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 황동규 세상 뜰 때 아내에게 오래 같이 살아줘 고맙다 하고 (말 대신 손 한번 꽉 잡아주고) 가구들과는 눈으로 작별, 외톨이가 되어 삶의 마지막 토막을 보낸 사당3동 골목들을 한 번 더 둘러보고 가리. 가만, 근자에 아파트와 빌라들 가득 들어서 둘러볼 골목 별로 남지 않았군. 살던 아파트 지척, 구두 수선 퀀셋 앞 콘크리트 바닥에 산나물 고추 생밤 내놓고 무작정 앉아 있는 할머니한테서 작은 밤 한 봉지 사 들고 끝물 나뭇잎들 날리는 서달산에 오르리. 낮비 잠시 뿌렸는지 하늘과 숲이 밝다. 하직 인사 없이 헤어진 다람쥐가 나를 알아볼까? 약수터에 전처럼 비늘구름 환하게 떠 있을까? 그런 호사스런 생각은 삼가기로 하자. 운 좋게 귀여운 다람쥐를 만나 밤 몇 톨 꺼내놓고 몇 발짝 걸어가다 되돌아와 밤 다 내려놓고 길에 굴러들어온 돌멩이는 슬쩍 걷어차 길섶으로 되돌려 보내고 서달산 능선 길을 아끼듯 걸으리. 벤치 하나, 둘이 서로 얽히듯 서 있는 나무, 약수터가 지나간다. 하늘에 샛별이 돋는다. 이 별 뜨면 가던 걸음 멈추고 무언가 맹세하곤 했지. 참 맹세든 헛맹세든 지난 맹세는 다 그립다. 내일 저녁에도 이 별은 뜨리라. 걸으리, 가다 서다 하는 내 걸음 참고 함께 걷다 길이 슬그머니 바닥을 지울 때까지.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3년 1월호 ---------------------- 황동규 / 1938년 서울 출생. 1958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풍장』 『사는 기쁨』 『연옥의 봄』 『오늘 하루만이라도』 등이 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