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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부일구(仰釜日晷) / 보물 제1845호
이 앙부일구는 해시계중의 하나로 반구형(대접모양)의 형태로 인하여 앙부일구라는 명칭이 붙었다. 시판은 동지(冬至)에서 시작하여 하지(夏至)에 이르기 까지 24절기를 13선의 위선(緯線)으로 긋고 이에 수직으로 시각선(時刻線)을 그었다.
영침(影針) 즉 그림자바늘은 북극성(北極聖)을 향하여 비스듬이 꽂았으며 문맹자들도 시간을 알 수 있도록 각 시간에 해당하는 신(神)의 그림을 그려넣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청동을 재료로 하여 주물을 부어 만들고 글자와 선은 흑색칠 바탕에 은상감(銀象嵌)을 하여 뚜렷이 보이게 하였다.
4개의 발은 수평을 맞추기 위하여 수평기준장치를 십자(十字) 형태로 하였다.
시각선이 12시 96각의 시제에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1636년 시헌력(時憲曆)으로 바꾼 이후의 것으로 보아야 하고 큰 앙부일구는 「한양북극고삼십칠도이십분(漢陽北極高三十七度二十分)」으로 새겨 있으므로 한양의 북극고도를 37도 39분 15초로 측정하여 확정한 1723년 이전의 것이다. 작은 앙부일구는 한양의 북극고도를 37도 39분 15초로 새겼으므로 18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보여진다.
휴대용 해시계 앙부일구
"김첨지가 올 때가 됐는데."
"이 사람 정신 나간 소리하고 있네. 지금이 때가 어느 땐데 벌써 김첨지가 온단 말인가. 아직 오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정말 그것밖에 안되었나. 어둑해서 난 유시 가까이 되는 줄 알았네."
"날씨 탓이야, 날씨 탓."
옛날 사람들은 이렇게 해가 있고 없음에 따라 시간의 경과함을 알았다. 앙부일구는 조선시대의 대표적 해시계로 , 중국 원나라의 천문학자 곽수경이 만든 여러 가지 천문 기구들의 영향을 받아서 세종 때에 제작된 것이다.
앙부일구는 궁궐이나 관공서, 그리고 때로는 양반들의 집에서까지 해시계로서 널리 사용되었다. 해시계는 정원에 설치해 놓고 시간을 즉정하는 것과 휴대용으로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시간을 알고 싶을 때 측정하는 것, 이렇게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이 해시계는 반구형의 대접과 같은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에 앙부일구란 이름이 붙었는데. 지금 우리는 이것을 쉽게 풀어서 오목 해시계라고 부른다. 오목 해시계는 다른 해시계와는 달리 그 모양도 특이하지만, 그 형식도 색다르다. 보통 해시계는 시반(時盤)에 시각선만 그어져 있어 그 시각선에 드리우는 시표(時標)의 그림자를 보고 시간을 측정하도록 만들어졌다. 시반은 평면이고, 그래서 시각선은 시표를 중심으로 방사선의 모양을 가진다. 오목 해시계는 시반이 조금 복잡하다. 둥근 반구의 시반에는 시각선뿐만 아니고 계절선도 그려져 있다.가로줄이 시각선이고 세로줄이 절기선이다.
옛날의 시간은 하루를 12등분하여 12지를 그 이름으로 붙였다. 하루를 12로 나누어 한 시각으로 하고 또 이 한 시각을 둘로 나누어 처음 것에는 초, 뒤의 것에는 정이라 이름붙여 불렀다. 이렇게 되면 하루는 24시로 나누어지는 꼴이 된다. 이 전통이 아직도 우리가 시간을 이르는 말에 남아 있다. 낮 12시를 이르는 오정, 또는 정오, 또는 밤 0시를 이르는 자정이 바로 그것이다. 즉 해 떠있는 시간들의 가장 가운데 시간이 바로 오시, 이 오시를 둘로 나누어 처음 것에는 오초, 나중 것은 오정이 된다. 또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으로 자시. 자시를 둘로 나누어 앞의 것에는 자초, 뒤의 것은 자정이다. 오정은 낮 12이고 자정은 0시, 또는 밤 12시이다. 그리고 옛날 시간의 이름에 붙어 있던 전통의 그림자는 오전과 오후에도 남아 있다. 오전이란 오시를 중심으로 오시 이전을 일컫는 말이고 오후란 오시 이후를 가리키는 말임을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자시로부터 시작해 해시가 되면 하루가 지난 것이다. 그런데 앙부일구에는 12줄의 시각선이 있는 것이 아니라 7개의 시각선밖에 없다. 7개의 선의 이름은 묘(토끼), 진(용), 사(뱀), 오(말), 미(양), 신(원숭이), 유(닭)시이다. 7개의 선. 우리가 해를 볼 수 있는 때의 시간만이 표시된 것이다. 즉 해뜨는 묘시부터 해지는 유시까지이다. 지금의 시간으로는 대략 아침 5, 6시 정도부터 저녁 6, 7시 정도까지이다. 해가 없으면 그림자도 없다. 유시 정도 이후부터 해는 땅 아래로 졌다가 다음 날 묘시 정도에 다시 떠오르는 것이다.
앙부일구에는 7개의 시각선과 이 초와 정을 나타내는 선이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한 시각을 8등분한 선, 그러니까 각각 15분을 나타내는 선이 그려져 있다. 하루를 모두 96등분한 셈이다. 이 15분에 해당하는 옛날의 시간단위가 1각이었다. 세종대의 앙부일구도 96등분한 것, 즉 96각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그 당시는 1일을 100각이라고 보고 있었다. 하늘 한 바퀴를 360도가 아닌 365와 1/4 정도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한 하루의 길이는 100각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4각은 어떻게 처리했을까? 그냥 무시해버렸을까? 앙부일구가 당시의 하늘에 대한 관념을 그대로 담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이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된다. 하루의 4각을 무시하는 것은 하늘에 대한 모든 생각과 이를 토대로 한 천문관측자료들을 무시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이 4각의 처리가 세종대의 앙부일구 복원시에도 가장 어려운 점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데 해결방안으로 제시된 것은 남은 4각을 각 시의 초와 정에 배분하는 방법이었다. 초각이라는 시간 개념을 하나 더 만들어 1각을 14분 24초로 하면 100각이 하루가 된다. 즉 세종대에는 15분이 1각이 아니라 14분 24초가 1각이었던 것이다.
계절선은 동지에서 하지에 이르는 24절기를 13선의 위선으로 나타내어 시간뿐만 아니라 절기를 알게 했다. 각 절기의 간격은 15일이다. 한 달에 2개의 절기가 들어 있는 셈이다. 동지 때는 태앙의 일중 고도가 제일 낮으므로 해그림자가 제일 길어지고, 하지 때는 반대로 태양의 고도가 제일 높으므로 해그림자가 가장 짧아진다는 원리에 따라 계절선을 만들었다. 13개의 절기선 가운데 해 그림자가 가장 긴 동지선이 가장 바깥쪽에 그려져 있고 가장 짧은 하지선이 가장 안쪽에 있다. 그 사이를 11로 나눈 것이다. 절기의 수는 모두 24개인데 왜 줄이 13개밖에 없을까? 그것은 춘분과 추분 때에 그림자 길이가 같다는 것을 생각하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동지와 하지 사이의 절기들에는 해 그림자가 같은 절기들의 짝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한 해 동안에는 해 그림자가 같은 날이 이틀 있다는 이야기다.
동지부터 하지까지 절기의 수는 모두 11개이다. 소한, 대한, 입춘, 우수, 경칩, 춘분, 청명, 곡우, 입하, 소만, 망종이 동지로부터 하지 사이에 있는 절기들이다. 그리고 소서, 대서, 입추, 처서, 백로, 추분, 한로, 상강, 입동, 소설, 대설이 하지부터 동지 사이의 절기들이다. 그러므로 해 그림자 길이는 가장 긴 동지로부터 대설과 소한, 소설과 대한, 입동과 입춘, 상강과 우수, 한로와 경칩, 추분과 춘분, 백로와 청명, 처서와 곡우, 입추와 입하, 대서와 소만, 소서와 망종의 쌍으로 하지까지 짧아진다. 24절기의 이름이 24절기로 한 해를 보내지 않는 우리로서는 낯설어 어렵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익숙한 추분과 춘분의 해 그림자가 같다는 것만 잊지 않는다면 앙부일구의 가로줄이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앙부일구의 영침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하지로부터 동지에 이르는 절기의 이름이, 오른쪽에는 동지에서 하지로 이르는 절기의 이름이 차례로 새겨져 있고 이를 잇는 절기선이 그어져 있다. 그러므로 절기선은 모두 13개인 것이다. 해 그림자가 입춘으로부터 한 차례 오르내리면 한 해가 지난 것이다. 15x24는 360일이니까 남는 5일들은 몇년씩 모아 두었다가 윤달을 만들었다. 그래서 어떤 해는 13개월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수직으로 시각선(자오선)을 그었다. 시반이 오목하니까 시각선들은 평행하게 등분되어 있다. 여기에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모양을 형상화한 멋진 시표가 북극을 향해서 비스듬히 세워졌다.
처음 앙부일구를 만들었을 때 세종대왕은 이 해시계를 글 모르는 백성을 위한 공중 시계로 삼기 위해서 시간마다 글자 대신에 그 시간에 해당하는 동물(時神)의 그림을 그려 넣어 만들었다고 한다.
동물 그림을 넣은 해시계 두 개를 만들어 서울의 혜정교와 종묘 남쪽 거리에 각각 돌로 대를 쌓소 그 위에 설치하게 했다고 하며 이 해시계들이 우리 나라 최초의 공중 시계였다고 한다.
이 오목 시계들은 임진왜란 때에 모두 없어져서 자취를 감추어 명맥이 끊어지는 듯하다가 17C 후반, 현종~숙종 때에 조선 천문학이 새로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앙부일구도 다시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 때 만들어진 것은 세종 때의 공중 시계와는 조금 다르지만, 대궐이나 명문 대가집에 설치하기 위해 청동으로 만든 훌륭한 오목 해시계였다.
선과 글자는 은실로 상감하여 새겨넣고 네 개의 다리는 용을 조각하여 세운 우아하고 정교한 공예품이었다. 이 때부터 오목 해시계는 조선의 대표적인 해시계가 되었고, 아름다운 무늬가 조각된 균형잡힌 석대 위애 놓여져 시간을 쟀다. 거리나 집안의 마당에 해시계가 설치되는 일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조선 시대 사람들의 개성 있는 과학 문화 창조의 한 면을 엿볼 수 있다. 또 중국에서는 원나라 때 곽수경이 앙부일구를 처음 만든 이후 그 제작의 맥이 끊어졌지만, 조선에서는 대표적 인 해시계로서 그 전통을 잘 이어 나갔고, 조선식 해시계로서의 한 흐름을 만들어 냈다.
휴대용 오목 해시계로 지금까지 알려진 것들 중에는 19C 후반에 강윤과 강건이 제작한 정말 멋있는 해시계들이 있다. 성냥갑만한 작은 해시계는 공예품으로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것으로, 상아로 만들어진 것도 있고 돌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소매 속에 넣고 다니다가 시간을 보는 선비의 모습에서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넘어선 우리의 멋을 발견하게 된다.
앙부일구(仰釜日晷)
앙부일구는 조선시대에 사용한 해시계로, "하늘을 바라보는
솥 모양의 해시계" 란 의미로 그 모양에 따라서 이름지어진
것이다. 앙부일영(仰釜日影)이라고도 부른다.
동지에서 하지에 이르는24절기를 알게 하였으며, 수직으로
시각선(자오선)을 그었고, 영침은 북극을 향하여꽂았다.
특히 글을 모르는 백성을 위해 글자 대신에 짐승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1437년(세종 19) 처음으로 만들어져, 혜정교(惠政橋)와 종묘 남가(南街)에 각가 석대를 쌓아 그 위에 설치하여 한국 최초의 공중시계 역할을 하다가 임진왜란 때 유실되어 없어지고,
2-3세기 후에 만들어진 2개의 앙부일구가 남아 보물로 지정되었다.
반구형의 대접 모양에 네 발이 달려 있는데, 동지에서 하지에 이르는 24절기를 13선의 계절선으로 나타내고, 이에 수직으로 시각선을 그었으며, 시표(時標)는 북극을 향해 비스듬히 세워졌는데, 그 선과 글은 은상감(銀象嵌)으로 새겨, 우아한 모습을 하고 있다.
대부분의 천문의기들이 14세기 중국의 유명한 천문학자인 곽수경(郭守敬)의 의기들을 참고하여 제작되었으나, 장영실이 제작한 앙부일구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발명품이다. 세종 때에는 종로 1가의 혜정교와 종로3가의 남쪽 거리에 대를 설치하고, 그 위에 앙부일구를 안치하여 일반 서민들이 오가면서 보기 쉽도록 하였다.
앙부일구는 그림자를 받는 면이 오목하도록 되어 있고, 영침은 일구의 정남부위에 고정시켜 영침의 끝은 시반의 정중앙에 위치하면서 정북을 가리키도록 하였다. 시반의 오목한 면에는 절후선(節後線)으로서 13개의 위도선을 긋고, 여기에 교차하여 시각선을 표시하는 24개의 경도선을 그었다. 시각선은 1줄 건너서 12지를 적어놓아 시간을 표시하였으며, 각 시각선 사이는 다시 4등분하여 각 선마다 1각(刻: 약 15분)을 나타내었다.
절후선은 24절기를 알 수 있게 한 것으로 가장 위에 있는 선은 그림자의 길이가 가장 긴 동지를 가리키며, 가장 아래 선은 그림자의 길이가 가장 짧은 하지를 가리킨다. 사이의 11 줄은 나머지 22절기를 2절기마다 한 선으로 표시하고 있다. 앙부일구는 주로 청동으로 만들었는데 은상감을 해서 공예적 아름다움을 가진 것도 있고, 청동제 이외에도 대리석등의 재료를 이용한 앙부일구도 있다. 또한 작은 휴대용 앙부일구도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세종 때의 앙부일구들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모두 없어졌으며, 현존하는 앙부일구들은 모두 17세기 후반 이후의 것들이다.
앙부일구의 구조
해시계는 시반, 받침대, 영침 세 부분으로 나뉜다. 시반은 동그란 공을 반으로 자른 모양을 하고 있다. 마치 솥과 같은 모양이다. 옛 사람들은 천원지방이라고 하여 하늘이 둥글고 땅은 평평하여 해와 달뿐만 아니라 별들도 땅을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이 그대로 시반에 녹아들었다. 그러므로 앙부일구는 둥근 하늘을 그대로 재현하여 해의 움직임을 담아낸 그릇인 셈이다. 앙부일구를 보면 방향과 계절과 시간을 알 수 있다.
둥근 반구의 시반에는 시각선과 절기선이 그려져 있다. 가로줄이 시각선이고 세로줄이 절기선이다.
영침은 시계바늘에 해당한다. 영침은 그 끝이 북극을 가리키고 각 지방의 위도에 따라 비스듬하게 세워지고 그러므로 적도와는 수직을 이루게 된다. 이 영침의 그림자 끝이 가리키는 것이 바로 시간이다.
옛날의 시간은 하루를 12등분하여 12지를 그 이름으로 붙였다. 자시로부터 시작해 해시가 되면 하루가 지난 것이다. 그런데 앙부일구에는 12줄의 시각선이 있는 것이 아니라 7개의 시각선밖에 없다. 7개의 선의 이름은 묘(토끼), 진(용), 사(뱀), 오(말), 미(양), 신(원숭이), 유(닭)시이다. 7개의 선. 우리가 해를 볼 수 있는 때의 시간만이 표시된 것이다. 즉 해뜨는 묘시부터 해지는 유시까지이다. 지금의 시간으로는 대략 아침 5, 6시 정도부터 저녁 6, 7시 정도까지이다. 해가 없으면 그림자도 없다. 유시 정도 이후부터 해는 땅 아래로 졌다가 다음 날 묘시 정도에 다시 떠오르는 것이다.
12시각을 24시로 만드는 법
하루를 12로 나누어 한 시각으로 하고 또 이 한 시각을 둘로 나누어 처음 것에는 초, 뒤의 것에는 정이라 이름붙여 불렀다. 이렇게 되면 하루는 24시로 나누어지는 꼴이 된다.
이 전통이 아직도 우리가 시간을 이르는 말에 남아 있다. 낮 12시를 이르는 오정, 또는 정오, 또는 밤 0시를 이르는 자정이 바로 그것이다. 즉 해 떠있는 시간들의 가장 가운데 시간이 바로 오시, 이 오시를 둘로 나누어 처음 것에는 오초, 나중 것은 오정이 된다.
또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으로 자시. 자시를 둘로 나누어 앞의 것에는 자초, 뒤의 것은 자정이다. 오정은 낮 12이고 자정은 0시, 또는 밤 12시이다. 그리고 옛날 시간의 이름에 붙어 있던 전통의 그림자는 오전과 오후에도 남아 있다. 오전이란 오시를 중심으로 오시 이전을 일컫는 말이고 오후란 오시 이후를 가리키는 말임을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세종대에 만들어진 앙부일구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글자 대신 12지신의 상을 그려넣었다고 한다.
글 모르는 백성들까지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한 배려이다. 그러니까 앙부일구에는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을 터인데 그 구체적인 모양은 알 수 없고 단지 동물의 얼굴에 관복을 입힌 모습이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다.
마치 경주에 있는 김유신의 봉문을 둘러싼 호석에 새겨진 12지신상의 것과 같이 말이다. 그런데 이후에 만들어진 해시계는 대부분 글자를 아는 양반들이 소유했기 때문에 시신보다는 12간지의 글자를 써넣는 쪽을 더 좋아해 지금 남아 있는 앙부일구에는 대부분 글자가 써있다
솥모양에 담겨진 태양의 운동
이 절기선들의 간격을 보면 균등하지가 않다. 그 까닭은 지구의 태양 공전 궤도가 타원이고 이 타원을 지구가 이른바 면적속도 일정의 법칙에 따라 돌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케플러의 타원법칙을 알고 있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다.
즉 태양을 하나의 초점으로 하여 그 둘레를 공전하는 지구의 회전 속도는 태양에서 가장 먼 지점을 돌 때보다 가장 가까운 지점을 돌 때 훨씬 빠르다. 이런 현상이 해의 움직임을 담아놓은 그릇인 앙부일구에 나타나 있다.
동지와 하지에 이르는 동안의 절기 사이의 폭이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 말이다. 다시 말하면 앙부일구에는 해를 공전하는 지구의 타원운동이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종 시대 앙부일구를 만들었던 사람들이 지구의 타원궤도와 운동법칙을 알고 있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이미 6세기경 중국에서 태양의 운동이 등속이 아니라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세종 때 앙부일구를 만들었던 사람들은 나름의 계산법을 개발하여 해의 각기 다른 속도를 앙부일구에 그려넣었던 것이다. 그 결과 앙부일구의 하지와 동지쪽의 폭은 좁고 가운데 부분은 폭이 넓게 그려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