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창포 어촌에서
바람의 아들 씀
2001. 7. 9. 월요일.
어제는 일요일.
충남 보령시 웅천읍 관당리 무창포 바닷가로 나갔다.
나는 혼자서 해변가를 거닐며 망망대해를 바라보거나 갯바위 위에 걸터앉아서 사색에 잠기곤 했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공간에서 혼자만이 갖는 여유였다.
금년 들어 몇 차례나 바닷가로 나갔다. 그것은 일상의 번잡에서 벗어난 자유였으며 해방이었다. 그리고 무창포 해변의 북편 저 건너편의 대천해수욕장을 아스란히 바라보며, 또 수평선 저너머로 가물거리는 섬과의 海里를 가름해 보았다. 해리를 가름한 이유는 의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6월 30일경 탈북민과 중국 거류자들이 대련항을 떠나 6일 만에 서해바다 위에 점점(点点)이 떠 있는 보령시 섬(외연도, 녹도, 호도, 삽시도 등) 사이로, 국내 연안으로 몰래 잠입했다. 바로 大川과 지척인 고정리항으로 잠입한 이들의 해상 침입 루트를 가상하여 보았다.
어째서 해경과 해군은 며칠 동안 망망대해의 공해에서 머물다가 국내로 침투하는 밀항선박을 조기에 발견하지 못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황해(The Yellow Sea)에서 公海라야 손바닥만 한 해수면에 불과할 터이다. 각종 최첨단 레이다망, 순찰함과 항공기가 감시할 터이다. 그렇다면 무관심이었을까? 7.9톤의 그 조그마한 밀항선에 무려 106명의 밀입국자와 아국의 안내책이 숨어서 입항하였다는 믿기지 않는 의문을 깊이 파헤치고 싶지는 않았다.
무창포 등대가 서 있는 어항 방파제.
海口를 양팔로 감싸 안은 모양의 浦口이다. 가벼운 波浪에 흔들리는 漁船에서 漁具를 꺼내는 김종갑 노인을 선착장에서 만났다. 김노인은 젊은 시절에 화망마을의 조씨네에서 농사일을 이 년간 거둔 적이 있어서 나는 김노인을 오래전부터 익히 알고 지내온 터였다. 지금은 漁翁이 되어서 2.5톤의 소형 어선 1척에서 타래 형태로 둘둘 말은 그물 더미와 투박한 어구를 방파제 위로 힘들게 들어 올리고 있었다.
나는 갯내음과 간기(염기鹽氣)로 가득 절은 방파제에 쪼그리고 앉았다.
검은 빛깔의 갯강구(큰 바퀴벌레와 비슷)들이 잽싸게 돌 틈 사이로 숨어버렸다. 어선 값을 여쭈었더니 새로 어선을 지으려면 싯가 4천만 원이 더 간다고 대답했다. 낚시 전용 요트는 새로 지으려면 2천만 원이 들고, 기타 장비를 갖추려면 총 3천만 원 쯤 홋가하며, 요트는 어선 겸용보다는 건조비가 싸게 먹히며 또 어선보다 수익이 더 낫다 한다. 김노인의 어선은 선령이 오래되어 현 가격은 천오백만 원을 홋가하며, 어선과 낚시배로 겸용하며, 7명의 낚시꾼을 태울 수 있단다. 승선 정원은 관허를 받는다 한다.
한 번 출항하면 선박 임대료로 30만 원을 받으며 대부분 무창포에서는 이 금(가격)이란다. 30만 원을 내고 배 한 척을 빌려서 하루 동안 낚시질을 하자면 그 경비가 수월찮게 들어갈 것이라고 암산했다. 교통비이며 숙박비 및 식사대 등이 솔찮게 들어갈 것이다. 김노인은 소형의 배라도 선장이 있으며, 자기는 자가소유의 배에서 허드레 일을 보조하는데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힘이 든다고 했다. 배마다 운전석에는 5백만 원 또는 1천만 원의 海圖가 있으며 이 海圖로 바닷속을 훤히 읽는다고 한다.
무창포는 海深이 낮아서 포구에 닻을 내린 배는 모두 소형의 어선이다.
어장생활의 수익은 농사일보다 훨씬 나으며, 자기 집 주변에는 300평의 밭이 있으나 지금은 전혀 손을 보지 않아서 풀밭이 되었으며, 뱃일로 농사는 전혀 짓지 않는다고 했다. 김노인은 과거 농사일에 기가 질렸단다. 농사일은 시간이 너무 지루하나 뱃일은 물때를 맞춰서 작업을 촉박하게 하므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며, 뱃일을 더 선호한다고 덧붙였다.
김노인은 어장(어항 공판장) 뒤편의 집단구역인 생선횟집(8채 정도) 가운데 4호, 5호는 자기 부인과 처제가 공동운영한다고 말했다. 처음 횟집 분양 시 다른 사람과의 건물 홋수를 조정해서 현재 중앙에 있는 4호, 5호를 같이 붙어 있게 타협을 보았다고 한다. 처제와 함께 주방일을 보기 편하도록 다른 사람과 분양 순번를 맞바꾸었다 한다. 횟집 1호당 큰 방이 두어 개로 횟집이 연달아 붙어 있었다.
김노인은 결혼을 늦게 했기에 수년 전에야 시집간 딸이 객지에서 살며, 얼마 전에 제대를 한 큰아들은 인천의 모회사에 다니며, 막내아들은 대천수산고 2학년생이란다. 막내아들이 이제 고2이면 늦둥이를 둔 셈이다. 막내가 항해사 자격증을 따면 수입은 괜찮을 것이라고 잔뜩 기대를 거는 눈치였다.
아마도 당신은 무학력자이기에 자격증이 없이 배를 몰기에 어떤 포한이 된 듯싶었다. 시집간 딸에게 4천5백만 원을 주었다며 이제는 제법 살 만큼 재산을 모았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40여 년 전의 가난했던 시절을 지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또 김노인의 집은 무창포해수욕장의 제4주차장 뒤편 충남민박집(☎ 041-936-3680)인 것 같다. 해변가 주변 여기저기에 조금씩 땅을 가지고 있으며, 민박집의 경우에 대지 가격은 평당 30만 원에서 50만 원선이라며 은근히 財富를 자랑했다. 그러나 무창포의 개발이 더뎌서 매매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내가 기거하는 화망마을의 집터 값이 평당 5~ 6만 원인 것을 감안하면 무창포의 대지는 高價이다.
김노인은 어선 충남호를 소유하며, 동서인 라순균씨는 한일호를 운영한단다.
라씨는 횟집 근방에서 얼쩡거리는 나를 보고는 아는 체를 했다. 나 역시 안면을 트고 지낸 바가 별로 없었으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라씨는 '대천경찰서의 경찰관 임병철씨와 동창생이며 또 화망마을 황의찬씨의 동생과 친구였다’라고 덧붙였다. 임씨와 황씨는 내 1년 선배이므로 라씨와 나는 1년 차 선후배 관계임을 확인했다. 라씨는 나를 몇 년 후배로 착각할 만큼 내가 나이보다 훨씬 더 젊어 보인다고 말했다. 아마도 라씨는 거친 갯바람과 고된 어업으로 더 늙어 보이는지도 모른다.
라씨는 한일호 횟집과 3톤가량의 한일호 어선을 가졌다며 횟집과 어선을 이용해 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내가 웅천초등학교 시절에 대전 대흥초등학교로 전학을 갔기에 동무들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무창포 주변에 사는 동창생들의 이름을 댈 수가 없었다. 단지 무창포에서의 친구란 무창포항 뒤편의 관당리 리장 김기섭과 김장섭, 김진순 등이 고작이다. 이것이 무창포에서의 나를 외롭게 한다.
서해안은 대체로 매년 7월 1일경 쯤에 해수욕장을 개설한다.
7월 초순은 서머 타임(summer time)의 절정기가 아닌 탓으로 아직은 인파가 그리 붐비지는 않았다.
무창포는 '신비의 바닷길', '바다가 갈라지는 곳'으로 알려졌다. 넓은 해변가를 산보하는 외래객과 어설프기 짝이 없는 외지인들이 호미와 비닐봉지 등을 들고서 암반이 드러난 곳까지 깊숙히 들어가 모래펄을 뒤집으면서 해산물을 잡는 이들이 많았다. 때로는 하이힐을 신거나 양산을 한 손에 들고서 해초와 따개비로 가득 뒤덮인 돌 위로 기우뚱거리며 위험스럽게 걷는 사람도 제법 많았다.
하기사 비싼 비용을 지불하여 관광버스나 자가용 편으로 관광 왔기에 썰물 속의 갯바다로 들어오고 싶은 유혹을 차마 저버리지 못했나 보다.
나는 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도 - 잔잔히 웃음을 띠며 - 일상의 삶을 즐거워했다.
나는 해변이 바라보이는 곳에 조그마한 별장을 갖고 싶다. 海松(금솔)의 그루터기에 앉아서 해풍을 쏘이다가 심심하면 모래사장을 산보하면서 波浪에 반짝이는 海水와 하늘과 맞닿은 水平線을 바라보거나 타오르는 太陽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모래톱을 걷고 싶다. 또 멀리 떠 있는 섬들을 무상하게 바라보고 싶다.
나는 가난하다. 그러나 해변가에 별장을 갖고 싶다는 희망은 아직도 유효하다.
2001. 7. 9. 월요일. 바람의 아들
무창포 어항
///////////////////////////
이 글을 '보령사랑'카페에서 발견했다.
나는 지금은 활동하지 않는다.
'바람의 아들'은 내 닉네임.
이 글을 쓴 지도 벌써 만20년이 넘었다.
* 원 제목은 '어촌에서'이나 '무창포 어촌에서'로 고친다.
무창포 이미지가 강하기에...
위 글을 읽으면서 20년 전 일이 어렴프시 떠오른다.
날마다 일기를 써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0년 전에는 나는 한자말을 무척이나 많이 썼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원안대로 그냥 놔 둔다.
2021. 12. 1. 보령해저터널(대천 - 원산도)이 처음으로 개통되었다.
나는 12월 2일에 시골집에 내려갔고, 하룻밤을 잔 뒤에 다음 날인 12월 3일에 대천항 인근에 있는 해저터널 입구로 들어섰고, 터널 속을 빠져나와서 원산도, 태안지역으로 올라간 뒤에 원청삼거리에서 우회전해서 홍성IC로 진입한 뒤 그참 서울로 향했다.
* 해저터널 길이는 6,927m. 자동차 70km 속도로 7분 정도 걸렸다.
앞으로는 해저터널을 이용해서 충남 서해안의 당진, 서산, 홍성, 보령을 오고 가야겠다. 더불어 보령 밑에 있는 서천까지도 다시 여행해야겠다.
내 시골집은 서해안고속도로 <무창포나들목> 바로 코앞의 화망마을에 있기에 고속도로를 타면 갯바다가 많은 서부 해안지역을 여행하기가 무척이나 수월하다.
고향에 오고 갈 때 슬쩍 에두르면 바닷가 섬 구경을 할 수 있다.
2021. 12. 5. 일요일.
첫댓글 아스란히 : 이스라이.
내 입말에는 '아스란히'이다. 인터넷 어학사전으로 검색하니 '아스란히'는 북한말이라고? 순 엉터리...
나는 '시가'라고 썼다. 인터넷 어학사전으로는 '싯가'.. 웃긴다. 다음국어사전에는 '시가'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