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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론 – 수필에서 결어 만들기
이동민
전통적인 수필쓰기를 검토하면서 결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알아보자.
‘수필이 무엇인가’를 질문할 때 일반적인 대답은 ‘수필은 언어를 이용하여 인생 표현을 사실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다.
이 일반론에 따르면 수필의 요소인 언어, 사실성을 활용하여 인생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요소를 어떻게 활용하여 인생을 표현해낼까. 결어가 무엇인지를 더 직접적으로 질문하면, 전통 수필에서 나타내는 결어는 작가의 주장이고, 인생에 대한 해석이며, 글의 주제가 된다. 일반적으로 공동선적인 가치와 다름 아니다. 작가가 사회에 잘 적응하는 삶을 꾸리고 있다면 수필을 구성하는 단계에서부터 결어를 이미 정해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작가가 익숙해져 있는 사회가치가 결어가 되기 때문에 단답이 대부분이다. 작가의 의도를 담은 담론이지만, 공동선이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단답이라면 구성도 단선적으로 한다. 결어는 작가의 고정된 사고 속에 이미 완성된 상태로 잠자고 있다. 수필쓰기는 잠자는 결어를 깨어나게 하는 작업이다. 이리저리 비틀어서 독자가 결어를 얼른 눈치채지 못하도록 실어나르면 잘 쓴 수필이라고 말한다. 독자들이 글이 끝날 때까지 눈치채지 못하도록 설계하는 것이 이야기 만들기 이다. 전통적인 수필쓰기는 이런 방식으로 쓴다.
저자가 독자의 신뢰를 받는 인격체일 때는 저자가 도출한 결어를 수용한다. 저자가 대중에게 권위를 가지면 저자가 제시하는 해답(결어)도 저자의 인격체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우리가 타인의 글을 인용할 때는 이름보다 직업이나, 사회적 직위를 소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오늘의 문학은 과거의 전통을 해체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중이다. 끊임없는 실험 속에서 새로운 방법들이 쏟아져 나온다. 지금까지 해답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 하룻밤을 자고 나면 잘못되었다고 추방당하는 것이 오늘의 문학이론이다. 재미있는 현상이라면 오답이라는 판정을 받고 쫓겨갔던 해답을 정답이라면서 다시 불러오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나쁘게 말하면 혼돈이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오늘은 해답보다는 해답을 도출하는 과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무엇이 답인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늘의 상황이기도 하다. 현대사회는 하나의 답만이 존재하는 사회가 아닐 만큼 복잡함으로, 정답을 찾아내는 것을 예전처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수필에서 내용을 담아내는 이야기를 예전처럼 단선적으로 만들 수 없다. 또 다른 답도 있기 때문에 수필의 이야기는 작가가 자기의 주장을 담아내는 도구일 뿐이다. 주장을 ‘담론 (*사람들이 모여서 어떤 주제를 가지고 다양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토론은 찬성-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이 서로 공방을 하면서 논쟁을 벌이는 것이므로, 조금 다르다. 담론은 상대방의 주장은 관여하지 않고 나의 주장만을 담는다. ) 이라고 한다. 현대문학은 담론의 구조임으로 하나의 이야기로 소통되는 단선적인 구조가 아니고 다양한 의미가 생겨날 수 있는 복선적인 구조가 된다. 복합적인 구조에서 저자가 하나를 선택하여 제시하는 것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라면서 자기의 주장을 읊는 방식이고, 독자는 독자 나름으로 하나의 줄기를 선택하여 작기의 결어로 만든다. 이런 이유로 작가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독자가 주인 행세를 하게 된다는 문학이론이다. 수필이 문학이라면 이런 이론도 수용할 가치가 있다.
우리는 홍길동전이나, 백설공주에서 보듯이 공동선의 가치를 결어로 이미 정해놓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공동선이 홍길동의 주장과 행동이 선하다는 것을 정해놓았기 때문에, 작가나 독자는 홍길동이 저지른 폭력적인 행위는 눈감아 버린다. 백설공주는 착하고 이쁘다. 그 이유로 백설공주가 억울하게 고통받았다는 사실이 우리의 사고를 점령해버렸으므로, 계모에 대한 복수는 당연하다. 독자가 한 번이라도 백설공주가 계모를 용서하지 않고 복수를 하는 것을 두고 나쁜 여자애라고 생각해 본 일이 있을까. 작가가 홍길동의 폭력성을, 백설공주의 복수심을 결어로 담아낼 생각을 해 보았을까. 적어도 문학으로서의 수필쓰기라면 공동선이라는 자동장치가 이끄는데로 기계적으로 달려가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까지 그렇게 수필을 써왔고, 읽어왔다.
전통적인 수필쓰기 기법에서 소재의 개념은 아주 중요하다고 말한다. 소재는 작가의 여러 경험에서 선택한다. 작가는 자기의 경험 중에서 어떤 경험을 소재로 선택하여야 자기가 구상하고 있는 수필에서 도출하려는 결어에 가장 적합할까를 생각하고, 경험에서 소재를 선택할 것이다. 즉 선택권이 작가에게 있다. 작가는 무엇 때문에 적합하다고 생각할까. 아마도 작가가 구상하는 결어를 이끌어 내기 좋은 소재라서 일 것이다.
우리는 사이버스페이스를 이야기하면서, 사이버스페이스를 구성하기 위해서 하이퍼링크를 이용하여 얻는 수 많은 자료 중에서 내가 필요한 자료를 선택한다고 하였다. 전통적인 글쓰기는 수 많은 나의 경험 중에서 선택함으로 하이퍼링크를 이용하여 필요한 것을 선택하는 것과 닮은 점도 있다.
우리가 IMF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금융위기를 겪을 때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금 모우기 운동을 했다. 대구서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한 서상돈 선생이 절대 선의 인물로 각광받았다. 그러다 보니 서상돈 선생은 나쁘게 말해서는 안 되는 인물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하이퍼링크를 이용하여 좀 더 많은 자료들을 찾아보면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자료도 많이 나왔다. 작가가 긍정적인 자료들만 가져와서 선의 상징으로 결어를 만드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독자가 더 깊은 검색을 해보고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자. 독자는 작가의 수필 글에 동조하기 보다는 자기 나름의 해석을 함으로 수많은 결어가 나타날 수 있다. 이럴 때는 결어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작가가 아니고 독자이다. 글의 주인은 작가가 아닌 독자가 된다.
서상돈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나올 수 있지만, IMF라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목적이 공동선이 되면 사상돈에 대한 평가는 이미 정해져 있다. 이런 평가도 사회를 긍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불가결함으로 서상돈의 좋은 일면을 소개하는 것이 나쁘달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사례를 찾아보면 부지기 수이다. 안동지역에서는 퇴계 선생의 인품은 말할 것도 없고 퇴계 선생의 사상에 이의를 제기해도 안 된다. 시비를 거는 자는 무조건 악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퇴계선생을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행동을 하는 신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글에서 더 친근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작가가 퇴계선생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글을 썼다면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전통적인 의식에 젖어 있는 사람은 작가를 비난할 것이고, 인간주의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좋은 글이라고 평할 것이다.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는 평화는 최고의 선이었고, 전쟁은 악 중의 악 이었다. ’최악의 평화라도 전쟁보다 낫다‘는 것이 그들의 구호였고, 아젠다 였다. ’평화‘ 이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나는 이 말을 한 사람이 이완용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멍해졌다. 평화라는 말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이완용과 연결지으니 왠지 감동의 강도가 떨어졌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나라가 이완용 때문에 전쟁을 치루지 않아서 조선의 백성들이 희생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독자의 반응은 어떠할까. 이완용의 논리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지난 정부가 차용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완용이라는 인물을 철저히 숨기는 것을 보면 작가가 결어로 이완용과 함께 제시하였을 때 절대 선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소개한 사례를 두고 생각해보자. 결어보다 결어를 이끌어 내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독자는 작가의 표현과 제시를 무조건 긍정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나름의 의견을 가지는 것이 오늘의 글 읽기이다. 이처럼 수필은 담론을 담는다. 담론은 결 어가 아니고 과정이다. 결어보다 과정이 더 의미가 있다는 이유이다.
글쓰기는 많은 정보를 이용하여 나의 인생을 바람직하게 꾸려가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였다. 현대의 글쓰기 이론에서는 미디어를 통해서 수많은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다. 내가 긍정하는 정보도, 부정하는 정보도 얻을 수 있다. 미디어에서 하이퍼링크로 얻는 정보는 예전의 활자 시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많은 양을 빠르게 얻을 수 있으므로 하나의 결어만을 제시하여 절대 선으로 동조를 얻기가 어려운 환경이 되었다.
공동선의 개념에서 보면 전통적인 글쓰기에서는 소재 선택에서부터 이미 결어가 결정되어 있는 수가 많다. 전통적인 글쓰기에서 결정된 결어를 드러내는 데는 소재가 중요한 이유이다. 작가가 경험하였던 사실에서 그런 소재를 선택한다는 것이 일반론이다. 선택이란 작가의 재량권이다. 글쓰기를 할 때 작가는 자신의 수많은 경험 중에서 임의로 선택한다. 임의로 선택한다고 하지만, 이미 정해진 선택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자기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사회에 소속되어 있으면, 같은 가치관을 가진다고 한다. 공동선이다.
결어는 작가의 가치관을 나타낸 것이라면, 작가는 어느 사회이든 사회에 소속되어 있으므로 이미 공동선에 빠져 있다. 대부분의 글쓰기에서 결어는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글쓰기라면 이미 정해져 있는 결어보다는 오히려 이야기의 시작에서 끝날 때까지의 과정이 더 중요해진다. 결어 자체보다 결어를 도출해내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야기의 과정을 만드는 것은 작가이고, 과정을 따라가는 사람이 독자이다. 독자는 작가가 펼쳐 보여주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무조건 동조하는 것이 아니다. 동조하면 작가가 제시한 결어도 수용한다. 작가는 자신이 이끌어 낸 결어에 독자가 동조하도록 설득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이다.
작가에게는 소재로 선택받지 못한 경험일지라도 독자에게는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세상만사가. 또는 모든 인물이 양면성을 지닌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이순신도, 퇴계 선생도, 조지 워싱턴 미국 초대 대통령도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모두 지닌 양면성의 존재이다. 정보의 소통이 어려웠던 예전에는 공자와 퇴계와 워싱턴의 선한 면만을 부각하는 글을 썼고, 독자들은 수용했다. 그러나 오늘은, 하이퍼링크를 통하여 눈 깜작할 사이에 수많은 정보들이 내 앞에서 대령한다. 나쁜 점을 보여주는 정보도 내 앞에 얼굴을 내민다. 이제는 독자들이 작가가 한 면만을 부각시키는 일반적인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이런 경우의 글쓰기는 자기의 주장에 동조하도록 하는 글쓰기의 과정이 중요해진다. 워싱턴이 설령 나쁜 일도 하였다 하더라도 여전히 착한 사람으로 인식시켜주기 위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결어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미리 결어를 결정하고 나서 쓰는 글이라 하더라도, 결어를 도출하는 과정은 작가의 몫이다. 독자를 설득하도록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작가의 몫이다.
전통적인 수필쓰기에서는 의미 담기를 중요하게 여겼다. 작가가 펼치는 의미가 글의 주제이고, 글의 형식에서는 결어가 된다. 주제로 말해지는 결어가 정말 결어로서의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에 대하여 의심을 하는 것으로, 이 글을 써보았다. 이것은 현대문학이 추진하는 추세와도 맞물리는 내용이다.
내가 말하는 수필론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반대 의견이 있을 것이다. 반대 의견들이 나와서 논쟁하면서, 수필의 새로운 길을 모색해보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소설을 생각해보자. 소설의 이야기 전개를 독자가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나름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인다. 흔히 경험하는 일로, 연속극을 보고 나서 시청자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말하면서 말다툼(토론?) 하는 것을 자주 본다. 독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 또는 정보로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낸다. 소설의 이야기 전개에 독자의 정보가 관여함으로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진다. 이럴 경우 독자는 독자인 동시에 작가가 된다. 이처럼 독자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오늘의 추세이다.
우리의 수필은 작가가 일인칭의 목소리로 객관적 가치를 전달하는 글 형식이 일반적이다. 독자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수필을 읽으면서 작가가 보여주는 데로 읽고 작가의 의도를 받아들인다. 독후감의 토론에서도 작가가 의도한 의미를 찾으려는 쪽으로 흘러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오늘의 독자는 자기의 머리에 입력된 정보(지식)로 작가가 제시하는 의미를 검색하면서 자기 나름으로 새롭게 해석하려 한다. 심지어는 작가가 제시하는 의미를 거부하기도 한다. 독자가 최종적으로 만들어 낸 의미는 작가와 다를 수 있다. 독자는 의미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함으로 독서가 능동적인 글 읽기로 바뀌고 있다.(*참고 1)
이처럼 독자의 재해석을 가능하게 한 것은 오늘의 정보 전달 환경이 변하였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자기의 경험에서 추출한 정보를 머릿속에 입력해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지금은 통신망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스마트폰, 정보를 제한없이 저장하는 컴퓨터, 끊임없이 정보를 창출해내는 매스미디어가 결합되어 있다. 손가락을 까딱하여 꺼내는 정보는 머릿속에서 꺼내는 정보와는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비교가 안 된다. 이런 것들이 독자가 더 적극적으로 의미를 창출하는데 참여하도록 한다.
수필쓰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주제가 중요하다. 그렇다면 수필에서 의미를 담아서 제시하는 방법도 환경이 바뀌 만큼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 오늘의 수필가는 구태의연한 글쓰기에서 벗어나려 이런저런 탐색을 해야 하리라.
*참고 1
1980년 대에 필립 C 위트록은 “하나의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로 읽는데만 그치지 않고, 그 텍스트를 위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낸다.
독서가들은 텍스트를 읽어 내려가면서 자신들이 지식, 경험에 얽힌 기억과, 글로 쓰여진 문장, 절과 단락 사이를 구축해 나감으로서 의미를 만들어 낸다..” 라고 했다.
**참고 2
X. B. 휴이는 “우리가 독서를 할 때 뭘 하고 있는지를 완벽하게 분석해는 일은 성취감을 준다. 그 일은 인간 정신의 활동 중에서도 가장 복잡다단한 활동의 상당 부분을 밝혀내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