횟집에서 아침을 먹고 있는데, 우리 횟집 옆에서 식당을 하고 있는 말자 누나가 왔다.
몇 년 전까지 고모네 횟집의 주방장을 했기 때문에, 식사를 거의 우리 집에서 같이 하는 편이다. 내가 유일하게 금진항 여자들과 소통을 하는 시간이 아침을 먹을 때다.
횟집의 아침은 금진항 여자들이 제일 한가한 시간이기 쉽다. 새벽에 바다에 갔다가 아침에 항구로 돌아와서 고기를 어판장에 내려놓고 아침을 먹고 설거지를 끝내고 다시 어판장에 그물 손질하러 나가는 시간이 그 시간이다. 그때 잠시 횟집에 들러서 수다를 떠는 것이다.
그러다가 아침을 놓친 여자들은 숟가락 하나 집어 들고 아침밥을 거들어 주기도 한다.
그날은 어디서부터 그 말이 튀어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춤 이야기가 나왔다.
“주문진에 지금은 공장이 많지만 옛날에는 여자들이 할 일이 없었지. 요즘은 신랑하고 같이 배를 타지만 예전에는 여자들이 배에 얼씬이나 했나. 주변에 얼씬 거리기만 해도 부정 탄다고 난리였지.
그래서 여자들이 신랑 바다 나가면 할 일이나 있나. 그래서 동네마다 춤선생들이 설치고 다니고, 여자들이 춤 바람이 난거야.”
“누나도 춤 배워 봤어요?”
“그럼, 나도 한창 췄지. 남동생이 일본에서 가지고 온 전축을 틀어놓고, 육박자부터 팔박자까지 다 마스터하고........지루박이야 기본이지, 기본.......““야, 누나 대단하다.”
말자 누나는 주문진에 살다가 남편이 죽고 다시 고향인 금진항에 와서 당뇨병 걸린 맏아들과 둘이 살고 있다. 언젠가 말자누나가 남편과의 주문진 야산 묘지 위에서의 첫 경험을 이야기 하면서 고모와 아내와 함께 배가 터지도록 웃은 적이 있다.
“춤은 배웠다고 다 추는 거 아니야.”
“그럼요?”
“나라시를 뛰어야 해”
“나라시가 뭐예요?”
“나라시가 뭐냐 하면, 기본을 배우고 나서 여러 남자들과 같이 실전을 뛰는 거야.
왜냐하면 남자마다 다 스타일이 틀리거든. 박자도 틀리고, 요령도 틀리고. 손 잡는 것도 틀리고. 그래야 카바레 가서 아무 남자와 발을 맞출 수 있는 거야.”
“아! 그러니까 운전으로 치면 도로연수 하는 거나 마찬가지군요.”
나라시라는 일본어가 참으로 유용하게 쓰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의 뜻이야 아무려면 어떠랴
그 말이 한국으로 수입이 되어 서민들 생활 곳곳에 침투해 들어가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일본어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뜻 보다 더욱 교묘하고 화려하게 변했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게 바로 서민들이 주로 쓰는 비속어와 사투리의 장점이 아니겠는가. 하여간 말자 누나가 설명하는 춤에 대한 나라시의 뜻을 완전히 파악한 건 사실이었다.
참으로 경쾌하고도 말끔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외래어면 어떻고 욕이면 어떻고 사투리면 어떠랴. 사람들 생활 깊숙이 들어가 어떤 표준어보다도 기가 막히게 쓰이고 있는 것을.
“참, 나라시 박이 중풍이 와서 사천 병원에 실려갔데”
“나라시 박이 누구예요?”
“그 있잖아요. 양짓마을 큰댁에서 일하던.............당신 어릴 때......엎어주던......”
“아! 춘삼이, 춘삼이 아저씨! 그런데, 그 아저씨가 왜 나라시 박이야?”
“그 인간 자네도 알잖아. 카바레 상무까지 한 거. 주문진에서 얼마나 잘 나갔다고. 주문진 묵호에서 그 인간 모르면 간첩이었지. 그 인간과 손 한번 잡으면, 스텝이 금방 늘었지. 하여간 춤 하나는 끝내줬지.”
아내의 설명으로 나라시 박이 춘삼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말자 누나가 나라시 박이라고 부르는 춘삼이는,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 양짓마을 큰댁에서 일하던 머슴이었다.
그러나 여느 머슴과는 틀림없이 달랐다. 나는 춘삼이를 떠올리면서 어머니를 같이 생각했다. 그 춘삼이가 늙어서 할머니 고향인 금진항에 들어와 혼자 살고 있었다.
춘삼이에 대한 기억은 특별한 것이었다. 내가 강릉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묵호로 전학을 갔을 때 묵호 삼거리 카바레 앞에서 우연히 춘삼이를 만난 적이 있다.
"성열아!"
굵직한 목소리가 내 어깨를 잡았다. 뒤돌아 본 순간 처음 본 얼굴이 나를 맞았다.
"누구시죠?" "나 모르겠어? 나 춘삼이야"
춘삼이? 누구지? 아무리 기억을 해도 처음 본 얼굴이었다.
"넌 어릴 때 얼굴이 많이 남아 있어서 내가 바로 알아보았는데, 넌 기억이 안나는 모양이구나."
어릴 때라.........한참을 앞에 서있는 덩치 좋은 남자의 얼굴과 기억을 번갈아 되씹어 보아도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내 이름과 어릴 때 운운하는 것을 보면 필시 날 아는 것은 분명한데.......
"너 기억 안나? 할아버지 제삿날 옥계역에서 널 엎어서 ......."
나머지 뒷말을 듣기도 전에 난 갑자기 과거로부터 달려오는 기억 한 장면을 뒷머리가 멍해지도록 잡을 수가 있었다.
춘삼이었다!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이 과거가 생각나듯이 갑자기 그 당시 옥계에서의 춘삼이와의 기억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까맣게 잊어버린 단절된 기억들이 내 온몸을 칭칭 감으며 머리 속으로 올라왔다. 내가 춘삼이의 얼굴을 기억 못하는 건 당연했다. 나는 춘삼이의 넓은 등판만 기억했다.
내가 어머니와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옥계 역에 내려면 춘삼이가 마중 나와 나를 엎어서 큰댁까지 십리 길을 걸었다.
아마 아버지는 그때 출장 중 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의 등에 업혀 겨울밤 찬바람을 피하기 위해 외투를 머리까지 쓰고 잠이 들기도 했다. 잠이 들지 않을 때는 그의 등에 볼을 대고 따뜻한 그의 체온과 걸음을 옮기면서 느껴지는 발자국소리의 리듬을 즐기기도 했다. 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와 춘삼이의 소근거리는 말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호호호.." "하하하.."
가끔씩 두 사람은 숨 죽여 웃기도 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춘삼이의 얼굴을 보면서도 그의 따뜻한 등판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춘삼이는 전쟁고아로 옥계면내에서 밥을 얻어먹으며 헤매는 것을, 할머니가 거두어들인 아이였다. 아버지보다는 네 댓살 아래였는데, 할머니는 아들처럼 때로는 집안의 일꾼처럼 그렇게 키우셨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큰댁에 들어와서 할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해에 집을 나갔으니 이십 년은 족히 큰댁 식구들이랑 살았다.
아버지와 큰댁 큰형은 나이가 동갑이었는데, 춘삼이는 큰형과 아버지를 똑같이 형이라 부르며 컸다고 한다.
조카와 아저씨를 형이라 부르는 이상한 관계가 아무런 무리 없이 유지할 수 있는 데에는 할머니의 힘이 컸다. 머리 속에 유교의 전통적인 가족질서가 뿌리 깊이 박혀 있었던 할머니가 그렇게 이상한 호칭을 허락하신 것이 지금도 불가사의하다.
큰형과 아버지가 어릴 때 같이 크면서, 호칭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는 것에 비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의문은 큰형과 아버지가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강릉으로 나가서야 큰댁 식구들이 이해하기 시작했다.
혼자 남은 춘삼이의 외로움과 서운함이 그를 가출하도록 만들었고, 가출한 춘삼이를 몇 번이나 수소문하여 잡아 온 사람은 영락없이 할머니였다.
그를 자기 아들이나 손자처럼 키울 수 없는 할머니의 아픈 마음이 그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유교적 가족관계마저도 무시하게 된 것 같았다.
방학 때 큰댁에 놀러 가면 유독 춘삼이는 나만 데리고 놀았다. 산으로 데리고 가서 산딸기며 머루며 온갖 먹을 것을 따주었고 호칭에 있어서도 나만은 예외였다.
우리 사촌형제 통 털어서 '춘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다른 사촌형이 춘삼이라고 부르면 어른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머리를 쥐어 박히고 온갖 놀이에서 제외를 시켰다.
아마 그 이유는 내가 형제들 중 유독 할머니를 많이 닮아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언뜻 생각나는 부분은 있었다. 어쩌면 어머니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 아버지는 집을 거의 떠나 있었다고 들었다. 산림청 간수로서 산에서 몇 달 씩 보내야만 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신혼 시절을 남편 없이 서럽게 시집살이를 했을 것이다.
아마 그런 어머니를 춘삼이는 마치 누나처럼 따랐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때 우리 집안에서 피가 섞이지 않은 두 사람이 비슷한 동류 의식을 품은 것은 당연할 지도 몰랐다.
지금 생각해 봐야 춘삼이가 어머니에게 보낸 시선이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지나가는 말로 언뜻 언뜻 춘삼이 얘기를 꺼낸 걸로 보아서 염문에 가까운 소문에 어머니가 괴로움을 당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놀면서 춘삼이 입버릇처럼
"네 눈은 엄마 같아"
하고 종종 얘기 했었다.
지금 생각 해 보면, 춘삼이의 말 속에 엄마라는 것이 할머니를 얘기 했는지 어머니를 뜻 했는지는 지금도 아리송하기만 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아버지를 따라 강릉 시내로 나오게 되었다. 그런 춘삼이가 얼마 후 집을 나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기를 지탱해준 큰 그늘이 없어져서 그가 옥계 큰댁에 눌러 있을 아무 이유가 없어진 때문임이 분명했다.
집을 나온 춘삼이가 좀도둑으로 경찰에 잡혀 있는 것을 아버지가 몇 차례 꺼내준 얘기를 들은 것이 춘삼이에 대한 기억이 전부였다.
"같이 가서 춘삼이 만나 볼까?"
그 때도 아버지는 경찰서에 가면서 어머니에게 이런 소리를 했던 기억이 있다. 아마 어머니는 아무 얘기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춘삼아..."
나도 모르게 춘삼이라고 불렀다. 내뱉은 말을 줒어 담고 싶을 정도로 미안했다.
머리에 하얀 백발이 보이고 백구두에 미색 정장 신사복을 입은 중년의 신사를 마치 아이 이름 부르듯 불렀으니 말이다.
"아. 미안해요"
"괜찮아. 이제 기억나지?"
춘삼이의 명함을 받았다.
거기에는 xx카바레 상무라고 박혀 있었다. 돌아서 가는 춘삼의 뒷 모습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춘삼이의 등판은 그때는 넓었다. 그리고 그의 등판에서 언뜻 어머니의 웃음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아버님이 춘삼이를 병원에 데리고 갔데요.”“그래?”
아내는 벌써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춘삼이가 굳이 금진항을 택한 것은 틀림없이 할머니 고향이라는 점이 작용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어머니처럼 돌봐주던 할머니 생각 때문에.
“그런데, 왜 나에게는 말을 안해줬어”
“당신, 요 근래 집에 없었잖아요.”
“사천 아산 현대 병원 맞지?”
“거기 가서, 아버님 이름 대고 병실 찾아 가세요.“
“왜 아버지 이름이야?”
“춘삼이 아저씨 주민등록증도 없데요. 그래서 아버님이 대신 의료보험증 가지고.......”
“음...........”
과거 춘삼이를 경찰서에서 빼내올 때처럼, 이번에도 어김없이 아버지가 춘삼이를 구해주었다.
어머니 때문에 그토록 미워하면서.
“병원 갈 때 어머니도 같이 가셨어?”
“그건 모르겠어요. 그건 왜 물어봐요?”
“그런 게 있어.........당신은 잘 몰라.”
아버지가 춘삼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을 때, 과연 어머니도 같이 갔을까 궁금했다.
삼십년 전에도 아버지는 춘삼이 때문에 경찰서에 갈 때,
“당신도 같이 가서 춘삼이 만나볼까?”
하고 어머니에게 말했고, 그 말에 어머니는 대답이 없으셨다.
이번에도 틀림없이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그렇게 물으셨을 거라고 확신이 들었다. 물론, 어머니는 그때처럼 대답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병실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춘삼이도 없었고 나라시 박도 없었다.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 노인네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어 어 어, 성열이 왔구나.”
“죄송해요. 그 동안 찾아뵙지도 못하고........”
“어 어 .........괜찮다.”
춘삼이 아저씨의 말소리를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라시 박......”
나는 가만히 속으로 불러 보았다. 노인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첫댓글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