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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
한글, 즉 훈민정음이라는 문자 체계의 사용 방법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책의 제목. 국보 제70호이며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참고로 해례본 책이 등재된 것이지, 무형의 훈민정음이라는 문자 체계 자체가 등재된 것이 아니다.
2. 어떤 책인가?
1940년에 와서야 비로소 다시 발견되어 한글이 어떤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는 책이다.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며 현재 지구 상에서 쓰이고 있는 모든 문자 가운데 '창제 원리'가 기록된 문서가 있는 문자는 한글이 유일하다.
훈민정음 언해본에는 제작원리 내용이 실려있지 않았기 때문에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한글의 창제에 대한 여러 가지 구구한 추측이 난무했다. 심지어는 문창살을 보고 본따 만들었을 거라는 추측까지 있었다. 이런 저런 어중이떠중이식 설이 나돌던 와중에 해례본이 발견되며 한글이 계통적으로 독립적인 동시에 당시 최고 수준의 언어학, 음성학적 지식과 철학적인 이론이 한글에 적용되어 있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해례본의 발견으로 인해 한글 창제의 원리에 대해 많은 것들이 확인되고 알려지긴 했는데, 사실 그 내용이 꽤 어려워서 아직도 대해 학자들 사이에 한글 원리에 대한 해석에 분명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도 있다. 자음 글자의 경우 혀나 입술 같은 발성기관을 본따 만들었다고 쓰여있지만 모음 글자의 경우 성리학 이론과 관련된 천, 지, 인을 가져와서 만들고 조합한 것이라 서술되어 있어서 학자들의 해석이 분분하다. 이는 모음이 들어간 울림소리의 경우 맨눈으로는 확인이 불가능한 성대의 움직임과 연관되어 있어서 세종도 확인과 검증이 불가능한 부분이라 이런식으로 설명한 것으로 추측된다.
2014년 현재 알려져 있는 판본은 안동본과 상주본 단 둘뿐이다. 그나마도 소재가 알려져 있는 것은 안동본뿐이다. 다행히 안동본을 토대로 영인본이 제작되었기 때문에 열람이나 유실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2014년에 제3의 판본의 일부분이 궁중에서 쓰던 모자 속에서 발견되었다. 아래 단락 참고.
3. 해례본의 구성
• 임금의 글
• 어제 서문
• 본문(예의): 세종이 간략히 해설한, 글자의 운용 방법
• 신하의 글
• 해례(다섯 '해설'과 한 '예시'가 실렸기에 '해례'이다)
◾제자해: 글자 창제에 관한 해설
◾초성해: 초성 글자에 관한 해설
◾중성해: 중성 글자에 관한 해설
◾종성해: 종성 글자에 관한 해설
◾합자해: 초중종 글자를 합한 글자에 관한 해설
◾용자례: 글자를 활용한 예시
• 정인지 서문 - 정인지 서문의 위치를 따지면 '서문'이 아닌 '발문'이 되겠으나, 세종이 서문을 쓰기 전에 정인지가 이미 썼던, 굳이 말하자면 원조 서문이 정인지 서문이며, 세종의 서문이 추가되면서 이것이 뒤로 밀려났을 뿐이기에 편집상의 위치와 무관하게 '서문'으로 불린다. '정인지 후서'라는 표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후서는 보통 책이 쓰이고 나서 한참 훗날에 추가적으로 쓰인 글을 의미하는바, 정인지는 창제와 거의 동시에 이 글을 썼으므로 적합하지 않은 표현이다. 《훈민정음》의 후서에 해당하는 것은 이하에서 설명할 숙종의 글.
그리고 해례본은 한문으로 쓰여 있다. 흔히 말하는 '나랏말싸미…'는 훈민정음 언해본의 서문이고, 《훈민정음》의 서문은 '國之語音、異乎中國…'로 시작한다. 당대의 문자 언어는 한문이었고, 새로 만든 문자를 설명하는 문자언어가 한문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최초로 발견된 《훈민정음》은 맨 앞 부분 두 장이 고의적으로 찢긴 상태였다. 이 낙장 두 장은 실록본을 베낀 가짜 페이지로 메꿔져 있었다.] 찢긴 이유에 대해, 학자들은 연산군의 한글 탄압 때 책을 감추기 위해서 표지를 뜯어 내고 다른 표지냈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연산군의 한글 탄압 때문에 표지를 뜯은 게 아니라는 정황적 근거가 있다. 최초 발견된 《훈민정음》의 종이 뒷면에는 가난하여 종이가 없어 기존의 책을 재활용했을 한 선비가 필사한 것으로 보이는 《십구사략언해》가 있었는데, 이 내용 역시 초반부가 등장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책을 필사할 때 처음부터 쓴다는 점을 감안하면, 표지를 뜯어낼 때 이 필사 내용 역시 같이 뜯겨져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 《십구사략언해》는 내용상 약 18세기 후기에 필사된 것으로 보이니, 결국 책 표지를 뜯어낸 것은 18세기 이후라는 얘기가 된다. 16세기의 연산군 한글 탄압과 연관지을 수 없다.
4. 현존하는 해례본
4.1. 안동본
초간본, 즉 원본으로 여겨지는 해례본이자, 최초로 발견된 해례본은 안동본(간송본)이다. 1940년대에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견되어, 그 뒤에 간송 전형필에게 입수가 되었다. 현재 간송미술관에서 보관 중인 《훈민정음》 해례본이 유일하다고 보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훈민정음》 해례본'이라는 이름보단 '《훈민정음》 원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상주에서 두번째 해례본이 발견된 이후에는 구별을 위해 발견된 지역의 이름을 따 안동본 또는 소유자의 호를 따서 간송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실은 이 판본 역시 세종대왕 생전에 나온 것으로 보긴 힘들다. 책에 수록된 '세종'이라는 묘호는 세종 사후에 붙여진 것이기 때문 즉, 해례본에 수록된 내용 자체는 세종대왕이 만든 것이 확실하나 대왕 생전에는 어디까지나 그 내용을 대신들 앞에서 반포만 한 것이고, 지금과 같이 책으로 활자판본을 만들어 편찬, 보급한 것은 세종 사후인 것이다. 그래도 현재 남아 있는 판본 중에서 간행시기가 가장 이른 판본이고 내용상 원본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국어학계에서는 이를 원본이라 하지 않고 "《훈민정음》 해례본"이라고 정확하게 부른다.
상주본의 경우 도굴꾼 서씨가 1999년 안동 광흥사의 대웅전 나한상 토불들을 부수고 훔친 복장유물이라는 증언을 하였고 2013년 말에 실제로 안동 광흥사에서 조선 세조 시기에 복장한 다수의 관찬 언해본 서적이 발견되면서 이 당시 편찬된 것임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는데, 간송본 또한 그 판본이 완전히 똑같고 같은 안동 지역에서 발견된 점을 미루어보아 상주본과 같이 세조 시기에 만들어 복장했던 유물이 아닌가 하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원소유주는 광흥사? 최근 초간본 월인석보 언해본 등 다량 발견돼 소유권 주장 탄력 ‘한글보급 전초기지’ 설득력,
안동본은 일제강점기의 국문학자 김태준의 제자였던 이용준(李容準)에 의해 그 존재가 처음 밝혀졌다. 원래 광산 김씨 문중의 가보로, 이용준의 처가인 광산 김씨 종택인 긍구당 서고에 이 해례본이 보관되어 있었던 것. 이것은 가문의 선조가 여진 토벌의 공로로 세종이 직접 하사한 것 이었고(이용준의 왜곡이라는 설도 있다.). 이용준은 이걸 발견하고 김태준에게 이야기했던 것이다. 당연히 김태준은 깜짝 놀라 이용준과 함께 본가가 있는 안동으로 내려가 해례본을 직접 확인했다. 이용준은 잘 보관할 만한 사람에게 넘기고 싶다고 말했고, 김태준은 당시 문화재 수집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던 간송 전형필을 떠올렸다. 김태준은 전형필을 만나 해례본 이야기를 했고, 전형필은 그 자리에서 은행으로 달려가 1만 1천원을 찾아와 1천원은 김태준과 이용준에게 사례금으로 주고 1만원은 해례본 값으로 치뤘다. 그때 당시의 물가로 따지면 기와집 열 채값에 해당되는 금액이었고, 현대의 물가로 환산하면 무려 30억원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사례비가 3억원? 대단하다 당시 전형필이 해례본의 가치를 얼마나 높게 봤는지 알 수 있는 일화. 그런데….
앞서 해례본의 앞쪽 두 장이 찢겨나갔다고 언급했는데, 2000년대의 연구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공개되었을 때 그에 관련되어 있던 인물들이 소유주 몰래 팔아먹기 위해(!) 일부러 찢어 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은 이용준이 긍구당의 서고를 열람하다 해례본을 훔쳐갔던 것. 이용준이 해례본과 《매월당집》을 여기서 훔쳤는데 표지에 광산 김씨 가보를 뜻하는 도장이 찍혀있어 이를 찢어내어 팔았던 것이 표지 실종의 진실이었던 것이다. 뭐 이런 현재 일본에 있는 《매월당집》 역시 해례본과 마찬가지로 앞 두 장이 인위적으로 찢겨져 있다. 나중에 이를 들키고 장인에게 혼나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과 이를 뒷받침하는 편지도 있다.
그 이후 김태준과 이용준은 이걸 판 돈을 사회주의 운동에 써 경성 콤그룹의 거물이 되었다고 한다. 김태준은 지리산 빨치산으로 붙잡혀 죽었으며, 이용준은 월북했다고 전해진다.
4.1.2. 간송 전형필, 그 이후
전형필은 이것을 사들이고 나서 광복이 될 때까지 이 해례본의 존재를 철저히 숨겼다고 한다. 한국 문화를 철저히 말살한 일제강점기 말기에 한글 창제원리를 자세히 설명한 이 책이 들켰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피난갈 때 이 책을 먼저 챙길 정도로 보존을 하였다.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은 그런 간송 선생의 노력 덕. 그리고 1956년 이 소장본을 바탕으로 사진을 촬영하여 만든 영인본이 제작되었다. 전형필은 영인본 제작을 위해 이 소장본을 흔쾌히 내놓았다고 한다.
그 이후 원본은 간송미술관에서 보관되고 있으며, 훈민정음 해례본을 공개하는 날이 적어 직접 보기 굉장히 힘들다고 한다. 원본 사진을 찍어서 만든 영인본이 따로 있다. 보존을 위해서 함부로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도 있다.
한국을 대표하며 아주 희귀한 것이기 때문에 실물로 보기가 굉장히 힘들다. 2014년 3월 말부터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리는 간송문화전에 원본이 전시된적이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고려청자와 함께 다른 전시물과 다르게 손에 유리대고 볼 정도로 가까이 볼수 없으며 약 1미터 이상 떨어져야 볼 수 있다.
4.2. 상주본
오랜 세월 해례본은 단 한 권만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왔지만, 2008년 7월에 경북 상주에서 간송미술관의 간본과 동일한 판본이 발견되었다. 경북 상주시 낙동면에 사는 고서 수집가 배익기가 집 수리를 위해 짐을 정리하다 발견하였다며 이를 안동MBC에 제보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발견지를 따서 이를 상주본이라 부른다. 최초보도
상주본은 《훈민정음》 안동본과 동일한 판본으로 서문 4장과 뒷부분 1장이 없어졌지만 보존 상태는 안동본보다 좋고 안동본에는 없는 당시 연구자의 주석이 있다 때문에 이 상주본은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여겨졌다. 굳이 가격으로 따진다면 1조원 이상의 가치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는 고문서 전문가와의 인터뷰가 안동MBC 방송에 실린 적도 있다. 현재 이 책의 가격이 1조원 이상이라는 이야기나 배익기가 이 책을 10분의 1인 천억원에 팔겠다는 이야기는 다 이 방송인터뷰의 고문서 전문가의 발언을 근거로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2015년 한글날 배익기가 입을 열었다. 한겨레 신문과의 통화에서 최소 1000억원 이상에 국가에 매각할 생각이 있다는 것. 지금까지의 복잡한 소유권 관계상 실제 보상이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었으나 문화재청도 보상 범위에 대해 검토중이라 언급함에 따라 실질적으로 보상준비는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배익기의 말과 문화재 관련 법령을 근거로 강제집행이나 소송으로 정부가 환수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무상헌납을 고속도로 건설에 개인 토지를 무상으로 내주는 것에 비유하며 1조원에도 훈민정음을 살 사람은 많다며 절대 1000억 미만으로는 환수하지 않을 것임을 공고히 했다. 해례본이 일부 훼손되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해외 반출 시도는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배익기를 면담한 표창원범죄과학연구소의 표창원 소장에 의하면 배익기의 현재 행보는 단순한 돈 욕심이 아닌 명예심과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명예회복 등의 방책을 적절히 쓰면 설득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으나 원 소유자였던 조 모의 사망으로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