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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그들은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 동포들을 데려 오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66,18-21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8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
19 나는 그들 가운데에 표징을 세우고 그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을
타르시스와 풋, 활 잘 쏘는 루드, 투발과 야완 등 뭇 민족들에게 보내고
나에 대하여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내 영광을 본 적도 없는 먼 섬들에 보내리니
그들은 민족들에게 나의 영광을 알리리라.
20 마치 이스라엘 자손들이 깨끗한 그릇에 제물을 담아 주님의 집으로 가져오듯이
그들도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 동포들을 주님에게 올리는 제물로
말과 수레와 마차와 노새와 낙타에 태워
나의 거룩한 산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리라.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21 그러면 나는 그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사제로 더러는 레위인으로 삼으리라.”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신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2,5-7.11-13
형제 여러분, 5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시면서 내리시는 권고를 잊어버렸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6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
7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11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12 그러므로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13 바른길을 달려가십시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동쪽과 서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22-30
그때에 2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다.
23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2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5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26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27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28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29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30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The narrow door; salvation and rejection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모든 민족들에게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살아남은 자들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오겠다고 하신다(제1독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신다며 시련을 견디어 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하시며,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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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예언자는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 동포들을 나의 거룩한 산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제1독서).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니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라고 히브리서의 저자는 말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이 적겠냐는 물음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며,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보통 마태오 복음은 엄격하고, 루카 복음은 부드럽고 따뜻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루카 복음도 엄중하고 강한 경고의 말씀을 전하는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여간해서는 지나갈 수 없는 좁은 문이 나옵니다. 심지어 그 문은 닫힐 것이라고 합니다. 닫힌 문 앞에서 사람들이 집주인에게 문을 열어 달라고 외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주인은 그들에게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라고 말합니다. 이 비유는 어떤 사람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에 숫자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오늘날 많은 유사 종교와 사이비 종교가 숫자 놀음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려 하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의 수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부단히 애써야 한다고 하십니다.
구원받기 위한 첫째 조건은 ‘싸우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 가끔 등장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싸웁니다]”(1코린 9,25).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우리는 애써야 합니다. 싸워야 합니다. 내면과 외면의 힘겨운 싸움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세상의 그릇된 논리와 유혹에 맞서 싸우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산다는 것은 인생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는 치열한 싸움입니다.
둘째 조건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우리는 낮아지고 작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춘 사람은 자신이 약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호소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스스로 구원을 자신해서는 안 됩니다. 세례를 받고 교리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꾸준히 미사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는 구원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늘 비유 말씀을 보면,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 자기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다는 항변에도 주인은 그들을 도무지 모른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복음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형식적으로 주님을 섬기며 세상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살면서도, 자신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낙관하는 이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자신이 고백하는 믿음과 전혀 다른 삶을 살면서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정용진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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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라고 묻는 어떤 사람은 시대마다 거듭되어 온 질문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은 당시 라삐 학교들 안에서 제기되었고, 구원이나 멸망에 대하여 몇몇 사람들을 고뇌하게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라삐들은 구원이 유다인들의 전유물이라고 말하는 데 일치하였지만, 몇몇 라삐는 선택된 백성에 속하는 모든 이가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어떤 사람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직접 대답하지 않으시고 열정적으로 권고를 하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사방에서 온 다른 이들에게 열려 있는 문의 비유를 드시며, 이민족들에게 나라와 복음이 열려 있음을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 소속된다는 사실에 근거를 둔 그릇된 구원의 확신을 거부하십니다.오늘 복음은 구원받는 사람의 숫자와 구원받는 것의 어려움을 말하며, 메시아 잔치를 예언하는 표상으로 상징되는 구원의 보편성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나라로 이끄는 문이 모든 이에게 좁다고 이르십니다.마태오 복음의 병행 구절은 이 사실을 더 자세하게 들려줍니다.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고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나중에 온 이들, 곧 복음을 믿고 실천하는 이방인들이 이스라엘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들어갈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충실하게 대답한다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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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첫머리를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각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먼저 성찰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는 내가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자동으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내 상태에 안주해서는 결코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면 무엇보다도 믿음을 굳게 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 하려면 먼저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 나는 그분 앞에서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부터 인정해야만 합니다. 물론 신앙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볼 수 없고 들을 수도 없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착한 사람이 고통을 받고, 악과 불의가 선과 정의를 이기는 것만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분명히 존재하면서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천사, 영혼, 사랑 등이지요. 어떤 사물이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참된 믿음은 ‘내가 하느님을 볼 수 있으므로 믿는다.’가 아니라, ‘하느님을 볼 수 없어도 믿는다.’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기도를 지금 들어주시기에 믿기보다는 나의 기도를 지금 들어주지 않으셔도 믿어야 합니다. 이럴 때 나의 믿음은 굳건해질 것이며, 나에게 주어지는 시련과 고통마저도 극복해 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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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동창 신부가 그의 부친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아버지라 하였는데, 그분은 공직자로서 청렴결백하기로 유명하였습니다. 비근한 예로, 추석 같은 명절 때가 되면 사람들이 과일 등의 선물을 보내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곧바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그 누구에게서도 단돈 만 원 한 장 받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버지가 아들 신부에게 언젠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살아가면서 내가 지키려고 했던 원칙 하나가 있단다. 사람이 살다 보면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할 때가 있단다. 선택할 때에는 언제나 선택하기 싫은 것, 바로 그것을 택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삶의 보람을 느끼게 될 거야.”
덜 원하는 것, 덜 편한 것, 덜 쉬운 것을 선택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복음적인 선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를 보여 줍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좁은 문은 들어가기가 불편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몸을 오그려야 합니다. 그 반면, 넓은 문은 대접받는 사람들을 위한 문입니다. 그래서 그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 편하고 쾌적합니다. 이 두 개의 문 가운데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좁은 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선택의 갈림길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떠올리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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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구원은 보편적입니다. 아무도 그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신자이든 비신자이든, 일정한 한계가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구원의 문이 좁은 문이라고 하십니다.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그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 길입니다. 그 길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이며, 그 문은 주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에 대한 굳건한 신앙을 가지고 참된 진리를 찾으며, 언제나 기쁘고 떳떳하게 살아가는 사람만이 그곳에 다다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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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앙의 목적은 구원에 있습니다. 왜 믿는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도착점은 같습니다. 온갖 이론과 지식도 결국은 구원에 대한 안내일 따름입니다. 구원의 이론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 말씀대로 좁은 문입니다.
구원의 문은 좁습니다. 하지만 좁아도 들어가야 합니다. 경쟁률이 높기에 좁은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낮추고 작아지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기에 좁은 문입니다.
작아진다는 것은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깨닫는 행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은총을 베푸십니다. 우리가 잘못을 거듭해도 도와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이러한 은총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 작아지는 것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의 약한 모습을 수없이 체험합니다. 비참한 일이나 억울한 일로 상처받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일을 불평과 분노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작아지는 생활의 출발이요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이 생각납니다. 고3 때에 분기별로 모의고사를 보게 되는데, 자신이 지원하는 대학명과 과 이름을 적으면 몇 명이 지원했고 그중에서 몇 등인지가 인쇄되어 나왔습니다. 저는 늘 서울 가톨릭대학교 신학과를 적어냈고, 그때마다 합격이라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지원자가 그리 많지 않아서 정원보다 조금 넘거나 미달이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굳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열심히 공부한다는 고3 시절이 제게는 가장 많이 놀았던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제 학력고사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놀라운 정보 하나를 얻게 되었습니다. 신학교는 정원제가 아니라 점수제라는 것입니다. 즉, 정원 미달이 되어도 성적이 낮으면 불합격된다는 것이었지요. 몇 명이 합격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몇 점이어야 합격하느냐가 중요했습니다. 지원자가 적다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점수를 무조건 올려야만 했습니다. 그때부터 정말로 열심히 공부한 것 같습니다.
주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무사히 신학교에 합격했고 이렇게 신부도 되었지만, 만약 그때 정원제가 아니라 점수제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싶습니다. 혹시 신부가 아니라 신랑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지금도 신학교는 어느 정도 정원에 맞추기는 하지만 학교에서 원하는 점수가 되지 않으면 미달이라고 해서 합격시켜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방식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문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겠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아마 정원이 몇 명이고 몇 명이나 구원의 문에 들어갈 수 있느냐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몇 명이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지를 말씀하시지요. 즉, 얼마나 많이 구원받느냐보다 어떻게 해서 구원받을 것인지가 더 중요함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함께 식사했다고 해서 종말의 잔칫상에 앉는다는 보장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즉, 미사에 열심히 참석했다고 해서, 성당에 얼굴을 자주 비췄다고 해서 구원의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반하는 불의를 일삼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구원에 정원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미달이라고 불의를 저질러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 뜻을 철저하게 따르는 의로운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살아가는 방식은 두 가지뿐이다. 마치 기적이 없는 듯 살거나, 아니면 모든게 다 기적인 듯 살거나(아인슈타인).
나의 일.
어떤 학생이 성지에 왔습니다. 이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공무원 시험을 공부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물었지요.
”왜 공무원이 되려고 하는데요?“
그러자 ”제일 안정적인 직장이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너도나도 공무원이 되려고 하는 것이고요.”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불안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한 청년들의 모습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면서 ‘정말로 공무원이 최고일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렸을 때 우리는 특별한 사람이 될 것을 늘 떠올렸습니다. 소방관이 된다는 꿈을 꾸면 어떤 소방관입니까? 용감하게 사람들을 다 살리는 특별한 소방관 아닙니까? 과학자라는 꿈 역시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연구로 우뚝 서는 특별한 과학자 아닐까요? 이런 식으로 특별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꿈이 어느 순간 보통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철학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약 열정이 빠져 있다면 특별한 사람은 절대로 될 수 없다.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직업 자체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괜찮은 직업을 갖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직업이 아니라 일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나의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진짜 ‘나의 일’ 말입니다.
때로 뜻밖의 선물처럼, 한 줄기 바람처럼, 그렇게 깨달음이 찾아온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필요한 책이 있어 서점에 들렀는데, '반일종족주의'가 눈에 띄더군요. 대충 어떤 책인지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지만, ‘대체 어느 정도인가?’ 궁금해서 구입했습니다. 책값을 지불하는데, 평소 눈인사를 하고 지내던 청년 직원의 저를 바라보는 표정이 꽤나 복잡했습니다.
할수 없이 제가 그랬습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이 책을 좋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대체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사는 거예요.” 그제야 청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깃들었습니다. 아마도 이 책 사시는 많은 분들, 대체로 저와 비슷한 마음이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분노를 넘어 서글픔이 밀려왔습니다.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거듭되는 거짓과 왜곡에 솟구쳐 오르는 모욕감을 견뎌내기가 힘들었습니다. 나중엔 손까지 부들부들 떨려왔습니다. 불처럼 화가 나며 이런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이 큰 부끄러움은 왜 나의 몫인가’
저는 한장 한장 책장을 넘기면서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토록 왜곡되고 조작되며 편향된 역사관을 지닐 수 있는가?’ 하는 마음에 큰 걱정이 앞섰습니다. 만일 순진무구한 우리 청소년들이 이 책을 접한다면...하는 마음에 두려운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물론 지난 역사에 대한 평가와 진단은 냉정해야 하고 정확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책은 일본제국주의가 저지른 만행을 두둔하고 그 업적을 찬양하는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묘하게도 이 책의 많은 내용들이 오늘날 아베와 그 주변에 포진해 있는 극우주의자들의 발언들과 일치합니다.
저자들은 이런저런 편협되고 제한된 통계나 기록물들을 나열하며, 일제 강점기 동안 ‘강제성’은 조금도 없었음을 강조합니다. 당사자의 동의가 전제된 공정한 계약관계였답니다. 강제 징용은 없었고, 보다 높은 소득과 나은 직장을 찾기 위해 건너갔답니다. 조선인이 응하지 않으면 그만이고, 그 조선인을 처벌할 수 없었답니다.
식량 강제 수탈은 없었고, 합당한 가격이 지불된 일본에로의 수출이었답니다. 조선인 광부와 일본인 광부 사이에 차별대우란 없었답니다. 강점기 기간 동안 한반도에 다양한 측면의 긍정적 성장이 이루졌답니다. 가만히 따지고 보니 아베나 일본제국주의 공식대변인의 입에서나 나올수 있는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교묘하게 논점을 흐리는 수법이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집중해야 할 주제는 일본군에 의해 저질러진 위안부 문제인데, 미국군 위안부, 한국군 위안부, 조선 시대 기생제, 공창제 운운하며, 일반화시키면서 시선을 흩어버리고 판단을 흐리게 만듭니다.
책을 덮으면서 드는 생각 한 가지! 그럼 그분들이 주장하는 바는? 일제 강점기는 우리 민족에게 다행스럽고 은혜로운 순간이었다? 두고 두고 일본제국주의에 감사해야 한다? 감지덕지하면서 더 이상 강제징용이니 위안부니 껄끄러운 말들은 꺼내지 말아야 한다? 아베와 극우주의자들의 말에 고분고분해야 한다?
다음 구절을 접하고서는 정말이지 기가 막히고 말문까지 다 막혔습니다. 적반하장이 따로 없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할 소리인지 참...
“한국의 거짓말 문화는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거짓말과 사기가 난무하니 사회적 신뢰의 수준은 점점 낮아지는 추세입니다. 한국은 국제적 비교에서 저신뢰 사회에 속합니다. 이 나라의 국민이 거짓말을 일삼고, 이 나라의 정치인들이 거짓말을 정쟁의 수단으로 삼게 된 것은 이 나라의 거짓말하는 학문에 가장 큰 책임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나라의 역사학이나 사회학은 거짓말의 온상입니다. 이 나라의 대학은 거짓말의 제조공장입니다.”
이 혼돈의 시절, 균형 잡힌 역사 의식을 지니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낍니다.
살아가다보면 가끔씩 마치 뜻밖의 선물처럼 또는 한줄기 선선한 바람처럼 깨달음이 찾아오는 순간이 있습니다. 휴가철에 펼쳐든 책 속 한 구절이 잠자고 있던 내 영혼을 흔들어 깨웁니다. 넋놓고 바라보던 영화 자막에서 내 삶을 뒤흔드는 명 대사를 만납니다. 별 생각 없이 펼쳐든 시집 속 짧은 싯구절이 무릎을 탁 치게 만듭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 가사 한 구절이 내 인생의 역대급 깨달음으로 다가옵니다.
따지고보니 우리가 그리도 간절히 염원하는 깨달음이란 엄청 대단한 것을 통해 다가오는 것이 아닌듯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그토록 갈구하는 절절한 하느님 체험이나 회심, 신앙의 진리에 대한 깨우침 역시 엄청 대단한 것을 통해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을 통해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 주변에 널러 퍼져 존재하는 모든 존재나 사물, 사건이나 반복되는 장면에 대한 열린 마음과 집중이 필요하겠습니다. 때로 스쳐 지나가는 성경 말씀 한 구절이 우리 삶을 완전히 뒤바뀌어놓을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가 매일 부르는 성가 한 소절이 한없는 위로와 기쁨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성경 말씀들 가운데, 몇구절도 너무나 은혜롭게 다가오더군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히브리서 12장 6절)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복음 13장 24절)
주님께서 가끔씩 우리에게 건네시는 훈육과 채찍질이 결국 우리를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매일 우리 앞에 펼쳐지는 평탄한 길, 넓다란 길, 빠른 지름길이 아니라 가파르고 험한 길, 좁은 길이 결국 우리를 넓고 푸른 주님의 목장으로 안내할 것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좁은 문은 힘들면서도 기쁘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봉오동 전투’(2019)는 우리 독립군들이 일본 정규군에 맞서 처음으로 승리한 감동적인 역사를 그렸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말합니다. 내가 더 잘살게 해 주겠다고 이 집에 들어왔는데 왜들 난리냐고. 그러나 독립군들은 말합니다. 남의 집에 들어와서 아내 자식 재산 다 차지하고 다 너희를 위한 일이라니 그것에 무슨 말이냐고. 그래서 그 침입자를 몰아내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이때 일본 군인들은 마치 여우를 사냥하는 것처럼 교만해있었습니다. 독립군들은 그들의 교만함을 이용해 계속 화를 북돋아 도망칠 곳이 없는 분지 안까지 끌어들입니다.
그 가운데서 큰 희생도 치러야했습니다. 숫자가 부족한 까닭에 몇몇의 사람들이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다. 일부러 포로가 되어 무수한 고문을 받으며 잘못된 정보를 흘려야 했고, 혼자서 그들을 유인하기 위해 총알받이가 되기도 해야 했습니다.
이들 덕분으로 정규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일반인들이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전쟁경험과 군사훈련으로 무장되고 최고급 무기를 가진 이들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 원동력은 자신들이 미끼가 되어 그들의 열을 바싹 오르게 했던 희생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희생 뒤에는 승리의 기쁨이 서려있었습니다. 그 전투로 일본군은 157명이 전사했고 300여명이 부상을 입어 총 45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독립군 피해는 사상자가 총 10여 명이었다고 합니다. 자신들이 지는 십자가를 통해 이러한 결과가 나올 것을 기대하던 그들은 십자가를 지는 동안에도 이미 부활의 기쁨을 맛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구원받을 사람은 적겠느냐고 물어봅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도 실제로 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구원 받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뜻을 넘어서서, 또한 구원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도 동시에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직 ‘좁은 문’의 의미를 모릅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미사에 나오고 봉사와 선교도 열심히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들은 열심히 신앙생활 했는데도 좁은 문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고 하신 걸까요?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기쁘지 않았습니다. 얼굴 찡그리며 신앙생활 했던 것입니다. 좁은 문은 그 자체로 그 뒤에 에덴동산의 약속이 있기에 그 문으로 가면서도 기쁩니다. 힘들지만 기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신앙생활을 했기에 힘들기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십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가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길을 알려주시러 세상에 오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이 곧 좁은 문입니다. 그러니 좁은 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가 좁은 문입니다. 좁은 문은 십자가인데 십자가의 길엔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 이루었다.”는 기쁨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은 십자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편하게 살아도 구원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상급이기에 노력 없는 상급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가는 사람은 아직 상은 받지 않았지만 상을 받기로 약속이 된 사람처럼 이미 부활의 기쁨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으로 내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지,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카인과 아벨이 하느님께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카인의 제물은 물리치시고 아벨의 제물은 받아들이셨습니다. 이에 카인은 기분이 나빴고 아벨은 기분이 좋았습니다. 기분이 나쁜 카인은 아벨을 살해하였지만 아벨은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아벨은 항상 상급을 기대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넓고 편한 길로 가려는 사람은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항상 기분이 나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상급을 기대하기보다는 벌 받을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의 행실이 나쁘기 때문입니다. 반면 아벨은 자신이 잘하고 있는 것을 하느님께서 보아주시니 당연히 ‘언제 상을 주실까?’라는 기대에 차 있습니다. 예수님은 물 한 컵의 선행에도 반드시 상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다면 반드시 기분이 좋아야합니다. 물론 힘들고 어렵지만 이것은 운동할 때 힘들고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그 힘들고 어려운 것보다 더 큰 기대와 행복이 그를 계속 뛰게 만듭니다. 더 건강해지고 또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일면으로 고통스러운 마음도 있으셨지만 부활의 영광을 기대하고 계셨습니다. 당신 수난을 예고하시며 동시에 부활을 말씀하지 않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항상 받을 상에 대한 기대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할 때 ‘오늘은 주님께서 어떤 상급을 주실 것인가?’란 기대를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 힘든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가 그렇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기대에 가득 차 있습니다. 이 길이 좁은 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분 좋은 감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바로 하느님의 법칙을 따르면 됩니다. 하느님은 항상 나를 기분 좋게 만드시려고 합니다.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하고 잘 했으면 칭찬해주십니다. 그런데 죄를 지으면 자아는 상 대신 벌을 받을 준비를 하라고 말해줍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지는 가장 완전한 방법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무엇을 사랑할 때 기분 좋아졌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사랑보다 강한 에너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보다 행복한 감정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주님께 상 받는 유일한 길입니다.
겨울 풍경화를 마친 화가가 몇 걸음 물러나 자기의 작품을 감상하였습니다. 어디 하나 틀린 데가 없었습니다. 나무는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아래로 휘어진 듯 유연히 드리워졌고, 오막살이 처마 밑으로 고드름이 우아하게 내려져 있었으며, 또한 땅위에는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신선한 눈송이가 조화 있게 화면을 채웠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은 팔리지 않고 몇 개월 동안 화랑에 그대로 걸려 있었습니다. 그 화가의 특징은 겨울 풍경화이었는데도, 아무도 그 그림을 사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는 옆에서 그림을 보고 있는 다른 화가에게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붓 가지고 계세요?”
그는 대답 대신 붓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붓을 받아들고는 몇 가지 색을 혼합하더니 듬뿍 찍어서 오막살이 창문에 붉은 빛을 덧칠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회색을 찍어 오막살이 굴뚝 위로 연기를 피워 올렸습니다.
그러자 그 그림은 그 날로 팔려버렸습니다.
우리도 이 풍경화와 같습니다. 내가 차갑고 기분이 좋지 않으면 누구도 나를 반기지 않아 더욱 기분이 나빠집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따듯하게 해 주기 위해 노력하면 나도 사랑받습니다.
사랑하십시오. 물론 사랑하면 이웃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나는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그러나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질 것입니다. 사랑 자체가 보상이기 때문입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됩니다. 이 길이 좁은 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가고 있다면 반드시 고통스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을 것입니다. ‘어떤 상을 주실까?’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상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기쁩니다.
주님의 훈육에 충실하라!(연중제21주일)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나는 어제 한 동창신부의 은퇴미사에 함께하며 강론을 하였습니다. 사제는 엄청난 폭풍우를 견디어 냈으며, 항해를 마치고 포구에 안착했고, 기쁨과 평화를 누렸습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온 사제의 먼 길은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어제의 은퇴사제는 첫 본당 파견에서 부임 후 2개월이 지난 시간에 사제관 전소와 8개월이 지난 시간에 또 다시 성전이 전소되는 엄청난 시련을 겪습니다. 이보다 더 큰 시련이 또 있을까요?
인간에게 그런 일은 실망이며 좌절이고 생에 대한 환멸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시련을 겪는 사제에게 “나다, 용기를 내어라,”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한 젊은 사제에게 엄청난 시련을 통해 일어나도록 날마다 훈육하십니다. 사제는 시련 중에도 훈육에 귀 기울이고 살았습니다. 주님은 사제의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주셨고 바른길을 달려가게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시련을 당신의 훈육으로 훈련시켰고, 한 사제에게 평화로움과 의로움의 결과를 가져다 주셨습니다. 사제는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잘 살았습니다’ 라는 감사함으로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는 신부님은 눈물을 닦습니다. 신부님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위로와 기쁨을 보았습니다. 이제 상처는 깨끗이 아물고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우직하고 성실하고 ...훌륭한 사제였습니다.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되어 바른 길을 가게 하셨습니다(히브12,5-7.11-13참조). 이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구원은 기쁨입니다. 기쁨은 목적의 성취에 대한 결과입니다. ‘영원한 생명’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살다가 힘이 빠질 때라도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주님의 훈육에 더욱 충실해야 합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13,24).
<물듦>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까닭은
당신이 나에게서
당신을 보고 싶어
당신으로 나를
물들이기 위함이지요
내가 당신과
함께 하는 까닭은
나에게서 당신이
당신을 볼 수 있도록
내가 당신으로
물들여지기 위함이지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13, 24)
곽승룡 비오 신부님
그리스도인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구원의 길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인데 그 구원의 길 마지막에 있는 문이 바로 좁은 문이다.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개인적인 완덕만이 아니라 이웃사랑이다. 인격적 완덕은 카리타스 없이 불가능하다. 완덕은 이웃에게 접근하여 접촉해서 열리는 문이다.
이 문은 자기희생과 봉사를 통해 동반하는 좁은 길이다.
그래서 좁은 문이란 바로 십자가다. 십자가 없는 교회, 십자가 없는 가족, 십자가 없는 사도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늘나라의 문, 곧 그 좁은 문을 여는 열쇠이다.
좁은 문. -구원과 멸망-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은 ‘좁은 문’입니다. 세월 흘러 나이들어 갈수록 좁은 문같습니다. 세상 곳곳에서 좁은 문에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입니다. 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좁은 문입니다. 결코 우열을 비교할 수 없는 각자 고유의 십자가와도 같은 좁은 문입니다. 어찌 사람만의 좁은 문이겠습니까? 우리 대한민국도 참 넘어야 할 첩첩산중에, 통과해 나가야 할 좁은 문의 연속입니다.
사람 숫자 만큼 좁은 문도 많습니다. 첩첩산중, 한 산 넘으면 또 한 산이듯, 좁은 문 통과하면 또 통과해야 할 좁은 문입니다. 어찌 보면 장애물 경기와도 같은 삶입니다. 형제자매들과 대화를 나누며 이구동성, 공감하는 대목은 살아갈수록 힘들다는 것입니다. 하여 하루하루만 살아간다는 이들도 많습니다.
삶에 지친 이들이 자주 찾는 여기 ‘영혼의 쉼터’ 요셉 수도원입니다.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고자 좁은 문을 잘 통과할 수 있는 은총을, 힘을 얻고자 오늘 미사에 참석한 형제자매들입니다.
삶이 힘들 때마다 고향 집을 찾듯이 수도원을 찾는 교구 사제 한 분이 생각납니다. 이분은 수도원을 일컬어 영적주유소, 영적충전소라 합니다. 수도원 정문을 들어서자 마자 바위판 아래, 바위판 위에 설치된 사제의 작품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성규57,9)
이란 수도영성의 모토가 붙은 거대한 바위판 아래 네 개의 벽돌에는 “1.네 마음을 다하고, 2.네 목숨을 다하고, 3.네 정신을 다하여, 4.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22,37), 바로 제가 그 사제에게 보속 처방전으로 써준 성구였습니다. 이어 옆의 바위판 위 설치 미술 작품도 인상깊었습니다. 벽돌과 컵에 쓰여진 글자였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기도하고!”-“운동하고”-“일하라!” 라는 말마디였습니다.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눈물겨운 투쟁을 하는 사제의 간절한 소원이 담긴 다짐처럼 느껴졌습니다. 후에 사제를 만나 격려했습니다.
“신부님의 소원대로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가 빠졌습니다. ”기도하고, 운동하고, 일하라!”에 “공부하고”가 들어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운동은 취미가 아니라 생존입니다. 기도처럼 시간을 내어 운동하기를 권합니다.”
그렇습니다. 끊임없이 기도하고, 공부하고, 운동하고, 일할 때 좁은 문도 잘 통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이 교구 사제가 준 작년 사제서품 상본의 성구가 참 강렬했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성구도 없을 것입니다.
“아빠! 아버지!”(마르14,36) 단 두마디 였습니다. 마침 어제 가톨릭 신문에서 읽었던 말마디가 생각났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원죄에서 해방된다.” 정말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는 관계라면 아버지의 은총으로 좁은 문 통과는 걱정안해도 될 것입니다.
이 사제는 친절하게도 상본 성구에 덧붙여 “아빠, 아버지!를 믿고 바라는 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는 새 힘이 솟아나리라!”(이사40,31) 말씀도 써서 선물했습니다. 얼마전 수도원에 피정 온 자매에게 준 말씀 처방전의 보속도 생각납니다.
“피정하는 동안 1.기쁘고, 2.평화롭게, 3.감사하면서, 4.사랑하면서, 5.행복하게 지내는 것이 보속입니다. 아니 평생 그렇게 살면 좋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 평화, 감사, 사랑, 행복’의 삶을 살 때 좁은 문도 잘 통과할 것입니다.”라는 요지의 보속이었습니다.
좁은 문의 연속인 우리 인생입니다. 새삼 좁은 문을 찾을 것은 없습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 누구나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내 좁은 문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예화로 서두가 길어졌습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경각심을 주는 복음 말씀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누구나에게 열려 있는 구원의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겠는지요? 바로 그 방법을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하여 구체적으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첫째, “바라보라!”입니다.
언제나 바라볼 수 있는 주님을 모신 우리는 행복합니다. 수도원 십자로를 통과할 때 마다 주님 부활상을 바라보시며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제가 여기 수도원에 만31년 정주하면서 마음 답답하고 막막할 때 마다 주님을 바라보듯 가장 많이 바라본 하늘과 불암산입니다. 참 좋아하는 시편 구절이 생각납니다.
“산들을 우러러 눈을 드노라/어데서 구원이 내게 올런고? 구원은 오리라 주님한테서/하늘땅 만드신 그님한테서.”(시편121,1-2).
언제 어디서나 바라보라 있는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보고 배울 분이, 스승이 없다 탄식할 것이 아니라 언제나 보고 배울 주님이 계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의 나라를, 그리스도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바로 제대 중앙에 높이달린 십자가의 주님을, 파스카의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좁은 문의 현실일수록 주님을 바라보며 눈길을 모아야 합니다.
바로 영원한 생생한 꿈을 비전을 희망을 지니고 살라는 것입니다. 늘 삶의 목표를, 삶의 방향을, 삶의 중심을, 삶의 의미를 의식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영원한 꿈이자 비전이자 희망인 하느님이, 하느님의 나라가,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 때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도와 주시어 좁은 문을 무난히 통과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구원임을 주님은 이사야의 입을 빌어 통쾌하게 선포합니다.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
“나는 그들을 뭇 민족들에게 보내고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내 영광을 본 적도 없는 먼 섬들에 보내리니 그들은 민족들에게 나의 영광을 알리리라.”
하느님의 영광을 앞당겨 바라보며 살 때, 우리 역시 주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복음 선포의 도구가 되고, 마침내 좁은 문들을 통과하여 주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고 우리에게는 평화가 되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 때 우리 역시 주님의 영광과 평화로 빛나는 존재가 되고 좁은 문들의 통과에도 결정적 도움이 될 것입니다.
둘째, “배워라!”입니다.
배움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갈망은 우리 믿는 이들의 필수 자질입니다. 삶은 시련입니다.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시련이요 영적전쟁입니다. 모든 시련을, 영적전쟁을 배움의 기회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배움의 필수 전제 조건이 바로 겸손입니다. 그러니 모든 시련이나 역경을 비움의 계기로, 겸손의 계기로 삼는 것입니다. 이래야 마음에 상처가 되지 않고 영적성장에 성숙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주님의 전사요 훈련병입니다. 백절불굴의 믿음으로, 칠전팔기의 정신으로 늘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입니다. 늘 초발심의 정신으로 새롭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배움의 기회로, 비움의 기회로, 겸손의 기회로, 성장의 기회로 삼는 이들에게 절망, 원망, 실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다.”
넘어지면 즉시 일어나 다시 시작해야 영적 탄력도 손상되지 않아 좁은 문을 잘 통과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진인사 대천명의 자세로 시련에 온갖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반드시 도와 주십니다. 비단 개인 문제뿐 아니라 강대국의 틈 바구니 사면초가의 좁은 문의 현실에 직면한 대한민국의 살 길이기도 합니다. 다음 주님의 다정하고 고마운 충고를 마음에 새기십시오.
“내 자녀들이여,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
그러니 우리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뎌 내십시오. 지극한 인내로 견뎌내며 노력할 때 주님의 은총으로 좁은 문을 통과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께 훈육을 받지 않는 자녀가 어디 있습니까?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돤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 줍니다. 결코 값싼 요행의 평화도, 값싼 요행의 은총도 없습니다. 이런 극기, 절제, 자제, 인내의 자기훈련 없이는 절대 평화도 없고 좁은 문 통과도 요원합니다.
그러니 형제 자매 여러분,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 길을 달려 가 좁은 문을 통과하십시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는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될 것입니다.
셋째, “사랑하라!”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뿐이 길이 없습니다. 온 마음, 온 목숨, 온 힘, 온 정신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도, 허무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사랑할 때 보이고 보이는 만큼 알게 됩니다.
사랑과 봄과 앎은 함께 갑니다. 사랑의 깨달음이요 사랑의 지혜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사랑이어야 주님 뜻대로 실천하며 살 수 있습니다. 내 좋을 대로 아무리 일 많이해도 주님께는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구원의 문은 닫히고 아무리 두드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하여도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주님은 냉랭히 대답하실 것입니다. 거듭 두드려도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정말 주님을 알았더라면, 주님과의 깊은 인격적 관계의 삶이었다면 이렇게 비극적 짝사랑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모르고 나를 모르는 무지가 얼마나 치명적 악이요 병이요 죄인지 깨닫게 됩니다.
평생 살아도 주님을 모르고 나도 모르는 무지가 좁은 문의 통과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어디에 살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에 항구한 지혜와 자비의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 있는 구원의 좁은 문입니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 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죽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방심하지 말고 주님의 영원한 현역으로, 훈련병으로 사랑 실천에 만전을 다하라는 충고성 경고의 말씀입니다. 하늘 나라 잔칫상에 참석하면 세 사실에 놀란다 합니다. 1.내가 천국에 와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2.천국에 올 거라 기대했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데 놀라고, 3.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사람들이 와 있음에 놀란다 합니다.
하느님 믿는 다고, 세례 받았다고, 교회 생활에 충실했다고, 기도 많이 했다고 구원의 보장이 아닙니다. 하느님만이 아시는 구원이고 참으로 사랑 실천에 항구할 때 천국의 구원은 보장될 것입니다. 누구나에 주어진 좁은 문의 평생과제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좁은 문의 인생여정입니다. 답은 셋입니다.
1.주님을 바라보라!, 2.모든 시련과 역경을 통해 배워라!, 3.주님과 이웃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라! 입니다. 평생 이렇게 살 때 마지막 좁은 문을 통과하여 하늘 나라 천국에 입장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좁은 문을 잘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좁은 문의 통과에 매일의 이 복된 미사은총보다 결정적 도움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아멘.
이스라엘 서쪽 한국 신자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도 이스라엘 사람으로 직접 선교하시던 때는 구약시대였습니다.
하늘 아버지를 예언자들은 잘 전했지만 예수님 시대엔 부패심했지요.
그들이 아버지의 뜻을 너무 변경 개조했기에 야단치고 화내셨습니다.
오죽하면 하늘 아버님이 말씀을 직접 육화시키셨을까 짐작해 봅니다.
구약시대를 비 이스라엘 인들은 더더구나 관심인들 뭐 두었겠습니까.
더구나 시대 다른 한국인들은 가톨릭신자 아니고서는 관심 없습니다.
예수님 덕에 신약시대를 맞아 한국인도 하느님 곁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서쪽 한국 신자들 하느님잔칫상 윗자리에도 앉게 되었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예전에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갔을 때 베들레헴 주님 탄생 기념 성당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곳에 들어가는 입구가 사람 하나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할 만큼 작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원래는 성당 입구에 큰 문이 있었지만 회교도들이 성당 안으로 말을 타고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문을 돌을 쌓아 막아버리고 현재의 좁은 입구만을 남겨 놓았다고 했었습니다. 그렇게 좁은 문으로 들어서면서 눈에 들어온 성전에는 눈부신 한 줄기 빛이 그 탄생 성당 내부를 비추고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예전 우리의 유교문화 안에서 군자는 큰 길을 걸어야 한다고 하면서 ‘군자대로’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 말의 의미는 작은 일에 연연하지 말고 큰일을 할 수 있도록 정진하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의미는 어쩌면 그와는 조금은 반대되는 개념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는 곧 좁은 입구를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모습처럼 진정 겸손한 모습으로 하느님 앞에 나아가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진정 하느님 앞의 겸손한 자의 모습은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에 늘 감사드리며 하느님 안에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고, 그 모습이 바로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한줄기 빛과 같이 우리의 어두운 내 마음의 방의 창문을 넘어 다가오시는 사랑 지극하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그 빛이 우리 안에 드리워질 때 우리는 그 빛을 받아 비로소 눈을 뜨게 되고 그분의 빛을 통해서 눈부시게 빛나는 새로운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주님께서 비추어 주시는 한줄기 생명의 빛을 받고 늘 감사드리면서 주님께서 마련해주시는 매일 매일의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참된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좁은 문: 진정한 회개에 이르는 과정
서동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 잔칫상에서의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좁은 문(루가 13,22-30)과 시련을 견디는 훈육(히브리서 12,5-13)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첫째가 꼴찌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말씀은 어떠한 경우에서도 신앙생활에서 긴장을 유지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선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메타노이아(metanoia) 즉 회개의 열매를 맺기 위해 전제되는 것은 선한 의지, 냉철한 지성, 정화된 기억의 샘을 통하여 좁은 문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영적 성장일 것입니다. 회개는 진정한 순명을 통해 가능하고 궁극적으로 참된 소유 곧 무소유의 소유를 가능하게 합니다.
한마음 한몸 운동본부 이정민 비오 신부님
복음에서 좁은 문이라는 표현이 새삼 우리 삶의 많은 어려움을 생각하게 합니다. 선하든 악하든, 돈이 많든 적든,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에서 어려운 시기를 겪게 마련입니다. 어쩌면 행복함에 미소짓던 시간보다, 아파하며 남몰래 눈물 흘리던 시간이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해, 곧 고통의 바다라고 말하는 불가의 가르침이 참으로 와 닿습니다. 성당에 다니면서 모든 번민과 시련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오 텅빈 주머니가 불룩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어려움을 살아야하는 우리 신앙인들은 독서 히브리서 말씀을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히브 12,7). 주님은 이 시련을 통해 나를 구원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신앙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을 신뢰하는 이는, 고통 중에도, 때로 주저앉아 울면서도, 끝내 인내하고 성장하여 구원의 길로 달려갑니다.
독서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좁은 문은 분명 주님의 영광의 자리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66,18). 좁은 문을 열심히 통과해 가야하는 이유는 주님의 영광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좁은 문을 힘겹게 선택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좁은 문으로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조롱하고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좁은 문은 이사야가 말하듯 우리가 생각도 해보지 못했던 주님의 영광, 부활의 길로 이어졌습니다. 오늘 복음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애타게 기다리며 원하십니다. 바로 우리 모두가 그 누구도 예외없이 당신을 따라 새로운 예루살렘인 하느님 나라에서 이 영광의 순간을 맛보기를요.
우리는 매일매일 선택해야합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선택을 해야겠죠. 하느님의 사랑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그분의 사랑을 거부하시겠습니까. 하느님의 사랑을 믿기로 결심했다면, 부모가 자식에게 감당할 수 없는 벌을 부과하지 않듯이, 하느님 또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십자가를 허락하심을 깨닫게 될것입니다. 자식에게 매를 드는 부모의 가슴이 찢어지듯이, 우리를 시련속에서 더 이끄시기위해 단련시키시는 하느님의 마음 또한 그러함을 깨닫게 됩니다. 광야에서 40년간의 시련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끄신 하느님께서, 모진 십자가 고통 후에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하느님께서, 이제 우리에게 그리 가볍지만은 않은 삶의 십자가를 허락하십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품 안에서 한 번 더 힘내 일어서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일어서봤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분의 사랑 안에서 커왔습니다. 부모의 따뜻한 품 안에서 잘 자라나는 아기는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다 헤아리지 못하지만 부모의 사랑안에서 행복하게 잘 커왔습니다. 주님의 자녀인 우리도 같습니다. 주님의 사랑 매번 다 헤아리지 못했지만 지금껏 잘 커왔습니다. 때로는 그 사랑이 보이지 않아 투정도 부리지만 그래서 너무나 좁아 보여 두려웠던 우리 각자의 좁은문 주님과 함께 다시 힘을 내 활짝 열어 나아가길 함께 기도합니다.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21주일의 말씀들은 선택된 민족이라 자부하는 이스라엘에게는 도전이 되고 이방인들에게는 희망이 되는 말씀들로 채워집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4)
구원받을 사람의 수에 대한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좁은 문"이라는 표현 자체에 답이 거의 들어 있는 듯 느껴집니다. 좁은 문으로는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들어가기 어려우니까요.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루카 13,25)
게다가 그 좁은 문이 때가 되면 닫힌답니다. 그러면 문을 기준으로 내부와 외부가 확연히 구분됩니다. 예수님은 구원 상황을 문 안쪽과 바깥쪽으로 설명하십니다.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27)
뒤늦게 문을 두드리며 주인과의 연관성을 들어 호소하는 이들에게 주인은 매정하게 이야기합니다. 자신들이 나름 주님 주변에서 제법 잘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주인은 "불의한 자"라고 단언하기까지 합니다. 사실 사도 바오로는 의로움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얻어지지 않고 믿음으로써 얻어진다고 했지요. 그러니 "불의한 자"란 사회적 도덕적 견지에서 무도하게 해악을 끼치는 자를 가리키기보다 구원을 가져오신 분을 믿지 않는 자, 바로 믿음을 거부한 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루카 13,29)
그런데 그 좁은 문으로 사방 팔방 온 세상에서 물밀듯 사람들이 밀려든다고 합니다. 율법이 보장하는 자들의 경직된 발걸음을 뱉어내던 좁은 문이 입을 한껏 벌려 새로운 백성을 맞아들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은 처음 초대받은 자들이 아니라 새로운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한 이들로 채워질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예루살렘의 재건을 선포합니다. 먼저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사람들을 모으러 오시고, 그들이 와서 주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이사 66,18 참조) 주님이 그들을 보내시면 "그들은 민족들에게 주님의 영광을 알릴 것"(이사 66,19)이고, 그리하여 그들이 이스라엘 동포를 "주님의 거룩한 산 예루살렘으로 데려올"(이사 66,20)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 중에서 사제와 레위인을 뽑아 주님이 현존하시는 예루살렘 성전의 위엄과 영광이 다시금 이어지게 할 것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은 한 민족의 소유가 아니라 새로운 피로 수혈되고 새로운 잔칫상이 차려질 만민의 도성으로 그 성문을 활짝 열어젖힐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히브 12,6)
제2독서는 주님의 훈육이 자녀로 대하신다는 표시라고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넘어 모든 민족을 당신 자녀로 여기시기에 새로운 길을 제시하시는 겁니다. 기존의 우상과 관습과 질서를 덮치며 밀려오는 도전이야말로 시련의 얼굴로 다가오는 아버지 하느님의 훈육입니다.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길을 달려가십시오."(히브 12,12)
주님이 던지시는 모든 시련과 도전 앞에서 다시 한 번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바른길을 달려야 합니다. 바른길은 좁은 문으로 이르는 길인 동시에 바로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이처럼 오늘의 모든 말씀들은 구원의 확장성과 보편성을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이제 어느 한 민족을 넘어 온 인류에게 구원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 수혜자인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불의를 벗었고, 맥 풀리고 힘 빠진 존재를 추스러 다시금 좁은 문을 향해 달립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기 전에, 온 사방에서 몰려드는 형제 자매들과 함께 바른길을 달려갑시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된다지만 애시당초 늦게 출발한 우리에게 등수보다 중요한 건 새로이 초대받은 우리 모두가 남녀노소, 빈부격차, 신분계급, 직업귀천 따질 것 없이 형제자매라는 자각입니다. 그러니 함께 달려갑시다. 집주인이 문을 닫아 버리기 전에!
저는 그 문앞에서 기다리렵니다. 벗님이 오시면 반가이 인사하고 들여보내고나서 문이 닫히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따라 들어가렵니다. 그러니 어서 오십시오. 사슴처럼 총총 뛰어 오십시오.
좁은 문
이종훈 신부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에 어떤 사람이 다가와 물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 그 당시 율법학자들과 라삐들은 구원의 대상과 그 숫자에 대한 논의를 자주 했었다고 하니 그 질문은 구세주이신 예수님께 한 특별한 것이 아니라 구원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한 라삐에게 던진 질문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다. 요즘말로 해석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해야 의미 있게 살 수 있나? 인생이란? 어떻게 하면 마음이 평화로울까?’ 정도가 될 것 같다. 이런 질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는 입을 모아 이렇게 대답한다. ‘예수님을 따라 그분처럼 살면 된다.’
예수님은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4).”하고 대답하셨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기보다는 모든 사람에게 보내시는 초대인 것 같다. 여기서 좁은 문은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라기보다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곳을 의미하셨던 같다. 그렇지 않다면 유다인뿐만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이 몰려야 그 문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루카 13,29). 예수님을 몰라도 그분처럼 사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 나라에서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오직 예수님만 알고 그분만 들어가실 수 있는 하늘나라의 문을 모든 인류에게 열어 놓으셨다.
그렇게 모든 이에게 알려졌지만 아무나 다 들어갈 수는 없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세례가 입장권이 아니고 성당에서만 지내고 성직자와 수도자와 친분이 있다거나 하느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또 기적 같은 위대한 일을 이루었다고 무조건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만이 들어간다(마태 7,21-22). 예수님의 삶 전체가 곧 하느님의 뜻이었다. 그분은 설교만이 아니라 병자들을 무상으로 치유해주셨고 가난한 이들과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다. 게다가 누가 죄인을 위해 수난과 죽음으로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걸어들어갈 수 있겠는가? 그 죄인을 지독히 사랑하지 않고서는 그럴 수 없다. 우리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 이제 그 문이 우리에게도 열렸고 그 일을 우리도 할 수 있게 초대하셨다. 원수를 사랑하고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사랑 말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하지만 그분을 주님이라고 믿고 따른다고 내 안의 죄로 기울어지는 성향도 함께 사라지지 않는다. 죄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는 없어도 예수님처럼 이웃을 사랑할 수는 있다. 예수님의 희생, 하느님의 보속과 죽음으로 쌓여진 은총은 무한하다. 그렇다고 죄를 피하려는 노력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 또한 하느님을 사랑함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예수님처럼 이웃을 사랑하려고 훨씬 더 많이 노력한다. 주님이 주신 계명은 서로 사랑함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다. 그 좁은 문이 우리와 온 인류에게 열렸다. 그 문은 좁아서 한 사람만 통과할 수 있다. 여럿이 함께 혹은 나를 대신해서 남이 들어갈 수는 없다. 인간적인 의지만으로는 안 되겠지만 세례로 받은 은총이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을 뛰어넘어 하느님을 닮은 이타성으로 옮아가게 도와준다. 하늘나라의 문이 좁아도 다 들어갈 수 있다. 들어가려고 하지 않으면 그 문은 더 좁아 보이고 들어갈 수 없다고 포기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다른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널찍한 길과 넓은 문으로 들어가 멸망하게 된다(마태 7,13).
예수님,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셨던 주님, 이 주어진 짧은 생을 주님처럼 살게 도와주소서. 주님이 지니셨던 하느님 아버지와의 친밀감을 저에게도 주소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아드님께 내려 받은 은총을 저에게 전달해주셔서 무엇이든지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 아멘.
< 이 세상 배불뚝이들에게는 좁은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는 말은 그 뜻이 늘 알 듯 모를 듯합니다.
그렇게 어려운 말이 아닌 것도 같고 그렇다고 이해하기가 그리 쉬운 말이 아닌 것도 같은 거지요.
우선 문이란 어디를 들어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입니다.
그런데 벽이 없이 사방이 트여있다면 문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문이란 이렇듯 벽이나 울타리로 막혀 있음을 전제하며 그렇게 막혀 있는 곳을 통과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문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고, 들어가려는 사람은 많지만 들어가기가 쉽지 않기에 좁은 문인데 여기서 우리는 의문이 생깁니다.
들어가려는 사람은 많다고 주님 말씀하시는데 정말 구원 받으려는 사람이, 그것도 하느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가 구원받으려는 사람이 과연 많을까요?
제 생각에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은 문이 좁아서가 아니라 들어가려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입니다.
지난 목요일 우리는 임금이 혼인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했지만 사람들이 그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는 비유를 들었는데 그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럼에도 오늘 주님께서 구원받으려는 사람이 많다고 하신 것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인 천국이 아니라 자기천국이거나 이 세상 천국인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고 그런 사람이 많아다는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에 어떤 부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주님을 찾아 왔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니 돌아간 얘기를 들었는데 이 부자처럼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사는 그런 천국인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강의 때 자주 이런 고약한 질문을 던집니다.
천국 가기 원하시는 분 있으시면 손을 들어보시라고. 그런 다음 지금 당장 가기를 원하시는 분은 얼마나 되는지 손 들어보시라고. 그러면 처음에는 다 손을 드는데 두 번째는 손 든 분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다 천국 가고 싶어 하지만 지금 당장 천국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으니 이 말은 지금 죽는 것은 싫고 어쩔 수없이 죽게 되면 지옥 가는 것보다 천국 가겠다는 거지요.
이런 뜻에서 천국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들어가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 것이고 이런 뜻에서 천국 문, 구원의 문이 좁은 겁니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인 천국은 막혀 있지도 않고 그래서 문이 없습니다.
오늘 독서 이사야서가 노래하듯 주님의 산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에게 열려있고 주님은 모두 그리로 데려가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천국은 좁지 않고 그래서 천국 문도 좁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도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고 하셨으니 공간이 좁아서 제한을 두시고 그래서 문이 좁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을 너무 좋아하고 이 세상 배불뚝이들이 되어서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고 들어가려 해도 문이 좁은 겁니다.
힘없는 사람들에게 온갖 나쁜 짓을 하여 자기 배를 불리며 이 세상을 자기들의 천국으로 만들려는 불의한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인 천국에 들어오려고도 하지 않겠지만 설사 들어오려고 한다 해도 너무 뚱뚱해서 천국의 좁은 문은 통과불가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기도가 마음에 와 닿습니다.
“하느님, 신자들을 한마음 한뜻이 되게 하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가르침을 사랑하고 그 약속을 갈망하며 모든 것이 변하는 이 세상에서도 참 기쁨이 있는 곳에 마음을 두게 하소서.”
참 기쁨이 있는 곳에 마음만 두면 문은 좁지 않습니다.
구원을 위한 과제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 구원에 대한 질문은 예수님 시대나 지금 우리의 시대에나 어려운 문제임은 틀림없다. 오늘 복음은 당시의 신자들과 우리 모두가 구원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라고 권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가 보장되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복음: 루카 13,22-30: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루카복음을 보면 9,51~19,28까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동안의 말씀과 행적들을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신이 십자가의 길을 향해 가시고, 이제는 다시 돌아오시지 못할 수 있는 분의 절박한 가르침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23절)라는 예수님께 드린 질문은 보다 넓은 의미로 해석된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유다인들은 유다인이라는 사실마 가지고도 장차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랍비 메이르(Meir)는 이스라엘에 살고, 거룩한 언어를 말하며, 신앙고백문인 셰마(Shema) 기도를 아침저녁으로 암송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자녀로 간주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아주 소수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정말 그럴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생각에 대해 의도적으로 멀리 하신다. 즉 ‘구원받을 사람이’ 적을 것이라고도 하시지 않고, 많다고도 하시지 않는다. 다만 구원에로 나아갈 결단을 촉구하시면서 상징적 개념으로서 절박함을 말씀하신다. 문제는 구원받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이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24절)고 하신다.
만일 어떤 사람들이 주인이 문을 닫아버려 문밖에 있게 된다면, 그것은 집주인이 갑자기 문을 닫아걸기로 결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과 같은 민족이고 또 같은 동네 사람이라는 특권을 내세우며 환상에 빠져 선행에 힘쓰지 않ㄷ았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는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26절)
선을 행한 사람 외에는 아무도 그리스도 앞에서 특권을 누릴 사람이 없다. 예수님께서 모르겠다고 선언하시는 그 “불의를 일삼는 자들”(27절; 시편 6,8 참조)과 정 반대의 입장에 있는 사람만이 그 특권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신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30절)
오늘 복음 전체를 보면 유다인들이 자신들의 특권, 즉 율법, 할례, 선민사상을 자랑하며 뽐내던 그 ‘보증’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같다. 여기서 루카는 이 이야기를 지금 우리에게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받았다거나, 영성체를 한다거나 교회 안에서 어떤 권한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서 그에 따르는 의무와 자기 고유의 사명을 수행하여 완수해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구원받을 사람이 아주 적어 보이지만, 그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음을 말씀하신다.“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서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29절) 하늘 나라는 특권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늘 나라를 위한 우리의 결단과 선행의 실천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은총을 통해 인도해 주시고 구원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질문을 했던 사람처럼 하느님 나라를 선망의 대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차지해야 하고 누려야 하는 것이다. 그 나라에서는 뜻밖의 일이 벌어질 것이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30절) 이것은 모든 신앙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 하느님 나라는 특권이 아니라, 선행을 통해 들어간다.
어떤 특정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봉사하는 교회와 같은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만이 분명 이사야가, 바벨탑으로 상징되어 왔던 그 분열의 모습과 대립되는 종말의 시대에 이루어질 구세주의 보편성과 형제적 사랑을 그리며 보여주었던(창세 10장; 이사 66,19 참조) 새로운 사랑의 ‘바벨탑’을 건설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이러한 사명감으로 항구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루카 13, 30)
("And behold, those who are last will be first, and those who are first will be last.”)
김웅태 신부님
+찬미예수님!
오늘도 주님의 축복 함께 하십시오.
오늘 복음(루카 13, 22~30)에서 예수님께서는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루카 13, 30)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동기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면서,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니시면서 가르치실 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 23) 하는 물음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루카 13, 24)는 말씀을 하시고 나서, 집주인이 언제 오더라도 성실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도록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세상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성실한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예언자들이 있는 하느님 나라에 있게 되지만, 불성실한 사람은 쫓겨나 울면서 이를 갈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루카 13, 25~28)
그리고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서 하느님 나라 잔치 상에 자리 잡을 것인데,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지요 (루카 13, 29~30)
구원받는다는 것은 결국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구원받기 위해서는 성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꾸준히 항구 하게 성실한 삶을 살아야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루카 13, 30) 라고 말씀을 하신 것은 현재 첫째로 사는 사람들, 어떤 면에서 볼 때, 성공한 사람일 수 있고, 성실한 삶과 노력으로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현세에서 높은 지위와 명예와 또 재산도 따르게 되지요. 성실한 삶의 보상이라고 보겠습니다.
그런 것이 하늘나라까지 이어지기 위해서는 죽을 때까지 그리고 죽어서도 성실한 삶으로 인정받아야만 하늘나라에서도 첫째가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현직에 있을 때, 성실한 삶을 살다가 은퇴 이후 노후의 삶이 불성실하다면 성실한 삶으로 삶을 마치는 것이 아니지요. 그것은 결국 현직에 있을 때 성실한 삶으로 인정은 받았지만 끝까지 항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늘나라에서는 첫째가는 삶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꼴찌라고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불성실한 삶을 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지 못하고 성실한 삶이 되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 일 수 있지요. 그러나 그들이 나중에 회개해서 성실한 삶으로 자신의 삶을 마친다면, 누가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보시기 때문에, 그 사람을 높이 올려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 사람의 마음을 보시고 그 사람의 참된 의도를 보시기 때문에 사람들의 겉모습만 보는 판단, 그로 인한 평가가 아니라, 사람 됨됨이를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를 하늘나라에서 높이 인정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모르는 성실히 삶을 산 많은 사람들이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와서 하느님 나라의 잔치 상에 자리 잡을 것입니다. (루카 13, 29)
그러기 때문에 지금 첫째가는 사람이든 지금 꼴찌로 달리고 있는 사람이든 끝까지 성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주고 계시다고 보겠습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현재 첫째가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 나는 현재 꼴찌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 나는 하늘나라에서 어떤 삶으로 인정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그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최민석 신부님
마을길을 걷다보면 꼬부라진 길모퉁이가 나오고 그 길모퉁이를 지나면 마을 길 위로 뚫린 고속도로에서 쌩쌩 지나는 자동차 소리 외면한 채 그냥 느린 걸음으로 일선 마을 낙동강 옛 다리를 건넌다. 은쟁반의 구슬처럼 빛나는 물결에 취하여 걷다보면 어느새 시원한 푸른 들판이 나를 환영한다.
다시 바람에 출렁이는 비단 빛 찬란한 들판을 지나면 이웃 마을 느티나무가 또 나를 맞이한다. 가던 길 멈추고 마을 길 느티나무 아래서 잠시 쉬어 간다. 뜨거운 여름날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서 있는 느티나무는,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을 쉬어가게 한다.
느티나무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거기에 그렇게 서 있는 게 아니다. 느티나무는 그늘을 드리우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느티나무니까 느티나무로 있는 것일 따름이다. 무심코 생존! 그것이 곧 자유요 사랑이요 하늘 길이다. 산굽이 돌아 흐르는 물은 흐르려고 해서 흐르는 것 아니요 마을 위에 떠 있는 구름은 떠 있으려고 떠 있는 게 아니다.
구름 한 점 떠 있어 너른 하늘의 풍경이 달라진다. 양털구름 하나 있어 하늘이 밝다. 좋은 생각 하나를 떠올리면 가슴속 하늘이 훤하다. 방금 전 파란 가을하늘에 평화롭게 가만히 떠 있던 흰 구름 하나 잠깐 후 다시 보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느새 지나가고 기억에만 남아 있다. 내 목숨의 날들도 그렇게 가고 있겠지. 유유히 흐르는 저 말없는 구름 뭔가 움켜쥐려 안달했던 나의 고단한 손 이제 사르르 펼쳐야 하리. 가슴속 애끓는 애증(愛憎)의 그림자도 이제 가만히 내려놓아야 하리.
하느님은 천지 만물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면서 모든 것을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하늘이 하시는 바를 돕는 일이 된다. 자기를 부인하여 스스로 십자가에 죽지 않고서 예수의 뒤를 따를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닐 때 비로소 나는 모든 것이 된다.
텅 비어 있는 나를 가득 채우고 있는 그 어떤 것이 바로 모든 것인 까닭이다. 사랑이신 하느님이 하시도록 나를 내어 맡기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바람과 같아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과거도 미래도 있기는 있지만 모른다. 그러기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제의 잘못이나 영화가 오늘을 삼키지 못하고 내일에 대한 걱정이나 기대가 오늘을 일그러뜨리지 못한다. 다만 있는 것은 오늘, 그의 과거와 미래를 함께 살리거나 죽일 수 있는 영원한 오늘 뿐이다. 성인은 오직 현재를 살고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사는 사람이요, 그 삶은 그의 ‘나’가 완전히 죽는 순간에 비롯되는 것이다.
내가 산책길을 걷는데 문득 내 내면에서 들리는 한 소리가 있었다. 그 말씀은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시다. 나를 따르란 말이다. 못 알아들었느냐. 내 뒤에 서서 나를 따라오란 말이다. 앞장은 내가 선다. 제발 내 앞에 서서 내 길을 방해하지 말라.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 24-25)
자신의 말을 앞세우지 말고 중뿔나게 우쭐거리지 말고 어른들이 일러 주는 대로 잘 순종하라는 말씀은 어머니를 대신하여 나를 키워주시던 외할머니가 하시던 말씀이다. 어릴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씀이 나이 예순이 다 되어 같은 말씀을 다시 듣는구나. 아아, 나에게는 그것이 평생을 두고 풀어야 할 숙제였더란 말인가.
노자는 세 가지 보물을 지녔거니와 하나는 사랑이요, 하나는 검소함이요, 하나는 감시 세상을 앞장서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이제 조금씩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순명의 길, 무아의 길이었던 것이다. 그 감당하기 어려운 나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길을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며 오늘도 걸어야 할 길을 걸을 뿐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한재호 루카 신부님
베들레헴에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자리 위에 세워진 주님 탄생 성당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당을 출입하는 문의 높이는 겨우 1.2미터밖에 되지 않습니다. 거룩한 장소에 말을 타고 함부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 이곳에 들어오는 이는 누구든지 머리를 숙이도록 하기 위해 12세기 십자군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 문을 두고 ‘겸손의 문’ 혹은 ‘좁은 문’이라고 부릅니다. 생각해보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같이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은 그분께서 얼마나 당신 자신을 낮추셨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니 이렇듯 겸손하신 하느님의 탄생을 경배하기 위해 찾아가는 이들도 고개를 숙이고 그곳에 들어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요. 오늘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을 새롭게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좁은 문은 단순히 구원받을 숫자가 많고 적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자기 자신을 얼마나 낮추는지의 여부가 구원을 결정짓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는 말씀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어린이처럼 작은 이가 되어야 구원의 문을 통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덕목이 무엇이냐’는 제자의 물음에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어 하느님과 타인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바다가 모든 것을 품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과 같지 않은 하느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고, 우리와 맞지 않는 타인을 기쁘게 포용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새 세상의 윤곽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에서(N. 39)
우리는 땅과 인류의 완성 시기를 알지 못한다. 우주 변혁의 방법도 모른다. 죄로 이지러진 현세의 모습은 분명 지나간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처소와 새로운 땅을 마련하실 것이며, 거기서는 정의가 지배할 것이고, 그 행복은 인간들 마음속에서 치솟는 평화의 온갖 소망을 충족시키고 넘치리라는 가르침을 우리는 받고 있다. 그때에 죽음은 패배하고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할 것이며 약하고 썩을 것으로 심겨졌던 것이 썩지 않는 힘을 입을 것이다. 사랑과 사랑의 업적은 남을 것이며, 하느님이 인간을 위하여 만드신 피조물 전체가 허영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될 것이다.
인간이 온 세상을 다 얻을지라도 자신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경고를 우리는 듣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땅에 대한 기대가 현재의 이 땅을 개발하려는 노력을 약화시켜서는 안될 것이고 오히려 그런 의욕을 자극시켜야 할 것이다. 이 지상에서 이미 새로운 세대를 어느 정도 암시해 주는 새로운 인류 공동체가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세적 진보를 그리스도 왕국의 발전과 분명히 구별해야 하겠지만 그것이 인간 사회의 질서를 개선하는 데에 이바지하고 있는 한,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도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과 형제적 친교와 자유와 같은 인간의 본성과 노력으로 얻어진 훌륭한 결실을 전부다 주님의 성령 안에서 주님의 계명을 따라 널리 지상에 전파한 후에, 모든 때를 씻어버리고 광채 찬란하게 변모된 그것들을 다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당신 성부께 “보편되고 영원한 나라를” 돌려 드릴 때이다. 그 나라는 “진리와 생명의 나라요,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요,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일 것이다. 이 나라는 이미 현세에 신비롭게 현존하고 있으나 주님이 오실 때에 완성될 것이다.
신앙이라는 '좁은문'
한민택 신부님
예루살렘으로 향한 여행길은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는 법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말씀하시며,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에 이르는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걸까요?
예수님께서 비유에서 두 번에 걸쳐 하신 말씀에서 실마리를 찾아봅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에서 먹고 마시고 당신의 가르침을 들은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분을 따름이며, 다만 육체적으로 그분의 뒤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맺고 그분을 알아가며 그분의 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걷기를, 길을 걸으며 함께 당신의 생각을 나누기를, 당신의 고민, 당신이 꾸는 꿈과 희망을 함께 나누기를 바라십니다. 나눔과 친교를 통해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그분의 가장 큰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단순히 ‘종교인’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살아 계신 하느님 아버지와 생생한 인격적 관계를 맺고, 자유로운 자녀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 사랑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자녀로서의 관계를 맺기를,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분에게서 든든함과 위안을 얻기를 바라십니다. 힘들고 험난한 세상 여정을 함께 걸으며 아버지께 의탁하고 미래를 그분께 내어 맡길 수 있는 신앙의 자세, 삶의 자세를 얻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신앙의 길이 ‘좁은 문’인 이유는, 그분을 닮아가는 길이며, 변화가 동반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형식적인 겉치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그 변화란 자신을 깎고 버리고 포기하고 내어놓는 것이기에, 자녀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는 것이기에 시련을 거쳐야 하는 쉽지 않은 과정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말하는 듯합니다. 주일 미사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최소한의 의무를 지키는 것만으로는, 형식적 겉치레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입니다.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 안으로 들어오라고 초대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여기서 다시 시작하기를 바라십니다. 지금 당장 스스로 찾아 나서기를, 자신의 길을 찾고 궁리하고 모색하기를 말입니다. 그 길은 분명 ‘좁은 길’이며 험난한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길이기에, 자신을 포기하고 그분께 맡겨드릴 수 있는 길이기에,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찬 길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는 우리에게 신앙의 위대함을 증언하기를 기대합니다. 과학과 기술에서, 경제와 정치에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 얼마나 위대하고 가치 있는 길인지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발견하지 못한 희망을 이야기하기 위해 우리는 피상적인 신앙, 형식적인 겉치레를 뒤로하고, 고개를 들고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좁은 문
서강휘 신부님
호리지차 천리지류(毫釐之差 千里之謬). 털끝만큼의 차이가 돌이킬 수 없는 착오를 낳는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차이인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가갈 수 없을 만큼의 거리로 벌어진다는 뜻이다.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은 그른 것이지 적당히 옳고 적당히 그른 것이란 없다. 애초에 털끝의 차이라 해도 차이는 차이이며 극복할 수 없는 간격도 거기서 비롯된다. 그러니 첫발을 어떻게 떼느냐가 그 이후의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마음에 거리끼는 미세한 가책을 무시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루카 13,26) 오늘 복음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 시도하던 자들이 집주인에게 했던 말이다. 언뜻 보면 이들은 항상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던 사람들처럼 보인다. 외견상 주님과의 거리가 매우 가까워 잘 지내는 듯 보이지만 어딘가 서먹함과 거리감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딱히 뭐라 비난할 구실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다음 구절에서 주인은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27)
그들이 조금 부족하다 해도 늘 함께 있었던 사람들에게 하는 말 치고는 그 비난의 수위가 높다. 하지만 그들의 어정쩡하고 방관자적인 삶은 시작부터 이러한 결과를 이미 내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주인과 함께 있기는 했지만 한 번도 주인의 삶에 깊이 동참하지 않았던 자들이다. 주님의 기쁨과 슬픔을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기만 했고, 그래서 타인으로부터 비난받지 않을 정도로만 살았던 사람들. 처음의 미온적 태도가 비록 깃털처럼 가벼운 것이었을지라도 마지막에 가서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주인과 항상 함께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그들이 불의를 일삼는 자들이라 비난받으며 거부된 이유는 무엇일까.
구원받을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 질문한 그는 아마도 유다인이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만으로 구원될 수 있다는 선민의식(選民意識)에 젖어 있던 사람이다. 그들에게 구원이란 이스라엘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공허한 이념의 산물일 뿐이다. 이러한 이분법은 유사 이래 계속돼 온 이데올로기다.
귀족인가 아니면 평민인가.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정략적 결혼과 인간적 욕망, 위선, 거짓을 감추기 위한 몇 가지 교양 있는 태도를 익히는 것뿐이다. 구약의 후계자라 자처한 바리사이들이 그토록 율법을 강조한 것도 같은 이유다. 자신의 인생을 진심으로 책임지고 한발 한발 성실하게 걸어가는 것을 생략하고 글자와 이념에 숨어 사는 삶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반사되는 우아함만으로 내면의 위선과 욕망을 감추는 정도가 그들에게 최선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역시 적당한 선에서 단절된다. 상대방의 아픔과 슬픔에 진정으로 동참하지 못하고 고고한 자세로 바라보거나 점잖게 훈계하려 들 뿐 참으로 나누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이 속해 있던 자기들만의 리그에 할당된 영토는 너무나도 협소하다. 그들은 정말 어디에서 온 ‘사람’들일까. 그들이 사는 세계를 대다수의 평민들은 알지 못한다. 주인의 질문이기도 하다.
스스로 선택됐다는 우월감으로 좁은 문에 서 있던 자들은 그 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들에게 그렇게나 좁았던 문이 어느새 모든 이에게 활짝 열려 있는 대문으로 변모하는 아이러니를 오늘 복음에서 만난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루카 13,29)
사방(四方)에서 몰려든 사람들이란 선민의식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던 이스라엘에게서 배척된 이들이다. 소위 이방인이라 불리는 사람들.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잡기 위해 어떤 수고를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자신들의 출신 성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잔치에 초대됐다는 것이며 그들은 그것에 응답했다는 사실이다. 이제 하느님 나라에는 특정한 자격 요건이 필요하지 않다.
제1독서에서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이사 66,18)라고 한 주님의 말씀처럼 모든 이에게 하늘나라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그런데도 ‘자신들만’ 초대됐다고 여기는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위해 그 문을 스스로 좁게 만들었다. 이것이 그들이 결국 하느님 나라 잔치에 참여할 수 없게 만든 원인이다. 모든 이에게 열려 있던 문을 좁은 문으로 만든 자들은 하느님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라고 하신 말은 하늘나라의 문이 정말로 좁다는 말이라기보다 너희들 스스로 만들어 놓은 그 좁은 문으로는 하늘나라에 들어 올 수 없다는 경고에 더 가깝다.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신분 상승을 어렵게 만든 귀족적 혈연이나 우리사회의 상류계급이 세워 놓은 계층 바리케이드는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좁은 문이다. 하느님 나라에 초대된 수많은 이방인들과 좁은 문을 통과하기 녹록지 않은 이스라엘의 차이는 아주 미미한 것이었다. 삶으로 동참할 것인가 아니면 삶을 이념과 계급에 가둬 둘 것인가의 차이다.
특권 계층에 속해 있다는 이념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할 뿐 아니라 행복하고 인간적인 삶조차도 보장해 줄 수 없다. 세련되지 않고 투박하더라도 진지하게 일궈 나가는 매일의 삶 안에 구원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소위 좋은 가문과 배경을 바탕으로 성공한 사람의 맵시보다 햇볕에 그을린 어머니의 얼굴과 노동으로 거칠어진 아버지의 손마디가 더 아름답게 여겨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삶이 하느님 보시기에도 그런 것이다. 계급사다리의 상층부라고해서 그것이 하늘과 가까운 것도 아니요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른 사람이 그 위치에 오르지 못하게 한 좁은 문이 스스로를 가둘 것이다. 물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으로 그 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작은 차이가 천 리나 되는 거리를 만드는 것이라면 그 거리를 좁히는 것도 작은 변화에서 시작된다. 회개를 통한 용서의 은총은 우리에게 허락된 넓은 문이다.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인생은 짧고 하느님 나라의 시간은 길다.
한주일을 시작하며
최승정 신부님
오늘의 첫째 독서는 이사야 예언서 66장의 말, 이사야 예언서의 마지막 장의 말입니다. 첫째 독서 말을 읽으며 ‘광’이라는 단어에 주목하게 됩니다. 구약의 창조 신학은 모든 피조물의 존재 이유가 바 로 창조주의 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 따 라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도 이스라엘을 통해 하느님 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이스라 엘이 바빌론에서 유배를 한 이유는 하느님 백성이 그 광 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에서 실현하게 될 하느님 나라를 통해 하느님 광이 최종적으로 드러나 고, 온 세상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그 광을 보 게 될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 예언자는 자신의 예언서를 마 무리합니다. 물론 그 예언은 단지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예고가 아니라 그들의 현재에 대한 예언자의 요청으로 알 아들어야 합니다. “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로 시작 하는 교회의 광송에서 예언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메아리 치고 있습니다.
둘째 독서에서는 ‘훈육’이라는 단어가 눈에 띕니다. 이는 그리스어 파이데이아(ươƩƤƥƟơ)의 번역인데, 이는 아이의 올바 른 성장을 위한 교육 또는 훈련을 뜻합니다. 히브리서의 저 자는 (헬레니즘의 파이데이아 개념을 차용하여) 자신의 공동체에 닥친
시련을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훈육으로 해석합니다. 그리 고 그는 그 시련이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바 른길’을 달려가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오늘의 복음은 ‘문’이라는 문학적 표상을 사용합니다. 예 수님은 “구원받을 사람이 적습니까?”라는 질문에 “좁은 문 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그 대 답은 그 문을 통해 주님의 집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이 많 겠지만 그들이 그곳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무서운 말 으로 이어집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의를 일삼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 말에 나온 신학적 개념과 문학적 표상을 한데 묶어 요약해 본다면, 하느님의 ‘훈육’에 따라 ‘바른길’을 달려가 그분의 ‘광’을 드러냄으로써 그분 나라 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한 문장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 니다. 어쩌면 신앙인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이 문장이 삶의 순간순간 무척이나 무거운 말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직 우리 교회의 믿음이 온전히 성장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 리고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한 주일의 삶을 시작하 며 다시 한번 호흡을 가다듬어야 할 이유이겠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김두찬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사람들에게 비유를 들어 가르치시 고 기적을 행하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시며 회개에로 초대하십니다. 그런데 바리사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치유하시는 것에 분개합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회개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를 들었으며, 죄에서 구원받기 위하여 자신들이 무 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예수님께 묻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구원에 대한 물음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르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3-24)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겠느냐’는 질문에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지’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답변은 구원받을 사람들의 수효보다 어떻게 해서 구원받을 것인지가 더 중요함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는 것은 근육과 힘의 열렬한 발휘를 뜻합니다. 즉, 모여든 많은 사람들이 한 번에 들어갈 수 있는 도시의 커다란 문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근육과 힘을 발휘하여 한 사람이 겨 우 들어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행동입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하여 좁은 문 으로 들어가는 여정이 바로 회개라는 것을 일깨워 주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회개의 실천적인 삶을 성인의 가르침에서 배워봅시다. “믿음을 견고히 세워 주고 신심을 변함없이 유지해 주며 덕행을 지속시켜 주는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기도와 단식과 자선이 바로 그것입니다. 기도는 문을 두드리고 단식은 청하며 자선은 받습니다. 기도, 단식 그리고 자선, 이 세 가지는 한 묶음이고 서로 서로가 의지하고 있습니다. 단식은 기도의 영혼이고 자선은 단식의 생명입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떨어져서는 제대로 작용할 수 없으므로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이는 단식 도 해야 하며 단식하는 이는 역시 자선도 베풀어야 합니다.”(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주교) 오늘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기도하는 삶’, ‘ 단식하는 삶’, ‘자선을 베푸는 삶’으로 회개의 여정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 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히브 12,6)
새롭게 시작되는 한 주간, 성모님의 보살핌과 주님의 축복으로 기쁨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만천성당 진입로
조철희 신부님
네비게이션을 찍고 만천성당에 처음으로 오시는 분이시라면 진입로가 어디인지 몰라 한참을 헤매실 수도 있습니다. 혹시 택시를 타고 오신다면 기사님이 여러 분에게 짜증을 낼지도 모릅니다. 지금 만천성당은 성당에 들어서는 초입에 예배당 이 들어서면서 성당으로 오는 입구가 예배당 건물과 대형 문구사 건물 사이의 아주 작은 공간, 승용차 하나가 겨우 통과할 수 있는 매우 좁은 틈만 남게 되었습니다. 가뜩이나 우리 만천성당은 올라오는 도로가 여러 명이 소유한 개인사유지인 이 유로 포장을 할 수 없는 비포장 길이어서 진입로 문제로 많은 고민과 불편함이 있던 터라 성당 오는 길은 더 험난한 길이 되어버렸습니다. 성당에 거의 도착하셔서 네비 게이션이 잘못 되었나하며 더 넓은 입구를 살펴보는 분이 계신데, 안타깝지만 넓은 입구는 없습니다. 성당에 들어오는 진입로는 차 하나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아주 좁은 길, 그길로 들어오시 면 됩니다. 조금만 참고 인내하고 그 좁은 입구를 통과하십시오. 그리고 불평하지 말고 오늘 복음 예수님 의 이 말씀을 묵상하고 올라오십시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13,24) 조금만 힘쓰고 일단 들어오십시오, 그 좁은 입구를 지나서 울퉁불퉁 길을 통과하면 나무와 산, 그리고 꽃들이 만발한 마치 천국처럼 넓고 아름답게 펼쳐진 만천성당에 드디어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 도 달하는 길도 아마 이러한 길일 것입니다. 들어가는 입구는 눈에 보기에 작고 좁기만 하고 자갈밭과 십자가 로 가득 차 있어 들어가기에 마음이 별로 내키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좁고 불편한 길을 조금만 감수 하고 힘써 올라온다면 좁은 길은 금방 사라지고 끝없는 낙원과 기쁨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좁 은 문으로 통과해 인내로 시련을 이겨내고 천국에 도착하기를 힘쓰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 나 쉽게 통과할 수 있는 커다란 문을 통과해 자갈도 없으며 장애물도 이미 제거된 편한 길을 가고자 원합 니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길의 마지막에는 허무하게도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좁은 진입로이지만 불평하지 마시고 일단 좁은 입구를 잘 통과해서 만천성당에 잘 도착하시길 바랍니 다. 또한 천국에 가고자 하신다면 좁은 문이라고 겁먹지 말고 일단 용기 내어 천국에 들어서는 입구에 잘 들어오시길 바랍니다. 조금만 힘쓰면 됩니다. 처음에 들어갈 때 아주 조금만 불편하면 됩니다. 그 불편함 은 길지 않을 것입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처음에는 인내의 길이고 시련의 길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인내는 열매가 되고 시련은 은총으로 변화됩니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여기 두 개의 진입로가 있습니다. 하나는 편하고 넓은 길 그래서 첫째로 출발하지만 가다보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길. 또 하나는 좁고 불편해서 힘들게 들어서서 출발하지만 결국 ‘하늘나라의 잔칫상’(루카 13,29 참조)을 차지하는 길. 여러분은 어느 진입로로 들어서시겠습니까?
하느님 나라 들어가기
강윤철 신부님
봄·여름·가을·겨울 4계절 가운데서 천당에 들어가기 쉬운 계절은 언제일까요?
답은 여름입니다. 더워서 문이란 문은 모두 열어놓고 있어서 그렇다는 아재 개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에어컨 때문에 문과 모든 창문까지 닫고 사니 옛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이 적을까 염려하지 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고 이르셨습니다.(루카 13,24)
베들레헴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동굴 위를 제대로 삼고 웅대한 성당이 세워져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모후 헬레나 성녀가 봉헌한 ‘예수 성탄 성당’입니다.
그런데 입구 문이 높이 1m, 너비 40cm로 아주 작습니다.
처음에는 크게 지었는데 언젠가 페르시아 군대가 말을 탄 채 들어온 후에 그렇게 막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기를 낮추고,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교훈이 담겼습니다.
구원받기 위해 겸손한 태도로 의롭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불의가 곳곳에서 예사로운 게 현실입니다.
신자들이 의로움을 실천하며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기는 만만치 않습니다.
많은 시련도 있습니다. 구원의 문은 참으로 좁다 하겠습니다.
불의를 멀리하고 시련을 하느님 사랑의 훈육으로 여겨 잘 견디어 냅시다.
나중에는 그것으로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히브 12,11)
올림픽 등 각종 운동 경기에서 메달을 따고 감격에 차 눈물로 환호하는 장면을 종종 봅니다.
그 메달은 엄청난 땀의 결실입니다. 운동선수, 농부, 사업가, 학자, 예술가 등이 피나는 노력으로 좋은 성과를 냅니다.
천국 메달을 따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어떠해야 할까요?
한편, 세례받고 교우들과 어울려 먹고 마신다고, 또 성경과 교리 말씀을 들었다고, 또는 교회에서 어떤 직책을 맡았다고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까? 교회를 사교의 장소나 사회단체처럼 여긴다면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루카 13,26-27)
복음으로 나의 삶을 변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회를 복음으로 변화시켜, 이 사회가 나날이 하느님 나라가 되게 해야 합니다.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러나 세례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애써 찾아야 할 좁은 문이 이 길입니다.
아멘.
서공석 신부님
“많은 사람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 하여라.”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집주인이 문을 닫아버리면, 열어달라고 애원해도 소용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집주인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은 그들이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문을 열어 달라는 사람들은 주인을 안다고 주장합니다. 주인과 함께 먹고 마셨고, 자기들의 동네에서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주인은 그 사람들을 모른다고 말합니다. 주인이 사람을 알아보는 기준은 그 사람이 자기를 보았거나, 함께 먹고 마신 사실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사람의 삶의 빛깔을 보고, 그 사람의 기원, 곧 어디서 온 사람인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삶의 빛깔이 같은 사람들은 “사방에서 모여들 것”이라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인류역사가 있으면서부터 사람들은 신(神)에 대해 줄곧 상상하였습니다. 유능한 인간이 행세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신을 모든 일에 유능한 분, 그래서 전능(全能)한 존재라고 말하였습니다. 높은 사람이 군림하는 것을 보고 신을 높은 분, 곧 지고(至高)한 존재라고 말하였습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자가 법을 주고 그 법에 따라 심판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신이 법을 주고, 그 법을 따라 심판하여, 잘 지킨 사람에게 상을 주고 못 지킨 사람에게는 벌을 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높고 강한 사람에게 사람들이 공물(供物)을 바치는 것을 보고, 신에게도 제물(祭物)을 봉헌해야 한다고 상상하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런 신을 가르치면서 신의 이름으로 법을 주고 제물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은 사람들이 상상한 그런 신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자비롭고 사랑하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빛을 따라 사는 사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실천이 있는 삶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고, 그 삶을 사는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생명을 그 본연의 빛깔 따라 사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분을 맞아들이는 이들은...혈통에서나 육욕에서나 사람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이들이다.”(1, 12-13). 예수를 따라 사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을 동기로 실천하는 삶의 빛깔이 있다는 말입니다.
2세기 어느 신앙인은 하느님에게서 난 생명이 하는 실천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습니다. “이웃을 탄압하며 약한 자를 짓밟고 재산을 축적하며, 아랫사람들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행위 등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도 않고, 하느님을 본받는 행위도 아닙니다. 이웃의 짐을 대신 지는 자, 이웃에게 베푸는 자, 자기가 받은 것을 이웃이 필요로 할 때 기꺼이 내어주는 자, 이런 사람은 그 혜택을 받는 사람 앞에서 하느님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진실로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입니다.”(디오그네투스에게).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실천이 삶의 어떤 빛깔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한 글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시듯이 우리도 베풀어서, 하느님이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사랑해서, 하느님의 일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있게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이 사람을 알아보는 기준도 사람의 삶의 빛깔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인류가 상상해온 신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높고 지엄하신 하느님이 계시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서, 그 아들과 교섭을 잘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아내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 곧 하느님의 가치관을 따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사랑과 자비가 우리의 삶 안에 살아 있도록 하기 위해 십자가, 곧 일상생활의 불편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재물과 지위를 얻고, 건강을 얻는 것을 구원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많은 사람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노력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수의 사람만이 그 의미를 알아듣고, 찾을 수 있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좁은 문이라 불렸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재물과 지위에 대한 애착을 버리는 일은 아무나 알아듣고 행할 수 있는 경지(境地)가 아닙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많은 사람이 들어가는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입니다.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일은 자기 스스로를 잃을 줄 아는 소수의 사람에게만 열려 있는 좁은 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재물과 지위를 하느님과 연계하여 생각합니다. 그것을 얻으면, 하느님이 우리 편에 계신다고 믿습니다. 그것을 잃으면, 하느님이 떠나셨다고 믿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좁은 문’은 재물과 지위를 하느님과 혼동하지 않는 사람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사랑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인간이면, 모두가 탐하는 재물과 기적으로 통하는 문은 넓은 문입니다.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면서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된 수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신앙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위해 스스로 희생하면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빛깔을 가진 생명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생명을 살자는 운동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도 사랑하고 자비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를 배워 실천합니다. 그런 사람이 오늘 복음이 말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에게 빌붙어서 기적과 재물을 얻어내어 잘 살아보겠다는 수작이 아닙니다. 사랑과 자비는 자기 스스로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사랑과 자비를 필요로 하는 이웃을 기준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그것은 득(得)이 아니라 실(失)을 갖다 주는 길입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의미와 보람을 깨닫는, 좁은 문이 열어주는 길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모든 사람을 위해 열려 있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를 잃을 줄 아는 사람들의 길입니다. 득(得)에 목숨을 걸지 않고, 실(失)을 두려워하지 않는 좁은 문이 열어주는 길입니다.
한 주일을 시작하며
최승정 베네딕토 신부님
오늘의 첫째 독서는 이사야 예언서 66장의 말씀, 이사야 예언서의 마지막 장의 말씀입니다.
첫째 독서 말씀을 읽으며 ‘영광’이라는 단어에 주목하게 됩니다.
구약의 창조 신학은 모든 피조물의 존재 이유가 바로 창조주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도 이스라엘을 통해 하느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바빌론에서 유배를 한 이유는 하느님 백성이 그 영광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에서 실현하게 될 하느님 나라를 통해 하느님 영광이 최종적으로 드러나고, 온 세상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그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 예언자는 자신의 예언서를 마무리합니다.
물론 그 예언은 단지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예고가 아니라 그들의 현재에 대한 예언자의 요청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로 시작하는 교회의 영광송에서 예언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둘째 독서에서는 ‘훈육’이라는 단어가 눈에 띕니다.
이는 그리스어 파이데이아(Faydia)의 번역인데, 이는 아이의 올바른 성장을 위한 교육 또는 훈련을 뜻합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헬레니즘의 파이데이아 개념을 차용하여) 자신의 공동체에 닥친 시련을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훈육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 시련이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바른길’을 달려가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오늘의 복음은 ‘문’이라는 문학적 표상을 사용합니다.
예수님은 “구원받을 사람이 적습니까?”라는 질문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그 문을 통해 주님의 집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들이 그곳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무서운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의를 일삼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 말씀에 나온 신학적 개념과 문학적 표상을 한데 묶어 요약해 본다면, 하느님의 ‘훈육’에 따라 ‘바른길’을 달려가 그분의 ‘영광’을 드러냄으로써 그분 나라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한 문장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신앙인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이 문장이 삶의 순간순간 무척이나 무거운 말씀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직 우리 교회의 믿음이 온전히 성장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한 주일의 삶을 시작하며 다시 한 번 호흡을 가다듬어야 할 이유이겠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신상옥 안드레아(생활성가 가수)
“나와 함께 영원히 머물러 계실 줄 알았는데 어느 날 훌쩍 나의 곁을 떠나신 그리운 나의 어머니 등 뒤에 나를 업고서 자장가 들려주던 음성 들릴 듯한데 보고 싶어요. 마냥 울고 싶어요.”
이 노래는 1999년 발표한 <어머니>라는 노래입니다.
저는 어릴 때 포도밭에서 일했던 시간이 많은데, 제가 가진 사진 중에 어머니가 원두막에 앉아계신 모습의 사진을 제일 좋아합니다.
바쁜 가운데 평화롭게 하늘을 보며 감사하시던 어머니의 신앙이 느껴지는 모습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천주교 신자 하나 없던 집으로 시집오셔서 홀로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가족 거의 모두를 신앙인으로 만드셨습니다.
“걸릴까 아슬아슬 즐겨 떨던 포도밭 서리.
그러다 잡혀도 웃어주던 할배의 맘보.
훈훈한 인정에 고개 숙여 울던 우리들.
지난날 잊지 못할 그 자리에 원두막 사랑.”
역시 제가 만든 <원두막>이라는 노래입니다.
제 유년 시절, 친구들과 포도 서리를 하던 어느 날 동네 어른께 잡혔던 기억을 담았습니다.
할아버지께 잡힌 저희는 사실 꾸중 듣고 벌 받느라 힘들었지만 노래 가사에는 동네 할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을 낭만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렇듯 노래 가사와 현실의 모습이 꼭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현실이 아름답기 때문에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비록 현실은 힘들더라도 각자의 가슴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노래에 담아 어려운 현실을 넘어서고 싶은 마음인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 또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어렵고 힘들더라도 주님께서 주신 사랑과 생명, 선함, 주님을 향한 갈망을 담아 서로 사랑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삶이 너무 복잡하고, 거짓된 메시지와 가치관의 혼란으로 절망에 빠질 때라도 우리 신앙인들의 노래는 더욱더 주님께서 주신 사랑과 희망, 믿음의 가치를 담아 생명의 고귀함을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신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들이 이제는 사제가 됐고 또 어떤 이들은 평신도로 살아갑니다.
가끔 모이면 “나는 이렇게 살아.” 또는 “나는 어떻게 살고 싶어.” 하며 자신의 이야기만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자의 삶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서로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요?
아마 신앙과 사랑에서 나오는 힘일 것입니다.
저는 노래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이런 사랑을, 그 사랑의 영원함을 노래로 알리고 싶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참 좋은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보내시지 않습니다.
“나와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시죠. 주님과 손을 잡고 함께 갈 때, 성모님과 함께 사랑의 사람들과 더불어 살 때 그 좁은 문은 친근한 어머니의 품이 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외국에 살면서 뿌리를 내리기까지는 뜻하지 않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지금은 웃으면서 말하지만, 당시에는 ‘수업료’를 냈다고들 하십니다. 때로 서러움에 눈물 흘리기도 했고, 왜 정든 땅을 떠나야 했는지 후회했다고 합니다. 이민이라는 좁은 문을 잘 참고 견디었기에 오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낼 수 있다고 합니다. 거주자 등록하는 데 1달 시간이 필요하고, 자동차 면허 따는 데 2달 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모든 일이 신속하게 진행되는 곳에서 살았기에 지루하고 답답하지만, 이 또한 뿌리내리는 과정입니다.
25년 전의 기억입니다. 주교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교포 사목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교님의 말씀을 듣고 기뻤습니다. 인정받았다고 느꼈습니다. 학원도 다니고, 조용히 준비하면 좋았습니다. 들뜬 마음에 술자리를 자주 했습니다. 젊었고, 가슴은 뜨거웠지만 냉철하지 못했습니다. 주교님께서 다지 저를 부르셨습니다. 저의 지나친 음주를 걱정하셨고, 질책하셨습니다. 미국 가는 결정도 취소하셨습니다. 반성하고 뉘우쳤으면 좋았겠지만, 원망의 마음이 컸습니다. 저의 음주 사실을 주교님께 알린 사람이 미웠습니다. 분명 같이 마신 사람 중에 있다고 생각하니 화가 났습니다.
성당에 돌아와 성경책을 펼치니 욥기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욥은 성실하게 살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깊었습니다. 그런데도 욥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가족은 행방불명 되었고, 종들은 강도를 만났고, 재산은 거센 파도에 휩쓸려 가버렸고, 몸마저 병이 들었습니다. 욥은 하느님을 원망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 분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좋은 것을 주셨음에 감사한다면, 하느님께서 나에게 나쁜 것을 주셔도 감사드립니다. 이 세상에 빈 몸으로 왔으니 빈 몸으로 돌아가는 것도 감사드립니다.’ 욥 성인의 기도를 묵상하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가슴에 차오르던 원망도, 분노도 봄에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따뜻한 바람에 기분 좋게 흔들리는 코스모스처럼 제 마음도 따뜻해졌습니다.
10시면 사제관에 들어오는 좋은 습관이 생겼고, 술자리에서도 과음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일찍 자니,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서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하루를 말씀으로 시작하니 여유가 있었고, 일할 때도 여유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아침에는 연락이 오는 경우도 거의 없고, 조용하기에 집중이 잘 되었습니다. 주교님의 견책이 제게는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영적인 죽비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주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땀을 흘리고, 노력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더 큰 노력과 땀을 흘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담담하게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세상의 문은 상대적입니다. 내가 노력했어도, 상대방이 더 노력하고, 더 능력이 있으면 내가 들어갈 문이 없습니다. 세상의 문은 ‘경쟁 가치’를 통해서 열리게 됩니다. 메달의 숫자는 한정되어있고, 메달을 원하는 사람은 많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문은 절대적입니다. 내가 노력하고, 내가 기도하고, 내가 나누면 됩니다. 천국에는 머물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문은 ‘비경쟁 가치’를 통해서 열리게 됩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사랑, 나눔, 배려와 같은 것들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님은 모든 것을 나누는 희생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우경식 요셉의원 원장님은 세속의 성공과 명예보다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먼저 선택하는 사랑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변을 보면 더러운 일, 힘든 일을 늘 앞장서서 하는 봉사의 열쇠를 가진 분들도 있습니다. 다른 모든 일을 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께 청하는 기도의 열쇠를 가진 분도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신앙이라는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신앙의 열쇠는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어둠에 빛을,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주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아들아 너는 주님의 견책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꾸짖으실 때 낙심하지도 말라,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견책하시고 아들로 여기는 자에게 매를 든다.” 그렇습니다. 삶의 어려움을 주님의 견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절망과 좌절 속에서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서는 사람, 이런 사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실패와 좌절을 통해서 새로운 삶의 방법과 길을 배우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실패와 좌절을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않습니다. 우리는 삶을 통해서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배울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찾고 구한다고 얻어지지 않는다. 왜? <루카 13, 22-30>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자신이 찾고, 구하고, 두드려 얻는 것이 진실이고 참되며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렇게 열심히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데 남처럼 얻어지는 것이 없고 늘 이 모양 이 꼴로 살게 합니까?” 하고 물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를 바로 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우선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어렵게 살지 않고 쉽게 살려고 하면 받은 것도 잊어버리고 거짓과 불의와 부정으로 주님이 “어디서 온 사람인지 나는 모른다.” 하신 것같이 내침을 받게 됩니다. 좁은 문은 정의와 사랑과 진실의 문입니다.
기도는 실천 의지 없이 달라고만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큰일을 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성립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하느님과 관계를 맺으려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에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 적대시하고 반대 입장으로 서로를 가열 차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도는 의미를 잃고 돌아오는 결과는 없습니다.
기도는 서둘지 말아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봄에 씨를 뿌리고 내일 추수를 기대하는 농부는 없습니다. 싹이 트고, 잎이 나고, 열매를 맺고, 열매가 익을 때까지 기다리며 거름을 주고, 물 주고, 정성껏 돌보아야 가을에 웃으며 추수하듯이 열매를 거두어들입니다.
힘들게 벌지 않고 큰 금고를 만들어 놓으면 돈이 들어옵니까?
기초부터 배우며 기초를 쌓아야 든든하고 성숙한 학문을 익혀 가르칠 수 있습니다.
매사를 자연의 질서에 따라 살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면서 구하는 사람은 큰 은총 속에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고 원하는 바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가난한 마음, 갈구하는 마음,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지 않으려면 가지고 있는 권력, 재력, 명예에 의지하지 말고 봉사, 나눔, 친교에 쓰면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에게 자유, 평화, 기쁨 속에 사는 행복이 옵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믿는 이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 주인이신 주님과 사랑을 나누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 2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말 없이 실천하는
계절의 변화입니다.
좁은 문을 지나고
빠져나온 가을에
감사드립니다.
말은 쉽지만
믿는 것을
실천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실천이 없는
우리믿음을 다시금
만나게됩니다.
실천이 없는
죽은 믿음은
그 어떤 문도
빠져 나갈 수
없습니다.
좁은 문의
실천이
중요합니다.
반성과 성찰사이에
좁은 문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교만과 아집의
바위돌을 먼저
힘껏 밀쳐냅니다.
나를 내려놓아야
좁은 문을 빠져
나갈 수 있습니다.
낮아지고 작아지신
예수님의 삶이
참으로 옳았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실천은
회개에서 시작합니다.
회개는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길입니다.
생명의 길은
비우고 내려놓는
실천에 있습니다.
변화하고
성장하고
영글어가는
우리의 믿음이길
기도드립니다.

꼴찌가 됩시다.
주수욱 신부님
세상은 2등을 기억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두 1등을 하려고 죽도록 노력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1등을 하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치열한 경쟁에 들어갑니다. 평생 경쟁하지만 정작 한 사람도 그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합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 이래로 현대처럼 교육의 기회가 흘러넘치게 제공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모두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인간의 성숙함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오로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생존 투쟁의 장이 돼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절망감은 이루 다 말할 것도 없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참된 행복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꿈과 이상이 사라지고 더 많은 소유라는 신기루를 좇으며 불나방처럼 죽어가는 사회가 돼버렸습니다. 한국 사회뿐 아니라 온 세계가 희망을 잃고 망연자실한 채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하느님을 떠난 인간이 안고 있는 깊은 문제입니다
흙수저 예수님
그런데 그리스도 신자들은 십자가 밑에 모입니다. 십자가는 꼴찌임을 강력하게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꼴찌가 되셨습니다. 하느님은 흙수저를 문 채 마구간에서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고향 나자렛은 변두리 세계입니다. 거기서 자라고 변두리 사람의 억양과 말투로, 말씀도 단순하게만 하셨습니다. 그분은 수도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래아 호숫가를 중심으로 활동하셨습니다. 주로 만난 사람들은 병자, 귀신들린 사람, 배고픈 사람들,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치범으로 몰려서 사형수로 죽었습니다. 흙수저를 끝까지 문 채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구원하기 위해서 아드님을 보내셨는데, 남들이 부러워하는 금수저 대신 흙수저를 안긴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기록하듯이, 하느님께서는 흙수저를 문 사람들을 항상 우선하여 선택하십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영광의 때’라고 매우 강조합니다. 카나 혼인잔치에서는 성모 마리아에게 서운하게 대답하면서 ‘저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라고 모호한 말씀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능력을 발휘하시어 아드님도 부활시키셨고, 인간을 모두 부활에 초대하셨기 때문에 하느님 영광의 때를 작정하고 준비하신 것입니다.
여종으로 자처하신 성모 마리아
성모 마리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을 찬송하고 기뻐하면서 자신을 비천한 여종으로 자처하셨습니다. 가난하게 사는 것을 기꺼이 선택하신 성모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동정녀로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자를 자신의 태중에 모셨습니다. 능력을 발휘하시는 하느님께서 성모님 안에서 큰일을 하시고, 미천한 이를 한없이 끌어올리십니다. 성모 승천이 이것을 말해줍니다.
당시 유다인 사회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바오로 사도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미련이 없었습니다.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삶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밑에 모이는 교회는 2000년 역사 속에서 항상 꼴찌가 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많은 성인 성녀들을 기리는 아름다운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교회는 이 꼴찌들이 첫째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성경을 충실하게 읽지 않는 교회는 이 복음 정신의 핵심을 놓치고 유혹에 빠지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의 유혹을 물리치신 것과 달리 유혹에 빠진 교회는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한국 순교자들이 그 당시 사회에서 분명히 꼴찌의 길을 가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꼴찌가 돼야 할 차례입니다. 적당히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성모님에게 성자를 잉태시키신 성령께서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도 이끄셨습니다. 그렇게 성령께서 이끄셔야 우리도 그 복음적 꼴찌가 되고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진정으로 세워집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훈육하는 하느님
염철호 신부님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 유배생활을 거치며 많은 것을 깨닫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유배가 하느님께서 백성들에게 내리시는 단순한 벌이 아니라 백성을 가르치는 채찍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함으로써 당신과의 약속을 깨트리자 하느님께서 유배로 그들을 벌하시는데, 이는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다시금 당신의 백성으로 되돌리시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오늘 2독서에서 봉독한 히브리서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히브 12,6).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를 통해 깨달은 또 다른 사실 한 가지는 유배를 통해 하느님 백성의 범주가 넓혀졌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은 유배를 통해 세상 곳곳에 퍼져 살게 되는데, 이는 하느님이 세상 곳곳에 전해지는 계기가 됩니다. 이스라엘은 유배를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 이름을 온 세상에 알림으로써 세상 모든 이들을 당신께로 불러 모으고자 하셨음을 깨닫습니다.
이는 오늘 1독서로 봉독한 제3 이사야서가 잘 알려 주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에 표징을 세우고, 그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을… 뭇 민족들에게 보내고, 나에 대하여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내 영광을 본 적도 없는 먼 섬들에 보내리니, 그들은 민족들에게 나의 영광을 알리리라”(이사 66,19).
오늘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유다인들의 자리를 온 세상 사람들이 대신 차지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이사야 예언서와 연관 지어보면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거절한 것은 이사야의 예언, 곧 유다인들의 실패와 좌절을 통해 모든 민족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함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보니 실패와 좌절을 상징하는 유배 사건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벌로 인해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유배를 통해 하느님의 계획을 더욱 깊이 있게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히브리어로 “유배를 끌고 가다”(힉걸라)는 말을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감추어져 있는 것이) 드러나게 만들다”입니다. 유배라는 단어가 계시와 같은 어근을 공유한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삶 안에서 스스로의 잘못이나 타인의 잘못, 세상의 악 등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유배생활에 빠지곤 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우리가 빠져 있는 다양한 유배 사건들이 단순한 하느님의 벌이 아니라, 나를 타이르고 훈육하기 위한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손길이기도 하다는 점을 일깨워 줍니다.
물론,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손길을 느껴보자고 억지로 유배상황에 빠지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누구의 탓으로 빠진 유배이든, 하느님께서 유배를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시는지 묵상한다면 하느님의 계획에 대해 평소에 알지 못하던 것들을 더 깊이 배우고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좁은 문을 지나려면…
김남수 마태오 신부님
대학에서 원하는 학생은 다섯 명인데, 스물다섯 명이 지원했습니다.
경쟁률이 어떻게 됩니까? 5:1.
일자리는 하나인데, 지원자는 열 명입니다. 경쟁률 10:1.
허락된 자리는 적은데, 그 자리를 얻고자 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경쟁률은 치솟기 마련입니다. 입학, 취직, 내 집 마련. 이 모든 것을‘좁은 문’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이를 통과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라는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요?
주일 미사 안 빠지고, 묵주기도 열심히 하고, 봉사 한두 가지 하면 가뿐하게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겠습니까? 전 세계 가톨릭 신자 11억 중에 구원의 자리는 몇이고, 내가 과연 그 자리의 주인공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구원을 남과 경쟁해서 얻어야 하는 합격증이나 자격증처럼 생각하지 않습니다.
구원을 나의 고통과 악습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면, 이는 당연히 남보다 내가 우선이어야 합니다. 같은 성당에 다니면서 활동하고 기도하지만, 구원이 아픔을 낫게 하고,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라면 다른 형제, 자매에게는 대단히 미안하지만, 우선 내가 그 혜택을 누려야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간절하게 청하는 구원은‘~으로부터 벗어남’을 넘어서‘~과 함께 함’입니다. 즉 고통과 악습으로부터 벗어남을 넘어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이 진정한 구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이 꼭 나이어야만 할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하느님은 나만의 하느님일 수 없고, 믿는 이들의 하느님이시고, 심지어는 믿지 않는 이들과도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이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가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더 부단히 자신을 살피고 주변을 둘러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는 말씀에서 힌트를 얻어,‘자신의 생각과 몸은 낮추고, 이웃에 대한 마음과 사랑은 넓히고.’입니다.
서공석 신부님
“많은 사람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 하여라.”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집주인이 문을 닫아버리면, 열어달라고 애원해도 소용없다고 말씀하십니다.집주인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은 그들이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문을 열어 달라는 사람들은 주인을 안다고 주장합니다. 주인과 함께 먹고 마셨고, 자기들의 동네에서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주인은 그 사람들을 모른다고 말합니다. 주인이 사람을 알아보는 기준은 그 사람이 자기를 보았거나, 함께 먹고 마신 사실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사람의 삶의 빛깔을 보고, 그 사람의 기원, 곧 어디서 온 사람인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삶의 빛깔이 같은 사람들은 “사방에서 모여들 것”이라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인류역사가 있으면서부터 사람들은 신(神)에 대해 줄곧 상상하였습니다. 유능한 인간이 행세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신을 모든 일에 유능한 분, 그래서 전능(全能)한 존재라고 말하였습니다. 높은 사람이 군림하는 것을 보고 신을 높은 분, 곧 지고(至高)한 존재라고 말하였습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자가 법을 주고 그 법에 따라 심판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신이 법을 주고,그 법을 따라 심판하여, 잘 지킨 사람에게 상을 주고 못 지킨 사람에게는 벌을 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높고 강한 사람에게 사람들이 공물(供物)을 바치는 것을 보고, 신에게도 제물(祭物)을 봉헌해야 한다고 상상하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런 신을 가르치면서 신의 이름으로 법을 주고 제물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은 사람들이 상상한 그런 신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자비롭고 사랑하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빛을 따라 사는 사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실천이 있는 삶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고, 그 삶을 사는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생명을 그 본연의 빛깔 따라 사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분을 맞아들이는 이들은...혈통에서나 육욕에서나 사람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이들이다.”(1, 12-13). 예수를 따라 사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을 동기로 실천하는 삶의 빛깔이 있다는 말입니다.
2세기 어느 신앙인은 하느님에게서 난 생명이 하는 실천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습니다. “이웃을 탄압하며 약한 자를 짓밟고 재산을 축적하며, 아랫사람들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행위 등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도 않고, 하느님을 본받는 행위도 아닙니다. 이웃의 짐을 대신 지는 자, 이웃에게 베푸는 자, 자기가 받은 것을 이웃이 필요로 할 때 기꺼이 내어주는 자, 이런 사람은 그 혜택을 받는 사람 앞에서 하느님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진실로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입니다.”(디오그네투스에게).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실천이 삶의 어떤 빛깔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한 글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시듯이 우리도 베풀어서, 하느님이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사랑해서, 하느님의 일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있게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이 사람을 알아보는 기준도 사람의 삶의 빛깔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인류가 상상해온 신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높고 지엄하신 하느님이 계시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서, 그 아들과 교섭을 잘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아내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 곧 하느님의 가치관을 따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사랑과 자비가 우리의 삶 안에 살아 있도록 하기 위해 십자가, 곧 일상생활의 불편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재물과 지위를 얻고, 건강을 얻는 것을 구원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많은 사람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노력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수의 사람만이 그 의미를 알아듣고, 찾을 수 있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좁은 문이라 불렸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재물과 지위에 대한 애착을 버리는 일은 아무나 알아듣고 행할 수 있는 경지(境地)가 아닙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많은 사람이 들어가는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입니다.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일은 자기 스스로를 잃을 줄 아는 소수의 사람에게만 열려 있는 좁은 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재물과 지위를 하느님과 연계하여 생각합니다. 그것을 얻으면, 하느님이 우리 편에 계신다고 믿습니다. 그것을 잃으면, 하느님이 떠나셨다고 믿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좁은 문’은 재물과 지위를 하느님과 혼동하지 않는 사람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사랑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인간이면, 모두가 탐하는 재물과 기적으로 통하는 문은 넓은 문입니다.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면서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된 수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신앙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위해 스스로 희생하면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빛깔을 가진 생명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생명을 살자는 운동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도 사랑하고 자비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를 배워 실천합니다. 그런 사람이 오늘 복음이 말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에게 빌붙어서 기적과 재물을 얻어내어 잘 살아보겠다는 수작이 아닙니다. 사랑과 자비는 자기 스스로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사랑과 자비를 필요로 하는 이웃을 기준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그것은 득(得)이 아니라 실(失)을 갖다 주는 길입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의미와 보람을 깨닫는, 좁은 문이 열어주는 길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모든 사람을 위해 열려 있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를 잃을 줄 아는 사람들의 길입니다. 득(得)에 목숨을 걸지 않고, 실(失)을 두려워하지 않는 좁은 문이 열어주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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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의 보물 1호는 무엇이었습니까? 딱지, 구슬, 장난감, 인형 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이런 것들을 소중하게 여겼고 여기에 한 가지 더 첨가한다면 ‘우표’를 무척이나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된 지금, 어렸을 때에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을 아직도 소중하게 여기고 있을까요? 아마 아직도 딱지나 구슬을 보물 1호로 여기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이것 없이는 못 살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왜 그럴까요?
생각해보니 지금 당장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들의 가치는 늘 바뀌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별로 중요한 것들이 아니었는데, 당시에는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만 생각했던 것이지요. 즉, 변하는 가치에만 집중을 하고 있었던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우리들이 집중해야 할 것은 변하는 가치가 아니라 변하지 않는 가치입니다.
이 변하지 않는 가치는 무엇일까요? 사랑, 믿음, 희망, 평화, 정의 등의 눈에 보이는 가치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가치이기도 합니다. 이 변하지 않는 가치를 간직하면서 살기란 참 어렵습니다. 이 가치들은 물질적인 세상의 가치와는 너무나 큰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보다는 남을 위한 가치고, 지금 세상 안에서의 만족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먼 훗날 주님의 나라에서의 큰 만족을 가져다주는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구원을 위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하십니다. 변하는 세상의 가치만을 추구해서는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가치를 계속해서 추구하는 우리들이기에 좁은 그 문으로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아무리 주님과 함께 식사를 했었다 하더라도 구원의 잔칫상에 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요.
미사에 열심히 참석한 것만으로 구원의 좁은 문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미사를 통해 얻는 은총이 엄청나지만, 형식적이고 보이기 위한 미사 참석은 주님께서도 별로 좋아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바로 변하지 않는 가치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흠 없는 도덕성, 그리고 영원한 사랑 등이 요구됩니다.
세상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이 세상 안에서 첫째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는 변하지 않는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 첫째가 되기 때문에,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고 또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사람들이 생긴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떤가요? 주님께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좁은 문’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어려우니 일찌감치 포기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문이 작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으로 반드시 들어갈 수 있도록 힘쓰라는 것입니다.
이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주님의 변하지 않는 가치에 집중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오늘의 명언: 희망은 어떤 상황에서도 필요하다(사무엘 존슨).
주님과 나의 거리.
갑곶성지에서 순례자들과 함께 미사를 하고나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저 카페 회원입니다. 저 페북 회원입니다. 저 카스 회원입니다. 저 밴드 회원입니다.”
제가 운영하는 카페의 회원은 한 15,000명 정도 됩니다. 그리고 페이스북 회원은 1,600명, 카카오 스토리는 1,900명, 밴드 회원은 1,200명이 넘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데 이쪽에서 활동하면서 제 글을 보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 순간에 어떻게 응답을 해야 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카페나 SNS에 제 글을 올리고는 있지만, 그 안에서 거의 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분이 계시는지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전자 우편을 주고받았다고도 하지만, 하루에 수십 통을 받고 있는데 어떻게 일일이 알 수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제가 쓴 글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면서 악의에 찬 글을 쓰시는 분들도 종종 만나기 때문에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터넷 안에서 제 글을 보셨다는 관계만으로 어떤 깊은 유대관계가 형성되기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직접 보고 말을 나누었던 분은 다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미사 한 번, 기도 몇 번, 봉사활동 몇 차례 등을 통해서 주님과의 뜨거운 친분관계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꾸준히 만나고 대화를 하지 않는다면 주님과 나의 거리감은 좁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거리감을 좁히기 위한 노력들, 그 노력들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덥다’라는 말이 일상이 되어버린 여름입니다. 이 무더운 여름에도 구슬땀을 흘리며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을의 풍성한 결실을 위해 들판에 나가는 농부가 있습니다. 산업의 근본인 철을 만들기 위해서 용광로를 달구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학이라는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 책과 씨름하는 수험생들이 있습니다. 가족들을 위해서 고단한 몸을 이끌고 지하철을 타는 사람이 있습니다. 더운 여름을 지내며, 나는 무엇을 하였는지 돌아봅니다.
지구의 반대편에서는 ‘올림픽’의 열기가 뜨거웠습니다.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 달리려는 인류의 열망이 한바탕 축제를 마련하였습니다. 스포츠를 통해서 인류의 화합과 평화를 도모하는 것이 올림픽의 정신입니다. 이번 올림픽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화려한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금메달의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5000미터 여자 육상 경기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경기 중에 넘어진 선수를 기다려주고, 함께 달리는 모습이었습니다. 다친 다리를 이끌고, 끝까지 완주를 하는 선수를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들어오는 선수를 보듬어 주는 동료의 모습은 감동이었습니다. 올림픽의 가치와 정신을 보여준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땀을 흘리고, 노력을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더 많은 노력과 땀을 흘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담담하게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세상의 문은 상대적입니다. 내가 노력을 했어도, 상대방이 더 노력을 하고, 더 능력이 있으면 내가 들어갈 문이 없습니다. 세상의 문은 ‘경쟁가치’를 통해서 열리게 됩니다. 메달의 숫자는 한정되어있고,메달을 원하는 사람은 많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문은 절대적입니다. 내가 노력하고, 내가 기도하고, 내가 나누면 됩니다. 천국에는 머물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문은 ‘비경쟁 가치’를 통해서 열리게 됩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사랑, 나눔, 배려와 같은 것들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모든 것을 나누는 희생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우경식 요셉의원 원장님은 세속의 성공과 명예보다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먼저 선택하는 사랑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변을 보면 굳은 일, 힘든 일을 늘 앞장서서 하는 봉사의 열쇠를 가진 분들도 있습니다. 다른 모든 일을 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께 청하는 기도의 열쇠를 가진 분도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신앙이라는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신앙의 열쇠는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 어둠에 빛을 ,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주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아들아 너는 주님의 견책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꾸짖으실 때 낙심하지도 말라,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견책하시고 아들로 여기는 자에게 매를 든다.” 그렇습니다. 삶의 어려움을 주님의 견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절망과 좌절 속에서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서는 사람, 이런 사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실패와 좌절을 통해서 새로운 삶의 방법과 길을 배우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실패와 좌절을 통해 아무 것도 배우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배울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십시오. -사랑, 훈육, 회개, 비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은 좁은 문입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끝이 보이지 않는 좁은 문 인생입니다. 피할 수 없는 좁은 문입니다. 다 똑같은 좁은 문이 아니라 사람마다 양상과 정도가 다 다른 나만의 고유한 좁은 문입니다.
십여년 이상된 요셉수도원을 사랑하는 이들의 모임인 예수성심자매회가 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모임을 갖는 데 지난 8월 모임은 각별했습니다. 유난히 계속되는 여름 불볕 더위였기 때문입니다. 자매님들에게 미사중 언급한 말이 생생합니다.
“한 달 한 번 모임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한 달간 이렇게 좁은 문을 잘 통과해 살아왔습니다.’하고 주님께 보고하는 시간이자 다음 한 달간 좁은 문을 잘 통과할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풍성히 받는 시간입니다.”
요지의 말에 모두 공감했습니다. 이렇게 주기적으로, 규칙적으로 주님을 만나 주님께 살아있음을 보고해야 좁은 문을 잘 통과하며 살 수 있습니다. 매월 1회 모임은 한 달간 좁은 문을 잘 통과해 온 삶을 주님께 고백하는 시간이자 한달 간 살아 갈 힘을 주님께 얻는 시간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매 주일 미사에 참여함은 주님의 집인 성전에 나와 참으로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은총의 시간이자, 또 다음 일주일 동안 좁은 문을 잘 통과하며 살아 갈 힘을 주님께 얻는 시간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오늘은 말씀을 중심으로 좁은 문을 잘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을 나눕니다.
첫째,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고, 내 삶의 중심이자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말씀을 깊이 공부할 때 주님을 알고 나를 알게 됩니다. 주님께 가까워 지면서 주님을 닮아 우리는 지혜롭고 자비롭고 겸손해 집니다. 주님 역시 우리를 사랑하게 되어 우리가 누구인지 잘 아시게 됩니다. 특히 주님의 때를 잘 알아 언제 어디서나 깨어 내 삶의 자리에서 충실히 주님의 뜻을 실행하게 됩니다. 이렇게 살아있는 동안은 늘 열려 있는 오늘 지금 여기 구원의 좁은 문입니다. 구원의 좁은 문이 닫히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주님이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주님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하고 대답할 것이다.”
늘 열려 있는 구원의 문이 아닙니다. 때가 되어 닫히면 끝입니다. 이 주님의 때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때를 놓쳐 문이 닫히면 만사 끝입니다. 주님과의 깊은 친교로 주님의 뜻과 주님의 때를 알았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재차 호소합니다만 주님의 결심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인 주님의 반응은 단호합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말합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모른다.’
두 번이나 거듭되는 주님의 반응이 가슴 철렁하게 합니다.
참으로 평생 열심히 주님을 믿고 살았는데 이런 결과라면 완전히 헛된 실패인생입니다. 주님께서 모르신다니 주님과 무관하게 내 뜻대로 산 인생임이 분명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았어도 주님이 그들을 몰랐다 하니 그들 역시 주님을 몰랐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주님을 사랑해야 주님을 알 수 있고 주님 또한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를 아시게 됩니다. 이렇게 주님과 사랑의 친교가 깊어야 주님의 뜻과 주님의 때를 알아서 구원의 좁은 문이 닫히기 전 통과할 수 있습니다.
둘째, 훈육의 기회를 잘 활용하십시오.
삶의 모든 순간이 훈육의 기회입니다. 우리가 겪게되는 일상의 크고 작은 모든 시련과 고통이 주님의 훈육입니다. 도대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게 살아있는 동안은 늘 열려 있는 오늘 지금 여기 구원의 좁은 문입니다. 이런면에서 우리는 평생 주님의 훈련병이요 주님의 수련자들입니다. 죽을 때까지 주님의 훈육은 계속 됩니다.
바로 우리 모두를 향한 히브리서의 주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잘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은 자녀가 어디 있습니까?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도 있고, 눈물로 씨뿌리는 사람들은 기쁨으로 곡식을 거두리라는 시편말씀도 있습니다. 모든 시련과 고통을 주님의 훈육으로 알아 지극한 인내로 견디어 낼 때 기쁨과 평화, 의로움의 열매입니다. 이렇게 하여 매순간 구원의 좁은 문을 성공적으로 잘 통과하게 됩니다. 그러니 다시 일어나 맥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 길을 달려가십시오. 살아있는 동안 계속되는 주님의 훈육이요 우리는 주님의 훈육을 받는 자녀이자 학생입니다.
셋째, 끊임없이 회개하십시오.
우리 삶은 회개의 여정입니다. 오늘 복음의 문이 닫힌 다음 주님께 문을 열어달라는 이들은 그대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회개의 표지’입니다. 평생 열심히 주님을 믿고 살았는데 문은 닫히고 ‘나는 너희를 모른다.’하면 얼마나 황당하고 절망스럽겠는지요.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자기를 비워갈 때 참 나를 알게 되고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회개의 열매가 하느님 찬미이며 하느님 찬미가 끊임없이 우리의 회개를 촉발시킵니다.
회개와 찬미는 함께 갑니다. 회개를 통한 사랑의 찬미가 운명을 바꿉니다. 슬픔을 기쁨으로, 불화를 평화로, 미움을 사랑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불신을 신뢰로, 어둠을 빛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회개의 찬미, 사랑의 찬미입니다. 고통스런 구원의 좁은 문을 내적으로 기쁨 가득한 넓은 문으로 바꿔줍니다.
어제 새로 구입한 농 기구 축복시 수도형제들이 함께 부른 시편성가 54장도 새삼 은혜로웠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나는 아무것도 아쉽지 않네
푸른 풀밭 시냇가에 쉬게 하사/나의 심신을 새롭게 하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바른 지름길로 인도하시고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해도/주님 계시니 두렵지 않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나의 한평생 축복하시고
선하심과 자비하신 은총으로/주님 궁에서 사오리다.-
찬미의 기쁨, 찬미의 축복입니다. 우리를 끊임없는 회개로 이끄는 사랑의 찬미보다 좁은 문 통과에 더 좋은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세 젊은이들은 입을 모아 하느님을 우러르며 '주님 찬미 받으소서' 하고 부르짖으며 바빌론 불가마 좁은 문을 통과했습니다.
그러니 회개의 찬미, 사랑의 찬미가 늘 입술에서 떠나지 않게 하시기 바랍니다.
넷째, 늘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지니고 사십시오.
성서의 사람들은 모두가 하느님 비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하느님 비전, 하느님 나라의 비전이, 꿈이, 희망이 있어야 좁은 문을 수월히 통과할 수 있습니다. 다음 구원의 좁은 문 통과가 좌절된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의 비전이 없었음으로 자초한 화임이 분명합니다.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 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되면,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도대체 이보다 큰 불행은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잃었을 때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비전은, 꿈은, 희망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물론 제자들의 평생 비전은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제1독서의 이사야의 평생 비전 역시 똑같습니다.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요 주님의 영광을 보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이 미사는 궁극의 하느님 나라 비전의 희미한 예표일뿐입니다.
다음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지니고 그 비전의 실현에 항구했던 자들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 구원의 보장은 없다는, 우리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끝까지 하느님 나라의 비전에 충실할 때 마침내 구원의 좁은 문을 통과해 오매불망 꿈에 그리던 하느님 나라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뵈올 때 거기 있으리라 희망하던 사람들이 있지 않음에 놀랄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가 무시했던 다른 부류의 사람들, 즉 불자, 힌두인, 무슬림, 불신자, 미신자 등 이방인들로 간주하던 이들이 거기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라벨을 붙이던, 이들은 예수님이 했던 대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 보살핌과 나눔의 사랑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예수님이 인정하는 종파에 관계없이 좁은 문을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명시적으로 예수님을 믿은 이들은 아니지만, 실제로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입니다.
연중 제21주일 주님은 우리 모두 구원의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훈육의 기회를 잘 활용하는 것이요, 회개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이요, 늘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지니고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구원의 좁은 문을 잘 통과할 수 있는 은총과 힘을 주십니다. 아멘.
구원에 이르는 겸손과 사랑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한 투쟁의 순례를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13,24)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그 어떤 인간적인 조건에 관계없이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 선택받은 자신들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배타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폐쇄적인 사고의 틀 속에 갇혀 살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스라엘 백성뿐이겠습니까? 누구든 구원받고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 그렇게 쉽지 않으며, 그에 합당한 준비와 행동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원의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 따르면 구원과 관련된 문은 좁은 문과 넓은 문이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넓은 문은 하느님과 관계없이 각자의 기준과 판단에 따른 것으로 힘들이지 않고 편하게 드나들 수 있는 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삶은 당장 편하고 내 입맛에 맛아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겠지만 다 헛되고 헛된 일일뿐입니다.
그러나 구원에 이르는 문은 좁은 문, 곧 땀을 흘려야 하고 어려움을 겪어내야 통과할 수 있는 문입니다. 이 문은 하느님 때문에 하느님의 자비를 실행함으로써 그 자비 안에 머물고,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하느님의 문'입니다. 그래서 이 문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문이요 사랑의 문입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삶과 수난의 여정이 바로 그 문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널찍한 문이 아니라 ‘좁은 문’을 선택해야 합니다. 곧 나는 어떤 길을 왜 가려고 하는지를 분명히 하고, 구체적인 삶에서 그런 선택과 결단이 드러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 길이 어떤 길이며 왜 이 삶을 살려고 하는지를 잊고 산다면 삶의 의미와 방향을 상실하고 말 것이 뻔합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써야”(13,25) 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다가올 내일도 그저 그런 미지근한 삶을 살면서 구원과 행복을 바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겠지요. 세상이 주는 기쁨과 비교할 수 없는 구원의 기쁨은 좁은 문, 곧 십자가의 길을 ‘있는 힘을 다하고, 온 마음을 다하여’ 받아들이고 살아냄으로써 주어질 것입니다.
좁은 문을 통과하는 자세도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의 자비 안에 머물기 위한 문이라면 비우고 낮추어 가난해지지 않고서는 통과할 수 없겠지요. 좁은 문은 친분관계나 제자라는 사실, 또는 신분이나 세상적인 업적으로 통과하는 문이 아님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또한 그 문이 닫혀버리기 전에 좀 더 낮추고 가난한 마음으로 사랑의 존재가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 독선과 편협한 선민의식에서 벗어나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혼을 지니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자비의 삶, 의로운 삶, 형제애의 실천함으로써 참 행복을 위한 좁은 문을 통과하도록 헌신했으면 합니다.
동쪽과 서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힘자랑 한창 하던 고등학교 시절 양치질을 하며 복도를 지나가고 있던 한 친구를 괴롭힌 적이 있습니다. 싸움 잘 한다고 소문 난 아이였습니다. 넘어뜨렸다 일으켰다 하며 나의 힘을 느끼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나도 싸움을 하면 잘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아이는 양치질 하던 입에 가득 찬 거품을 삼킨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화를 내며 한 마디 던졌습니다.
“너 나 알아?”
그러고 보니 말 한 마디도 섞어보지 않던 친구였습니다. 그 아이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만 좀 세다는 것. 그래서 그 아이를 이기면 서열이 매우 높아진다는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스스로 잘 안다고 착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아이를 이용하여 나를 드러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면 이용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다고 스스로 착각하며 그 아이를 이용한 것이지만, 그래서 아무리 안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는 나를 모른다고 할 것입니다. 물론 나도 실제로는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자신을 깎아내리는 사람이 아닌 자신에게 영광을 주는 사람만 안다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저도 사제인지라 신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저를 만났던 기억을 되새기며 아는 신부님이라는 것을 내세우려고 노력합니다.
“그때 미사 끝나고 신부님이 아녜스 자매와 이야기하고 있을 때 저도 함께 인사 나눴잖아요?”
이런 상황에서는 기억나지 않아도 반갑게 인사해 주어야합니다. 그 사람에게 영광을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것이 또 고마워서 더 기억해 줄 것입니다. 어쨌거나 그분도 자신의 영광을 위해 나를 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부모님이 부끄러워 길을 지나면서도 아는 척을 하지 않았던 아픈 기억을 간직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부모님이 자신을 영광스럽게 해 주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이면 자녀를 위해서라도 부모님도 모른 채 하고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약 마지막 심판 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모른다고 하시면 그것보다 큰일은 없을 것입니다. 분명 우리도 할 말은 있을 것입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분께로부터 배우고, 그분과 함께 먹고 마셨다는 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미사 안에서의 친교까지 갔었음을 말합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이런 말까지 합니다.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마태 7,22)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그러나 과연 하느님께서 우리를 모르실까요? 뒷말까지 더 읽어보면 해답이 나옵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불의를 일삼아 온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모르신다고 하시는 말씀은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모른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심판 때에 구원받고 싶다면 인정받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님께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그렇습니다. 주님의 뜻을 먼저 헤아리고 실천하는 이라야 주님께서 인정하실 것입니다. 인정하신다는 말은 영광을 준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안다고 증언하신 적이 있는데 바로 세례를 받을 때입니다. 세례는 아버지의 뜻에 순명할 것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뜻이 성령의 힘과 함께 그 사람의 머리 위로 내려앉으십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영광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를 안다고 증언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됩니다. 이렇게 당신께 영광을 올리는 아드님을 어떻게 모른다고 하실 수 있겠습니까?
한 요양원에서 불평쟁이로만 알려져 있던 노인이 세상을 떠났고 그의 방에서 한 편의 글이 발견되었습니다. 간호사들은 이 글을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나를 성격도 알 수 없는 까다로운 늙은이라고 보는 것을 잘 안다. 밥도 제대로 안 먹고 양말도 한 짝씩 잃어버리기 일쑤였던 나. 그러나 한 때 나도 사랑을 했었고 신랑이었고 아버지였고 행복한 가정을 꾸렸었다. 40세가 되었을 때 아들은 내 곁을 떠났고 조금 있다가 아내까지 떠났지. 이젠 옛 기억으로만 살아야하는 오갈 곳 없는 늙은이. 심장이 있던 자리에는 돌 하나가 들어섰지만 여전히 젊었을 때의 열정을 지닌. 그러나 냉혹한 현실에선 여전히 피해만 끼치는 존재.
그리고 마지막엔 이렇게 끝맺습니다.
“너무나 짧았던 너무도 빨리 지나가버린 시간들을 생각할 때마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냉혹한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뿐이지. 그러니 이제는 눈을 뜨길 바라네. 사람들이여 눈을 뜨고 바라봐주시게. 까다로운 늙은이가 아닌 ‘나’를.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 봐주게.”
간호사들이 왜 그 노인을 있는 그대로 봐주지 못했을까요? 그 노인 위에 서서 판단했을 뿐이지 그 노인의 내면과 깊은 뜻은 헤아리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노인을 이용해 자신들이 젊고 똑똑하고 필요한 존재들임을 보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당신을 알아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당신도 알아주실 것입니다. 그러려면 그분의 뜻 안에 우리 자신을 넣어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표현합니다. 주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좁은 문 안에 있어야만 주님께 이해받고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좁은 문이란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 주님께서 당신이 안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이해받고 인정받고 싶다면 겸손하게 상대의 뜻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 주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를 이용하게 되고 “너 나 알아?”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하느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정받는 유일한 길은 주님의 뜻, 즉 이웃사랑이라는 좁은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좁은 문을 열 열쇠는?
박영봉 안드레아 신부님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오늘도 땀 많이 흘리셨죠?
이 더위가 언제 수그러들지 참 걱정입니다.
더워서 아무 것도 하기 싫은 아니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무기력증에 걸릴 지경입니다. ㅠㅠ
힘을 달라고 미사 중에 하느님께 떼를 좀 써야겠습니다. ^^*
형제 자매님,
제1독서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읽을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했던 ‘유대인만의 구원’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방민족 가운데서도 사제와 레위인 즉 하느님을 위해서 온전히 봉헌된 사람이 나오게 되리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은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라는 어떤 사람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좀 이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가 얼마나 될 것이라는 대답을 하시지 않고,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라고 엉뚱한 대답을 하십니다.
그래서 왜 구원의 문이 좁다고 하시는가?
우리에게도 구원의 문은 좁을 것인가?
등등의 많은 의문들이 생깁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의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그 다음에 하신 비유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인과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쫓겨나는데, 주인은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하고 그 사람들을 쫓아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29절에서는 사방에서 사람들이 와서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는 사람의 숫자가 적은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좁은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야 할 사람들이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라는 말씀도 이것을 뒷받침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왜 구원이 문이 좁아졌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구원관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혈통을 타고났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면 저절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판단에 의하면 자신들에게는 구원의 문이 활짝 열려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때가 되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보내신 당신의 외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을 실천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구원의 문이 좁아진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방인들에게는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에서 완전히 제외된 사람들이었지만 이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꼴찌가 될 첫째란 유대인들이고 첫째가 될 꼴찌는 이방인들입니다.
형제 자매님,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는 다른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미 첫째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꼴찌가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첫째로 계속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제2독서에서 히브리서의 저자가 그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임을 마음에 새기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시련이 주어진다면 “이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훈육하시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잘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고 예쁜 자식 매 한 대 더 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강하고 바르게 세우시기 위해서 그리고 마침내는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시련으로 훈련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 곧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훈육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내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데 하느님께서 항상 평화를 누리도록 해주셔야지 왜 이런 고통을 주시는가?”라고 하느님을 원망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나의 모든 것을 온전히 당신께 의탁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우리를 단련시키실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하느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신 유일하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세상의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체험한다면 나의 모든 것을 그분을 위해서 버릴 수가 있고 그분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만이 좁은 문을 활짝 열 수 있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면서 우리 역시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 또 무엇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형제를 잘 사랑함으로써 좁은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확보한 첫째로 남아있을 수 있도록 이 한 주간도 내 가족과 이웃 형제들을 잘 사랑하면서 생활합시다!
성당 문이 곧 천당 문은 아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것이 쉬운지 어려운지 질문을 받으십니다.
질문을 한 사람은 ‘구원 받으셨습니까?’라고 도발적인 질문을 하는 일부 무례한 개신교 신자들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저와 같은 사람과 비교하면 구원의 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사실 우리는 구원 문제에 관심이 많아야 하고 그래야지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기 행복의 문제에는 관심이 많아도 구원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는 신앙인이 제법 많습니다.
그렇다면 왜 신앙인임에도 구원의 문제에 관심이 없을까요?
그것은 구원을 내세의 문제로만 치부하기 때문이거나 행복과 구원을 별개의 문제로 보고 지금 행복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참된 신앙인이라면 현세의 행복이든 내세의 구원이든 다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앞서 제가 예로 든 개신교 신자들이 비록 무례하기는 하지만 하느님께 구원을 두고 있기에 대다수 우리 천주교 신자들보다 훨씬 신앙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께 구원을 두고 있음은 맞지만 미성숙하고 광신적인 구원론에 그들은 머물러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바는 하지 않고 그저 ‘주님, 주님!’하면서 하느님만 믿으면 구원 받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구원의 문제를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오늘 주님께서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우리 천주교 신자들에게 적용하면 이렇게 되겠습니다.
성당 문이 곧 천당 문이요 구원의 문이 아니다.
성당 문을 부지런히 드나든다고 천당 문이 저절로 열리는 것이 아니다.
시편은 정의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합니다.
“너희는 열어라 정의의 문을. 내가 들어가 야훼께 감사기도 드리리라. 이것이 야훼의 문, 의인들이 이리로 들어가리라.”(시편 118, 19-20)
복음은 불의를 저지르면 구원의 문이 닫힌다고 합니다.
성당에 와서는 ‘주님, 주님!’하면서 주님을 열심히 섬기는 체 하지만 성당 문을 나서면 주님의 뜻을 개떡같이 여기며 깔아뭉개는 자에게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라고 말씀하시며 다른 사람은 다 하느님 나라에 있는데 너희만 문 밖에 있을 거라고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문은 명문 대학처럼 소수만 그리로 들어오도록 하느님께서 애초부터 그 문을 좁게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그리로 들어오기를 바라시지만 그리로 들어가려는 사람이 많지 않기에 좁은 문인 겁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시만 나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기에 당신의 다른 자녀에게 우리가 피눈물을 흘리게 하면 하느님께서 가만히 있으실 수가 없습니다.
정의는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최소한의 사랑이요 기본이고, 사랑이 가장 완전한 정의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교황님은 칙서 자비의 얼굴에서 정의와 자비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아무튼 성당 문이 곧 천당 문, 구원의 문은 아닙니다.
성당 문이 정의의 문, 사랑의 문, 자비의 문이 될 때 곧 천당 문입니다.
그러므로 자비의 해인 올해 자비의 성당 문을 활짝 열도록 해야겠습니다.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히브 12,7)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우리는 가끔 역경과 시련을 만날 때
"하느님께서 어디 계시는거야? 이럴 때 나와 함께 해주시지 않고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걸까?"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히브리서의 저자는
"아냐.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 하느님은 자비롭고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야. 마음이 아프지만 지금 시련을 겪고 더 튼튼해지기를 묵묵히 기다리고 계신 거야."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러니 지금 혹여 여러가지 어려움과 시련이 있다하더라도 너무 쫄지 마세요.
하느님께서는 좋을 때만이 아니라 우리의 시련과 역경 때도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묵묵히 지켜 보고 계시는 주님을 믿으며 오늘도 화이팅 하시길 축원합니다.
<구원 : 하느님과의 참된 친교>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친교를 나누기 위해서는
음식을 함께 먹으며
사는 이야기 나누는 것이 제격입니다.
세상살이 안주 삼아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킬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밥과 술과 이야기가 나누어진
정겨웠던 자리를 마치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나눔을 곱씹으며,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내어주고,
서로 닮으려는
아름다운 노력이 따를 때
참된 친교가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미사에서 삼위일체 하느님과
가슴 벅찬 친교를 이룹니다.
주님의 말씀과 성체와 성령의 은사를
받아먹고 즐깁니다.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을
차마 보잘것없는 몸과 마음으로는
받아 안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하느님과의 만남과 사귐이
충만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조건 없이
당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심으로써
우리와 친교를 이루고자 하시는데,
우리가 아무런 나눔 없이
이기적으로 하느님을 소유하려고 한다면,
이는 참된 친교의 자세가 아닙니다.
하느님께 거저 받았으니,
이제 우리가 거저 내어놓아야 합니다.
나눔의 삶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벗들을 살리는 생명의 양식으로
우리 자신을 봉헌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과
갈림 없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 2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좁은 문에도
길은 있습니다.
빠져나갈 수
있기에
문입니다.
예수라는
좁은 문이 있기에
좁은 문은 결코
우리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힘겹지만
빠져나가려는
사람이 있기에
좁은 문은 열려있고
조금씩 넓어져갑니다.
조건을 따진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좁은 문을 통해
피조물이라는
겸손을 다시
배우게 됩니다.
좁은 문을 통해
안주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을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좌절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가난함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고통과
희망은 좁은 문
안에서 함께
존재합니다.
좁은 문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입니다.
주님을 더욱
신뢰하게 하는
좁은 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끌어가시는
주님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생활의
실천없이는
믿음과 삶은
분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깊을수록
우리의 모든 생활은
모든 것의 감사로
이어질 것입니다.
좁은 문속에서도
새롭게 발견되는
기쁨이 참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이라는
가난함으로 더욱
기쁘고 자유로워지는
신앙의 기쁜 여정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종종 자신의 신앙 체험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시는 분들을 만납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이야기하시고, 또한 이 사랑을 받고 있는 자신의 굳은 믿음을 내세우십니다. 솔직히 이렇게 내세우는 신앙은 위험성이 많습니다. 개신교에서 많이 말하는 소위 신앙 간증이라는 것, 이는 잘못된 길로 갈 확률이 매우 많습니다. 주님께서도 치유를 해주신 다음, 치유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떠벌리며 자신의 은혜 받음을 자랑하라고 하지 않으시지요. 오히려 그 기적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바로 당신의 뜻이 잘못된 뜻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하나 하나를 다 사랑하셨지만, 그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는 대중성은 사랑하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들을 보면서 왕으로 모시려고 할 때에도 그 자리를 물러나 숨으신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즉, 주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끄는 대중심리를 어떻게든 없애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요구하시는 바입니다. 우리들의 생각 중에서 ‘좋은 것이 좋은 것이지’라는 것,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데 뭐’ 등의 사람들의 일반적인 행동과 생각을 그대로 따르고 답습하려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특히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더욱 더 그러한 행동을 따릅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을 통해서는 구원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오늘 복음에서 나오듯이 많은 사람들이 가려하는 넓은 문으로 가려고 하지 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좁은 문은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사랑을 가지고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자기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벗을 위해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줄 수 있는 이타적인 사랑을 가지고서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그래서 이 문은 쉽고 편한 길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어렵고 힘든 길이기에 ‘좁은 문’으로 표현하신 것이지요.
많은 물질을 갖기 위한 노력보다는 많은 사랑을 간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과를 9개를 가지고 있으면서, 사과 하나가 없어서 열 개를 채우지 못했다고 아쉬워하고 스스로 불행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나눌 수 있는 사과를 9개나 가지고 있다면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사과를 하나만 가지고 있다면 이를 누구와 함께 나눌 수 있는지 주변을 둘러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일수록 소유욕에 집착을 보인다고 하지요. 지금 내 자신은 무엇을 더욱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소유욕에 집착을 보이고 있다면 그만큼 내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로는 절대로 주님께서 들어가라고 하신 좁은 문에 들어갈 수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좁은 문으로 떳떳하게 들어갈 수 있는 우리를 꿈꿔 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햇볕과 그늘을 구별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다(김재진).
벤쯔 쎄단
어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들었습니다. 주일 새벽, 여러분에게도 전해드립니다. 이 이야기 보시고 크게 웃으시고, 기쁘고 행복한 주님의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자식 자랑 하는 것을 너무나도 좋아하시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이 할머니께서는 노인정에서 친구 분에게 아들 자랑을 하십니다.
“에구! 우리 아들이 최고급 ‘벤쯔 쎄단’을 샀는데 얼마나 좋은 지 몰라.”
그런데 친구 할머니의 귀가 상당히 어두운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휴! 저 할망구는 별 것도 아닌 것으로 맨날 자랑질이야? 이제는 하다하다 안 되니까 ‘배추 세 단’ 산 거 가지고도 자랑하구 자빠졌네.”
그렇습니다. 귀가 어두워서 ‘벤쯔 쎄단’을 ‘배추 세 단’으로 잘못 들으신 것이지요. 그러나 그 할머니는 친구가 부러워하지 않고 핀잔만 주니까 다시 힘주어서 말합니다.
“좋으니까 자랑을 하지. 그 벤쯔가 얼마나 비싼 줄 알아?”
이에 친구 할머니도 지지 않고 말합니다.
“아이고! 그까짓 배추가 좋아봤자 그게 배추지 뭐. 배추에 금테라도 둘렀남?”
이런 식으로 둘이 티격태격 싸우는 것을 보고 있었던, 노인정 최고 어르신인 왕 할아버지께서 버럭 소리를 지르시며 이렇게 말씀하세요.
“야! 시끄러! 이 할마시들이 그냥~~ 왜 아까부터 ‘빤스 세 장’ 가지고 난리들이야? 그냥 쳐 입어!”
서로가 자기가 듣고 싶은 데로 듣고, 들리는 데로 말한 것이지요. 어쩌면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 역시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듣지 못하고, 또 그래서 제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내 욕심만을 내세워서 주님의 뜻을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철저하게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 주님께서 우리 앞에 준비해 놓으신 좁은 구원의 문에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좁은 문을 탓할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의 자아가 작아져야합니다.
우리의 자아가 작아진다면
못 빠져 나갈 문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좁은 문은
십자가처럼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달아날 수도 없습니다.
세속의 유혹을 빠져나오기위해서는
좁은 문처럼 고통이 동반됩니다.
우리 힘으로는 결코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써 가능한 일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져있기에 구원의
문은 점점 좁게 보이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가까워질수록 자비의 하느님은
더 넓은 문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걱정할 좁은 문이 아니라
나누어야 할 넓은 문입니다.
분주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언지를 일깨워주는
'좁은 문'입니다.
우리의 욕심이 사라지면
모든 것은 평화로워 질 것입니다.
하느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겸손한 하루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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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에서 ‘모죽’이라는 대나무에 대해 보게 되었습니다. 이 모죽은 씨를 뿌리고 5년 동안 하나의 싹도 나오지 않으며, 만약 나오더라도 1Cm도 채 되지 않는 작은 순이 나올 뿐이랍니다. 그러다가 다섯 번째 해가 끝나갈 무렵의 어느 순간부터 하루에 몇 십 Cm씩 무서운 속도로 자라나서 거의 25미터에 이르는 엄청난 위엄을 자랑하게 된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5년 동안의 시간은 무엇일까요? 5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지요. 땅 속에서 뿌리를 견고히 내리면서 모진 세월을 견디고 성장을 위한 준비를 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다른 어떤 식물보다도 빨리 그리고 높이 커나갑니다.
이 모죽이라는 대나무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지금이라는 순간에 어떤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좌절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현재를 허송세월하며 보내는 것이 아니라, 모죽처럼 인내하면서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준비의 시간이 모두 지난 뒤에는 엄청난 성장이 바로 내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과연 어떤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켰던 모세는 40년 동안 숨어 살면서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 준비했습니다. 예수님 역시 30년 동안 소년과 목수의 삶을 사시면서, 하느님의 일을 준비하셨습니다. 나와 비교할 수 없는 분들도 이렇게 30년 이상의 시간을 준비했는데, 우리는 얼마나 급하게 내가 원하는 결과만을 요구하고 있었을까요? 특히 마지막 그 순간, 우리들이 모두 원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에 항상 최선을 다해서 깨어서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준비에 대해 늘 소홀한 우리는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우리들에게 강조하여 말씀하십니다. 신랑을 맞이하러 나온 열 처녀의 비유지요. 기름을 미리 준비해 놓은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기름을 미처 준비하지 않은 처녀들은 급하게 기름을 사러 갔다가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지요.
여기서 복음은 잘 준비한 처녀를 슬기로운 처녀라고, 또 준비하지 못한 처녀는 어리석은 처녀라고 이야기합니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로 슬기로움이 구분되지 않습니다. 또한 세상의 기준으로 많은 것을 가졌느냐에 따라 구분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신랑 맞을 준비를 잘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로 슬기로움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슬기로움의 기준은 바로 준비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그 마지막 순간을 위한 준비를 잘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가 슬기로움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슬기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마지막 그 날을 위한 준비를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그 마지막이 보이지 않는다고 안일한 마음을 품어서도 안 되고, 또한 아직도 멀었다면서 나중에 하자고 뒤로 미루는 생활을 해서도 안 됩니다. 바로 지금 마지막 날을 위해 깨어 준비하는 사랑의 삶, 이 삶만이 슬기로운 사람으로 주님께 인정받을 수 있음을 늘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비교’만 하지 않아도, 우리의 행복은 수천 배로 부풀 것이다. 우리가 ‘계산’만 하지 않아도, 우리의 행복은 세상 전체를 뒤덮고도 남을 것이다(정여울).
불안도 쓸모가 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부정적 감정 역시 욕망의 한 형태며 따라서 생의 에너지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삶의 완성을 위해서는 때로는 불안도 필수 요소가 된다는 것이지요. 불안하기 때문에 절망하기도 하지만, 이 불안 때문에 지금의 자리에서 도약할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하긴 러시아 과학자들이 했던 동물 실험 결과를 보면 그 이유가 더욱 더 분명해지지요. 두 그룹의 실험 대상이 있습니다.
첫째 그룹의 동물들에게는 어떤 위험 요소 없이 풍성한 음식과 상쾌한 공기, 안락한 환경이 주어졌지요. 둘째 그룹에게는 걱정과 기쁨이 공존하는 공간을 제공했습니다. 이 둘째 그룹의 동물들은 초원에서 한가로이 놀다가도 가끔 맹수의 습격을 받았고, 먹이를 얻기 위해서는 직접 노력해야 했습니다.
연구 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요? 글쎄 안락한 환경에서 살던 동물들이 훨씬 빨리 병들어 죽어가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긴장과 불안, 노력을 요하는 환경에서 동물들의 건강과 장수가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그 불안 때문에 준비를 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노력들이 나를 지켜주는 방패가 되고 동시에 삶의 활력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주님께서 마지막 그 날이 언제인지를 말씀해주시지지 않지요. 바로 언제 올지 모르는 날이라는 사실 때문에 불안해 할 수밖에 없지만, 이러한 불안이라는 긴장 속에서 잘 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불안도 쓸모있네요.
첫째가 꼴찌 되는 실수 범해선 안돼."
홍승모 신부님
오늘 복음말씀은 우리에게 지금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주님은 구원받을 사람들 숫자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에 관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여기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의미는 다름 아닌 주님과의 형식적 관계가 아니라, 긴밀한 내면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현재의 시간을 주님과 함께하는 회개의 여정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회개는 과거의 모든 것을 깨끗이 정리하고 주님 앞에 떳떳하고 당당하게 서는 삶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려고 애써도 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그만 두려고 해도 되풀이 되는 자신의 나약한 의지를 인정하며 생명의 원천이신 주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의 나약한 처지를 한탄하는데서 방향을 전환시켜 주님의 자비에 맡기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이 바라는 '악'에서 방향을 전환해 주님께서 바라는 '선'으로 향하도록 애쓰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의 행동을 늘 정당화시키고 변명의 구실을 늘어놓는 것에서 방향을 전환해 주님 은총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기쁨과 행복의 삶을 희망하며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들어가야 할 문은 주님을 상징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 예루살렘 여정을 걸어가듯이, 주님은 우리가 누구나 당신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들어오기를 바라십니다. 삶에 지치고 절망한 사람, 되풀이 되는 죄 때문에 주님 앞에 서기가 합당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 치유하기 힘든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 자신 스스로를 판단하고 자신만이 삶의 주인공으로 착각하고 사는 모든 사람을 기다리십니다.
다만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두드림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의지와 필요성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문 밖에 서 있을 것입니다. 문 밖에서도 잘 지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문 밖의 세상이 주는 사라질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두드림은 주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열어두신 용서와 자비의 문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넓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좁은 문을 제시하십니다. 아마 문이 좁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들어가기에 좁다는 뜻일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문은 들어가기에 결코 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삿짐 옮기듯 많은 것을 등에 지고 손에 움켜쥐고 들어가기에는 너무 비좁을 것입니다.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겨 가져가고 싶어 하는 가치들이 오히려 문에 걸려 장애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이 삶의 주인공이라는 교만, 자신만이 들어갈 자격이 있다는 자만, 그런 장애들을 버리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문이 바로 좁은 문일 것입니다.
더욱이 그 문은 항상 우리를 기다리며 열려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결국 문이 닫히는 때가 오면, 사람들은 문 밖에서 외칠 것입니다.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루카 13,25).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주님은 아담을 부르며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하고 찾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주님을 피해 두려워 숨기만 했습니다. 주님이 애타게 찾으면 찾을수록, 우리는 주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제 주님이 우리를 더 이상 찾지 않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주님 말씀 안에서, 주님 성찬례 안에서, 주님을 안다고 변명해도 주님은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유익과 필요에 따라서만 주님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1코린 11,27-29).
우리는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픈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준다는 사실을 희망해야 할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문은 좁다.
손용환 신부님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그러면 좁은 문의 특징이 뭘까요? 어렵고 힘듭니다. 자신보다 남을 더 생각합니다. 자기를 희생합니다. 의미 있게 삽니다. 구원을 희망합니다. 작은 것에 감사합니다. 탓을 남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참고 인내합니다. 겸손하며 용서할 줄 압니다. 아낌없이 베풀고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돌립니다. 옳은 일을 위해 목숨까지 바칩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신 분들을 성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구원에 이르고, 좁은 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넓은 문의 특징은 뭘까요? 쉽고 편합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자기만을 위합니다. 돈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요행을 바랍니다. 많은 것을 얻고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모든 게 남의 탓이라고 합니다. 쉽게 화를 내고 분노합니다. 교만하고 칭찬 받기를 좋아합니다. 끊임없이 모으고 모든 영광을 자기에게 돌립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는 사람들을 속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멸망에 이르고, 넓은 문으로 들어갑니다.
현대인에게는 세 가지 고질병이 있습니다. 첫째는 안일주의요, 둘째는 상대주의요, 셋째는 실리주의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편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편한 것을 충족시키는 것이 물질문명입니다. 요즘은 물질이 풍부합니다. 그리고 돈만 있으면 뭐든지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편리한 것에 길들여지면 힘들고 어려운 일을 기피하고 점점 더 안일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다음은 상대주의입니다. 요즘은 절대가치가 없습니다. 내가 사는 방식, 내 생각, 내 감정, 내 기분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대주의가 판을 치니까,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합니다. 그래서 뭐가 옳고 그른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피땀 흘려 애쓸 필요도 없고, 목숨 바쳐 의로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힘들게 살아서 존경받을 이유도 없고, 세상이 썩고 부패해도 나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리주의입니다. 이것은 결과주의와도 비슷합니다. 방법과 과정은 전혀 문제시하지 않고 오직 결과만을 가지고 평가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많이 벌고, 권력을 차지한 사람이 이 사회에서 승리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고질병이 신앙생활에도 스며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복신앙이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고난의 길은 거부하고, 오직 자신의 이익과 축복만을 갈구합니다. 이런 신앙이 모든 사람들이 가는 편한 길이요, 넓은 문입니다.
엘리위젤이 쓴 「흑야」를 보면, 죽음의 수용소에서 앙상한 뼈만 남은 무리들이 일터로 끌려갈 때, 사정없이 내리치는 간수들의 채찍을 피해 대열의 가운데에서 걷고자 사투합니다. 일단 대열의 중앙을 확보하면 무서운 채찍은 모면할 수 있습니다. 채찍은 항상 바깥쪽의 친구들만 위협하고, 중앙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무사안일주의적인 평범한 중앙대열에서 이탈하시어 사랑을 실천하시다가 결국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천국의 문은 대열의 중앙에 있기만 하면 저절로 밀려들어갈 수 있는 넓은 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책망을 받아도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문입니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될 날은 반드시 옵니다.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지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맺을 날은 반드시 옵니다. 오늘의 희생과 봉사는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이제 어느 문으로 들어가겠습니까? 넓은 문입니까? 좁은 문입니까? 지옥의 문은 넓고 편하지만 멸망으로 이끕니다. 천국의 문은 좁고 험하지만 생명으로 이끕니다. 집주인이 천국 문을 닫은 후에 문을 두드리지 맙시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신희준 신부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라고 대답 하셨습니다. 그런데 “좁은 문”이란 말마디에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마음이 뭔가 답답해져 옴을 느끼게 됩니다.
“구원받는 것마저도 ‘무한경쟁’이란 말인가요?”라는 공허한 질문을 예수님께 던져 봅니다. 어릴 적부터 자원은 오로지 인간뿐인 이 땅에 살면서 우리는 내가 살기 위해 너를 짓밟고 죽이는 일에 넌더리나게 푹 빠져 살아왔습니다. 남들보다 더 좋은 직장 다니기 위해 남들보다 더 좋은 대학교, 더 좋은 고등학교, 더 좋은 중학교, 더 좋은 초등학교, 더 좋은 유치원 등등에 다니기 위해 안간힘을 써온 우리에게 ‘좁은 문’은 너무나도 익숙하면서 지긋지긋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인생의 마지막도 ‘좁은 문’이라뇨?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요? 신앙생활도 결국엔 나 하나의 구원을 위해 다른 이들을 물리쳐서 이겨내야 한다는 뜻일까요? 사랑의 예수님께서 설마 이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겠지요?
문득 신학생 때 수업 중에 어느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은총은 무한하게 크지만, 그렇게 큰 은총을 받아 담아야 할 우리 그릇이 너무 작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자신의 그릇이 작은 줄은 생각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은총이 너무 박하게 작다고 하느님 탓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일등 학교, 일등 직장을 향한 ‘좁은 문’과 구원의 ‘좁은 문’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차이점을 제가 간과했습니다. 일등 학교, 일등 직장은 누구나 ‘정말로’ 원하기 때문에 그곳을 향한 문은 ‘실제로’ 좁지만, 그와 반대로 구원을 향하는 길을 ‘정말로’ 충실하게 걸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적기 때문에 ‘실제로는’ 아주 넓기만한 구원의 문은 좁은 것입니다. 마치 그리스도인 정치인
은 많지만, 실제로 그리스도인처럼 정치하는 사람은 적은 것과 마찬가지로, 구원에 이르기를 원한다고 겉으로 외치면서도 구원에 이르기 위해 자신의 생활방식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은 무척 적은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가와서 문을 두드리면서 들어가게 해달라고 애원하겠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들은 모르는 사람들이오. 미안하지만 문을 열어 드릴 수 없겠소.”라며 문을 열어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예수님께서는 우리 얼굴을 보고 아는 사람이라 해주실까요? 우리 얼굴을 알아보셔야 우리가 구원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사실 정답은 우리 양심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습니다. 한 번 오랜만에 일으켜 세워 볼까요? 정답은…: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미카 6,8)
끝으로, 제 가슴 속에 작은 울림을 남긴 요한 23세 교황님의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신아르 지방의 한 평야에 세워진 바벨 탑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인류의 첫 세기에 건립된 그 탑의 건설은 혼란을 일으키며 중단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서 이런 유형의 탑들을 사람들은 짓고 싶어 합니다. 분명한 것은 한 가지입니다. 첫째 탑의 운명을 후대의 탑들도 뒤따를 것이라는 사실입니다.”__
사통팔달
장재봉
세상은 숫자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많은 것과 큰 것들에 마음이 쏠립니다.
오늘 주님을 찾은 “어떤 사람”도 “구원받을 사람”의 수를 궁금해 한 것이라 싶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숫자의 많고 적은 것을 알려주지 않으시고 “힘써라”고 동문서답을 하시네요.
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함으로 하느님나라를 향하는 길을 크고 넓게 확장하시고 그 나라로 통하는 문을 사통팔달 열어 놓으신 분께서 “좁은 문”이라 하시니 의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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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1독서 말씀은 하느님의 계획이 이미 오늘 우리에게 이루어진 사실을 깨닫도록 합니다.
선하신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모으신 일도 “그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사제로, 더러는 레위인으로 삼으리라”는 말씀도 교회를 통해 모두 이루어졌으니까요.
오늘 주님의 아리송한 답변의 이유를 찾아봅니다.
물론 우리는 좁은 문에 대칭되는 넓은 문이란 세상이 따른 일이기에 수월하고 많은 사람이 들어가는 문이기에 매우 인기가 있는 문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때문에 매사, 세상이 선호하는 일을 포기하고 결단하는 결의가 얼마나 어려운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순간마다 마음을 모으는 일이 얼마나 치열한 상황인지를 일깨운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 최선을 살아가는 마음들이 너무 ‘좁다’고 더욱 더 “힘써라”고 말씀하신 줄 모르지도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모두에게 열려 있는 문이지만 한번 닫히면 결코 다시 열리지 않는다는 사실, 한번 들어서지 않으면 영영 놓치게 된다는 절박한 진실에 깨어있기를 당부하신 것이라 싶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늦기 전에’ 주님께로만 집중하는 일이 얼마나 귀하고 또 어려운지를 일깨우신 것이라 받습니다.
노닥대느라 허비한 시간만큼 불의와 타협하느라 더뎌진 마음을 단단히 동여매고 그분의 길을 어서 가고, 마저 가야한다는 이르심이라 헤아립니다.
그 길을 막고 있는 잡다한 생각들을 허물고 그 문 앞에 놓인 것들을 말끔히 치워야 한다는 말씀이라 새깁니다.
하느님 나라의 문은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모여든 모두에게 활짝 열려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누구나 얼마든지 믿음으로 들어서는 모든 이들을 다 받아들이기 위해서 넓고 큰 길을 닦아 놓았으며 엄청나게 큰 대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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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부자가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서 목욕탕에 갔습니다. 그의 초라한 옷차림을 본 종업원은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작은 비누와 너덜너덜한 수건을 주었지요. 목욕을 마친 그는 종업원들에게 금화 한 개씩을 팁이라면서 각각 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들은 깜짝 놀랐지요. 더군다나 그들이 홀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불평하기보다도 오히려 후한 팁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도 했지요.
‘우리가 그를 융숭하게 대접했더라면 더 많은 금화를 팁으로 주지 않았을까?’
일주일 뒤 부자가 다시 그 목욕탕을 찾아왔습니다. 종업원들은 그를 알아보고 이번에는 왕처럼 대접했습니다. 그에게 무료로 마사지도 해주고, 몸에 좋은 향수도 뿌려주면서 극도로 정중하게 모셨습니다.
목욕이 끝나자 부자는 그 종업원들에게 팁이라며 100원씩만 주는 것입니다. 크게 실망한 종업원들을 바라보며 부자가 말했습니다.
“이 동전은 지난 번 서비스에 대한 것이고, 지난 번 금화는 오늘 서비스에 대한 것이네.”
이 부자의 행동이 공평합니까? 공평하지 않습니까? 너무나도 공평한 부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자신의 행동은 생각하지 않고 다른 이의 행동을 섣부르게 판단하기에 급급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 대상은 나의 이웃을 뛰어넘어 하느님을 향할 때도 종종 있게 되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기를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무조건적으로 구원의 문이 자기에게만은 활짝 열리기를 바라기 보다는, 그 구원의 문에 자신 있게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첫째처럼 보이는 사람이 꼴찌가 될 수 있는 것이며, 꼴찌처럼 보였던 사람이 첫째가 될 수 있는 곳이 하느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자신은 그 좁은 구원의 문에 자신 있게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큰 사랑을 간직하고 나의 이웃들에게 다가서야 합니다. 미워하고 판단하고 단죄하기보다는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동네에 갑자기 정전이 되었습니다. 그 마을의 형제님 한 분이 전력회사에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지요.
“아니, 이렇게 전기가 나가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자 전력회사 직원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냉장고에 있는 아이스크림부터 빨리 드십시오.”
정전되면 냉장고의 아이스크림이 녹을 테니 빨리 먹는 것이 맞는 말이겠지요. 어쩌면 우리들에게도 우선순위는 사랑의 실천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야 가장 중요한 구원의 문에 떳떳하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금 당장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삶의 목표는 찾을 가치가 있는 유일한 행운이다(G.K.체스터톤).
난 용감한 척할 수 있다(리처드 스텐절, ‘만델라스 웨이’ 중에서)
1963년 5월 만델라는 그에게 곧 종신형을 선고하게 될 리보니아 재판 기간 동안 수감되어 있었다. 다시 만델라의 옆에는 스티브 테푸라는 나이 든 수감자가 있었다. 섬에 도착했을 때 만델라와 테푸가 뒤처지자 한 교도관이 고함을 질렀다. “이 새끼들, 여기서 죽여 버릴 거야.” 그들이 교도소 본관 건물에 도착했을 때 교도관이 다시 소리쳤다. “옷 벗어!”
수감자들이 알몸이 되자 교도관들은 한 사람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만델라는 그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교도관장이 어떤 사람에게 말했어요. ‘왜 이렇게 머리카락이 길어?’ 그 사람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힘겨워했죠. 그러자 다시 교도관장이 말했어요. ‘규정을 몰라? 머리를 잘랐어야지!’ 그래서 난 그에게 말했어요. ‘저기요...’ 아, 그게 전부였어요.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죠. 그가 말했어요. ‘나에게 그딴 식으로 말하지마!’”
만델라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의자에 몸을 기대며 회상에 잠겼다. “날 때릴 게 분명했죠. 솔직히 너무 무서웠어요.”
그러나 만델라는 해냈다. 교도관장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다.
“‘건드리려면 그렇게 해 보시오. 난 남아공 대법원에 당신을 세울 것이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모든 것을 다 잃을 것이오.’ 그러자 그가 멈췄어요. 놀라운 일이었죠. 내가 용감했기 때문이 아니에요. 그저 누군가는 용감한 척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거죠.”
종종 용감한 척하는 것을 통해서 참된 용기를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용감한 척하는 게 바로 용기인 것이다.
즐거운 꼴찌로 살기
김민수 신부님
“공부의 신”이라는 TV드라마가 높은 시청률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별 볼일 없는 꼴찌들을 모아 국내 최고 명문대에 합격시키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입니다.
시청자들은 ‘루저’들의 변화과정을 지켜보며 대리만족을 느꼈을지 모르지만, 여기엔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강자의 논리’와 ‘1등 지상주의’가 깔려 있습니다. 세상은 첫째를 우선적 가치로 꼽습니다. 둘째 이하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로지 1등만 대접을 받습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어느 개그맨의 풍자도 있습니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이웃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웃은 나의 성공을 위한 수단이요 도구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성공하고 출세하여 남보다 더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이웃과 단절되고 맙니다.
또한 첫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늘 불안하고 끊임없이 경쟁하게 됩니다.
참된 신앙인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 세상에서 꼴찌의 삶을 선택하는 자입니다.
기꺼이 꼴찌가 될 때 이웃을 내 인생의 동반자로 여기며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개인주의가 만연된 시대에 상생과 공동체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함입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나신 김수환 추기경님은 스스로 당신 자신을 바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바보는 어리석고 우둔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여 남을 행복하게 해 주는 바보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궁극적으로 “바보천사”라 불립니다. 이 세상에서 기꺼이 꼴찌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함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좁은 문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살다보면 후회스러운 일이 꼭 생기게 마련입니다.
저에겐 술을 마실 때 후회스러운 일이 가장 많이 발생합니다. 어제도 과음을 해서 오늘도 늦게 일어났고 하루 종일 머리가 띵한 채 보내야했습니다.
저는 독한 술을 잘 안 마시는데 어제는 술자리에 함께 하신 신부님들이 고량주를 드시겠다고 했습니다. 조금 조심스런 분위기라 저 혼자 약한 술을 마시겠다고 하기가 어려웠고 그렇게 분위기에 휩쓸리게 되었습니다.
정말 상황이 그렇게 가더라도 아닌 것 같으면 혼자라도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대다수의 사람과 과감하게 홀로 맞선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 영화화되기도 하였는데, 한 심리학자가 지원을 받아 제비뽑기를 하여 간수 팀과 죄수 팀을 짜서 며칠간 만들어진 감옥세트 내에서 상황극을 하며 지내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간수들은 점점 사악해져갔고 죄수들은 간수들의 폭력에 온갖 굴욕적인 것까지 정말 죄수처럼 따라하였습니다. 실제 간수가 아니고, 실제 죄수가 아닌데도 아무도 그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상황의 힘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결국 며칠 뒤 폭력이 점점 심해져서 억지로 실험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 간수들이 죄수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게 행했던 대부분의 장면들이, 수십 년 후에 미군들이 이라크 포로들에게 했던 장면들과 매우 흡사한 면을 보면서, 상황이 사람을 어떻게 만들어가는 지를 잘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하는 것도, 좋은 단체에 가입해야 하는 것도 다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입니다. 혼자서는 대부분의 주위 사람들이 하는 것들에 대항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대단히 많은 상황의 힘 안에서 힘없이 맥도 못 추고 주관도 없이 이리저리 쓸려 다니며 살아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를 조종하는 그 상황의 힘을 이기라는 뜻입니다.
공기 중에 인간에 생명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산소는 21%입니다. 그러나 생명유지에 전혀 필요하지 않은 질소는 78%를 차지합니다.
아마도 세상에서 구원받을 사람들의 숫자도 질소의 비율보다는 산소의 비율에 가까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문은 좁고 험해서 더 많은 사람들은 넓고 편한 길을 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당에 나온다고 해서 과연 다 공기 중 산소와 같이 21%에 속할까요?
세계에서 가톨릭을 믿는 사람들도 21%정도 되겠지만, 그 가톨릭 신자 중에서도 정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21%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주일미사 참례율은 신자의 30%에도 못 미치고, 유럽은 10%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에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나라에서 쫓겨나 “저희가 먹고 마실 때에 주인님도 같이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우리 동네에서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라고 따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신 적이 있습니까? 없다고 한다면 진짜 예수님께서 모른다고 하셔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이는 미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심으로써 그 분과의 친교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사에 나와 주님, 주님 한다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악을 일삼는 자들아, 모두 물러가라.”
미사를 했는데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모르시겠다’고 하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제가 2년의 보좌생활을 하고 지금은 멀리 떨어져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이나 전화로 자신들의 이름을 대면서 먼저 자신들을 기억하느냐고 물어봅니다. 기억하고 있다면 별 문제가 없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렇게 물어보면 대답하기가 조금 난감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무리 자주 만났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과 진정으로 만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중학교 때 지금의 에버랜드로 소풍을 간 적이 있었는데 친구들과 누가 예쁜 여자들과 사진을 찍는가 시합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학교에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한 예쁜 아이에게 말을 걸어서 사진을 함께 찍었습니다. 그 아이와 단 10초 정도밖에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지금도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타나면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러나 일 년 이상을 매일 함께 했던 초등학교 때 선생님들의 얼굴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 것은 신기한 일입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상 깊은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은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인상을 주지 못하는 신자들은 오래 남지 않습니다. 열심히 봉사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거나 혹은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기억에 오래남지만 특별히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지 못한 신자들은 자주 연락하지 않는 이상엔 조금씩 기억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악을 일삼는 자들아, 모두 물러가라.”라고 하신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들은 당신이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잊지 않으시지만 아무리 미사에 열심히 참여한 사람도 악을 일삼으면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억하시는 예쁜 사람은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매일 군중 속에 끼어 군중 속의 한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만나봐야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한 개인으로서 예수님께 예쁜 모습을 보여야 예수님의 마음에 깊이 박혀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막시밀리아노 꼴베 신부님은 포로수용소에서 가정이 있는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하자 자신이 나서서 대신 죽겠다고 자원하였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신앙만 버리면 많은 재산과 명예를 주겠다는 말을 무시하고 고통스러운 순교를 선택합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가난하고 버려진 사람들을 끌어안습니다.
이런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는 길을 선택한 이들은 모두 성인들이고 예수님 마음에 깊이 새겨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택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과 반대로 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많은 사람이 넓은 문으로 가고 좁은 문으로는 몇 안 되는 사람만이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 골고타 언덕까지 간 사람은 몇 명이었습니까? 대부분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갔지만 요한만이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따라서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마음에 가슴깊이 새겨진 사도는 요한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성당에 나옵니까? 그렇습니다. 주일미사 참례율 28%, 그렇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28%에 들어야합니다. 평일미사에 참례하는 사람이 많습니까, 아니면 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까? 당연히 몇 명 안 되죠? 그렇다면 그 몇 명 되지 않는 편을 택하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이 많습니까, 읽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까? 묵주기도를 꾸준히 하는 사람이 많습니까, 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까? 십일조를 내는 사람이 많습니까, 아니면 안 내는 사람이 더 많습니까?
정말 이렇게 따지다보면 신자들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지 않은 것이 좋은 길임을 쉽게 깨달을 수 있고 무엇이 좁은 문인지도 알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좁은 문을 선택하지 않는 이유는 좁은 문이 힘든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힘든 길을 선택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길이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쉬운 길과 어려운 길이 있다면 항상 어려운 길을 선택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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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현재 인천의 간석4동 성당 주임신부로 있습니다. 그런데 작년 12월에 부임할 때부터 이 성당이 그리 낯설지가 않았어요. 아니 성당 뿐 아니라, 본당의 관할 구역 모든 곳이 낯익었지요. 왜냐하면 제가 어렸을 때 놀았던 동네가 바로 이곳이랍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살았던 동네이다 보니 어떻게 낯설겠습니까?
하지만 이 동네에 살았던 때가 벌써 20년 전의 이야기이니 변한 것이 전혀 없을 수가 없겠지요.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요즘처럼 급변하는 세상에서 20년이면 얼마나 많이 변했을까요? 하긴 많이 변했습니다. 그 당시에 있었던 저층 아파트는 모두 고층 아파트로 탈바꿈을 했고요, 제가 살았던 집은 빌라로 변해 있더군요. 또한 없었던 넓은 도로가 생겼으며, 논과 밭만 있던 곳에는 인천의 젊은이들이 즐기는 유흥가로 변했습니다.
그렇다면 제 모습은 어떨까요? 20년 전의 모습 그대로를 하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제 모습 역시 많이 변했지요. 그래서 오랜만에 학창시절의 친구들을 우연히 만나게 되면, 친구들이 말하곤 합니다. “너 이렇게 변했니?” 하긴 저 역시 과거의 사진을 보면서, ‘내가 이럴 때도 있었는데…….’라면서 스스로 미소를 지으니까요.
과거와 지금을 비교하면서, 문득 과거에 제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을 생각해 봅니다. 보물 1호로 취급했던 많은 우표들, 이 우표를 모으기 위해서 잠을 설쳐가면서까지 새벽부터 우체국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했는데……. 지금은 단 한 장의 우표도 간직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 제게 있어 소중한 보물은 탁구라켓이었지요. 탁구장에 갈 때마다 반드시 챙겨서 가지고 갔던 탁구라켓. 탁구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고 신나는 운동이라고 생각했는데, 탁구라켓을 잡은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모든 것은 다 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변하는 것들에 목숨을 걸고 있는 듯 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때는 꼭 필요하고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기에 목숨을 걸고서 그것을 간직하려고 하지만 과연 영원히 내게 필요한 것일까요? 과연 물질적인 부와 권력이 천년만년 내게 꼭 필요할까요?
바로 이렇게 잠시의 기쁨만을 생각하고 쫓아가는 우리들을 보시면서 안타까워하시는 주님께서는 오늘 제2독서의 말씀처럼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 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통해 경고하고 계십니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현세의 생활이 영원함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지요.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인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항상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만큼은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그런데 그것들이 과연 하느님 나라에서도 필요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면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용기. 그것이 바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비결이 아닐까요?
변하지 않는 주님의 뜻을 따르도록 노력합시다.
지위에 걸맞는 행동을 하라(임성학, '인생게임에서 이겨라'중에서)
국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섬유 회사가 있었다. 한동안 잘나가던 회사는 수출길이 막히면서부터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사장을 비롯한 임원 회의가 열리고, 본사와 공장에서 비용 절감을 위해 10% 물자 절약 운동을 펼치기로 했다.
회사 내 모든 부서와 공장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전에는 점심시간에 컴퓨터 전원과 전등을 끄지 않고 나가는 사원들이 태반이었는데, 그날 이후 철저히 컴퓨터 전원을 끄고 전등도 소등했다. 한 번 복사해 쓰고 버리던 종이도 이면을 다시 활용해 썼다.
그러던 어느 날, 거래처를 방문하기 위해 외출을 서두르던 전무의 눈에 쓰레기통에 버려진 종이 한 묶음이 눈에 띄었다. 한번 복사하고 이면을 사용하지 않은 A4용지였다. 전무는 그 종이를 가져와 자기 책상 위에 놓더니 작은 크기로 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서 직워들에게 자른 종이 한 묶음씩을 나눠 주며 메모지라도 쓰라고 하고, 복사지를 버린 여직원에게는 경위서를 제출하게 했다.
다음 날, 전무는 임원 회의에서 그 일을 발표하며 물자 절약 운동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전무의 발표를 들은 임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시했다. 발표를 마치고 전무가 막 자리에 앉으려고 할 때였다. 아까부터 묵묵히 듣고만 있던 사장이 물었다.
"이봐, 박 전무, 자네 봉급이 얼마인가?"
"네?" 전무는 뜬금없는 사장의 질문에 어리둥절했다. 다른 임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전무면 전무다운 일을 하게. 쓰레기통에 버린 종이를 활용한 것까지는 잘했네. 경위서를 쓰게 한 것도 경각심을 주기에 적절했고... 문제는 그 버려진 종이를 자네가 일일이 잘라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네. 지금은 위기에 처한 회사를 위해 머리를 싸매고 경영 전략을 세워야 할 아까운 시간이네. 다시 말해 자네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은 종이를 자르는 게 아니라는 거지. 그런 정도의 일은 아르바이트 사원에게 맡겼어야 해. 자네 물자 절약 10%를 한 것이 아니라 몇십 배, 아니 수백 배 중요한 시간을 낭비했네. 자네가 그 종이를 자르고 나누어 주는 시간 동안에 자네는 자네의 봉급보다 훨씬 더 손해나는 일을 한것처럼 보이는군."
전무는 그날 회의에서 직급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사장으로부터 한 수 배웠다.
좁은 문
임문철 신부님
‘좁은 문’ 하면 갑자기 입시 지옥이 생각나 느낌이 그닥 좋지 않습니다.
요즘 부모들의 가장 큰 스트레스가 아이들의 진학 문제라고 합니다.
아니 진학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입니다.
소신학교 입학 시험을 보는데 꼭 합격시켜달라고 기도하다가 순간, ‘내가 붙으면 다른 한 사람이 떨어져야 하는데?’ 하고 멈칫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저 대신 다른 사람을 합격시켜달라고 기도할 수도 없고, 저는 하는 수 없이 “알아서 해주십시오” 하고 말았습니다.
좁은 문은 세상 사람들이 걸어가는 넓고 편한 길이 아닙니다.
좁은 문은 당장 필요한 사람들에게 내 것을 나누어주지 않고 혹시 모른다는 이유로 잔뜩 구겨 넣은 이기심과 탐욕의 대형 짐가방을 들고는 도저히 통과할 수 없는 문입니다. 배낭도, 손가방도 버리고 빈 손이 되어야 들어갈 수 있는 문인 것이지요. 대신 좁은 문은 남의 무거운 짐을 대신 들어주는 사랑의 손에는 무한히 넓어지는 자동문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좁은 문은 달콤한 멍에요, 가벼운 짐입니다.
좁은 문으로, 파이팅!
김영국 신부님
파이팅! 우리말 사전의 설명에 따르면 운동경기에서 ‘잘 싸우자’는 뜻으로 외치는 구호다. 하지만 우리는 이 구호를 너무나 좋아해서 운동경기에서뿐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십분 발휘해서 최선의 결과를 내도록 하자는 격려의 의미로 아무 때고 사용한다. 가벼운 게임을 할 때도 의례 파이팅을 외친다. 파이팅이 원래 ‘싸움’이라는 뜻의 파이팅(fighting)에서 유래했으니 외국인들의 귀에는 우리가 호전적인 사람들로 보일지 모르겠다.
그런데 예수님도 파이팅을 외친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4). ‘힘써라’는 번역은 너무 점잖다. 희랍어 ‘아고니제스테!’는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워라!’는 명령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하느님의 편에서는 거저 주시는 것이나 우리 쪽에서 보면 그저 편안히 드러누워 얻어먹을 수 있는 떡이 아니다. 사도 바오로는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기 위해서 ‘싸움’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하면서(1티모 6,12), 자신도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다”(2티모 4,7)고 말했다. 여기서 다 같은 동사를 사용하고 있음은 두말 할 것도 없다.
믿음의 길, 구원에 이르는 길은 처절한 싸움의 길이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에게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당신 먼저 좁은 문을 통과하심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문(요한 10,9)이 되어 주셨다. 성경은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루카 22,44)고 전한다. 여기서 ‘고뇌에 싸여’라는 표현 역시 너무 약하다. 희랍어로 ‘엔 아고니아’는 머리만 쥐어짜는 고뇌가 아니라, 인류구원의 기로에서 예수님이 피땀을 흘리며 악의 세력과 벌이신 처절한 한판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 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다. 이 말씀은 구원받을 사람은 이미 소수정예로 예정되어 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구원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라는 권고와 격려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 주님이 그 문을 닫아 버리면 밖에서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없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주님의 백성들이 모두 다 약속의 땅에 발을 디딜 수 없었던 것처럼(1코린 10,1-5), 세례성사를 받아 교적에 이름이 올라 있고, 게다가 성경과 교리지식까지 풍부히 갖추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구원을 장담할 수는 없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루카 13,26) 하며 주님과 안면이 있음을 상기시키고, 주님의 가르침의 내용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리 강조해도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27) 하시며 매몰차게 외면하실 것이다.
구원에 이르는 좁은 문으로 우리 모두 파이팅!
좁은 문, 생명의 문 구원의 문
평화신문 2004년 8월 22일
요즘 사회적 관심이 증가하고 있는 대안교육에 대해 연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여러 대안학교를 비교 연구하던 중 특별한 한 학교를 발견하였습니다. 이 학교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 교육이념에 충실한 학교였습니다. 그리고 학생 개개인이 처한 상황과 적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학교였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높은 대학합격률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특별한 학교였습니다. 이런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선생님들의 강한 소명의식과 끊임없는 헌신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학교를 소개하는 소책자를 읽다가 '직업선택의 십계'란 항목이 유난히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①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②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③승진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④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⑤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⑥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⑦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⑧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⑨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⑩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한마디로 요약해서 '좁은 문'을 선택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권고하십니다. '왜 하필 좁은 문입니까? 예수님은 왜 우리를 좀 편하게 두지 않으십니까?'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좁은 문을 선택해야 하는 까닭은 그 문이 생명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넓은 문을 포기해야 하는 까닭은 그 문이 멸망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넓은 문은 누구나 꿈꾸던 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추종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넓은 길을 선택함과 동시에 넓?예루살렘 성문을 당당하게 통과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평생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을 선택하셨습니다. 영예스런 문이 아니라 고통스런 문을 선택하셨습니다. 가파르고 좁고 험한 길인 십자가 길, 치욕과 죽음의 길인 십자가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평생 예수님 길은 좁은 문의 연속이었습니다. 좁은 문만이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문, 생명에 이르는 문, 생명을 구하는 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여정의 각 단계 앞에 놓인 많은 문을 통과할 때마다 우리는 문 크기에 절대 연연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 문이 우리를 어떤 곳으로 이끄는가에 관심을 집중시켜야 하겠습니다.
문 크기나 외적 화려함에 절대로 현혹되지 마십시오. 문이 얼마나 비싼 문인지에 마음이 끌리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보다는 문의 종착점을 보십시오. 거기에 우리 삶의 최종목표이신 주님께서 계시는지를 보십시오.
우리가 끊임없이 넓은 문을 포기하고 좁은 문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좁은 문은 주님께서 통과하신 문이며, 좁은 문 그 너머에 주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은 비록 고달프고 자주 포기하고픈 문이지만 결국 그 문만이 영생의 문이며, 구원의 문이며, 부활의 문이며, 천국의 문입니다.
사실 너무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이시기에 우리 앞에 펼쳐질 구원의 문은 넓기만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넓은 것은 아닙니다. 너무도 완고하고 자기 주장이 강해서 예수님을 받아들일 여유가 조금도 없는 사람들, 과도한 욕심과 지나친 이기심으로 가득차 터질 듯한 영혼의 소유자들에게 구원의 문은 좁기만 합니다.
내 방식만이 최고라는 사람들, 자기 주장을 양보하지 않고 끝까지 관철시키려는 사람들, 언제나 사사건건 따지고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 돈과 권력이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영혼은 너무도 비대해진 나머지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것입니다.
반대로 매일 철저한 자기 반성을 통해 매순간 기꺼이 자신을 비워내는 사람들, 갖은 고통과 번민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과중한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지만 매일 떨치고 기쁘게 일어서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문은 한없이 넓기만 합니다.
좁은 문
이기양 신부님
죽어서 연옥에 가게 된 자매가 사방을 둘러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 곳에 본당 신부님이 계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뜻밖의 장소에서 신부님을 뵙게 되자 어찌나 반가웠든지 큰소리로 인사를 하였습니다.
"아이고 신부님, 저는 신부님께서 계시던 본당의 신자였답니다. 그런데 이런 곳에 신부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잘 아는 신자 방문이라도 오셨습니까?"
그러자 신부님이 황급히 자매의 말을 막으며 속삭이는 것이었습니다.
"쉿! 조용히 하세요. 옆에 주교님께서 쉬고 계십니다."
물론 웃자고 지어낸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 중요한 메시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단지 우리가 신자라는 이유로, 또 신부라는 이유만으로는 천당에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직위보다는 복음적인 삶이 더 중요하다는 심오한 가르침이 짧은 이야기 안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루카 13,26)하고 인간적 친분을 내세워 들어가려고 애원하지만 집 주인은 야박하리만치 문을 닫아 버릴 것입니다.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27). 아무리 성직자와 수도자들과 친분이 있어도 악을 일삼는 자들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말씀하시지요.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 13,30).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지금 첫째인 사람들은 유다 백성들을 뜻합니다. 하느님께 뽑혀서 첫째가 된 그들도 하느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꼴찌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한편 이 말씀은 이방인과 세리들, 그리고 창녀들도 비록 그 출발은 늦었지만 하느님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따른다면 첫째가 될 수 있다는 인생역전의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의 성공 기준은 자녀 교육을 얼마나 잘 시켜서 어떻게 출세를 시켰으며, 재산은 얼마나 모았으며, 얼마나 사회적 직위가 높은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이 조건을 갖추면 첫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요 행복한 집안으로 통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의 기준은 세상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마음에 들고 첫째로 꼽힐 사람의 기준은 마태오 복음 25장 '최후의 심판'에 잘 나와 있습니다. 바로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가난한 사람을 도왔으며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느냐'하는 것이 하느님 뜻을 가장 잘 실천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신자이면서도 하느님 말씀이 아니라 이 세상의 관점을 지향해서 살아가며 그것밖에 모른다면 그는 세상에서는 첫째였을지 몰라도 죽어서 하느님 심판을 받을 때 꼴찌로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살았다면 혹시라도 세상에서는 덜 성공한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하늘나라에서는 첫째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의 아주 구체적인 예가 루카 복음 16장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말씀에 잘 나와 있습니다. 매일 호화롭게 먹고 입고 마시며 잔치를 벌인 부자는 자신의 재산만 믿고 살다가 죽어서 지옥으로 떨어지고, 부자의 집 앞에서 땅에 떨어진 음식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며 개들이 종기를 핥던 거지 라자로는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다가 죽어서 천국에 들었습니다.
세상의 기준과 하느님의 뜻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번번이 선택의 기로 앞에서 갈등합니다. 가난한 이웃을 배려하며, 힘없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함께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에서 첫째 되는 비결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되겠지요?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의 말씀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는 길에 가르치신 내용이다.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이 십자가의 길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도 이 가르침은 어떤 면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포함한다. 그러기에 “선생님,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되겠지요?”(23절)라는 질문은 보다 넓은 의미로 해석된다. 당시 유다인들은 자신이 유다인이라는 것만으로도 하늘나라를 보장받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Meir라고 하는 랍비는 이스라엘에 살고, 거룩한 언어를 말하며 Shema(신명 6,4)기도를 아침저녁으로 암송하는 사람은 하느님나라의 자녀로 간주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와 반대로 어떤 묵시문학계에서는 아주 소수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마치 흐르는 물이 한 방울의 물보다 크듯이 구원받는 사람들보다는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제4에스델 9,15).
그러나 예수께서는 여기서 직접적인 답은 회피하시고 구원에로의 결단을 촉구하시고 그 결단의 절박성을 강조하신다. 문제는 구원받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안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다. ‘좁은 문’과 그 문이 ‘닫혀지게’ 될 시간은(24-25절) 그리스도인들이 짊어져야 할 과제의 어려움과 절박성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다. 어느 누가 이렇게 위대한 선물인 하느님 나라를 두고 시간을 허비할 수 있으며 머뭇거릴 수 있겠는가! “사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 집주인이 일어나서 문을 닫아버린 뒤에는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인님, 문을 열어주십시오’하고 아무리 졸라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고 할 것이다”(24-25절).
만일 문밖에 남게 된다면, 그것은 주인이 갑자기 문을 닫았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와 같은 민족이고, 같은 동네 사람이라는 특권을 내세우며 환상에 빠져 선행을 실천하지 않는 결과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세례를 받았고, 주님의 식탁에서 성체를 영했다는 것으로 하늘나라를 보장받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되고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희가 먹고 마실 때에 주인님도 같이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우리 동네에서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26절). 선을 행한 사람이 아니면 그리스도 앞에 특권을 누릴 사람이 없다. ‘악을 일삼는 자들’(27절; 시편 6,8 참조)과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는 사람들만이 특권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이 선택받은 백성에 속해있다는 특권으로가 아니라, 또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세례를 받았다거나 영성체를 한다거나 교회 안에서 어떤 권한을 받았다거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례에 따르는 의무와 사명을 잘 수행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서 구원받을 사람들을 부르실 것이다. 구원받을 사람이 따로 정해진 것이 아니며, 인간들 스스로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다만 하느님만이 은총과 사랑을 통해 당신의 길로 인도하시어 구원해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선망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차지하고 기쁨을 누려야 하는 것이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30절). 이것은 분명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일이다.
이제 교회는 이러한 상황 안에서 자신의 사명 즉 ‘선교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해 열려진 하느님의 나라의 확장을 통해서 자신을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1977년 8월 3일, 바오로 6세 담화문). 그러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은 우리들이 먼저 항상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즉 우리 자신이 철저히 복음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일부 사람들만이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봉사하는 교회와 같은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삶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선교사명을 충실히 수행하게 하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고 모든 이로 하여금 그 나라를 누릴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이제 우리가 세례 때 받은 그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그에 맞는 삶을 살아 참으로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릴 수 있는 은총을 구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자.
하늘나라엔 어떤 기득권도 인정되지 않는다.
유영봉 몬시뇰
묵상길잡이 :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이 선택된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다가 참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많은 이방인들이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었다. 하늘나라엔 어떤 기득권도 인정되지 않는다.
1. 연옥에서 만난 주교님
본당에서 가난하고 배운 것이 없는 한 아주머니는 본당신부님을 항상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본당 신부도, 그 아주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어느 날 연옥에서 그 신자가 본당신부님을 만났다. 그런데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높고 먼 곳에 계셨던 본당신부님을 연옥에서 만나다니, 한동안 정신이 멍하였다.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본당신부님께 달려가서 “신부님, 저는 신부님 본당의 신자였는데, 신부님이 이곳에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잘 아는 신자 방문이라도 오셨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신부님은 “쉿! 조용히 하세요. 저기 우리 주교님도 계셔요.”하였다고 한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주교님도 아직 연옥에 계셨다.
이 이야기는 물론 꾸르실료 교육 때 할법한 우스개 소리지만, 우리에게 시사(示唆)하는 바가 없지 않다. 인간 세상에서는 신분과 직책의 고하(高下)나 빈부귀천(貧富貴賤)에 따라 사람대접도 다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어떤 기득권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2. 꼴지가 첫째 되는 이변
이 세상에도 예상을 뒤엎는 사태들이 많다. 선거 때마다 모든 언론과 여론조사 기관의 투표소 출구조사에서조차 당선이 확실시된다는 후보가 의외로 고전하고 낙선하는가 하면, 가망이 없어 보이던 후보가 의외로 민심의 지지를 얻어 당당히 당선되는 예를 많이 본다. 불교의 역사를 보면, 불교의 여러 종파 중에서 선종(禪宗)은 깨달음을 얻은 큰스님이 조사(祖師)로 추대되고, 방장(方丈)이 되어 대대로 전수되어 왔다. 그래서 ?달마? 대선사(大禪師)로부터 시작하여, ?혜가?, ?승찬?, ?도신?, ?홍인?, ?혜능?, ?마도조일? 등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과연 누가 다음 대를 잇는 조사(祖師)로 추대되어 방장이 될 것인가??하는 것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조사(祖師)는 수행자들을 불러 모으고 깨달음의 정도를 알아보기 위해 공안(公案)을 내걸고 선문답(禪問答)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평소에 전혀 드러나지 않았던 부엌에서 불이나 지피던 화부(火夫)나 주방장들이 높은 깨달음의 경지를 인정받아 조사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통해 무욕(無慾) 무념(無念)의 경지를 얻고, 진정한 혜안(慧眼)을 갖는 득도(得道)의 길은 세상의 출세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 되겠지요?”하는 질문에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쉽고 편하여 많은 사람이 택하는 길보다는, 어렵고 힘들어 사람들이 외면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다.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선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13,30)고 말씀하신다.
인간 사회에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학벌, 재산, 사회적 지위, 가문, 미모 등등이 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사람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비굴하게 행동하면서도, 어떤 사람은 발톱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람마다 자신에게 남보다 나은 것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나는 너와 다르다.”를 강조하며 “네가 감히 나와 맛 먹으려고?” 하는 자세로 얼마나 으스대고 잘난 체 하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하느님께 선택받은 민족임을 내세우며 비뚤어진 선민(先民)의식으로 꽉 차 있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나자렛 촌놈’으로 여겨 배척하였다. 결국 첫째는 꼴찌가 되고, 이방인들이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던 것이다.
하늘나라에서는 인간 세상의 어떤 기득권도 인정받지 못한다. 오래된 구교우 집안이라고, 집안에 신부 수녀가 많이 났다고, 재산이 많다고, 본당 간부나 직책을 오래 역임했다고 하늘나라에 들어가지는 못한다. 주님께서는 “동녘이 서녘에서 사이가 먼 것처럼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참으로 구원될 사람들 중에 들기 위해서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철저히 하느님의 뜻을 받들며 살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스스로 죽는 십자가의 길 , ‘좁은 문’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쉽고 편한 것이 = 좋은 것’이라는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구원에 이르는 좁은문 : 평범한 삶의 진리를 살자!
홍금표 신부님
우리 민족의 특징을 극단성에서 찾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의 문화를 극단적으로 발달시키는 경향입니다. 중국보다 더 극단적인 주자학, 로마보다 더 로마적인 가톨릭 문화가 그러한 예입니다. 최근 웰빙이란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현상도 그렇고, 개구리가 좋다하면 개구리가 씨가 마르고, 반신욕이 좋다하면 반신욕과 관련된 용품과 방법이 봇물처럼 터지는 현상도 그렇습니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일상적인 건강한 삶에 더해질 때 유용한 것으로 독립적으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닌데도 우리는 그것이 전부인양 한동안 얽매입니다.
이러한 극단을 추구하는 현상은 우리 국민만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일상적인 것보다는 특별하고 이상적인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심과 관련이 있지 않나 여겨집니다.
인기 드라마를 보면 대부분의 내용이 일상적인 가치나 평범한 이야기를 주제로 삼지 않습니다. 탈선이 아니면 꿈속에서나 이루어질 것 같은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드라마들이 「다모 폐인」이나 「파리의 연인 폐인」과 같은 현상을 낳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이야기들이 인간의 욕심에 호소하기 때문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이상적이고 그럴싸하게 만들고자 합니다. 이단의 특징 중 하나가 예수님보다 더 이상적인 사랑과 진리를 추구하고, 예수님이 가르치지 않은 특별한 비법과 신비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욕심을 자극하는 것이 바로 이단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기본적이고 평범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극단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심은 특별한 무엇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열쇠인양 거기에 매달림으로써 기본적인 가치를 소홀히 여기게 되고, 특별함만을 쫓다 정말 중요한 일상을 잃어버리는 부작용을 가져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기본적인 삶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확인시켜 줍니다.
예수님은 먼저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좁은 문은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회개를 뜻한다 합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먼저 구원이란 인간의 의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보여 주면서 그 의향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의향에 맞갖은 의지적인 노력이 있을 때 가능한데 그 노력이 좁은 문, 즉 회개임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삶에 적용되는 기본진리입니다. 요즈음 올림픽이 뉴스의 중심입니다만 모두가 가지고 있는 승리라는 선수들의 바람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피땀이 함께하는 연습과 노력이 있을 때 꿈은 현실이 됩니다.
그리고 『문을 닫아 버린 뒤에는 두르려도 소용이 없다』란 말씀은 구원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는 것, 즉, 때가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은 세상의 일을 하고 내일은 구원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에 대한 경고요, 모든 것을 위해서는 물론 서두를 필요는 없을지 모르지만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26절에서 28절의 말씀. 같이 식사를 했거나 가르침을 받은 것과 같은 개인적인 친분이나, 또는 아브라함과의 육적인 관계 등 그러한 자격은 구원에 있어서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7절의 악을 일삼는 자들(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는 정의의 실천 여부가 심판의 관건임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 말씀은 당시 예수님을 반대하던 유다인들을 향한 말씀입니다만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 여기서 첫째와 꼴찌는 구체적으로 유다인과 이방인을 상징하는 말씀으로, 유다인들에게 지금 너희가 하느님의 선택을 받고 있다고 까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야 할 바는 인생에 있어서는 지금의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불행이 행복으로, 행복이 불행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 인생이요, 구원도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여기에 안주할 수만은 없고, 내일의 나를 위해 오늘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완성(구원)을 위한 회개의 삶이 바로 오늘의 삶이요, 그러한 삶이 첫째가 첫째로 남아 있고, 꼴찌도 첫째가 되는 길입니다.
『구원의 길에 왕도와 특별한 비법은 없다』 『평범한 삶의 진리를 살라!』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 정도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김기성 신부님
우리는 많은 불안함을 갖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 불안함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죽음 이후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갖는 불안함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과연 내가 올바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신앙인이 지켜야 할 많은 것들을 지키고 살아가니까 내가 죽은 후에 하느님은 나를 모른 체 하시지는 않겠지?' '비록 내가 약간의 죄를 짓는다 해도 그보다 더 많은 선행을 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니, 이 정도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오늘 복음을 보면 바로 이런 의혹과 불안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에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불안한 마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 되겠지요?"
한편으로는 자기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일들을 도와주니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기들만은 구원받을 수 있겠지 하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런 자부심을 가차 없이 깨트리십니다. 구원의 문은 좁으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시고, 문을 닫은 후에는 아무리 문을 두드리고 사정해도 열어주지 않을 것이란 말씀을 하신 후에는, 사방에서 많은 사람이 몰려와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사람들이에, 자기들만이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고, 율법서에 적힌 대로만 행동하면 틀림없이 구원받을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기다리던 메시아가 나타나지 않아 항상 불안에 떨며 생활하였습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이 구세주이시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했을 때였고, 예수님을 따라다니기는 하지만 어딘가 불안 했던가 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구원에 대한 확답을 받고자 예수님께 질문을 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구원에 대한 약속을 하시지는 않고 구원에 이르는 문을 좁은 문으로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많은 유혹과 고통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좁은 문을 향하여 가려 해도 갈등과 고통이 따르니 아무렇게나 하고 싶은 대로 사는 넓은 문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힘들다 하여 내가 살고 싶은 대로 넓은 문을 통과해서 살다가 내가 가고 싶다고 해서 좁은 문을 쉽게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한 발짝 한 발짝 그리스도가 제시한 사랑의 길을 걸어가야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다 해도 말입니다. 또한 그 좁은 문은 선택된 사람들만이 통과 할 수 있는 문이 아닙니다. 그 어느 누구라도 노력만 한다면 통과할 수 있는 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이스라엘 사람들같이 우리가 세례를 받았으니 선택받은 사람들이라는 자부심만을 갖고 있다든지, 약간의 선행과 의무를 지닌 신앙생활로 만족하여 머물러 있다면 구원의 좁은 문은 영원히 통과할 수 없는 문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만족함이 없이, 그리고 멈춤이 없이 넓은 문으로 가고 싶은 유혹을 매 순간 이겨내는 싸움입니다. 그 어떤 고통이라도 견디면서 말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서공석 신부님
“많은 사람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 하여라.”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집주인이 문울 닫아버리면 열어달라고 애원해도 소용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집주인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을 열어 달라는 사람들은 주인을 안다고 주장합니다. 주인과 함께 먹고 마셨고 자기들의 동네에서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주인은 그 사람들을 모른다고 말합니다. 주인이 사람을 알아보는 기준은 그 사람이 자기를 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인은 사람의 삶의 빛깔을 보고 그 사람을 알아봅니다. 보지는 못하였어도 삶의 빛깔이 같은 사람들은 “사방에서 모여들 것”이라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인류역사가 있으면서 사람들은 신(神)에 대해 줄곧 상상하였습니다. 유능한 인간이 행세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신을 모든 일에 유능한 분, 그래서 전능한 존재라고 상상하였습니다. 높은 사람이 군림하는 것을 보고 신을 높은 분, 곧 지고(至高)한 존재라고 상상하였습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자가 법을 주고 그 법에 따라 심판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신이 법을 주고 법대로 심판하고 벌 줄 것이라 상상하였습니다. 높고 강한 사람에게 사람들이 공물(供物)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를 바치는 것을 보고 신에게도 제물을 봉헌해야 한다고 상상하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런 신을 가르치면서 그 그늘에서 신의 이름으로 법을 주기도 하고 제물을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은 인간 상상이 만들어낸 그런 신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새로운 지식을 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이 사랑하고 자비로우신 분이라 그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질서가 살아 있는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실현되도록 하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2세기 어느 신앙인 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실천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습니다. “이웃을 탄압하며 약한 자를 짓밟고 재산을 축적하며, 아랫사람들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행위 등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도 않고, 하느님을 본받는 행위도 아닙니다. 이웃의 짐을 대신 지는 자, 이웃에게 베푸는 자, 자기가 받은 것을 이웃이 필요로 할 때 기꺼이 내어주는 자, 이런 사람은 그 혜택을 받는 사람 앞에서 하느님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진실로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입니다”(?디오그네토스에게?,10,6). 그런 본받음이 있는 곳에 하느님의 질서가 실천되는 하느님 나라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시듯이 우리도 이웃에게 베풀어서, 하느님이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사랑해서, 하느님의 일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있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주인이 사람을 알아보는 기준도 바로 이 본받음이 보이는 삶의 빛깔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인류가 상상하는 신을 믿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높고 지엄하신 하느님이 계시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계셔서 그 아들을 통해서 빌면 하느님으로부터 더 많은 은혜를 얻어 낼 수 있다는 신앙이 아닙니다. 각자가 하느님으로부터 재주껏 혜택을 받아내어 자기 한 사람 잘 되겠다는 신앙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에 매료된 사람입니다. 그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실현되도록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사랑과 자비가 우리의 삶 안에 살아 있게 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는 본받음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얻어내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물을 얻고, 지위를 얻고, 건강을 얻는 것이 구원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실(失)이 아니라 득(得)이 구원으로 보입니다. 오늘 복음은 많은 사람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 한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실이 아니라 득을 주는 구원을 찾아 나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노력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소수의 사람이 그 의미를 알아듣고 찾을 수 있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좁은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재물과 지위를 잃을 수 있는 것은 아무나 알아듣고 행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많은 사람이 들어가는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입니다. 사랑과 자비는 자기 스스로를 잃으면서 실천 가능합니다. 소수의 사람이 들어가는 좁은 문입니다.
우리는 재물과 지위를 하느님과 혼동합니다. 그런 것을 하느님이 주시는 특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잃었을 때 하느님이 거두어가셨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좁은 문은 재물과 지위와 혼동되지 않은 하느님에게로 통하는 문입니다. 그런 것과 혼동되지 않는 하느님을 택한 사람들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사랑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이 문은, 우리가 쉽게 탐내는, 재물과 기적으로 통하는 문이 아닙니다. 보잘 것 없는 이, 그러나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이들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면서 들어가는 문입니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신앙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위해 스스로 희생하면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운동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도 사랑하고 자비를 때때로 실천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를 배워 실천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교회 제도 안에 몸담는 일도 아니고 기적을 얻어내는 일도 아닙니다. 하느님께 빌어서, 좀 더 잘 살아보겠다는 길도 아닙니다. 사랑과 자비는 자기 스스로를 잃게 합니다. 득이 아니라 실을 갖다 주는 길입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의미와 보람을 깨닫는, 좁은 문이 열어주는 길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특혜를 받아내는 길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를 위해 자기 스스로를 잃을 줄 아는 사람들의 길입니다. 득을 찾지 않고 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좁은 문이 열어주는 길입니다.
주님, 저는 구원받겠습니까?
최경용 신부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이지만 사실 구원 문제는 모든 인간의 문제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되었다는 사상으로 인해 자기네만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힘쓰는 사람이면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신다. 즉 구원의 보편성을 가르치신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구원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 ‘저는 구원받겠습니까?’라고 질문해야 할 것이다. 주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면 ‘이미’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구원은 죽어야 판결이 나고 완성되므로 ‘아직’ 구원받은 것은 아니다. 구원 받는 조건은 주님을 믿고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승과 저승은 연결되어 있다. 이승에서 잘 살아야 저승에서도 잘 산다.
어떤 이는 자기 조상이 순교 성인이고 자기 집안이 순교자 가문이라고 자랑한다. 또 어떤 이는 자기 집안에 성직자, 수도자들이 있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구원은 순교자, 성직자, 수도자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이 잘 살아야 구원을 받는다. 신자 아내를 둔 어떤 비신자가 ‘자기는 하느님의 사위’라고 자랑하였다. 자기 아내가 하느님을 늘 아버지라고 부르니 자기는 저절로 하느님의 사위가 되었단다. 아무리 하느님의 사위라 할지라도 하느님을 믿지 않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구원은커녕 장인 되시는 하느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일수록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불의를 일삼은 사람에게는 천국 문이 열리지 않는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고 항의해 봐도 소용이 없다. 같은 내용이 담긴 마태 7,21-23을 보면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면서도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였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하는 사람만 알아보시고 불의를 행하는 사람은 모른다고 배척하신다. 사랑이 있는 곳이 천국이고 행복이다. 사랑하면 이미 이 세상에서 구원 받았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비결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주님, 저는 구원 받겠습니까?’
"보편된 정신을 살리자."
배광하 신부님
보편종교
가톨릭이란 ‘공번된’ ‘보편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다 믿을 수 있는 열린 종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 당시 유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경멸의 대상이었던 사람들을 품어 안으셨습니다. 장애자이든, 여자이든, 죄인이든, 세리이든 그들 모두를 받아 들이셨습니다. 로마 제국의 식민지 시대에, 그것도 모든 계층, 성별, 나이, 종교 등의 엄격한 차별이 있었던 때에 모두가 하나 되기를 열망하시며 포용의 참 평화를 사셨습니다. 그로부터 약 20년이 지난 후 스승 예수님의 정신을 꼭 닮으려 노력하였던 사도 성 바오로는 이렇게 외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 27~28)
200년 전 그 같은 놀라운 보편된 가톨릭 신앙의 정신이 양반 선비들에 의해 이 땅에 들어 왔을 때, 그분들은 분명히 가톨릭 정신을 알았고 그 정신을 몸소 실천하며 사셨습니다. 그렇기에 양반, 중인, 상놈, 노비, 천민, 백정의 계급이 뚜렷했던 그 시대에 그 모든 계급의 벽을 부수어 버리고 함께 평등의 삶을 사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호남 교회사 연구소 소장이신 김진소 신부님은 그때의 교우들 감격을 이렇게 쓰셨습니다.
“천주님의 신비가 한 꺼풀 벗겨질 때마다 감격에 자지러졌다. 이 깨지기 쉽고 허약한 뚝배기 같은 인간, 훅 불면 자취도 없이 사라질 허무한 인간, 정승집 개만도 못한 인간이 천주님의 아들이요 예수님의 형제라니, 이제 죽어도 무슨 한이 있겠는가. 천지가 개벽하는 일이었다.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예수님을 통하여 광명의 빛이 이 땅을 찬란하게 비추었다.”
신앙의 인품으로 말미암아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 머리를 숙이고 겸손히 내려오니 그토록 빠른 시간에 복음이 이 땅에 선포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세상 모든 이에게 전해진 것처럼, 동방의 한국 땅에도 전해진 것입니다. 보편된, 가톨릭 그 이름으로 말입니다.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이사 66, 18)
걱정의 소리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 하였습니다. 2000년 전, 200년 전 계급과 신분의 차별이 뚜렷했던 시대에도 가톨릭, 보편 신앙이 가능했었는데, 그 모든 차별이 없어진 오늘날 우리가 보편된 가톨릭 이름 값을 하지 못한다면 예수님과 사도들, 무수한 성인 성녀들의 삶이 가엾어 지는 것입니다.
끼리끼리 모이고, 자신들과 이해가 맞는 교우들과 신앙이 아닌 친목 모임으로 변절되어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편협된 바리사이 종교가 되어 나가는 행태에 걱정의 눈길을 보내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본당은 본당대로 자기 본당에 안주하려 들고, 교구는 교구대로 자신의 교구에만 신경을 쓰는 모습에 가톨릭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워집니다.
어느 목사님은 오늘날 개신교의 잘못에 대하여 이렇게 통탄하셨습니다.
“교회는 성직자들이 장사하는 집이 아니다. 시장 바닥의 상도덕에도 미치지 못하는 신도 쟁탈전, 치부의 수단으로 전락한 십일조의 강요, 그것도 모자라 헌금자 명단까지 주보에 올리는 파렴치한 행위가 공공연히 벌어진다. 또한 한국교회는 죄인을 양산하는 위선과 기만의 장소이다. 교회는 신도들에게 죄의식만을 심어주고 있다. 그 원죄론은 결국 교인들의 돈을 뜯어내는 목회자의 협박 무기로 전락하였다. 개인 기업을 상속시키듯 교회의 목회직을 자기의 왕국처럼 혈통으로 세습시키는 자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 사탄의 자식이라 지탄받아 마땅하다.”
이 말은 비단 개신교 교단에만 국한된 탄식과 비난이 아닙니다. 우리 가톨릭도 어느 사이엔가 비슷한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행하였던 자신들만의 성역을 쌓는 파렴치한 일들을 오늘 우리도 답습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의 신앙의 삶에 물어 보아야할 것입니다. 전통 신앙이라고 자부한다면 그 전통에 걸맞은 너그러움과 보편된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미리 시작하였다고 모두 구원의 문에 입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구원을 위한 끊임없는 받아들임, 좁은 문으로 가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오늘 예수님 진노의 말씀을 우리도 듣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 27)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님
어떤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 천국 문 앞까지 갔는데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어 무슨 까닭인지 앞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앞 사람이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베드로 사도가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는데 본래 얼굴과 다른 사람들이 많아 시간이 걸린다고 했답니다. 얼굴이 다른 사람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성형수술이 유행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우스갯말까지 나올 정도로 외모에 대한 관심이 크다 보니 무리한 다이어트로 목숨을 잃기도 하는 것이 요즘의 현실입니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육신에 대한 관심만큼 우리 영혼도 다이어트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구원의 문이 좁기 때문입니다. 단지 밥을 굶어서 살을 빼는 다이어트는 생명력이 없고, 적당히 영양을 섭취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운동을 하는 것이 건강한 방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 주님!’ 한다고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영양을 섭취하고 실천으로 단련될 때 영혼은 비로소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지요. 우리가 어느 정도로 영혼을 위한 운동을 하고 있는지 성경 말씀에 비추어 살펴봅니다.
음식:“얘야, 살아가면서 너 자신을 단련시켜라. 무엇이 네게 나쁜지 살펴보고 거기에 넘어가지 마라. 사실 모든 것이 누구에게나 좋은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을 누구나 즐기는 것은 아니다. 온갖 사치를 누리려 하지 말고 과도하게 음식을 탐하지 마라. 사실 병은 음식을 지나치게 먹는 데서 오고 탐식은 구토로 이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탐식 때문에 죽었으나 그것을 피하는 자는 생명을 연장하리라.”(집회 37,27-31)
“술 마시는 것으로 남자다움을 과시하지 마라. 술은 많은 사람을 망쳤다.”(집회 31,25)
하느님의 뜻:“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5-17)
세상의 것:“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분노, 격분, 악의 중상, 또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수치스러운 말 따위는 모두 버리십시오.”(콜로 3,5.8)
삶의 자세:“그러니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2베드 1,5-6)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1코린 10,31)
자선:“진실한 기도와 의로운 자선은 부정한 재물보다 낫다. 금을 쌓아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토빗 12,8)
말:“절대로 말을 옮기지 마라. 아무것도 잃는 것이 없으리라. 어떤 말을 들었으면 죽을 때까지 묻어두어라.”(집회 19,7.10ㄱ)
부정 이윤:“상인은 잘못을 피하기가 어렵고 장사꾼은 죄악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많은 이들이 돈 때문에 죄를 짓고 부를 찾는 자는 눈을 감아버린다.”(집회 26,2927,1)
나눔:“계명을 생각해서 빈곤한 이를 도와주고 그가 궁핍할 때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마라. 형제나 친구를 위해 돈을 내주어 그 돈이 돌 밑에서 녹슬지 않게 하여라.”(집회 29,9)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사도 4,32)
자녀교육:“제 자식을 사랑하는 이는 그에게 종종 매를 댄다. 그러면 말년에 기쁨을 얻으리라.”(집회 30,1)
용서:“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사랑:“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걱정:“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마태 6,31)
시련:“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에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1베드 4,12)
재물:“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마태 19,21)
복음선포:“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2티모 4,2)
부모공경:“자녀 여러분, 주님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옳은 일입니다.”(에페 61)
판단:“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 7,1)
이 중에 한 가지라도 완전히 지키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자신 있게 대답하시겠습니까? 구원에 이르는 문은 바늘귀처럼 좁습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야 합니다. 율법교사나 부자는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 18,18) 하며 영원한 생명을 자신의 업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질문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 질문한 어떤 사람은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 하고 아주 조심스럽게 구원받는 것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적다, 많다’로 대답하지 않으시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고 하십니다. 내 역량만큼 힘쓴 다음 나머지는 하느님의 몫입니다. 하느님은 한 탈렌트 받은 사람한테 다섯 탈렌트 받은 사람처럼 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한 탈렌트 받은 사람이 그것마저 빼앗긴 이유는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곧 힘쓰지 않은 것입니다. 행하는 사람은 체험을 통해 영적으로 더 풍성해집니다. 그래서 더 행하게 되고 더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25,29) 빈곤한 과부의 렙톤 두 닢이 예수께 감동을 준 이유도 그녀의 처지에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루카 21,3). 꼴찌 그룹에 속하는, 어쩌면 물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물려받은 것이 별로 없어 창녀와 세리가 된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갈 수 있는 것도 그들이 어떤 특별한 공로를 세웠기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상기해야겠습니다. 그들의 처지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참회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단죄와 구원의 기준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루가는 예수께서 그 일행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상경하고 계심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예수께서 그 도중에 마치 어느 곳도 빼놓지 않으려는 심상으로 여러 동네와 마을에 직접 들러 가르치셨다고 전한다.(22절) 세상의 심판과 구원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루가가 예수님 공생활의 마지막 종착역이 될 예루살렘으로의 상경을 재차 강조하고, 오늘 복음의 첫 부분을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에 관한 질문으로 시작하는 것도 다 그 이유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선생님,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 되겠지요?"(23절) 하고 묻는다. 이 질문은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에 관한 것이다. 동시에 질문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가 적을 것이라는 걱정을 은근히 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숫자에 대한 답을 주는 대신에 ‘좁은 구원의 문’을 언급하셨다. 이 말씀은 오직 하느님만이 알고 계실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를 묻기보다, 묻고 있는 그 사람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는 것이다. 물론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에 따라 구원의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겠지만, 문제는 숫자보다는 좁은 구원의 문을 들어가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여 노력하는 것이다.(24절)
여기서 노력한다는 것은 회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회개는 당장 이루어져야 한다. 회개를 마지막 시간으로 미룬다는 것은 위험천만의 발상(發想)이다. 왜냐하면 구원의 문은 좁을뿐더러 문이 닫히고 나면 다시는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의 문이 한번 닫히면, 거기에는 어떠한 종류의 뇌물이나 억지는 물론, 끈덕진 요구도, 면식(面識)도, 친분(親分)도 통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심판에서 단죄와 구원을 판가름하시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다. 구원의 문에 들지 못한 사람은 모두가 ‘악을 일삼는 자들’이다.(27절) 여기서 심판의 기준이 악행(惡行)과 선행(善行)임을 알 수 있다. 심판의 기준은 예수님과 평소에 식사를 함께 한 것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는 것도,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선(善)을 따라 행동했느냐 않았느냐는 것이다. 줄을 잘 선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선(善)과 정의(正義)를 따라 실천하는 것이 구원받음의 조건이다. 구원은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는 자의 결정에 달려 있다.
이쯤에서 우리는 예수께 “선생님,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 되겠지요?”(23절) 하고 질문을 던졌던 사람이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에 속한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심증을 굳힐 수가 있다. 그들은 자기들 소수만이 선택받은 자들이며, 그래서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오히려 꼴찌가 되고 다른 사람들이 첫째가 될 것이다.(30절) 성조들과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잔치에 이미 들어 있고,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입장을 허락 받았으나, 그들 자신은 정작 문 밖에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구원에 이르는 문은 좁지만,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러나 문에 들 수 있는 사람은 당장 회개하는 사람이며, 회개의 표로 선(善)을 행하고 정의(正義)를 따라 사는 사람이다.
연중 제21주일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김태훈 수사님
시작기도
주님, 성령을 보내시어 당신 말씀을 깨우치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오늘 복음에서 구원받을 사람이 적으냐는 어떤 사람의 질문에 예수님은 각 개인이 받아들여야 할 윤리적인 도전의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예수님에게 구원의 문제는 이처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입니다. 그분은 그 사람의 질문에 대해 ‘그렇다.’라고 말씀하시고, 구원받는 방법을 알려주시면서 모두를 초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루카는 여기서 ‘힘쓰다’, ‘~하려고 하다’로 번역된 두 동사에 개인의 노력을 표현하면서도 두 노력을 구분합니다. ‘~하려고 하다 ’로 번역된 동사는 ‘찾다, 구하다, 청하다, 노력하다, 바라다, 얻으려고 애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힘쓰다 ’라는 동사의 어원은 ‘전투, 격투, 분쟁’이란 뜻을 가진 명사로 원래 ‘무기를 가지고 싸우다, 적과 싸우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여기서 ‘경쟁하다, 전투적인 열정으로 노력하다’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많은 사람이 나름대로 구원받으려 노력하지만 단순한 노력, 바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전쟁에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우듯 맹렬히 노력해야 합니다.
구원을 위해 철저히 노력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도전은 바로 이어지는 비유에서 강화됩니다. 집주인은 손님들이 오자 문을 닫아버립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계속 문을 두드리면서 주인이 뭔가 실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 생각에 자신들은 집 안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이 잔칫상에 앉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이 말씀을 통해 잔칫상에 앉기 위해서는 선을 행해야 하고 들은 것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들에게는 바로 이 모습,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에 대한 이런 노력의 측면뿐 아니라 다른 측면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오늘 복음은 큰 단락으로 나뉘는 13,10-14,35 안의 소단락을 형성하고 있으면서, 그 안에 있는 혼인잔치의 비유(14,15-24)와 병행구조를 이룹니다. 이 혼인잔치의 비유에서도 하느님 나라를 잔칫상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이 인간의 노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혼인잔치의 비유에서는 하느님의 주도권과 은총이 강조됩니다. 곧 사람들이 잔칫상에 앉을 수 있는 것은 그분께서 초대하고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이 잔칫상에 초대된 사람들이 보여주듯 자격이 없을지라도 초대에 응답하기만 하면 그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루카는 병행구조를 이루는 두 본문으로 완성적인 구원의 측면을 묘사합니다. 곧 구원은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의 노력이라는 두 요소의 완벽한 합작품인 것입니다.
그리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구원의 또 다른 측면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는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중이었습니다. 루카는 9장 51절에서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곧 하늘나라를 향한 여정은 바로 그분의 수난, 죽음, 부활을 가리키며 바로 이 문맥 안에서 좁은 문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좁다’라는 단어 자체도 이미 어려움과 고난을 함축적으로 표현합니다. 이는 병행 구절인 마태오복음에서 사용된 ‘비좁은 ’이라는 단어가 신약성경에서 사용될 때 자주 ‘환난’을 지칭하는 것에서 더 확실해집니다. 그렇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곧 구원을 원하는 이들은 예수님처럼 자기의 십자가를 껴안고 그 십자가를 통해 자신을 향한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루카 14,27)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방식을 따라 자신을 내맡기며 구원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묵상(Meditatio)
많은 성인이 “죄를 짓기보다 죽는 것이 낫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곧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을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하느님과 이룬 일치의 단맛과 소중함을 깊이 알수록 더 강해집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그 삶을 위해 ‘목숨을 다하는’ 노력은 내 노력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은총의 선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당신과의 친교를 바탕으로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갑시다.
기도(Oratio)
주님, 저를 영원의 길로 이끄소서.(시편 13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