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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씨는 동남아 여행을 앞두고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콘돔을 챙겨가지고 갈 것인가. 아니면 그냥 갈 것인가가 그것이었다. 마지막 날까지 마음의 결정을 하지 못하던 찬씨는 결국 ‘가져간다 해서 꼭 쓰라는 법은 없지.’ 하는 생각으로 집에서 쓰던 콘돔 두개를 커다란 여행용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의 아내는 커다란 여행용가방과 호박덩어리만한 배낭을 리무진정류장까지 실어다 주며 한마디 했다.
“뭐 빠뜨린 건 없죠?”
리무진계단에 한발을 올려놓고 돌아보며 찬씨는 아내에게 짧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걱정 마!”
아내는 밝게 웃어 보였다.
“내가 부탁한 것 잊지 마!”
찬씨는 대답대신 리무진의 넓은 창 너머에 서있는 아내에게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모아 보여줬다. 그의 아내가 손바닥을 활짝 펴 보이며 밝게 웃었다.
씨엠렙 공항에 내리자 왼손에 검은 무전기를 든 공항안전원인 듯한 여성이 오른손을 활짝 펴 보이며 밝게 웃었다. 베트남 항공소속 VN939기가 인천공항을 이룩하여 호치민을 경유 캄보디아 씨엠렙까지 장장 일곱 시간을 나르는 동안 처음 보는 미소였다. 이해 할 수 없는 그 친절과 미소는 박찬씨 일행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워메 자가 날보고 쪼개뿌네 이.”
“아따 착각도 심해뿌네 이."
동갑이자 막내격인 싹쓸이와 노커팅이 농을 주거니 받거니 공항을 빠져 나왔다. 막내라고 하지만 변수와는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아 친구나 다름없었다.
찬씨의 일행은 그를 포함해 다섯 명이었다. 문화부서와 마케팅기획실에 근무하는 일명 싹쓸이와 노커팅, 나이가 제일 많은 노씨, 노씨는 나중에 ‘분위기 작살’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리고 이번 여행의 총무격인 ‘변수’, 변수는 이번 여행자들 중 중간나이인 마흔셋 이었다. 그들은 모두 같은 회사의 다른 부서에 근무하는 사람들로서 상반기 우수 직원으로 선발되어 전액 회사부담으로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여행하게 되었다.
인천공항에서 베트남 항공기에 오르며 빨간 아오자이를 입은 스튜어디스들에게 농을 건넬 때만해도 고무공처럼 부풀었던 싹쓸이와 노커팅, 그러나 한번도 마주보고 웃어주지 않는 스튜어디스들의 사회주의적 표정에 어느 정도 기가 죽어갈 무렵 보여준 캄보디아 공안원의 미소는 그들의 가슴에서 사그라지던 불씨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노씨’가 노커팅의 발뒤꿈치를 운동화발로 툭 걷어찼다. 노커팅이 돌아보며 ‘선배님 왜 그러세요?’하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마주보며 픽 웃었다. 마치 공범을 앞 둔 자들의 의기투합 같은 그런 웃음이었다. 그들은 모텔 같은 호텔에 여장을 풀자말자 술집으로 몰려갔다. 전력사정이 안 좋은 씨엠렙의 밤은 몹시 어둡고 후덥지근했다.
다음날 아침 아홉시에 호텔 로비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들이 10시가 되어서야 다 모였다. 찬씨는 도대체 어제저녁 어떻게 호텔까지 왔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어두운 술집에 아가씨가 있고, 춤을 추고, 좀 호기를 부리고……뭐 그런 것 들이 여기저기 끊긴 필름처럼 생각의 퍼즐이 잘 정리되지 않았다. 싹쓸이와 노커팅이 제일 늦게 나왔다.
“너덜 어제 저녁에 알밤 깐겨?”
나이가 제일만은 노씨가 졸린 눈을 비비며 말 했다.
“아따 성님, 분위기 파악 좀 합시다 이.”
노커팅이 뭔가 섭섭하다는 투였다.
“무슨 일들 있었어?”
노씨보다 두 살 아래지만 변수 보다는 두 살 위인 찬씨는 아무래도 어제 밤 일이 가물가물 했다.
“자자 늦었으니 빨리 출발이나 합시다.”
변수가 총무 역할에 충실 하느라 서둘렀다.
그들은 길거리에서 한 그릇에 1,000리얼 하는 국수로 아침을 때우고 곧바로 앙코르투어에 나섰다. 거리에 서자 쾌쾌하고 후덥지근한 9월의 햇살이 사정없이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일행이 맨 먼저 관광을 할 곳은 앙코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곳에는 앙코르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재청의 의미를 갖고 있는 앙코르(Encore)는 캄보디아의 앙코르(Angkor)를 본 프랑스인들이 감탄사로 앙코르를 연발한 것에서 유례 되었다고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앙코르와 앙코르와트를 혼동하고 있지만 앙코르는 수많은 유적이 산재한 광범위한 정글 전체를 이르는 말이고, 앙코르와트는 앙코르에 속해있는 유적들 중에 한 유적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앙코르톰은 앙코르와트와는 1.3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과거 크메르인들의 수도에 해당하는 성이였다.
찬씨 일행은 먼저 앙코르톰으로 향했다. 여행 가이드북에 먼저 앙코르톰부터 가야 된다고 그렇게 써져있다는 노커팅의 안내에 따른 것이었다. 다른 의견을 내 놓을 만한 아무런 이유도 사전 지식도 없었다. 일행은 택시를 잡아타고 이동했다. 시내는 조용해 한국의 조그마한 읍내 같았다. 자전거 뒤에 벌렁 눕혀 묶인 채로 실려 가는 돼지가 보였다. 찬씨는 얼굴에 선텐을 바르고 모자를 꾹 눌러썼다. 개 두 마리가 아침부터 길가에서 혀를 빼물고 헐레를 붙고 있었다. 시내랄 것도 없는 거리를 벗어나 앙코르톰 쪽으로 가자 오토바이 뒤에 타고 역시 유적지로 향하고 있는 서양인들이 많이 보였다. 자그마한 캄보디아인 뒤에 커다란 사람들이 붙어있으니 모습이 상당히 우스웠다.
시내를 벗어나자 도로는 비포장이었다. 어제 밤 한차례 내린 비로 비포장도로는 젖어있었다. 흙들이 모두 빨갛다. 그래서 온통 세상이 갈색인 느낌이다. 물이 어느 정도 마른 웅덩이의 진흙은 왠지 파다가 무언가를 만들어 봐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잘 개어져 있었다. 입구에서 입장료를 받는다. 1일 권은 20달러, 2~3일 권은 40달러란다. 총무가 공동경비로 입장권을 샀다.
앙코르톰은 앙코르왕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라 일컬어지는 자야바르만7세(통치; 1181~1201년)에 의해 세워졌다. 한국으로 말하면 고려 최충헌 집권 무신정권 시작 시기가 아니가 싶다. 각 변이 12km에 이르는 성벽을 8미터 높이로 쌓았고, 다섯 개의 성문을 냈으며 그중 남문이 가장 잘 보존 되어 있었다. 성문의 꼭대기에는 네 방향으로 똑 같은 아발로키테쉬바라 보살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었다. 온화하고 근엄한 표정이 여행자들의 기를 조금 죽여 놓았다. 성문 앞에 있는 다리의 왼쪽에는 54명의 신이, 그리고 오른쪽에는 54명의 악마가 있었다. 이 조각의 주제는 앙코르와트의 유명한 부조 중 하나인 우유의 바다 젓기에서 따온 것이라고 했다.
“어디가나 신과 악마는 싸우는구만.”
“그런데 왜 신은 악마를 한방에 못 날리지?”
뭐 그딴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일행이 남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쭉 뻗은 길을 따라 양쪽으로 하늘을 찌를 듯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울창한 숲이 나타났다. 시내 쪽으로 나가는 자전거 행렬이 줄을 잇고 있었다. 숲이 끝나자 길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그 앞에 바욘사원이 고성처럼 버티고 있었다.
바욘사원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층과 2층은 사각형이고 3층은 원형을 이루고 있었다. 1층에는 외벽을 따라 돌아가면서 부조가 새겨져 있었다. 당시의 생활상과 앙코르 왕국의 역사를 새겨 넣었는데 결론적으로는 왕권강화를 위한 신화창조 임을 느낄 수 있었다. 부조물을 이리 저리 보고 있는데 일행과 떨어진 한국인 아저씨 한분이 슬쩍 벽면을 보더니
“아~ 대단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군.”
그렇게 말말하고 총총히 사라졌다. ‘대단한? 도대체 무엇이 대단하단 말인가?' 찬씨는 대단하다고 말하는 유산과 정말로 대단하게 버려진 사람들, 관광지 주변의 1달러를 구걸하는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에게 쏘리라고 말하자 ‘Sorry can not get me anymore’로 답변하던 소녀의 잔상을 떠올렸다.
안으로 들어가 올라가 보니 큰 얼굴의 탑들이 밖에서보다 선명히 드러났다. 보살형의 얼굴이 탑의 4면을 둘러싸고 있는데 어느 방향에서 봐도 똑같았다. 탑이 한두 개가 아니라 사원 전체에 우후죽순처럼 솟아 있었다.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관음보살이 흥 하고 콧김을 불어내는 것 같아 몹시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야 큰 바위 얼굴 산 같다.”
어디선가 한국말이 크게 들렸다. 돌아보니 대부분이 한국 사람이었다. 사원의 북쪽 출구로 나오는데 허름한 불상이 하나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향을 피우며 노 승려가 앉아 있었다. 사람처럼 불상도 아파 보였다. 노씨가 1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시주하고 노 승려와 사진을 찍었다. 승려가 노씨 몫으로 향불하나를 피워 꽂았다. 사원을 나오자 귀에 익은 소리가 또 들렸다.
“오 빠 미 남 이 다 세 개 완 딸 라.”
꼬마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놈의 데는 어딜 가나 물건을 파는 아이들 아니면 거지들이 벌떼처럼 달려든다. 단체 관광객들이 예쁜 꼬마 여자의 물건만 사준다. 마음착한 총무도 1달러를 주고 조잡한 손목걸이 세 개를 산다. 노씨도 따라 산다. 아이들이 더 많이 몰려든다. 일행이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빠져나오지를 못한다. 찬씨는 그것을 향해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오 빠 미 남 이 다 세 개 완 달 라.”
“노오, 땡큐.”라고 하자 그중 한 여자아이가 흉내를 내면서 까르륵 웃는다. 한국말을 따라하며 부지런히 쫓아다닌다. 일행은 빠르게 바프온 사원 쪽으로 거름을 옮긴다. 인기 연예인이 팬들을 끌고 가듯 그대로 아이들을 몰고 간다. ‘세 개 완 달러.’가 ‘네 개 완 달러.’로 바뀌더니 마지막에는‘다섯 개 완 달러.’까지 가격이 내려간다. 윤곽이 뚜렷한 얼굴 형태와 깊숙이 박힌 까만 눈동자가 슬프다. 찬씨도 1달러를 주고 손목걸이 다섯 개를 산다. 사원 안으로 들어서자 신기하게도 더 이상 따라오지 않고 돌아서서 조용해 졌다.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있고 인적도 한적한 왕궁 터를 돌아서 나오다가 보니 코끼리 모양의 테라스가 있었다. 이곳이 그 유명한 코끼리 테라스구나! 마구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한다. 크메르 왕국의 행사가 있을 때 사용되었다고 하는 테라스 앞쪽에 잔디가 넓게 깔려있어 마야 유적지에서 본 축구장이 연상되었다. 잔디 곳곳에는 끼워 맞추는 데 실패한 커다란 돌조각들이 소똥처럼 흩어져 있었다. 유적 곳곳에 소가 있었다. 사원과 관광객과 소가 공존하는 곳이었다.
날씨가 몹시도 청명했다. 어제 밤 한차례 소나기를 퍼부은 덕분이것 같다. 찬씨는 목이 말랐다. 가지고간 물 한 병은 이미 다 마셔 버렸다. 한 병 살려고 하니 1500리엘이란다. 1달러를 주니 거스름돈이 없다며 두 병을 사란다. 두 병을 사니 1000리엘을 거슬러 준다. 요상한 계산 시스템이다. 씨엠렙에서는 캄보디아 현지화인 리엘, 미국달러, 그리고 태국 바트화가 동시에 통용되고 있었다. 1달러는 약3800리엘이며, 태국 화폐로 35바트였다. 모든 가격은 달러로 게시되어 있으며, 1달러 미만일 경우에는 달러화를 내고 거스름돈은 리엘로 받았다. 코끼리 테라스를 끝까지 걸어가니 문둥이 왕의 테라스가 나왔다.
이곳에는 스카프를 파는 어린이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조금은 짜증스럽다. 코끼리 한번 타는데 30불이란다.
“워메 뭔 놈의 코끼리 조깨 타는디 30불이나 받는다냐 이?”
노커팅이 탈것도 아니면서 볼멘소리부터 한다.
“아따 사람 타는데도 50불인데 저 큰놈의 코끼리를 타는디 30불이면 싸제 이!”
싹슬이와 노커팅이 킥킥거렸다.
노씨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들이 본래부터 별명이 싹쓸이와 노커팅이 아니었다. 어제 밤 술집에 놀러온 현지 처녀들 두 팀이 있었는데 각각 세 명씩이었다. 노커팅이 가서 한 팀을 섭외 해가지고 합석을 했는데 여자 셋에 남자가 다섯이라 짝이 안 맞는다며 싹쓸이가 일어섰다.
“나가 가서 싹 쓸어 와불제.”
그래 그냥 그 현장에서 노커팅이 싹쓸이에게 싹쓸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아가씨들이 ‘싹쓸이, 싹쓸이’하면서 좋아했다.
다시 모토를 타고 동쪽으로 조금 더 달리니 타프롬 사원이 나타났다. 앙코르톰의 신비함과 앙코르와트의 웅장함도 좋았지만 과거의 영광과 오늘의 몰락을 통해 세상사의 무상함을 느낄 수 있기에는 타프롬만한 곳은 없었다. 자이아바르만7세가 그의 어머니를 위해 지었다고 하는 이 사원은 거의 폐허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 폐허의 잔재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영화 ‘툼레이더’의 촬영지이기도 했던 그 곳은 수백 년 묵은 나무가 돌과 벽 틈에 뿌리를 내리고 사원의 벽을 뱀처럼 휘감고 있었다. 인간만이 자연 속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닌가 보다. 인간이 자신들의 편리함이나 혹은 욕망을 위해 만든 문명이라 불리는 잔재물 들도 결국은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한 꼭지의 영화처럼 증명해 보여주고 있었다.
문을 통과하니 양쪽으로 숲이 있고 사원까지 쭉 뻗은 오솔길이 이어졌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생긴 돌무더기들이 아주 작은 나무막대기가 지탱하고 있었다. 곳곳에 ‘무너질지 모르니 지나가지 마시오.’라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야 한글 안내문이 다 있네!”
노씨가 반갑게 안내문을 읽었다. 그러나 찬씨는 그것을 보며 조금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나 한국인들이 설치고 다녔으면……’시멘트로 땜질을 한 돌과, 무너져 내린 담장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니 ‘앗, 저거였구나!’ 하는 것이 있었다.
엄청난 돌로 이루어진 사원의 건물틈바구니에 한 아름도 더되는 뿌리를 박고 똬리를 틀은 거대한 나무뿌리가 악마의 손으로 사원을 거머쥔 듯한 모양을 하고 있고, 그 거대함에 짓눌린 사원은 점점 무너져 내려가고 있었다. 패키지로 온 다른 관광객 가이드 이야기를 귀동냥으로 들은 것에 의하면 그 나무뿌리를 제거하자니 사원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것이고 그대로 두자니 나무뿌리가 더욱 굵어지면서 사원의 틈바구니를 넓혀 결국은 무너지게 할 것이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고 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것을 보면서 찬씨는 첨에는 가슴이 뭉클했고, 그 다음엔 자연이라는 것의 힘에 놀랐고, 그 다음엔 아등바등 살아가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모습이 떠올랐고, 그 다음엔 착하게 살아야지라는 다짐을 한 번 더 했고, 그 다음엔 이건 사람의 뜻이 아닌 것 같아 하는 생각을 했고, 공연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야! 인디애나 존스 같다.”
또 한국말이 들렸다. 이국에서 들은 조국의 말, 그것은 반갑다기보다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을 들켜버린 느낌이었다. 마지막 모퉁이를 돌아 사원을 빠져 나오니 한 낮이었다. 현지인들의 씨에스타 시간이었다. 온몸이 땀에 젖고 어깨가 앙코르유적의 돌덩이를 짊어진 듯이 무겁다.
“어디 가서 션한 매주나 한잔 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유.”
노씨가 ‘유’자를 길게 빼며 찬씨를 바라봤다. 그러나 다른 일행들은 어제 밤 과음한 탓인지 별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발 마사지나 받으러 갑시다. 이곳은 발마사지가 유행이라 든데.”
총무의 말을 따라 모토를 잡아타고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오토바이 뒤에다 포장마차 같은 것을 달고 다니는 것인데 서로 마주보고 다섯 명이 충분히 탈수 있었다. 5달러란다. 흥정을 끝내고 모토에 올라탔다. 찬씨는 마사지하는 곳이 혹 그런 곳이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서서는 10불, 누워서는 20불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혼자 마다하고 나올 수도 없고 ……좀 외설스런 이야기지만, 여행자들의 우스갯소리에 의하면, 어느 나라든 문호개방을 하면 외화벌이로 여자들이 제일 먼저 나선다는 속설이 있다. 마사지센터 입구에 들어서니 상상보다 시설이 쾌적했다.
1인당 20달러란다. 발마사지를 받으며 마사지 걸과 서투른 영어로 수작을 건다.
“하우올드아유?”
마사지를 하던 손을 멈추고 아가씨가 얼굴에 물음표를 지의며 올려다본다.
“하우, 오드, 아, 유?”
찬씨도 따라서 눈을 크게 뜨고 내려다본다. 아가씨가 고개를 옆으로 살래살래 흔든다.
“못 알아 듣나봐, 몇 살이냐고?”
노커팅이 짜증을 냈다. 그러자 아가씨가 활짝 웃으며 오른손가락 두개를 먼저 펴 보인다음, 다시 손가락 세 개를 펴서 내밀었다.
“투앤티 쓰리.”
“허 이년이 한국말을 알아듣네. 너 결혼 했냐?”
또 아가씨가 고개를 옆으로 흔든다.
“안 했어?”
그래도 아가씨가 고개를 옆으로 흔든다.
“야야 못 알아 듣나보다. 유아 씽글 오어 따불?”
싹쓸이가 대충 영어를 만들어 낸다. 그래도 아가씨가 고개를 옆으로 흔든다.
“해브 유어 보이프랜드?”
아가씨가 “노우 프랜드!”하며 활짝 웃는다.
“왜 쪼개 이년아?”
그래도 웃는다. 정말 잘 웃는 민족이다. 가만히 보니 그들은 어떤 말은 한국말을 어떤 말은 영어를 듬성듬성 알아들었다. 발마사지가 끝나고 팁으로 1달러씩을 주었다. 하루에 한명내지 두 명의 손님을 받는 그녀들은 오직 팁만이 수입이라고 했다. 일행 중 노씨와 찬씨는 2달러씩을 주었다. 2달러를 받은 아가씨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악수도 하고 포옹도 하고 두 손을 흔들며 이산가족처럼 아쉬워하며 마사지센터를 나왔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아봤다. 큰 길 주변에 있는 바욘식당에서 어린코코넛에 담아주는 치킨카레가 일품이란다. 상당히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나지만 가격이 대부분 2~3불이었다. 맥주 곁들여 이것저적 시켜먹는다. 꼬마 거지가 다가온다. 거지들과도 편하게 눈을 마주칠 수가 없다. 작은 돈을 줄 수도 있었는데 쉽지 않다. 돈을 주는 것이 도움이 될까? 아니면 돈을 주지 않는 게 도움이 될까? 소녀는 옆자리에서 200리엘을 얻는다. 한국 돈으로 약 60원이다. 좋아하는 표정이 아니다. 하긴 그 돈으로 뭘 할 수 있겠는가. 푸짐하진 않지만 적지도 않은 밥과 반찬과 차가운 맥주를 앞에 놓고 앉은 찬씨는 부자여야 하는가.
음식을 남긴 것이 미안하게 느껴졌다. 소녀는 여전히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닌다. 찬씨가 남은 음식을 싸서 소녀에게 줬다. 소녀가 그것을 비닐봉지에 담는다. 어머니를 가져다 줄 것인지 개밥으로 쓸 것인지 알 수는 없다. 작은 연민내지는 사치에 대한 미안함으로 소녀에게 남은 음식을 건넸을 뿐이다. 소녀는 여전히 얼굴에 미소가 없다. 소녀는 언제 행복해 질까? 10달러를 건넨다면 행복해 할까? 일행은 식대를 지불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녀는 주변을 맴돌며 구걸에 열중하느라 찬씨 일행이 자리를 떠나건 말건 관심이 없었다. 소녀를 뒤로하고 자리를 뜬다. 잠시 그들의 공간 속에 출연했던 엑스트라가 퇴장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소녀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이빨을 쑤시며 오후 관광에 나섰다. 세게 7대 불가사의중의 하나라는 앙코르와트다. 규모나 보존, 정밀하게 결합된 건축양식, 전체적인 균형감 등에 있어서 앙코르와트가 앙코르 유적군을 대표한다는 것은 실로 당연해보였다. 수르바르만 2세(802-850)가 앙코르의 창시자로서 최초의 왕이란다. 그리고 앙코르는 1434년 지금의 프놈펜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막을 내렸다. 그들이 왜 이 거대한 성벽과 사원의 도시를 버리고 프놈펜으로 떠났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앙코르를 지속적으로 침범한 태국의 위협이 수도로서의 적합성을 잃게 했을 것이란 추측만 있을 뿐이었다. 왕국의 주민들이 앙코르를 버리고 떠난 이후 앙코르는 수백 년 간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갔다.
해자 위에 놓인 다리에서 가이드북을 읽고 있자니 귀엽게 생긴 꼬마가 신기한 듯 일행을 구경했다. 사탕 두 개를 주고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꼬마들이 “오니상”, “오네상”하며 따라 다녔다. 얼마나 많은 일본의 언니, 오빠들이 휘젓고 다녔으면……
사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불구자들이 동냥을 하고 있었다. 찬씨의 가슴이 조금 찡 해진다. 입구를 들어가서도 사원까지는 한참 걸어가야 했다. 회랑의 벽면은 문신처럼 정교한 조각들로 뒤덮여 있었다. 대부분 신과 악마의 전쟁역사나 앙코르의 천사라는 무희 압살라의 조각들이었다.
‘그리스의 신화, 로마의 신화, 단군의 신화, 앙코르 신화, 제 각자가 천지창조를 주장하는 그 신화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찬씨는 복잡한 생각의 정리를 뒤로 미루고 일단 사원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 입구에 걸터앉았다. 주변의 경치가 평화롭다. 하늘에도 구름 한 점 없다. 계단을 올라오는 사람들은 모두 헉헉거린다. 그들을 대상으로 꼬마들이 콜라를 판다. 1달러다. 주문을 하면 해자 건너가게까지 뛰어갔다 온다.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과연 세상은 공평한 것인가? 앙코르와트의 모습이 연못에 반사되어 물 속에도 선명하게 나타난다. 소가 유적지 곳곳을 어슬렁거리면 돌아다닌다. 일상의 생활과 유적이 유리되어 있다는 기분이 별로 들지 않는다. 내부를 구경하는 동안 어디선가 사람이 보였다가는 금세 사라져 버리기 일쑤였다. 미로의 수수께끼 같았다. 그때 어디선가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려 왔다. 그것은 말소리라기보다 고함 소리였다.
“그러려면 소나 키우지 내가 여기 왜 와!”
‘ 맞다 그 대구 아저씨다.’
40여명이 노란조끼를 입고 단체관광에 나선 사람들 틈에 부부동반으로 끼어있는 대구 아저씨, 그의 고향이 대구라는 것도, 그의 막내아들이 몇 달 전에 입대 했다는 것도, 그가 소를 키운다는 것도, 그가 노 정부에 불만이 많다는 것도…… 30분이나 비행기를 연착시킨 베트남항공기내에서 혹은 캄보디아로 가는 비행기로 환승하기위해 기다리던 호치민공항 보세구역에서 술 취한 그의 입을 통해 들은 이야기였다. 아마 지금 저 소리도 조용히 하라는 그의 아내에게 객기를 부리며 한 말일 것이다.
“워메 징한거 저치 또 만났네. 소나 키우지 그래 왜왔어. 씨바.”
“엉덩이를 발로 차 뿌까.”
싹쓸이가 인상을 쓰자 노커팅도 짜증을 냈다. 노랑머리 유럽인도 뭐라 씨부렸다. 구겨진 서양인의 어깨너머로 앙코르와트의 해가 지려했다. 일행은 불이 나게 사원을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프놈바켕으로 갔다. 일몰 관광은 프놈바켕이 으뜸이란다. 순례자처럼 사람들이 몰려 올라간다. 15분도 채 안 걸리는 정상에 오르니 일본인, 서양인, 중국인, 태국인, 현지인, 흑인, 백인, 마치 인간전시장 같다. 남동쪽으로 어렴풋이 방금 떠나온 앙코르와트가 보인다. 그곳에서도 누군가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멀리 서쪽으로 펼쳐진 논과 그 사이에 삐쭉삐쭉 솟아 있는 야자수들이 새삼 남국에 와있음을 느끼게 한다. 저 끝도 보이지 않는 저쪽에 태국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라오스가 있고, 그 넘어 중국이 있고, 그 귀퉁이에 조국이 있고, 그 곳 어디쯤에선가 아내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멀리 서쪽으로 조각배를 거꾸로 덮어 놓은 듯한 모습의 산이 보인다. 그 뒤쪽부터 서서히 저녁놀이 붉어져온다. 서양인 커플이 올라오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캄보디아 꼬마 두 명이 열심히 따라 올라오고 있다. 찬씨는 턱을 괸다. 철새 떼들이 무리지어 날아가는 모습이 주변 환경과 너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어디서 보나 석양은 곱고 슬프다. 사라지는 것이 아름답다는 저 아이러니, 찬씨는 또 담배한대를 피워 문다. 가난한 고향을 떠나던 날도 열차의 뒤로 뒤로 물러나는 석양은 붉었었다. 마음이 산란하다. 주변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기다렸지?’ 하는 표정으로 상현달이 떴다. 젊은 처자의 아랫배처럼 완만한 곡선으로 부풀어 오른 달을 보며 찬씨의 마음도 이스트를 머금은 빵처럼 부풀어 오른다.
‘오늘밤 쉽게 잠들 수 있을까 ……’
찬씨는 혼자 중얼거리며 프놈바켕을 내려왔다. 앞 청바지 차림으로 내려가던 두 여자가 중간에 서서 뭐라 지껄이며 메모를 했다. 언 듯 들어보니 중국말 같다.
“유아 차이니스?”
“노~오, 우이아 재페니스.”
‘아~ 쪽팔려!’ 중국말인지 일본말인지도 잘 구분 못하는 국제 촌놈이 다음에 대꾸할 말도 준비하지 못한 채 뭐 하러 시비를 걸었을까…… 찬씨는 ‘회아라 유 프롬’을 뒤통수로 들으며 서둘러 내려왔다. 미리 내려온 일행들은 입구에서 콜라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어디가나 메모를 하는 이들은 보나마나 일본인 이었다. 일행은 숙소로 돌아와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로비에서 다시 모였다. 찬씨는 이국의 밤거리를 혼자 걸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일행과 어울려 숙소에서 차로 한 3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는 마티니라는 술집에 모토를 타고 갔다. 자그마한 술집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는데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는 제법 화려한 집이었다. 숙소밖에는 늘 오토바이 운전사들이 줄을 서있었다. 입구에서 기도들이 소지품 검사를 하는데 외국인인 그들 일행은 건드리지 않았다. 웨이터에게 맥주를 주문했다. 한국의 80년대 전형적인 디스코텍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남자들은 대부분 캄보디아인들이고 서양인들이 서너 명 보였다. 싹쓸이가 여자를 데려다 앉혔다. 선배인 찬씨와 나이 많은 노씨 옆에 먼저 앉혔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이목구비가 또렷한데다 눈이 깊고 슬퍼 보이는 것이 찬씨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노커팅이 디카를 들고 기념촬영을 한다고 설쳤다.
“자~알 좀 찍어 봐라.”
노씨가 자세를 잡으며 노커팅을 바라본다. 여자가 머리를 약간 노씨 쪽으로 기울인다. 노씨가 가볍게 여자의 어깨를 감싼다.
“아따 성님 겁나게 폼나부네.”
노커팅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 다 좋은데 너 어저께 같이 머리통과 발모가지는 날리고 몸통만 찍지는 말아라.”
노커팅이 제 목을 당수 하듯이 툭툭치며. “노커팅 노커팅” 국적불명의 발음을 연발하며 카메라셔터를 눌러댔다. 아가씨들이 따라서 “노커팅 노커팅”하며 웃었다. 그래서 노커팅은 국적불명의 노커팅이 되어 여행 내내 노커팅으로 불렸다. 노커팅이 무대에서서 노래를 부른다. ‘꽃을 든 남자’를 부르며 악을 악을 써댄다. 그래도 제법 폼이 난다. 여기저기서 환호가 터진다. 일행과 아가씨들이 스테이지로 나가 춤을 춘다. 만국 공통의 몸부림이었다.
찬씨만 자리에 앉아 맥주를 홀짝거렸다. 맥주가 맹물 같다. 그도 그럴 것이 프랑스 백년지배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맥주를 드라이해서 주는 것이 아니라 잔에다 어름을 채운다음 그 위에다 맥주를 부어주는 것이었다. 위스키처럼 말이다. 도수도 약한 맥주에 물을 타서 마시니 그 맛이 영 덤덤했다. 찬씨의 잔이 비자 옆에 단정하게 서있던 자그마한 체구의 웨이터가 하얀 수건으로 맥주병을 싸서들고 정중하게 잔을 채웠다.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니 눈이 크고 앳되어 보였다.
“너 몇 살이냐?”
“?”
“하우올드아유?”
“?”
“몇 살?”
“아~아 투앤티 파이브”
이들은 서투른 영어보다 짧은 한국말을 더 쉽게 알아들을 때도 있었다. 대부분이 아주 온순하게 생겼다. 그들 어디에서도 ‘킬링필드’의 무서운 그림자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캄보디아 40대 남자는 적어도 한사람이 7~8명의 살인경험이 있다하니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저 순진무구한 눈빛과 평화로운 분위기와 아름다운 유적과 킬링필드가 동일선상에 있다는 것에 대하여 찬씨는 혼란스러웠다. 눈을 감는다. 이국에서 들어보는 모국의 노래, 완달러를 구걸하며 손을 내미는 소년소녀들, 초코렡 기부미를 외치던 60년대의 누이들, 해방 이후 절대적 빈곤 풍경을 소설로 남긴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이 생각난다.
‘어머니가 세 자식에게 하루 두 끼니는 근근이 입에 풀칠을 시키다, 어느 날 하루를 꼬박 굶긴 적이 있었다 했다. 이튿날 아침, 어머니가 이모님 댁에서 보리밥 한 그릇을 얻어와 그 밥을 불려 먹는다고 죽을 쑤어, 당신은 먹지 않고 세 자식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빈 뱃속에 뜨거운 죽을 너무 급하게 먹었던지 길중이가 먹은 죽을 죄 토해내고 말았다. 길중이는 방바닥에 위액과 더불어 토해놓은 죽을 긁어 다시 먹었음은 물론인데, 걸레로 방바닥을 훔치는 어머니를 길중이 동생 길수가 눈여겨보았던지, 길수가 나중에 그 걸레를 빨아먹고 있더라 했다.’
결국 이 소설에서 걸레를 빨아먹은 길수는 '더러운 세월' 을 못 이기고 그만 병으로 죽게 된다. 찬씨는 앙코르의 아이들을 보면서 길수를 떠올렸다. 과거의 영화와 오늘의 가난. 과거의 영화가 앙코르의 장엄한 유적들이라면, 오늘의 가난은 바로 아이들이었다. 어디가도 캄보디아는 가난, 가난뿐이었다. 어느 사원 앞에도 손과 다리가 잘린 소녀가 구걸을 하지 않는 곳이 없었고, 완딸러를 외치며 조잡한 물건 파는 아이들이 없는 곳이 없었다. 찬씨에게는 자꾸만 그 소리가 ‘기부 미 초코렡.’으로 들렸다.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말로 얼버무리기에는 드러나는 절대적 빈곤이 너무나 절절했다. 어디를 가도 방치된 아이들과 무심한 어른들, 그것이 캄보디아 이념의 현주소였다. 앙코르의 길수들은 이념이 남긴 ‘더러운 세월’에 붙어 가난의 걸레를 빨아먹으며 살고 있었다. 찬씨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아~씨바. 오늘 졸라 땡겨뿐다.”
노래를 끝낸 노커팅이 의자에 털썩 앉으며 맥주를 벌컥거렸다.
“아따 성님은 뭔 딴 생각을 고로코롬 허벌나게 헤뿐다요?”
싹슬이가 숨찬 소리로 찬씨를 바라봤다.
“어~ 엉, 킬링필드 말이야. 영화 덕분에 캄보디아 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것들이 킬링필드로 대변되는 대학살이 아닌가 싶고, 그런 고정관념 때문에 캄보디아 하면 엄청 무서운 동네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는데…… 실제로 이 풍경은 킬링필드와 너무나 거리가 멀고, 도무지 뭐가 뭔지 획이 갈리네.”
“ 대체 크메르루즈라는 좀마니 씨방쉐이들은 뭣 땜시 그렇게 지랄 맞은 짓거리들을 해부러쓰까?”
싹쓸이가 좀 분위기 잡친다는 듯이 한마디 내 뱉자 노커팅이 아는 체를 했다.
“아따 그거 말여, 그 이야그 할려면 우선 그 당시 그 좀마니 정권의 대빵인 폴포트라는 아저씨 이야기를 먼저 해야되더라구, 그러려면 어쩔 수 없이 캄보디아의 근대사를 이야기해야 하는디……”
“그럼 짧게 한번 이야기 해봐라.”
“사실 나두 여행 전 견문을 넓히기 위해 이것저것 뒤지다가. 어떤 친절한 넘이 쓴 기행문에서 읽은 거니깐, 어? 씨바! 내가 아는 거랑 틀리네 그러기 없기다. 맛 뵈기로 조금만 들려 줄텐깨.”
“아따 그려 짧게 해라 이. 아주 분위기 조져뿔지 말고. 맛 뵈기만 보여라 이. 워메 디스코 땡기다가 근대사 공부라니 원. 씨바.”
티스코 곡이 멈추고 타이타닉 주제곡이 나온다. 싹쓸이가 담뱃불을 비벼 끈다. 아무래도 분위기는 아니지만 캄보디아의 근대사는 기본나가리로 좀 알아두자는 것이 일행들의 공통된 감정 같았다.
“일단, 캄보디아도 울나라 모양으로 외세 침략을 졸라 받았드만, 사실 주변 정세가 온통 ‘한 쌈박질’하는 나라로 접해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베트남, 라오스, 그리고 태국.......어때? 쌈질 자주 하던 나라들 맞지? 특히, 태국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부텀 캄보디아를 졸라 쥐 잡듯이 잡았드만,”
노커팅이 맥주로 목을 축인다.
“해서, 1863년인가 언제인가 하여튼, 프랑스 씨~봐~앙~ 쉐이들로부터 식민지 생활이 시작되는 거여, 그리고 2차대전 때는 일본 다쾅들 한테 조때구, 그리고1945년 다시 프랑스가 기어 들어와서 통치하고…… 그러다가 프랑스에서 공부 열라한 친 프랑스파인 ‘씨아누크’ 국왕이 대빵자리에 앉고…… 졸라 친 프랑스적이라고 생각해서 지들 꼭두각시가 될 것이라고 씨아누크를 국왕에 앉혀놓으니깐 씨아누크 국왕이 프랑스한테 배신을 때린 결과 1954년에 독립을 얻었고. 해서, 캄보디아 피플들은 씨아누크 국왕을 ‘캄보디아 독립의 아버지’ 내지는 ‘ 캄보디아 민족의 아버지’라 부른다드만.
아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메리카 코쟁이 나라에서 놀다가 얼떨결에 캄보디아에 들어온 ‘론돌’이라는 친구가 혜성과 같이 등장한 거지. 이 좀마니 아저씨는 아메리카를 에없고 싸워서 공화국을 세운거쥐…… 그럼 씨아누크 국왕은 이 때 걍 먼 산만 바라보면서 광팔고 있었냐구? 아니지, 되졌다 싶어서 망명을 선택했지, 그러데 아~씨바 어느 나라에서도 이 노인네를 받아주지 않는 거여. 그런데, 결국 씨아누크 국왕을 받아준 나라가 있었으니 그것은 지금도 전 세계 만방에 이름 졸라 떨치구 있는 바로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더라 구거지. 해서 아직두 그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하고 졸라 친하다자너.
하여튼 이 ‘론놀’이라는 피플은 씨아누크 정부를 몰아내고 5년 동안 정권을 잡는데 ........ 아메리카 코쟁이한테 배웠는지, 누구한테 배웠는지 지랄 맞은 짓만 골라 하는 거라. 부정부패 졸라 심하고, 악행이라는 악행은 죄다 선보이고. 그러니 누가 좋아 하것써? 캄보디아 피플들에게서는 서서히 반미감정이 생기기 시작하는 거라. 그 좀마니가 미국이 뒤에 있으니깐 그것 믿고 개지랄 떤다고 생각한거지.
그러자, 그 싸가지 ‘론놀’ 장군을 완샷에 나가리 시키고 바로 뒤에 휘황찬란하게 등장한 인물이 바로 ‘폴포트’라는 피플. 그 넘은 백성들의 원성이 졸라 높은 시기에 그것도 농촌부텀 서서히 잠식시켜 들어간 거지. 일종의 농촌 부흥운동이라고 해야 하나? 밑에 계층부텀 먹어 들어가는 수법을 쓰는데, 16세만 되면 죄다 징집을 하고 총과 계급을 주는 거야. 그리고, 사상교육을 철저하게 시켜서 직접 엄마 아버지를 비밀 봉지를 머리에 씌워서 질식시키거나 대나무 창을 이용해서 참혹하게 살해하게끔 했더라 그거지.
그리고, 온 나라를 강제수용소로 만들어서 남여 노소 할 것 없이 죄다 당에서 나누어준 검정 셔츠를 입고 집단 농장에서 조뺑이 트게 일을 시키는 거지. 그 당시 엄청게 사람을 죽이는디 단지 안경을 썼거나,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혀있지 않거나, 금이빨을 했다는 이유하나 만으로 죽였다고, 다시 말해 지식인이라고 생각되는 피플들은 싹쓸이 한거지. 거 왜 영화를 볼 것 같으면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암두 몰래 소 외양간에 들어가서 소의 목을 칼로 베서 피를 빨아먹는 디스프란의 모습이 나오자너.”
“야야 역겹다 구만 하자 구만해.”
노씨가 손을 내젓는다.
“하여튼 그렇게 개지랄을 떨던 폴포트도 ‘훈센’이라는 아저씨한테 조때구 이름모를 지하방에서 죽었다나 어쨌대나? 이것이 이 나라의 그대사라는 거여 이.”
노커팅이 서둘러 이야기를 마치고 맥주잔을 들자 빈 잔이다. 재빠르게 그러나 정중하게 캄보디아 웨이터가 술잔을 채워 준다.
“이 쉐이들이 지금 내말 알아들어 부렀쓰까?”
노커팅이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옆에 있는 웨이터와 아가씨를 번갈아 보았다. 아가씨가 웃었다.
“알아 듣나본데?”
노씨가 혀를 찼다.
“그럼 지금 수상도 ‘훈센’아저씬가?”
총무가 물었다. 노커팅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다 끝나기 전에 부르스곡이 나왔다. 일행은 싹슬이를 선두로 아가씨들의 손을 잡고 하나 둘씩 일어나 스테이지로 나갔다. 곡명은 알 수 없으나 몹시 흐느적거리고 쓸쓸했다. 찬씨는 텅 빈 테이블을 혼자 지키다가 옆에 앉아있는 아가씨의 손에 10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쥐어주고 일어섰다.
밖으로 나오자 오토바이부대가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찬씨는 그냥 걸었다. 아가씨가 저만큼 따라오고 있었다. 찬씨는 그 아가씨가 현지에 놀러온 아가씨인지 아니면 본래 웃음을 파는 여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한참을 걷다보니 상주인구 10만 명의 조그만 도시가 고향처럼 느껴졌다. 도시라고 해야 할까 마을이라고 해야 할까. 픽업트럭이 서는 정류장이 있고, 호텔이 있고, 신호등이 도시전체를 통 털어서 겨우 2개 있고, 24시간 편의점이 하나 있고…… 찬씨는 그 유일한 편의점 앞 나무의자에 걸터앉았다. 아가씨가 다소곳이 옆에 다가와 앉았다. 전기사정이 좋지 않은 도시, 검은 밤하늘에 하얀 달과 붉은 먼지를 그대로 간직한 곳, 도시는 하나의 풍경처럼 말이 없었다. 어쩌면 흐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연은 하나의 풍경처럼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아가씨가 캔을 따서 건네주었다. 코카콜라였다.
어디가나 아이들은 지천이었다. 톤레샵 호수 가는 길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씨엠렙 시내에서 약 40분 거리에 캄보디아 전체 국토의 15%를 차지한다는 호수, 동남아 최대를 자랑한다는 호수, 크기가 경상남도만 해서 프놈펜까지 연결이 되어 있다는 호수, 그 크기가 주는 중압감과는 상관없이 아이들은 가난했다. 여행 이틀째 일행은 톤레샵 호수를 관광하고 있었다. 호수 입구에서 배를 타고 가다보니 일단의 수상가옥 집성촌이 나왔다. 우기 철에는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불어나면 집을 통째로 훔쳐 가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돼지도 사육하고, 구멍가게도 있고, 교회도 있고, 한국 선교회에서 지어준 학교도 있었다.
호수는 온통 푸른빛이었다. 아니 그것을 푸른빛이라고 해야 할지 누른빛 이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자근 배를 타고 사람들이 그물 질 하고 있었다. 수상학교 앞을 지나는데 이제 막 학교 파하고 집에 돌아가는 꼬맹이 학생들이 나오는데 죄다 배를 타고 나갔다. 3~5명씩 짝지어서 배를 타고 가는데 어떤 아이는 연신 깨진 바가지로 배안에 들어온 물을 퍼내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학생들이 매고 다니는 가방이 죄다 한글이 써 있는 것이었다. 우리 학교 다닐 때 쓰던 가방이 캄보디아에 수입이 되어서 애들이 가지고 다니는 것이었다. 씨엠렙 길거리에 지나다 보면 ‘자동문’ 내지는 ‘공무수행’ 또는 ‘성북구 조기축구회’라고 써 있는 자동차를 많이 볼 수 있었다. 수입된 중고차인데 글씨를 지우지 않고 그냥 타고 다녔다.
일행이 탄 조그마한 배는 마주 오는 다른 배에 손까지 흔들어 보이는 여유를 부리면서도 수상가옥 틈새를 비집고 사정없이 달렸다. 선장의 나이를 물으니 스물여덟 살이란다. 아직 애인은 없단다. 결혼할여면 약 삼천달러 정도가 있어야 한다는데 돈이 없어서 못한단다.
“그럼 너 여자랑 자본 적 있어?”
노씨가 호기심 가득한눈으로 물었다.
선장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그럼 너 아다라시냐?”하면서 싹쓸이가 킥킥댔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선장이 엄지를 세워 자신을 가리키며 ‘아다라시냐 아다라시냐’했다. 아마 최고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모양이었다. 이 선장은 다음에 다른 한국 관광객을 만나면 또 자신을 엄지로 가리키며‘아다라시 아다라시’ 할 것이다.
선상에서 찐 새우에 소금을 찍어먹는 요리를 안주삼아 점심대신 소주한잔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평양랭면’집에 들렀다. 평양랭면 집에서는 북에서 온 인삼주와 ‘이름난 술’ 평양소주를 팔고 있었다. 랭면은 그저 랭랭하기만 할뿐 서울 맛만 못했다. 다만 북한에서 엄선(?)되어 왔을 ‘에미나이’들이 약 10여명쯤 있고, 조그만 무대가 있고, 평양 아가씨들이 노래를 하는데 무대매너가 주현미를 무색하게 할 수준이었다. 또 조금 있으려니까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약 4~6명 정도의 아가씨들이 나와서 그 유명한 ‘반갑습네다.’를 춤과 곁들려 부르는데 제법 볼만 했다. 그런데 그녀들은 춤을 추고 노래를 할 뿐만 아니라 남자들하고 나란히 사진도 찍고 음식수발도 드는 아주 다용도 아가씨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찬씨는 그녀들에 대하여 한때는 근접할 수 없는 이념의 저편에 있었다는 것 말고는 그리 신비로울 것도 호들갑을 떨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참으로 우스운 것이었다. 이념이 언젠가는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하더니 이제는 6불짜리 흥행물로 존속하고 있으니, 그 생명력이 참으로 끈끈하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찬씨 일행은 그렇게 캄보디아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베트남행 밤비행기에 올랐다. 캄보디아에서 베트남,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두 나라의 다른 점이 확실히 느껴졌다. 같은 인도차이나에 있으면서도 캄보디아는 인도의 영향을 받은 듯한데 베트남은 중국의 영향이 강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나 캄보디아 사람들은 베트남 사람들에 비해 잘 웃었다. 캄보디아에서는 두세 살 된 아이가 어른들도 견디기 어려운 더운 날씨에 비지땀을 흘리면서도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었다. 난폭운전을 하고 있는 운전사도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웃었다. 70년대에 있었던 내전 중에 태국으로 몰래 피난 가는 캄보디아 사람과 원주민 태국 사람을 구별하는 방법이 팔을 비틀어서 아프다고 찡그리면 태국 사람이고, 아파도 웃으면 캄보디아 사람이었다고 할 정도이니 알만했다.
또 하나, 캄보디아 사람들은 어딘지 모르게 어리숙해 보였는데 베트남 사람들은 중국 피가 섞여서인지 좀 빤질빤질하고 돈을 밝힌다는 느낌이 들었다. 거지들이 돈을 달라고 할 때도, 캄보디아 이들은 부끄러워하면서 먹을 것을 나누어 주면 혀를 쏙 내밀며 겸연쩍어했는데 베트남에서는 맡겨놓은 것을 내놓으라는 듯 뻔뻔한 태도였다.
찬씨 일행은 메콩강투어에 나섰다. 전날 밤도 늦게까지 호치민 시내를 휘젓고 다닌 싹쓸이와 노커팅이 부스스한 모습으로 로비에 나타났다.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호텔의 밖에서 들어왔다. 말인즉슨 담배한대 피우고 들어오는 중이란다.
현지 가이드를 따라 서둘러 메콩가에 이르니 왠지 강이 친숙한 느낌을 준다. 티벳에서 베트남까지 흐르는 4,500킬로를 흐르는 강, 중국 윈난에서, 라오스에서, 태국 북부에서, 캄보디아에서 한번은 본 적이 있는 듯한 아시아의 어머니 같은 강이다. 베트남 전쟁을 이겨낸 인고의 강, 황토 빛 강물 위로 빨간 해가 떠오르기 전 오늘도 메콩강 어디선가 닭 울음소리가 들리고, 부지런한 강마을 사람들은 조각배를 저어 어슴푸레한 강물로 나아가 그물을 드리울 것이다. 급격하게 불어오는 변화의 바람 속에서도 수백 년 전통의 모습을 잃지 않는 메콩 강 사람들…… 그들 중 대부분이 베트콩이라니 찬씨는 도무지 믿겨지지가 않았다.
일행은 보트로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바다처럼 넓은 강, 바나나와 야자수 잎사귀가 하늘을 가린 좁은 수로를 따라 마을들을 찾아 나서면 처녀지를 탐험하는 느낌이 든다. 베트남 전쟁 때, 이곳 곡창 지대인 메콩 델타 지역은 미군과 베트콩 사이에 전 투가 치열했단다. 사이공과 가깝기도 했지만 아열대 수림, 키를 넘는 풀, 늪지 등의 자연환경이 베트콩에게는 몸을 숨기기에 최적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군은 월남전에서 7천2백만 리터의 고엽제를 뿌렸다고 한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사용한 폭탄은 히로시마 원자 폭탄의 4백 50배에 달하는 1천 3백만 톤에 달한다고 하니 미국이 전쟁 비용을 폭탄 대신에 그곳 사람들의 복리 후생에 사용했더라면 미국은 베트남 정쟁에서 승리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베트남에는 미국을 찬양하는 노래로 가득 찼을지도 모른다. 허나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씨바”
찬씨는 욕을 하듯 강가에서서 오줌을 갈겼다. 그의 일생을 통해 가장 거친 욕이었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하노이를 거쳐 어두운 밤길을 달려 하롱베이가 있는 인근 도시 홍가이로 갔다. 어디가나 도시가 있고 사람이 있는 밤거리의 풍경은 비슷비슷했다. 술이 있고 여자가 있고…… 늦은 밤 호텔에 여장을 풀기가 무섭게 찬씨를 제외한 다른 일행들은 모두들 밤거리로 몰려 나갔다. 이국에서의 마지막 밤이라 생각하니 찬씨도 잠이 오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챙겨본다. 그 때에야 아내의 부탁이 떠올랐다.
“이것하고 똑같은 것 좀 사와.”
아내가 찬씨의 손에 쥐어준 것은 진한 밤색 립스틱 케이스였다. 랑콤사 제품, 색조번호 229번이었다. 찬씨는 인천공항 면세점에서도 호치민공항 면세점에서도 그것을 구하지 못했다. 신제품으로 개발하면서 조금씩 색깔을 바꾼다는 것이었다. 텔레비전을 겼다. 한국영화 서편제가 화면에 가득했다. 한국어로 노래 부르고 베트남국어가 화면아래 흘렀다.
찬씨는 서편제의 고장에서 태어 낳다. 그리고 그의 아주 어렸을 때 꿈은 검 . 판사나 국회의원 같은 힘 있는 자였다. 또 한때는 화려한 연예인이기도 했다가 훌륭한 스포츠맨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언제인가 모르게 철이 들면서 그 꿈들은 하나하나 접혔다. 성인이 되고 결혼 적령기가 되면서부터 찬씨의 꿈은 수입 좋은 직장인에 취직하는 것으로 아주 현실화 되고 구체화 되었다.
그러면 결혼 15주년을 1년여 앞두고 있는 지금 찬씨는 그 소박한 꿈을 이루었는가? 그리 많은 봉급은 아니라 해도 탄탄한 직장에 다니고 있고, 내 집 마련도 하고 자가용도 샀다. 박봉이라도 쪼개어 주말이면 아이들과 산이나 계곡에 놀러가서 삼겹살을 구어 먹었다. 거기다 소주 한잔을 할 때면 그런대로 꿈은 현실화 된 듯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해외여행을 다닐 만큼 가정형편도 나아지고 아이들도 많이 컸다. 그래서 찬씨는 좀더 행복해 졌는가……
찬씨는 텔레비전을 끄고 거울 앞에 섰다. 귀밑머리가 반백이 넘는다.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주례사에 빠지지 않던 메뉴다.
‘믿고 의지하며……’
서울은 지금쯤 가을일 것이다. 가을은 풍요와 결실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열매가 가지를 떠나고, 곡식이 대지를 떠나는 이별의 계절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독립하여 혼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이 아름다운 계절에 찬씨는 왜 등이 시린가? 나이가 들면 시린게 가슴뿐인 줄 알았는데 언제부턴가 가슴보다 등이 더 시립다. 왜 그럴까? 씨를 뿌리고 여름을 가꾸었던 찬씨는 그 집의 마름이었던가? 찬씨는 불혹의 나이가 다가도록 아직도 혼란스럽다. 차카게 살 것인가 안 차카게 살 것인가……남자는 순결해야 하는가? 아니어도 되는가? 헌 갓 쓰고 밤거리 전봇대에 오줌한번 눈 것에 불과하다는 싹쓸이와 노커팅의 오입 론……
자정이 훌쩍 지났건만 아직도 그들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찬씨는 창가에 기대서서 이국의 거리를 내려다본다. 혼자 이기도하고, 둘 이기도하고, 몇이 어울리기도 하고, 남남이기도 하고, 남여이기도한 무리들이 까마득히 어디론가 사라지고 돌아온다. 어떻게 이 밤을 써야할까? 턱을 괴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속절없는 달빛사이로 괴테의 기행문이 떠오른다.
‘이국에서 보내는 이 마지막 밤
슬픈 그 모습 내 마음속에 어른거린다.
소중한 것 그 토록 많이 남겨준 밤을 생각하니,
지금 나의 두 눈에선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어느새 인적도 끊기고 개 짖는 소리도 그친 가운데
달의 여신이 하늘 높이 밤 마차를 몬다.
달을 우러르자 눈에 들어오는 이국의 풍경
우리의 수호신이 부질없이 가까이에서 지켜주고 있구나.’
다음날 하롱베이 관광을 마친 일행과 함께 찬씨는 하노이 공항에서 립스틱을 샀다. 아내가 부탁한 번호와 똑같은 번호가 없어 손등에 찍어 발라가며 가장 근사한 색조를 골라 여행용 가방 깊숙한 곳에 꽃아 찔러 넣었다. 영양 크림도 하나 더 샀다. 그런데 문제는 그 깊숙하고 은밀 한곳에 찬씨의 기억 속에서도 깜짝 지워져버린 물건두개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보다 안전한 장소가 필요했던 그 물건 두개와 화장품이 나란히 있음으로 해서 찬씨의 인생 말년은 매우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어찌되었건 비행기는 무사히 하노이 공항을 이룩했다. 모두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깨끗한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다만, 찬씨만이 홀로 깨어 5박6일의 여정을 돌아봤다. 그중에서도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캄보디아인과 앙코르문명이었다. 신화가 만든 문명, 찬란한 인류의 유산, 고대로의 신비여행 등 앙코르를 수식하는 수많은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그 곳을 직접 봤다는 성취감 보다는 허무한 마음이 앞섰다.
물론 유적지는 거대했고, 앙코르의 밤은 한없이 감상적이었다. 특히나 프놈바켕에서 내려다본 일몰과 앙코르와트 헤자에 비친 석양은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씨의 머리가 아닌 가슴에 남은 여행에의 결론은 슬픈 이념의 초상,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허무의 부스러기 정도로 요약되었다.
눈을 감아도 지워지지 않는 검고 깊은 눈망울 속에 들어있는 오랜 절망과 슬픔, 오빠 완달러를 외치는 고사리만한 손, 그 작은 손에 찢겨진 핏자국, 인류의 문화유산이라는 앙코르 유적, 그러나 그 인류의 후예들은 비참하게 널브러져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쓸쓸한 모습은 술집에서 이방인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현지 여성들을 바라보는 캄보디아 젊은이들의 눈빛이었다. 찬씨는 그들의 눈 속에서 비치는 60년대 조국의 누이들을 보았다. 그 잔영 때문에 찬씨는 비행기 의자 등받이에 곱게 기대어 있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인류의 문화유산이라는 앙코르와트라는 것에 대해서도 찬씨는 호의적이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앙코르유적을 두고 인류의 자부심 어쩌고 하는 것에는 동의 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유네스코가 어떤 기준의 잣대를 앙코르에 들이댔는지 모르지만 찬씨는 이번에 앙코르 여행을 하면서 이것은 인류의 자부심이 아닌 부끄러움이라는 해석까지 하게 되었다. 최소한 앙코르 유적에 대해 사회학적 관점을 들이대었을 때 그렇다는 말이다. 아름답고 오래되었다는 이유가 가치 있는 문화유산의 전부가 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 찬씨의 생각이었다. 보존의 필요는 있을지언정 진정 우리가 자부심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 유적들이 당대 가지고 있었던 사회적의미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것이다. 즉 킬링필드가 암울한 캄보디아와 인류의 현대사에 있어 비극적 상징이라면 그 대칭점에 서있는 것이 앙코르 유적이라는 것이다.
흔히들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그러하듯 그곳 역시 ‘외계인이 지은 사원’ 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앙코르와트는 외계인이 지은 것이 아니다. 분명 인간이 지었다. 그것도 아주 단순한 목적으로…… 좀더 직접적으로 말해 당시 경쟁적으로 사원을 건립함으로써 왕권의 권위를 시위하려했던 왕들 중 한 명인 수리야바르만 2 세가 자신을 비슈누신과 일체화함으로써 왕의 권력을 무소불위한 지점으로 끌어올린 조작된 이념의 산물이 바로 앙코르와트다.
어지러운 정세 속에서 왕이 된 인간에게는 절대적 통치 권력이 필요했을 것이고 민중들에게 그 권력을 무한대로 행세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왕권신수설’같은 하늘의 힘이 필요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 사원 건립의 의도가 불순했다는 것이다. 찬씨는 이념이 빚은 현대 인류의 최대 재앙을 킬링필드라 인정하면서도 앙코르 유적에 대해서는 인류문명의 자부심 따위로 해석하는 것, 그래서 앙코르유적을 무조건적으로 아름답게만 칭송하는 것에 대하여 거부감이 들었다. 물론 석양 무렵의 앙코르 유적의 그 찬란한 아름다움이나 건축물 자체가 가지는 미적가치, 과거의 화려함이 세월 속에서 어떻게 쇠락하는 가를 생각하게 하는 감상 등은 별개로 하자는 이야기다.
그리고 찬씨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따위의 그 허무하기 짝이 없는 이념들이 숱한 목숨을 앗아간 것에 분노하듯이, 왕이 자신의 왕권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자신은 아무런 노동력을 제공하지 않은 채 자신의 욕망을 구체화 한 상징물이 후대에 의해 예술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념의 대립 속에서 결국 아무렇지 않게 죽어간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를 인류의 부끄러운 초상으로 기억해야 하듯이, 왕과 신이 같다는 이념에 의해 저 엄청난 상징물을 짓다가 죽었을 중세의 노동자들을 우리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먼저 기억해야할 것이다. 존엄한 한 개인의 생명을 담보하면서까지 우리가 지켜야 할 그 무엇이 세상에 과연 있을까.
특히나 인류의 문화재라 칭송되는 그 찬란한 앙코르와트의 제1회랑, 한 때는 신이라 불리우는 왕과 사제들만 머무를 수 있었던 가파른 계단에는 천년이 지난 지금 헐벗은 아이들이 다람쥐처럼 기어오르며 쓰레기통을 뒤졌다. 문화유산이고 뭐고 간에 그 아이들에게 당장의 구원은 감상에 빠진 관광객이 마시다남은 코카콜라 병에 있을 뿐이었다. 그 암담한 현실이 지금까지도 찬씨의 속을 편치 않게 하였다. 그리고 그 절대빈곤이라는 것이 바로 사오십년 전 찬씨 조국의 보습이라는데 더욱 현기증이 났다. 그것을 까마득히 잊고 잠시 감상에 젖어 아가씨의 가슴에 팀을 꽂아주던 값싼 자부심이 찬씨를 부끄럽게 했다.
그리고 지금도 캄보디아 곳곳에 느닷없이 나타나는 무슨무슨 당이라는 간판들, 과연 그 자생적인 정치권력의 기호들이 앙코르의 아이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찬씨는 자꾸만 속이 울렁거렸다. 그래서 편하게 잠들지 못하고, 옆구리에 떠있는 별을 보며, 저기 비행기 뒤편 구름아래 마을에 번개 치는 것을 보며 꿈인 듯 생시인 듯 인천공항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돌아온 찬씨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당일 낮 10시 미사에 참여했다. 그날이 성당 체육대회 날이라 넓은 고등학교운동장에 서서 미사를 드렸다.
“하늘에 계신……거룩히 빛나시며……”
하늘은 맑고 바람은 시원했다.
“이는 그리스도의 몸이니……죄 없는 자 이 빵을 ……”
아직 젊은 싹쓸이와 노커팅은 처음부터 ‘노세, 노세 먹고 노세였다.’노씨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서 가끔 공자님 같은 소리를 해서 ‘분위기 작살’이라는 별칭까지 얻었지만 결국 마지막 밤에 무너졌다. 변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변수가 있어서 명확하게 알 수가 없다. 찬씨는 빵을 받으려 신부 앞에 줄을 섰다.
“그리스도의 몸.”
체육대회가 끝나고 운동장 정리를 하고나니 벌써 해가졌다. 집에 돌아온 찬씨 부부는 여행가방을 풀었다. 찬씨가 아니라 아내가 풀었다. 선물과 빨래 감을 따로 분리한다. 그동안 찬씨는 콧노래를 부르며 샤워를 했다. 물방울을 털어내며 화장실을 나오는데 안방에서 와장창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뛰어 들어가 보니 아내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파랗게 떨고 있었다. 화장대 유리가 박살이 나있었다. 14년간 안방을 지키며 찬씨부부의 애증을 지켜보던 혼수품이었다. 그 주변으로 콘돔두개와 랑콤사 립스틱과 화장품케이스가 파편처럼 널려있었다. 영양크림도 하얀 거품을 토하고 있었다.
“말해봐.”
한동안 말을 못하던 아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변명이든 해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찬씨는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확실하고도 엉뚱한 증거 앞에 어떤 형태의 진실도 무의미해 보였다.
“미안해!”
찬씨는 불쑥 엉뚱한 말을 하고 말았다.
“미안하다고? 뭐가 미안한데?”
찬씨는 뭐가 미안한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 순간 그 말밖에 할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미안하다는 말은‘긍정’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격이 되고 말았다. 그 길로 집을 나간 찬씨의 아내는 돌아오지 않았다. 찬씨는 여러 날 수소문 끝에 아내가 캄보디아행 베트남항공에 탑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후 찬씨는 여러 차례 캄보디아에 갔지만 아내의 행방을 찾지는 못했다.
그렇게 반년이 흘렀다.
어느 날 몹시 취한 찬씨는 술잔을 높이 들었다.
“콘돔이 필요 없는 세상을 위하여, 건배!”
다음날 찬씨는 사표를 쓰고 캄보디아로 날아가 버렸다.
<에필로그>
그리고 2년 후 내게 이 길고도 긴 고해성사 같은 편지를 보내왔다. 나‘변수’는 찬씨의 편지를 소설로 재구성해서 세상에 내보낸다. 그러면서 나는 세상을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혹시 이글을 그의 아내가 읽는다면 진실을 믿을까? 그리고 세상에 진실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