이해하질 못합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잘 믿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말은 어찌 보면 공짜로 구원받는 것처럼 그렇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음으로 우리 모두는 구원받습니다. 이는 일점일획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진짜 중요한 것은 정말로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느냐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 믿는다면 그 사람 말에 온전히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 말대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흔히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말들 합니다. 그렇습니다. 믿으면 순종하게 되고, 순종하면 믿게 됩니다. 그렇다면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말씀에 순종한다는 말이 과연 무슨 뜻입니까? 말씀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믿으면 그 말씀대로 살게 되고, 그 말씀대로 살다보면 온전히 믿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함은 별개가 아니라, 하나인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엊그제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 청문회가 하루 종일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이토록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까?
그 이유는 지금까지 정의와 평등을 부르짖으면서 많은 국민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었던 조국 후보자의 말과 행동에 있어 차이가 발견되어 많은 국민들이 크게 실망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말과 행동의 차이!’
그런데 여러분? 이는 예수 믿는 우리 신앙인들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말씀 따로 삶 따로가 아닌, 말씀대로 살아야 진정 참된 믿음을 가진 자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 따로 행함 따로가 아닌, 믿음과 행함은 늘 항상 같이 가야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모습을 우리는 너무나도 쉽사리 목격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 21세기의 바리새인이 되어 있음을 깨닫고는 깜짝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말로는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하면서 인간적인 방법에 의한 교회 성장을 추구하는 속물적인 모습, 돈과 이성과 명예욕에 끌려 다니는 세속적인 모습, 겉으론 웃고 있지만 속으론 이를 갈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모습 등등...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날의 한국인들 눈에 비친 기독교는 그렇게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종교 선호도를 보더라도 천주교 40%, 불교 37%에 비해 기독교는 22%에 그치고 있습니다. 아니 이보다 훨씬 더 낮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원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제 시대는 물론이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단연 기독교에 대한 선호도가 으뜸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인들이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보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한국인은 기독교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인들 때문에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우리 기독교인들이 총체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다른 사람이 아닌 저와 여러분부터 이런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바꾸어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독교인들이 사는 모습을 보니 나도 예수 믿고 싶구나!” 뭐 이렇게 말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더 이상 “너나 예수 잘 믿어라!”는 조롱을 들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그 답을 우리는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직 가본 일이 없는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장차 선교여행의 도움을 얻기 위해 이 편지를 썼습니다. 여기에 자기 소개를 하면서 특히 자기가 전파하고 있는 복음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부분은 이방인들에게는 물론이지만, 유대인들에게도 반드시 복음이 필요하다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만이 아니라,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의 잘못된 문제의식을 예리하게 지적해 나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서 마땅히 해야 할 하나님 백성으로써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백성이란 특권을 누리고 자랑하는 데에만 열을 올리다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선택받은 백성의 의무는 까맣게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와 유사한 문제가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구원 받은 성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부심에 사로잡혀서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는 등한히 한 채 특권만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자기들도 잘 못하면서 남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손가락질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오히려 그들로부터 ‘너나 예수 잘 믿어라!’고 되레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특권과 의무를 명확히 파악함으로써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특권과 의무 첫 번째는 회개의 특권과 의무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의 특권과 의무” 로마서 2장 1절 말씀 다같이 함께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여러분!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이방인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이방인들을 정죄하고 있지만, 자기들도 똑같은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까운 농장에서 버터를 사오곤 하던 제빵업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눈에 띠지는 않지만 언제부터인가 버터의 크기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이상하게 여긴 제빵업자가 사온 버터를 저울에 올려놓고 달아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버터의 무게가 이전보다 많이 줄어 있었습니다. 화가 치민 제빵업자는 그 농장 주인을 고발했습니다. 그래서 농장 주인이 급기야 재판을 받게 되었지요.
판사가 "집에서 어떤 저울을 사용하고 있습니까?"라고 묻자 농장 주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저울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버터의 무게를 잽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1파운드짜리 빵의 무게와 같게 만듭니다."
"그 1파운드짜리 빵은 어디에서 사옵니까?" 그러자 농장 주인은 고소인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우리는 늘 언제나 저 제빵업자한테서 사 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이 바로 이 제빵업자와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와 허물에 대해서는 예리하게 비판하고 문제를 삼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죄와 허물에 대해서는 눈이 멀어 있습니다. 비판하지도 못하고 문제 삼지도 못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유대인들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4절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들이 죄를 범한다고 해도 인자하게 용납해 주시고 참아주신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회개하지 않고 계속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죄와 허물을 참아주시고 기다려 주십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특권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그 사실을 깨닫고 빨리 회개하고 그 죄와 허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백성으로써의 의무입니다. 유대인들의 문제는 특권은 누리고 있으면서도 의무는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곧바로 징계하시거나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인자와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참아주시고 기다려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누리는 특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빨리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인자를 베푸시고 오래 참아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그냥 없던 것으로 덮지 않으십니다. 죄는 회개 없이는 용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회개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 우리의 뜨거운 눈물의 회개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다 토설하고 철저히 회개함으로써 죄사함의 기쁨과 감격을 맛보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특권과 의무 두 번째는 말씀의 특권과 의무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의 특권과 의무” 여러분? 12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는 달리 율법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결국엔 율법 없는 이방인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두쇠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돈을 버는 데만 몰두한다는 점입니다. 돈을 많이 모아 부자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거지처럼 살고 있다는 겁니다. 돈은 벌 줄도 알아야 하지만 잘 쓸 줄도 알아야 합니다.
돈은 가지고 있는 것보다 쓸 때 그 힘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이 바로 이 구두쇠 거지와 같습니다.
율법을 소중히 간직합니다. 열심히 외웁니다. 열심히 공부합니다. 생명처럼 소중하게 율법을 보존합니다. 그러나 그 율법대로 살지 않습니다. 그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삶 속에서 말씀의 능력이 발휘되지 못합니다.
이들의 문제를 13절은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13절 말씀도 다같이 함께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여러분!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 하나님 말씀을 간직하는 것! 그것만으로는 온전하지 않다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달리 율법을 듣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없는 말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분명 남다른 특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들은 사람은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 말씀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유대인의 문제는 율법을 소유하는 특권은 누리려 하면서도, 그 율법을 실천하려는 의무는 등한히 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도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님 말씀을 읽는 데는 꽤 열심입니다.
여기 저기에서 성경통독 사경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2019년 성경통독 대행진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성경을 필사하는 분까지 계십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일에도 나름 열심입니다.
성경을 날마다 묵상하는 사람들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분명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특권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말씀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 말씀의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말씀은 있으나 말씀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오늘날 이 시대 사람들의 질책이 계속 쏟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너나 예수 잘 믿어라!”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23절 말씀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우리 주님은 분명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말일까요? 아니지요? 예수를 진짜로 믿으라는 겁니다. 예수를 진짜로 믿으면 저절로 그 예수님처럼 행동이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말로만 주여 주여 하니까 거짓 신자, 삯군 목자가 나올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특히 이 부분이 제 가슴을 후벼 팠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많은 주의 종들이 주여 주여 주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면서 선지자 노릇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더 이상 ‘주여 주여!’ 주의 이름만 부르는 21세기의 바리새인들이 되지 마시고, 주님 말씀대로 온전히 실천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특권과 의무 세 번째는 신앙생활의 특권과 의무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의 특권과 의무” 28절과 29절 말씀 다같이 한 목소리로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여러분!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았다는 것을 자랑하지만, 그 할례는 단지 육신에 받은 할례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진정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지금 유대인들이 육신의 할례만을 자랑하면서 실제로는 마음의 할례는 받지 못한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악어의 눈물”(Crocodile Tears)이라는 말은 영어권 사람들에게는 “거짓 눈물”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익숙한 관용어구입니다. 특히 ‘오델로’와 같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악어가 큰 먹이를 잡아먹을 때 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이는 마치 “나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동물을 잡았지만, 죽어가는 동물을 생각하면 너무나 불쌍해서 눈물이 나온다.”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전문가들 이야기에 따르면 악어가 큰 먹이를 삼키려고 입을 크게 벌리는 순간, 자동적으로 눈물샘을 자극하게 되어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겁니다.
결국 악어의 눈물은 속마음과 전혀 관계없는 육체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마음이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단지 생리적인 현상으로 흘리는 눈물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유대인의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오직 육체적인 할례만 받은 채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모두가 다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을 맺으시면서 명하셨기에 유대인들은 태어나자마자 8일이 되면 다 할례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은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고, 하나님 백성으로써 신앙생활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주신 특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할례를 받은 사람은 마음에도 할례를 받아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감으로써 진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의무입니다.
29절에 보면 유대인의 문제를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유대인들이 특권만 주장하면서 사람들에게 칭찬만 받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정작 그리스도인으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칭찬은 간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사람들의 칭찬에 지나치게 신경을 씁니다.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사람들에게 유명해지는 것에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입니다.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겠지만, 사람들에게 칭찬 받으려 하다보면 자칫 칭찬 받기 위해서 위선적인 행동을 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마치 악어의 눈물처럼 슬프지도 않은데 슬퍼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억지로 눈물을 흘릴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총알택시를 아십니까? 저는 직장 다닐 때 툭하면 늦게 끝나서 집이 인천 부평이기에 종종 총알택시 신세를 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빨리 달리는 지 정신이 번쩍 번쩍 납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도무지 잠을 자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한 목사님과 총알택시 기사가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죽었답니다. 그런데 총알택시 기사는 곧바로 천국으로 가고 목사님은 잠깐만 기다려 보라고 하면서 저승에서 대기 중 신호가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기가 막힌 목사님이 그 이유를 따져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렇게 명확하게 대답해 주셨다고 합니다. "너는 설교할 때마다 늘 사람들을 졸게 했지만, 총알택시 기사는 사람들을 늘 기도하게 했느니라!"
이는 분명 사람들이 지어낸 유우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사람들이 목사님이 설교할 때는 졸고만 있을까요? 그 말씀에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단지 말씀일 뿐, 생명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자기 자신이 신앙의 모델이 아닌 목회자는 설교자라기보다는 떠벌이요, 의사라기보다는 돌팔이에 불과하다.”라는 윌리엄 펜의 경고를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늘 언제나 하나님의 칭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내 스스로 만족한 신앙생활에 머물러서는 아니 됩니다.
사람들의 칭찬에 초점을 맞춘 신앙생활을 해서도 아니 됩니다. 하나님께서 칭찬하실 그런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여전히 사람들의 칭찬에만 관심을 기울일 때 이런 질책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쏟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너나 예수 잘 믿어라!” 여러분! 오늘날 세상 많은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크게 실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잘못 때문에 기독교 아니 예수님 자체를 좋아하지 않게 된 겁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저와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아니 예수님을 좋아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독교인의 특권을 주장하기 보다는 기독교인의 의무를 성실히 감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제발 우리 모두 예수 잘 믿으십시다! 아니 저 이대성 목사부터 예수 잘 믿겠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죄와는 피 흘리기까지 싸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애쓰고 힘쓰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 모든 삶의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 중심,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당당히 펼쳐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제 후로는 참된 그리스도인답게 우리들 삶 속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모습이 밝히 드러남으로써 영혼 구원의 통로로 온전히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
롬 2장 28~29절 / 박봉수목사
유대인이라는 말은 원래 유대교를 신봉하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자신들을 구별하기 위해 스스로 붙인 이름입니다. 그리고 자기들과 다른 사람들 즉 유대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비유대인이라는 뜻으로 이방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저들의 눈에는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유대인이고 다른 하나는 이방인입니다. 자기들 눈에 진정한 종교인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과 헛된 우상을 섬기거나 아예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 즉 이방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한 배경에 선민사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만을 특별히 선택하셨다는 사상입니다. 자기들만을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하셨고, 자기들만을 구원하셨다는 믿음입니다. 이 사상은 저들로 하여금 남다른 정체성과 자부심을 가지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유대인은 이 선민사상을 바탕으로 실제 종교생활에서도 그 누구도 따라 올 수 없을 정도의 열심이 있었습니다. 율법과 구전이 유대인들의 종교생활의 경전일 뿐 아니라 저들의 실제 생활의 법이요 지침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율법을 지키는 일에 생명을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저들을 기뻐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책망하셨고 외면하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과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열심으로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겼으나 정작 하나님께서 물리치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그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문제의 핵심을 짚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살피면서 예수를 믿어도 제대로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맹목적인 열심, 잘못된 헌신은 정말 헛수고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지적되고 있는 유대인의 문제를 살펴보면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우리가 힘써야 할 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믿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2: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을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바울은 지금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죄를 지적하면서 실상은 자기들도 같은 죄를 범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특별하게 구별해 주셨고, 자기들을 특별하게 대해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신념과 달리 저들의 삶이 구별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말로는 자기들이 이방인들과 다르다고 하지만 삶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종교행위에서는 거룩한 척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이방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평생을 신앙생활 잘 해 오신 할아버지가 계셨습니다. 교회에서는 존경 받고 많은 봉사를 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교회에 나오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목사님과 장로님이 심방을 가셨습니다.
목사님이 “할머니 이제 교회에 나오시죠” 말씀하셨습니다. 할머니가 반문하셨습니다. “교회 나가 예수 믿으면 천국 가죠?” “그럼요” “그래서 안나가는 거예요. 지금도 지긋지긋한데 죽어서도 저 영감태기하고 같이 있을 생각을 하니 끔찍해요. 천국이고 뭐고 다 싫어요. 저런 영감태기하고 빨리 헤어지고 싶을 뿐이예요”
오늘 이렇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없지 않아 있습니다. 마치 저 유대인들이 믿은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달라서 하나님께 책망 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잘못된 신앙생활을 보이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소명과 사명의 분리 때문입니다.
소명이란 하나님께서 남달리 구별해서 부르신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아주 특별하게 대해 주신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소명 받은 사람들은 남다른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는 특권, 그리고 장차 저 천국에 갈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명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명이란 하나님께서 소명을 주신 실제적인 이유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대해주시는 이유를 말합니다.
창 12:1-4을 보면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 평범하게 남과 다를 바 없이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남다른 특권을 주셨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고, 복을 주셔서 이름이 창대하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소명입니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닙니다. 이렇게 남달리 그를 부르신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그 받은바 복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섬겨서 그들도 아브라함이 받아 누리는 복의 자리로 이끌어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명입니다.
유대인들의 문제는 소명만 생각했고 사명을 잊어버렸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남달리 택하시고 부르시고 복을 주신 것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왜 자기들을 그렇게 남달리 택하시고 부르시고 복을 주셨는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믿음과 생활이 분리되는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부르신 것 남달리 복을 주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왜 자기들을 부르셨는지, 남달리 복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있는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르니까 삶이 뒷받침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과 삶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은 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왜 나를 택하셨는지, 왜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2. 깨달은 대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2:23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바울은 유대인이 율법의 사람들이라고 자랑하면서 실제로는 그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점이 또 다른 유대인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그들의 가장 큰 자랑거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자기들에게만 율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율법이 자기들이 선민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 가운데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율법을 어린 시절부터 부지런히 가르쳤습니다. 집집마다 메주자라 하여 문설주에 말씀함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테필란이라 하여 율법 말씀을 기록해서 팔에 그리고 미간에 붙이고 다녔습니다. 늘 말씀을 암송했습니다. 한 마디로 저들은 율법의 백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21-22입니다.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말씀을 알고 가르치면서 정작 그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학교 수업시간에 생뚱맞은 질문을 던져봅니다. “성경을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달달 외우는 사람이 있다고 해 봅시다. 그 사람이 신앙은 참 좋겠죠?,교회학교 아이들이 공과공부를 잘해서 연말에 시험을 봤는데 100점을 맞았다고 해 봅시다. 그 학생은 신앙이 참 좋겠죠?” 학생들이 선뜻 그렇다고 대답을 못합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암송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아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했으면 거기서 멈추지 말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으면 거기서 멈추지 말고 깨달은 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깨달은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을까요? 한 마디로 말씀이 내 자아 속에 스며들어와 나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것을 말씀의 성육화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들어오셔서 말씀의 역사를 일으켜 주셨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아내와 이혼하기로 결심한 분이 있었습니다. 이 여자를 만나서 내 인생이 이토록 불행하게 됐다고 결론을 내리고 이제라도 행복하려면 이 여자와 어서 헤어져야 한다고 결심했습니다.
마지막이다 싶어서 부부성장 프로그램에 아내와 함께 참여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는데 하나님께서 돕는 배필을 친히 준비해 주셨다고,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그 배필과 한 몸을 이루라고 배웠습니다. 그 말씀은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머리로 인정한 그 말씀을 마음으로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몸으로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고민이 됐습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일주일 내내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기로 했습니다. 기도할 때 성령께서 이분의 마음을 계속해서 두드리셨습니다. 4일째 되던 날 이분의 마음이 열려서 그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 말씀이 이분의 마음속에서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분의 눈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가 불쌍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여자가 나를 만나 정말 고생을 많이 했구나. 내가 힘 든 것보다 이 여자가 더 힘들었겠구나”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용기를 내서 아내의 손을 잡았습니다. 아내의 눈에 맺힌 눈물이 보였습니다. 입이 열렸습니다. “여보 미안해! 우리 앞으로 잘해 보자...”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깨달았으면 깨달은 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3. 새 사람된 대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바울은 유대인들의 또 하나의 자랑거리인 할례에 대해 공격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8일에 할례를 거행합니다. 요즘말로 포경수술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그 아이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몸에 흔적을 남기는 것으로 이방인과 자기들을 구별하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증거라고 자랑해온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았지만 할례 받은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있는 점을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신학적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두 종류의 유대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표면적(outwardly) 유대인이고 다른 하나는 이면적(inwardly) 유대인입니다. 여기서 표면적 유대인이라는 것은 할례를 받아서 겉모양으로 유대인이라는 표시가 확실한 사람을 말합니다. 반대로 이면적 유대인이라는 것은 그 마음에 할례를 받아서 속사람이 유대인이 된 사람을 말합니다.
표면적 유대인은 겉 사람에 할례 표시가 있어서 자기가 유대인이라고 착각하고 살지만 그 마음은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어서 유대인으로 살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이면적 유대인이 되는 것인데 이것은 마음의 할례를 받아서 그 마음이 진정한 유대인으로 변화되어 유대인답게 살 수 있게 된 것을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세례도 받았습니다. 집사 직분도 받았습니다. 성수주일도 잘하고, 교회 봉사도 잘합니다. 겉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문제가 없습니다. 훌륭합니다. 그러나 그 삶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표면적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면적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전 3:1을 보면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신령한 자’이고 다른 하나는 ‘육신에 속한 자’입니다. 원어성경을 보면 신령한 자는 ‘프뉴마티코스’ 곧 영적인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사르키코스’ 곧 육적인 사람을 말합니다. 표준 새번역을 보면 신령한 자는 영에 속한 사람이고 육신에 속한 자는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표면적 그리스도인은 바로 육에 속한 사람이고 이면적 그리스도인은 영에 속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육에 속한 사람은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산다는 것이고, 영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도 성령을 체험한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주로 시인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의 삶을 지탱하고 이끌고 가는 것은 성령이 아니시고 자기의 자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물론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성령이 주도적으로 자기의 삶을 이끌어가십니다. 자아는 철저하게 성령께 순종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새 사람이 되었다가 새 사람을 유지하지 못하고 옛 사람의 모습을 다시 드러냅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옛사람으로 돌아간 것은 아닙니다. 겉모습은 그리스도인다움을 유지해 갑니다. 그러나 속사람은 그리스도인다움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새 사람 되었으면 그 새 사람됨을 유지해 가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중요한 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수영을 하지 못하는 분이 물에 들어가면 가슴 정도 물이 찰 때까지 자기 맘대로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물이 차면 이제 자기 맘대로 할 수 없습니다. 물이 자기를 조종합니다. 성령 충만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하면 새사람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요즘 조화를 보면 생화보다 더 생화같습니다. 그러나 조화에는 생명이 없고 향기가 없습니다. 오늘 조화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참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려면 믿은 대로 살아야 합니다. 깨달은 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 뿐 아니라 새 사람된 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칼빈주석
롬 2장 25-29절
25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26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28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롬 2:25-29
25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변호하면서 그의 주장에 반대하여 이의를 제시할 수도 있음을 미리 예상하고 이를 다룬다. 만일 할례가 주님의 언약에 대한 상징이라면, 그리고 주님께서 할례로 말미암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자신의 특별한 백성으로 택하셨다면, 그들이 이런 면에서 헛된 자랑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들은 할례라는 표적이 의미하는 바를 소홀히 여기고 오직 겉으로 드러나는 할례의 모습만 주시했다. 그래서 그는 단순한 표적 때문에 어떤 것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고 답한다. 할례의 진정한 특성은 영적인 약속이며, 그 약속은 믿음을 요구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약속과 믿음 둘 다 소홀히 여겼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의 확신은 무익한 것이었다. 갈라디아서에서처럼 바울이 여기서 할례의 주요 용도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그들의 명백한 오류를 보여주는 쪽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는 이 점을 주의 깊게 눈여겨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이 할례의 전체적인 특징과 목적을 설명하고 있었다면, 은혜와 값없이 주시는 약속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갈라디아서에서나 로마서에서나 자기가 다루는 주제가 요구하는 바에 따라 이야기하고 있다. 즉, 그는 논쟁이 되고 있는 부분만 논한다.
유대인들은 할례 자체가 의義를 얻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 자신의 용어로 논증을 펴면서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 즉, 할례를 통해서 의를 얻기를 기대한다면 거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할례 받는 사람이 자기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온전하게 예배하는 자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할례는 온전함을 요구한다.
우리의 세례에 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마치 세례의식 자체로부터 거룩함을 얻기라도 하는 것처럼 오직 세례에 사용되는 물만 신뢰하면서 자기가 의롭게 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생각에 이의異意를 제기하면서 세례의 목적을 증거로 제시해야 한다. 즉, 세례는 주님께서 그 의식을 통해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부르시기 위한 것이다.
이런 경우에 세례가 우리에게 증거하고 인쳐 주는 은혜와 약속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은 세례라는 공허한 그림자에 만족하면서 그 안에 담긴 진정으로 중요한 의미를 존중하지도 않고 고려하지도 않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울에게서 다음과 같은 점을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신학적 논쟁과는 별개로 표적에 대해서 신자들에게 이야기할 때는 그 표적이 가지고 있는 효력과 약속을 그들에게 연결시킨다.
그러나 표적의 특성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터무니없는 해석자들과 논쟁할 때는 그 표적이 가지고 있는 진정하고 고유한 특성에 대한 모든 언급을 일체 생략하며, 그들의 거짓된 해석을 반박하는 쪽으로 모든 논증의 방향을 잡는다.
바울이 율법의 다른 어떤 행위가 아닌 할례를 증거로 제시하는 것을 보고서, 그가 의식儀式에서만 칭의稱義의 개념을 박탈하고 있다고 추측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감히 하나님의 의에 대항해서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항상 진정한 선善보다는 외적인 율법의 준수를 자랑한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경외로 말미암아 그 마음에 감동을 받은 사람은 어느 누구도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의를 얻고자 노력하면 할수록, 그는 자기가 그 의에 얼마나 많이 못미치는지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겉으로 거룩한 척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바리새인들이 너무도 쉽게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놀랄 필요가 없다. 할례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의롭게 되었다고 자랑하는 그들의 어설픈 핑계 말고는 유대인들에게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았던 바울은, 이제 그들에게서 그 무의미한 허세까지도 벗겨낸다.
26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이 논증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수단은 항상 목적보다 하위에 있으며 목적에 종속된다. 할례는 율법에 언급되어 있으며, 따라서 율법보다 하위에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율법을 위해 제정된 할례를 지키는 것보다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만일 무할례자가 율법을 지키면, 아무 효과가 없는 무익한 할례를 받고서 율법을 범하는 유대인보다 훨씬 낫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무할례자가 본성상 타락했다 할지라도, 율법을 지킴으로써 성화聖化되어갈 것이고, 그리하여 무할례는 그에게 할례와 같이 여겨질 것이다. 하반절에 사용된 ‘무할례’uncircumcision라는 단어는 그 고유의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하지만, 상반절에서 그 단어는 사람을 물건 취급하듯 이방인들을 경멸적으로 일컫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우리말 성경에서는 ‘무할례자’와 ‘무할례’라고 번역함으로써 그 둘을 구분하고 있다 - 역자 주).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바울이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대상인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누구인지 알려고 너무 안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은 그저 ‘만일 율법을 지키는 어떤 이방인을 찾을 수 있다면, 무할례 상태의 그의 의義가 의롭지 못한 상태의 유대인의 할례보다 더 가치 있을 것이다’라는 가설假說을 제시하고자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음에 이어지는 “본래 무할례자가 …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라는 구문이 사람이 아니라 그러한 상황을 예例로 들어 설명한 것이라고 본다. 이는 남방 여왕이 올 것이라는 구절(마 12:42)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구절(눅 11:32)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이런 견해를 가지는 것은 바로 바울이 사용한 말 때문이다. 그는 율법을 지키는 이방인이 율법을 범하는 자를 심판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 이방인이 무할례자이고 율법을 범하는 사람은 문자 그대로 할례를 받았더라도 그러하다.
27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with the letter and circumcision)라는 말은 환치법換置法에 따라 ‘문자 그대로의 할례로’(by literal circumcision)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문자 그대로의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율법을 범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외적인 의식儀式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영적으로 예배하는 일을 계속 소홀히 여겼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즉, 그들은 율법의 가장 중요한 항목인 경건과 의義와 심판과 진리를 경시했다.
28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이 어구는, 진정한 유대인인지 아닌지는 타고난 혈통이나 신앙 고백에 의해서 혹은 외적인 상징에 의해서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유대인임을 나타내는 할례는 겉으로 드러나는 표시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진짜 유대인인지 아닌지, 그리고 진짜 할례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내적內的 차원의 문제이다. 진정한 할례에 대해서 바울이 덧붙이고 있는 발언은 성경의 여러 구절들에서 따온 것이며,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고 도처에서 명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바이다. 포피包皮를 잘라내는 것은 단순히 몸의 한 부분을 살짝 베어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본성을 잘라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할례는 육신 전체가 썩어 없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29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바울이 덧붙인 이 구문은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한다. ‘율법 조문’이라는 말은 경건함이 없는 외적인 의식을 뜻하고, ‘영’이라는 말은 이 의식의 영적인 취지finem를 의미한다. 표적과 의식儀式의 진정한 중요성은 그것이 가진 목적(a fine pendeat)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이 목적이 제거된다면, 그 자체로는 아무 쓸모가 없는 율법 조문만 남게 된다. 바울이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때 인간이 그것을 신실한 마음으로 받지 않을 경우, 그분이 명하시는 모든 것은 율법 조문, 즉 사문死文으로(in frigida scriptura)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음성이 인간의 마음 깊이 스며들게 되면, 그 음성은 어느 정도 ‘영’으로 변화된다. 여기에는 예레미야가 예레미야서 31장 33절에서 주목한 것처럼,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차이가 암시되어 있다. 그 구절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법을 그들 속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기록한 후에, 자신의 언약을 승인하여 확정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도 이와 동일한 점을 염두에 두고 말한다(고후 3:6). 그 구절에서 그는 율법을 복음과 비교하면서, 율법은 죽어 있을 뿐만 아니라 죽이기까지 하는 ‘율법 조문’이라고 부르는 반면 복음은 ‘영’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돋보이게 한다. ‘율법 조문’이 진정한 의미를 가진 것이고 ‘영’은 비유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완전히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인간의 눈은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들 생각에 근거해서 칭찬하는 것에 우리가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바울은 말한다. 사람들은 화려한 겉모습에 기만당할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므로 오히려 우리는 마음속 가장 깊은 곳의 은밀함까지도 보시는 하나님의 눈으로 만족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거짓된 평판으로 스스로를 기만하는 위선자들을 하나님의 법정으로 소환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