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가 한참 어렵던 98년도에 30여년간 다니던 회사를 퇴직하고 나니 살아온 날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앞만 보고 열심이, 그리고 무사히 살아온 것에 대하여 감사하며 그 일부라도 사회에 반환하자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병원에라도 봉사한다며 최일도목사님이 운영하는 청량리 다일 공동체 천사병원에 자원봉사를 하려고 교육을 받고 있던중 2002년도 코익카 해외자원봉사자를 모집한다는 것을 알았다. 일종의 재능나눔 해외자원봉사였다. 시험과목은 영어와 전공 그리고 면접이었다. 전공은 회사에서 콤푸터 분야 근무를 하였기에 문제가 없으나 영어는 문제였지만 배우면 쓸데가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갖고 퇴직 후 일년간 Full Day 로 영어를 학원에서 배운 것이 도움이 되었다. 나이 제한이 만 61세로 한다는 것을 확인후 몇 달이 남아 스리랑카 컴퓨터분야에 지원하여 선발되었다.
그곳에 가기 전 이천에 있는 유네스코 문화관에서 해외봉사에 필요한 사전 교육을 마쳤다. 2002년 11월 에 스리랑카로 출발할 때 방송국 기자가 나의 활동을 소개한다며 동행하여취재했다. 취재 녹화하는 과정에서 얼결에 서투른 배우가 되어 NG도 많이 냈다. 이렇게 시작한 나는 콜롬버에서 한20키로 떨어진 곳에 한국정부에서 세워준 한국-스리랑카 기술 및 직업훈련원에서 미취업 청소년을 대상으로 컴퓨터강사로서 2년간의 기간을 마치고 2004년 12월 20일 돌아온후 일주일도 안되어 그곳에 스나미가 일어나 나를 아는 분들이 나를 걱정하여 전화들을 받았다.
그곳에 가서 첫 컴퓨터강의시간에는 긴장을 하여가며 열심이 강의를 하고 알았냐고 물었더니 몰라서 미안한 듯 고개를 천천히 가로 젖는다. 그래서 말이 서틀러서 그런가하고 그림을 그려가며 다시 또 반복해서 열심이 설명하고 다시 물어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불편한 마음으로 교무실에 들어가 현지선생을 불러내어 사실이야기를 했더니 웃으면서 교실로 같이 가자고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들은 예스의 대답을 우리와는 달리 좌우로 옆으로 설래 설래 흔든다.
그곳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좋은 인상을 남기기위해 노력했다. 어린이 구호기관인 유니세이프에 작은 금액이긴 하지만 기부를 하기위해 은행에 찾아가 지로 번호를 물으니 모른다기에 그러면 유니세이프 사무실에 전화를 하여 계좌번호를 물으니 알려 줄수 없다며 하고 싶으면 와서 하라고 하며 끊는다. 아마도 그들 생각은 자선은 그들을 위하여 하는것이 아니고 내자신을 위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것으로 같다. 다른 은행으로 다시 찾아가 매너저를 만나서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앞수표를 만들어 우체국에가서 보내라기에 우체국 수수료를 주고 부탁하고 돌아왔다. 또 양로원 생활은 어떤지 호기심에 내가 사는 집주인에게 물어서 작은 생필품을 사가지고 그와 같이 갔더니 가지고간 물건을 납품 검사하는 식으로 조사를 하더니 일주일 후에 감사하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이런 이야기들을 학생들에게 이야기하면서 나는 이곳에 컴퓨터 교사로 오긴 했어도 인성교육도 이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우리함께 고아원에 위문 방문하자고 말했더니 좋아했다. 방문 승인을 훈련소장에게 허가를 맡아야한다기에 그것은 내가 하겠다고 하고 그곳에 갈 때 발생하는 비용의 반은 내가 나머지 반은 참가학생둘이 부담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 결정한 날자와 장소에 간다고 소장에게 보고한 다음 학교버스 빌려 연료를 채운다음 고아원에 갔더니 아무도 보이지를 않는다. 이곳은 불교국가라서 그런지 모든 자선단체들은 불교단체에서 운영한단다. 그러기에 고아원도 사찰에서 운영하는데 주지가 출타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누가 위로나 격려차 방문한다면 당연이 책임자들이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손님을 맞이 하는데 그곳에 아무도 없었다. 현지교사가 다음에 다시오면 어떻냐고 하는데 생색 내러간것도 아닌데 그럴수없다며 그곳에 가저간 적은 선물들은 그곳에 맡기고 같이 간 학생들은 아주어려보이는 동자승에게 경배(인사)를 드리는데 진지하다. 돌아 오면서 학생들에게 날이 무덥기에 얼음케이크를 사주었더니 줄거워하는 모습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곳 있는 동안에는 근무처 근처에 숙소를 구하여 혼자서 자취를 하면서 생활하였기에 현지인과 친해지려고 노력을 많이 하였다. 그래서 이들에게 사진을 찍어줄려고 했다. 인화비용을 생각하여 가족사진을 찍어줄려고 했다. 광고문을 만들어 현지인에게 공짜로 사진을 찍어준다고 설명을 하니 처음에는 의심을 하기에 사진을 줄때 돈을 달라면 안 찾으면 된다고 설득하면서 촬영한 다음 사진을 갖다 주니 그제서야 믿고 마음을 열었다. 아침에 학교로 가면서 만나는 어린이들에게는 사탕을 주어서인지 그뒤 로는 만날 때 마다 말은 잘 안 통하지만 미소로 반갑게 인사 하였기에 그런 내용들을 이메일로 ' 좋은 생각' 잡지사에에 보냈더니 기사화해주었다.
그곳에 생활하면서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집을 새로 짓는 공사장에는 지붕처마 밑에 목매달아 죽은 마네킹을 걸어놓아 섬짓함을 느낀다. 이상하여 현지인에게 물었더니 집을 짓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면 복이 안 들어와 처다 보지 못하도록 하기위하여 일부러 무섭게 사람이 목매 달린 것처럼 마네킹을 매달아 걸어놓는다고 했다.
처음 6개월 동안은 강의 자료를 만드냐고 눈코 뜰새 없이 바쁘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여유가 생기자 건강관리에도 신경을 써 조깅을 하여 토요일이면 10키로 정도를 땀좀 흘려가며 돌아다닌 덕분에 그곳에서 열리는 단축마라톤(6키로 FUN RUN)대회 장년부에서는 참가하였다가 일등을 했다. 대회장에서 출발할 때 나는 단거리이기 때문에 처음에 처지면 딸아잡을수없다고 생각하여 처음부터 선두를 유지하고 맨앞에서 경찰 선도차를 따라가고 있었다. 갑자기 그차가 멈추었다. 이상한 생각으로 앞을 보니 공교롭게 기차횡단도로였다. 저편에서 기차가 우리측을 향하여 달려오는 중이다. 나는 횡단도로를 뛰어 건너갔다. 그순간은 내가 맨선두 그리고 선도차 그리고 선수들이였다. 그렇지않아도 맨앞을 달렸는데 기차가 막아주었으니 당연이 1등을 했다. 난생 처음으로 뜀박질로 상금을 받았다. 그것으로 포식했다.
2004년 12월 근무기간이 만료되어 해냈다는 성취감과 이곳을 떠난다는 아쉬움에 이들에게 나와 한국의 좋은 이메지를 남기기 위해 달력에 있는 우리나라 명소사진들을 오려서 마을근처 유치원에 사탕과 함께 갖다 주었더니 경치가 멋있다며 어디냐고 묻기에 한국의 아름다운 경치라고 설명해했더니 그곳 유치원교사와 어린꼬마들이 좋아했다던 추억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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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 시절를 회상하면 생각지 않게 신문 티브, 라디오등의 매스콤에 소개되어 줄거움과 당혹스럼도 없지는 않았으나 내 자신으로 볼때는 전혀 선생 경험도 없는 내가 어설픈 영어로 현지인을 상대로 무사히 마치고 왔다는 자부심과 다른 문화를 경험하여 좋은 추억을 가진것에 기쁘다. 또한 행복은 물질에 있기는 하자만 그보다는 정신에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봉사는 남을 위한다며 시작을 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에게도 보람되고 의미있는 삶이된다는 사실을 체험하기도 했다.
동아닷컴에서 저의이름을 검색하면 나타나는 볼수있는 금주의 인물로 소개되었던 추억의 사진.
일등 상금으로 돈 봉투를 받는 장면(우리가 생각하는 시상식 장면과 너무나 다르지요?)
첫댓글 선배님의 글을 읽으면 나의 지나 온 과거가 회한으로 다가 오네요..
하려고만 하면 얼마든지할 수 있었던 환경이였었는데
왜 당시의 환경에 만족하며 안주하고 있었던가 하고요.
늦다고 생각할 때가 기회라고 말하지만 이젠 기억력도 가물 가물 하니 ....
혜리미님 관심을 가지고 댓글을 주신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기회가 지나갔다는 부정보다는 앞으로 얼마든지 다른 기회가 있을것이란
긍정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첫주일인 월요일 보람되고 즐겁고 행복하세요.
양병택선생님 올려주신 스리랑카의 자원봉사의 이야기 자세히 읽어보았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어볼때마다 많은것을 느낌니다.
퇴직후에 이렇게 값지게 국위를 선양한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훌륭한 삶의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여러가지의 방법이 있으나 너무나 가치가 있고
훌륭하다는 말씀을 않 드릴수 없습니다. 삶의 이야기방에 이렇게 좋은 글이 올라온다는것은 저로는 굉장히 고무적인 일입니다.
우리나라가 저 먼 남아프리카의 스리랑카에 가서 민간자격으로 컴프터 교육을 지원하시고 그나라의 국민들과 함께 호흡을 했다는 것만도 자랑입니다.
감사합니다
과찬에 송구스럽고 감사합니다. 스리랑카는 옛날에는 세이론이라고 하던 인도밑 코딱지만한 섬나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