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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장 회한(悔恨)의 시간(時間)들
진일문은 난생처음 보는 무공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그는 재빨리 우수를 들어 십팔 번의 변화를 일으켰다.
위이이잉--!
그의 손 끝에서 가느다란 백기(白氣)가 뻗어나와 허공을 메우고 있는 백발을 뒤덮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이 되자 놀랍게도 백기가 뒤로 밀리며 백발은 더욱 빳빳이 곤두섰다.
가공할 반탄력이 진일문의 공력을 도로 튕겨내 버린 것이었다.
파파팍--!
괴음향과 함께백발이 구부러지더니 마치 우산처럼 벌어져 진일문을 에워쌌다.
족히 수십만 가닥은 될 듯한 그 머리칼은 금시라도 그의 전신에 무수한 바람구멍을 내놓을 것 같았다.
"멋진 수법!"
진일문은 찬탄을 보냄과 동시에 아홉 개의 분신을 환출해 냈다.
그러자 그의 분신들은 각기 다른 무공을 펼치며 아라소를 감싸고 공격을 개시했다.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움직이면서도 섬광 같은 공세를 뻗어 내는 그 분신들은 흡사 유계(幽界)를 떠도는 영혼들처럼 보였다.
그 광경에 아라소는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그의 입에서 경악에 찬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광화제육법(光化第六法)! 너는 누구냐?"
꽝!
굉렬한 폭음이일며 우산처럼 펼쳐졌던 아라소의 백발은 대번에 가닥가닥 끊어져 사방으로 날아가 버렸다.
"크으윽!"
아라소는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신음을 내뱉으며 뒤로 벌렁 넘어갔다.
그의 입과 코로 검붉은 피가 줄줄 흘러 내렸다.
진일문.
그는 애초에 그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기혈이 뒤집힌 나머지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던 것이다.
아라소의 공력은 실로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때문에 적지아니 내상을 입은 그는 사뭇 침중해지고 말았다.
'이 자가 미리 부상을 당하지 않았었다면 과연 내가 감당할 수 있었을까? 더우기 두 명이 합공이라도 한다면.......'
이 때, 관전 중이던 아라천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꼬, 꼬마....... 너는 대체 누구냐? 네가 어찌 하여 본교(本敎)의 교단비전무공(敎團秘傳武功)을 사용한단 말이냐?"
"흐음?"
진일문이 오히려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방금 그가 펼친 무공은 만상군자로부터 환혼심령전이대법을 통해 전수받은 것으로써, 바로 삼천공이 참오한 광화비전(光化秘傳) 상의 무학이었다.
그런데 두 괴인이 어찌 한 눈에 그 무학을 알아볼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그들은 생각지도 않은 표현까지 썼다.
'본교? 교단비전무공?'
잠시 의문에 사로잡혔던 진일문은 이내 머리가 탁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들은 그럼 파사국의 정교(正敎)에서 왔겠구려?"
그 한 마디에 아라천의 눈이 금새 격동을 일으켰다.
"그걸 알고 있는 너는 대체 누구냐?"
진일문은 웬지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본인은 진일문이란 사람이오."
"진일문?"
아라천은 되뇌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사십 년간이나 이 곳에 갇혀 있었으니 그 이름을 알 턱이 없었다.
진일문은 침착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알아내고자 애쓸 필요 없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를 테니 말이오. 이제 내가 당신들에게 묻겠소."
"무엇이냐?"
"당신들은 오십 년 전에 중원으로 건너 왔소. 사실 중원의 광명교와 파사국의 정교는 같은 뿌리라 해도 장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각기 다른 흐름을 갖게 되었소. 그런데 그 당시 정교에서 몰려와 광명교를 쳤던 이유는 무엇이오?"
쓰러져 있던 아라소가 천천히 일어나며 신음처럼 말했다.
"으으... 그 내막을 알고 있다니, 대체 너는 누구냐?"
진일문은 대답대신 결연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대들은 어차피 이국인이오. 어떤 이유로든 중원을 위협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소."
잠자코 있던 아라천이 다시 입을 열었다.
"꼬마야, 꼭 그렇게 말할 바는 아니다. 우리는 당시 한 가지 물건만 되찾을 수 있었다면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건이라면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진가 아이야, 보다시피 우리 두 늙은이는 이 꼴이 되었다. 그러나 네가 동족을 위하듯이 우리도 본국을 사랑한다. 이 일은 무척 중요한 비밀이다. 네가 먼저 신분을 자세히 밝히지 않으면 노부로서는 더 말할 수가 없다."
아라천의 말에는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진일문도 이를 인정하는듯 표정을 풀며 담담하게 말했다.
"좋소. 당신의 말을 믿고 얘기하겠소. 나는 과거 광명교의 십대천왕이었던 세 분으로부터 이 내막을 모두 전해 들었소. 나는 그분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아라천이 그의말을 가로 막았다.
"잠깐! 혹시 그들은 천하도인, 천검불패, 만상군자가 아니냐?"
진일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바로 그 분들이오."
아라천의 몸이한 차례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 그들이 아직 살아 있단 말이냐?"
그것은 의외로일말의 기대가 담긴 음성이었다.
"돌아가셨소."
"아!"
아라천과 아라소는 탄식을 터뜨리며 진일문을 응시했다.
그들 두 사람의 눈에는 적의(敵意)가 아닌, 허탈함이 어려 있었다.
이윽고 진일문은 얼마 전에 겪었던 일들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아라천과 아라소의 안색은 수시로 변했다.
잠시 후.
얘기가 다 끝나자 두 사람은 또 다시 탄식을 불어냈다.
"아! 결국 중원과 파사국은 모두 피해자일 뿐이로구나."
한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진일문은 묵묵히 그들의 반응을 기다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면에 아라천과 아라소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로 얼굴이 굳어져 갔다.
마침내 아라천이 침중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좋다, 진소협. 내 전부 말해 주겠다."
아라소는 흠칫하는 표정을 보이며 그를 만류했다.
"아라천!"
그러자 아라천은 아라소를 바라보며 타이르듯 말했다.
"아라소, 할 수 없지 않느냐? 우리는 살만큼 살았으며 총교로 돌아갈 수도 없는 몸이다. 오십 년 전 우리가 중원에 와서 한 일이 대체 무엇이냐? 고작 그 간악한 반가(盤哥) 놈에게 속아 중원을 짓밟고 이 모양이 된 게 전부가 아니냐? 게다가 공주까지도 놈에게 넘어간 이상 무슨 희망이 남아 있느냐?"
"으음......."
신음을 발하는아라소의 얼굴에도 체념의 빛이 떠올랐다.
한편.
진일문은 가슴이 섬뜩해지고 말았다.
'반가라고?'
웬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만상군자 역시 반씨성을 가진 자에 의해 가공할 음모가 획책되었다는 유시를 남기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혹시?'
어느 한 부분에 생각이 미치는 순간, 진일문은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 아라천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수십 년간에 걸친 무림비사의 또 다른 장(章)이 열리고 있었다.
광명교(光明敎).
이들은 본래 파사국에서 발원한 정교(正敎)의 일맥이었다.
포악한 왕조(王朝)에 대항하기 위해 민간집회로 시작된 정교가 중원에까지 흘러 들어오게 된 것이다.
역시 그 성격은 민간결사대로써 세월이 흐르며 황조(皇朝)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불의(不義)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광명교의 교칙이 황실의 부패상과 수시로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광명교가 이른바 마교(魔敎)로 몰리게 된 것도 사실 이 때부터였다.
비록 마교로 낙인 찍혔을지언정 세월이 흐르는 동안 광명교는 정교 즉, 총교(總敎)의 지시를 전혀 받지 않게 되었다.
나름대로 정착이 되어 독립적으로 발전을 이룬 것이었다.
반면에 파사국의 총교에서는 문제가 발생했다.
거듭되는 내분으로 인해 교세가 약화일로에 놓여 있는가 하면, 교단의 비전무학마저도 유실되어 버렸다.
총교에서는 한가지 단안을 내렸다.
수백 년 전 중원의 광명교에 나누어 준 광화비전(光化秘傳)을 되찾기로 한 것이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오십 년 전의 일이었다.
광화비전(光化秘傳).
이는 정교무학의 정화였다.
따라서 그들이 어려운 시기를 빌어 돌려 받고자 한 것은 그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광명교측에서는 이 제안을 수락하지 않았고, 급기야 총교는 비밀리에 광화비전을 탈취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당년의 광명교주가 바로 동방절호였다.
그의 무공은 가히 신의 경지라고 할만큼 지고해 총교로서는 가급적 그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을 피하려 한 것이다.
이에 치밀한 계획을 세운 총교는 중원의 지리와 정세에 밝은 한 인물을 앞장 세워 이른바 십대고수를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아라소와 아라천.
이 쌍둥이 형제도 그 십대 고수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이 꾸민 계획이란 다름 아닌 이간책이었다.
말하자면 광명교의 십대천왕과 교주 사이에 반간계를 동원해 분열을 조장하자는 것으로써 그 계획은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즉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천하도인과 천검불패, 만상군자 등으로 하여금 동방절호를 천산의 무극단으로 유인해 처단하도록 만들었으며, 끝내 광명교를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했다.
그러고도 총교는 정작 주목적이었던 광화비전은 손에 넣지도 못했다.
문제는 점차 예기치 않았던 국면으로 비화되어 총교에서 파견한 십대고수들이 차례로 죽어가는 놀라운 사태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당시 십대고수를 이끌었던 인물은 총교주의 세 딸 중 셋째인 파라오공주(芭羅奧公主)였고, 그들에게 길을 안내한 인물은 반(盤)씨 성을 가진 한 명의 청년이었다.
준수한 용모에온화한 기품까지 겸비한 그 청년은 누구에게나 호감을 느끼게 하는 인상이었다.
그는 이런 분위기와 더불어 매끄러운 언변과 뛰어난 지략을 이용해 광명교에 깊이 침투했다.
그는 동방절호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으며, 이것을 기화로 중원의 세력 판도를 뒤집어 놓는데 크게 공헌했다.
동방절호의 죽음과 광명교의 멸망, 또 그로 인한 중원의 원기상실 등이 사실은 모두 그의 구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그는 파라오공주의 환심을 사 그녀와 맺어지기를 종용하는 등 다분히 야심가적인 측면도 보였는데, 이때만큼은 십대 고수도
분연히 들고 일어나 그들의 결합을 반대했다.
그러나 공주의마음이 그에게 기울어지는 바람에 두 사람은 종내 결혼을 했고, 십대 고수는 그에 의해 하나씩 제거되었다.
결과적으로 파사국에서 밀파된 총교의 인물들은 목적도 달성하지 못한 채 머나먼 이역에서 한을 품고 죽어갔다.
아라소, 아라천 형제만이 파라오공주의 시위를 겸하고 있었던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물론 멀쩡하게살아 있지는 못했다.
강제로 살이 썩어 내리는 독약을 마신 뒤 이 곳에 감금된 것이다.
아라천의 긴 얘기는 한숨과 함께 끝을 맺었다.
진일문 역시도내심 탄식을 금치 못했다.
'이들은 중원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경위야 어찌 되었건 광명교의 교주였던 동방절호가 중원을 이역에 팔아 넘기려 했다고 모함을 한 것도, 삼천공으로 하여금 그를 제거하게 한 것도 모두 이들이 한 짓이 아닌가?'
실로 엄청난 반전(反轉)이다.
이렇게 되면 중원무림의 역사는 다시 고쳐 씌어져야 하지 않는가?
진일문.
그가 무천비동에서 만상군자의 환혼심령전이대법을 통해 전해 들었던 것도 아라천이 말한 내용과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
무림 삼천공(三天公).
그들은 동방절호를 끌어내어 제거한 뒤,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자신들이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광명교의 붕괴는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었다.
그 직후의 정사대전(正邪大戰)에서 희생된 무림인의 숫자가 그 얼마던가?
반씨 성을 가졌다는 예의 청년은 파사국은 파사국 대로, 또 중원은 중원 대로 각기 그 나름의 충혼(忠魂)을 교묘하게 역이용해 양
측 모두에게 엄청난 손실을 입혔다.
단 일인, 그의 간계에 의해 삼천공을 비롯한 천하인들이 꼭두각시 놀음을 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와중에서 삼천공이 광화비전의 필사본을 입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그 길로 폐관에 들어가통한을 씹으며 광화비전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후사는 자신들이 키웠던 아홉 명의 제자에게 당부했다.
그 제자들이 오늘날의 구대성군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의외의변수는 또 있었다.
아홉 제자 중에서도 대제자인 화개악이 놀랍게도 반씨 청년이 심어 놓은 첩자였던 것이다.
특히 모계로 치자면 당년의 반씨 청년과 버금갈 정도였다.
과연 화개악은폐관한 삼천공을 감금상태로 바꾸어 놓고 삼성림의 전권을 장악했다.
구대성군이 두 갈래로 갈라져 싸우게 된 것도 반대세력을 제거하려는 그의 계획 중 일부였다.
그리하여 왕중헌과 진중서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화개악에게 패해 오명(汚名)을 뒤집어 쓴 채 삼성림을 떠나야만 했다.
이후로 화개악은 삼천공을 상대로 끊임없이 위협을 가했다.
광화비전을 내놓으라고.......
진일문은 침중한 얼굴이 되어 내심 중얼거렸다.
'광화비전은 문자 그대로 마경(魔經)이다. 결국 그것 때문에 모든 일이 벌어지지 않았는가? 더구나 세 어르신은.......'
그는 삼천공의회한과 고뇌에 십분 공감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쩌면이 시대를 살다간 기인(奇人) 중 가장 불운한 인물들이다.
왜냐하면 끝까지 천운(天運)이 그들을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광화비전.
거기에는 결정적 결함이 있었다.
그것은 십성 이상을 연성하면 심성이 변해 돌이킬 수 없는 마인(魔人)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삼천공은 제자인 화개악으로부터 온갖 협박에 시달리면서도 꾸준히 광화비전을 연마했다.
그것만이 최후의 마세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심중에서 은연 중 마(魔)가 싹트는 것을 인식하면서 마침내 이도저도 중단하고 말았다.
마인이 되어서 세상에 나가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는 스스로 심맥을 끊어 자결해 버린 것이다.
진일문은 비원(悲怨)을 가라앉히며 점차로 냉정을 회복해 갔다.
중요한 것은 역시 과거지사가 아니라 당면한 문제들이다.
그는 어느 순간에도 이 점을 망각하지 않았다.
'화개악이 공주라고 부른 사람은 파사국 총교의 파라오 공주가 틀림없다.
또한 지금까지의 연계로 보아 반씨 가문은 분명 반희빈의 직계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에 총교에서 중원의 길잡이로 보냈다는 청년은 반희빈의 부친일까?'
명조의 병권을장악하고 있는 대도독(大都督), 그런 자가 한 때 무림을 좌지우지했다는 것은 실로 충격적인 사실이다.
'현재 암중에서 무림의 전권을 쥐고 흔드는 세력은 천마신궁이다. 삼성림도 실은 그들의 주구에 불과하다.'
진일문의 추리는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그는 어느덧 막강한 권력을 가진 대도독과 천마신궁과의 연관을 더듬어가고 있었다.
"한 가지만 더 묻겠소. 귀교에서 파견했던, 그 반씨 성을 가졌다는 자의 이름이 무엇이오?"
아라소는 이를부드득 갈았다.
"놈의 이름은 반야천(盤冶天)이다. 놈은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우리 교단에 침투한 것이었다."
"반야천?"
진일문은 눈쌀을 찌푸렸다.
반희빈의 부친은 반무독(盤武獨)이다.
성만 같았지, 이름이 틀린 것이다.
그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당신들은 혹 그 자가 총교를 기만하고 광명교를 붕괴시킨 이유를 알고 있소?"
아라천의 푸른눈에서 섬뜩한 광망이 일었다.
"흐흐흐... 진소협은 놈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지 아는가?"
"그럼 그에게 달리 내력이 있었다는 말씀이오?"
"있고 말고! 놈은 파황교(破荒敎)의 최후 일맥이다."
"으음, 역시......."
진일문은 신음성을 발했다.
파황교라면 중원 마도의 본맥이다.
아라천의 얼굴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놈의 야망이 어디까지인지는 도무지 추측할 수가 없다. 놈은 그렇듯 천하를 제멋대로 희롱했으면서도 아직 진실한 면모는 전혀 드러 내지 않았다. 뭔가 또 다른 꿍꿍이가 있지 않고는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흐음."
"놈은 파황교의 맥을 이었으나 당시로서는 힘이 부족했다. 그래서 본교를 이용하고자 공주님까지 차지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같으면......!"
아라소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리고는 더 생각하기도 싫다는듯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일문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두 사람 다 맞는 말이다. 만일 그가 이제라도 천하를 웅패하려 한다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리다. 필경 그는 은밀한 가운데 엄청난 힘을 갖추어 놓고 있을 것이다.'
결국 파황교는천마신궁으로 이어져 내려 왔고, 또 천마신궁은 삼성림을 괴뢰로 하여 전 무림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어 품 속을 뒤지더니 무엇인가를 꺼내 보였다.
"두 분은 이것을 본 적이 있소이까?"
그것은 삼각형의 소기(小旗)였다.
아라소와 아라천은 대번에 안색이 변해 합창이라도 하듯 외쳤다.
"오오, 암천명월기(暗天明月旗)!"
두 사람은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한 쪽 무릎을 꺾었다.
그리고는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깊숙히 고개를 숙였다.
진일문은 탄식과 더불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짐작대로구나.'
그 삼각형의 소기는 공주라는 사람이 화개악을 통해 전해 준 물건이었다.
그는 자못 착잡한 심정이 되어 소기를 거두었다.
그제서야 두 사람은 머리를 들고 자세를 바로 했다.
아라천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귀하가 어찌 영기(令旗)를? 공주님과는 어떤 관계시오?"
그 말은 직접적으로 진일문의 추리를 입증해 주었다.
그는 도독부의무사들에게 납치되었고, 이를 지시했던 사람은 도독부의 대마님이다.
즉 반무독 도독의 모친이자 반희빈에게는 조모가 되는 여인이다.
그리고 그 여인이 지금은 손녀로 인해 마음을 바꾸어 진일문을 키워 보고자 했던 것이다.
'도독부의 대마님이 파라오 공주라.... 그렇다면 반도독이 아니라 그의 부친이 바로 천마신궁의 수뇌다. 그 자가 아마도 반야천이라는 희대의 거마(巨魔)겠지.'
진일문은 입술을 질겅 씹었다.
'이제 남은 것은 왕사부의 배경을 알아내는 것이다.'
그의 얼굴은 금새 침중하게 굳어졌다.
'만상군자 어르신의 말에 의하면 왕사부가 외세와 결탁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 외세란 엣센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는 실로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엣센은 원(元)을 뜻하거늘, 과거 동방절호가 그들에게 중원을 팔아 넘기려 한다는 소리는 있었어도 왕중헌과의 연결은 금시초문
이었다.
이렇게 되면 천의회(天義會)의 실체에 대해서도 의혹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하자면 왕중헌은 또 다른 음모의 핵(核)이었던 것이다.
진일문은 품속에서 이번에는 한 자루의 보도를 꺼냈다.
그것은 바로 여취벽이 그에게 정표로 주었던 신물이었다.
"두 분은......."
장강(長江).
거대한 물줄기위로 먹구름이 잔뜩 뒤덮혀 있었다.
강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갈대는 완만한 물살의 흐름을 타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가끔 북쪽에서 회오리 바람이 물려와 괴괴한 적막을 산산이 부수어 놓곤 했다.
강의 어귀에는한 척의 범선이 정박하고 있었다.
상선(商船)일까?
배의 규모는 꽤 컸으되 선창 이외에 아무런 치장도 없이 짐만 잔뜩 싣고 있었다.
그러나 선실 안의 분위기는 겉보기와 전혀 달랐다.
선창에도 단아한 느낌이 드는 휘장이 쳐져 있어 배주인의 담담하고도 유현한 성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선실의 중앙에는 나무로 된 탁자가 놓여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탁자에 면한 의자에는 한 중년문사가 앉아 있었다.
일신에는 백의를 걸쳤다.
그래서일까?
그는 청수했으며 유독 깨끗한 인상이었다.
일신에는 사람을 압도하는 신비한 기운이 어려 있어 감히 정시하기도 어려울 것 같은 인물이었다.
중년문사는 아까부더 줄곧 오른손에 하나의 섭선을 쥔 채 흔들고 있었다.
그는 섭선을 접으며 입을 열었다.
"무영이냐? 들어 오너라."
스슷!
가벼운 파공음과 함께 선실 안으로 한 인영이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그는 즉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하지만 흑의를 입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는 웬지 짙은 자조가 느껴졌다.
중년인이 명했다.
"일어나라."
그 말에 따라 천천히 일어서는 인영은 바로 허무영이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 미미한 경련이 일었다.
"저를 찾으셨습니까?"
매우 침착한 어조였으나 그 속에는 팽팽한 긴장이 도사리고 있었다.
중년인은 등을 돌린 채 잠시 침묵했다.
이윽고 그는 감회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오랫만이구나, 무영. 너를 본 지도 한참된 것 같다."
"송구스럽습니다."
허무영의 눈에일말의 곤혹이 스쳤다.
"허허... 무영, 너는 내 제자다. 그런데 너에게서 사부라는 말을 들어본 지가 아득한 것 같구나. 지금 그렇게 불러 주겠느냐?"
허무영은 대답대신 전신에 한 차례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그의 얼굴은 더욱 창백하게 변해 버렸다.
그러나 그는 무엇 때문인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중년인은 낮게탄식을 불어냈다.
"무영, 네 기분은 안다만 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를 먹어 치워야 하는 것이 곧 생존의 법칙이다."
변명이나 설득이 아니었다.
반드시 수긍해야만 될 것 같은, 그런 의무감을 종용하는 어조였다.
"너는 공히 노부의 대제자다. 앞으로 내 모든 것이 네 소관이 될텐데 어찌하여 회의하느냐?"
허무영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자고로 사자는 자식들을 강하게 키우기 위해 일부러 절벽으로 떨어 뜨린다. 너는 아직도 그 깊은 뜻을 모르느냐?"
스승과 제자, 그들 사이에는 흡사 벽이 가로막힌듯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북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중년인은 몸을돌렸다.
오만과 권태가섞인 가느다란 눈이 짙은 눈썹 아래에서 빛을 뿌려냈다.
만면에 습관인듯 냉소적인 표정이 어려 있기도 했다.다만 굳게 다문 입술에서는 완강함이 느껴졌다.
"너를 천마신궁에 침투시킨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외의 신분으로도 너는 훌륭히 임무를 수행했다. 노부가 삼성림과 일월맹의 내막을 손바닥 들여다보 듯 환히 알게 된 것도 네 덕분이다."
중년인은 말을중단하더니 허무영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야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천의회(天意會)는 무림정기를 수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 그리고 그 간의 공과를 따져볼 때 네 힘이 가장 컸다. 너도 알다시피 무림은 사마외도(邪魔外道)의 난립으로 인해 어지러울대로 어지러워져 있다. 천마신궁과 삼성림은 한통속으로써, 비단 무림을 제패하려 드는 것만이 아니라 대명조의 보좌(寶座)까지 넘보고 있다."
이는 실로 엄청난 말이었다.
일반인들로서는 가히 상상도 못할 소리가 그들 사제지간에 조용하게 오가고 있었다.
허무영은 눈을내리깔고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눈에는 한 가닥 고통의 빛이 떠올랐다.
중년인은 천천히 선실 안을 거닐었다.
"게다가 마교의 부활을 꿈꾸며 급부상한 일월맹도 심각한 위협을 던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도무림은 무력하기만 하니 무림의 앞날이 어찌될지 걱정이다."
그는 갑자기 걸음을 뚝 멈추더니 허무영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의 동공 깊숙한 곳에서 일순 기이한 광망이 번뜩였다.
"필요에 따라서는 대(大)를 위해 소(小)를 버려야 하듯, 노부는 선(善)의 추구를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중년인의 손이허무영의 어깨에 와 얹혔다.
"네가 나를 오해한 것은 바로 그 부분일 것이다. 노부는 너의 지금 심경이 어떨지 충분히 알며, 또 이해한다."
허무영은 보이지 않게 이를 악물어야 했다.
마치 가슴이 뻥 뚫려 버린듯 허탈해져 왔다.
'사부시여, 당신이 뭐라고 말씀하셔도 저는 당신의 실체를 알고 말았소이다. 이 허무영은.......'
문득 그는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을 느꼈다.
사부의 손이 뒷덜미의 옥침혈(玉枕穴)을 쓰다 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살짝 누르기만 해도 즉사하는 치명적인 사혈(四穴)이다.
중년인의 손은이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극히 짧은 순간이었으나 그것이 허무영에게는 곧 삶과 죽음의 교차지점이었다.
이어 중년인은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무영, 너에게는 천부적인 능력이 있다. 너를 동영(東瀛)으로 보내 인자술(忍者術)을 익히게 한 것이나, 은신술과 역용술까지 배우게 하여 일급 첩자로 키운 것은 그만큼 네 자질이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너는 그동안 이 사부를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고 본분을 다했다. 현재는 아니지만......."
문사의 손가락은 다시금 허무영의 옥침혈에 가 닿았다.
뼈처럼 단단한 그의 음성이 허무영의 귀에 깊숙히 들어가 박혔다.
"너를 진즉 풀어줄 수도 있었다. 환멸을 느낀다면 첩자로서의 생명을 다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부는 대의(大義)를 위해 나서야 하는 몸, 미안하구나."
중년인의 중지(中指)에 서서히 힘이 가해졌다.
'우우... 역시!'
허무영은 옥침혈로부터 집요하게 파고 드는 손가락의 촉감을 느끼며 전율했다.
그 느낌은 이내 뼛속까지 스며 들어 전신의 피를 모두 한 곳으로 몰리게 했다. 그의 입이 비로소 떨어졌다.
"사부시여! 제자는 사부를 위해 신명을 다 바쳤소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헌신짝 버리듯 저를 버리십니까?"
중년인의 손가락이 일순 멈칫했다.
그 짧은 찰나, 허무영은 몸을 공처럼 둥글게 접어 떼구르르 문쪽으로 굴러갔다.
그런 그의 동작은 그야말로 빛보다도 빠른 것이었다.
"으음, 네가......."
중년인은 신음을 발하더니 손바닥을 앞으로 내뻗었다.
위이이잉--!
연화(蓮花)의 형상을 띈 손바닥 환영이 허공에 무수히 피어 올랐다.
투명하게 빛나는 그 손들은 언뜻 아름답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순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허무영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벗어날 가능성은 거의 희박했다.
그가 알기로 상대는 자신의 무공내력마저도 전부 파악하고 있다.
곧이어 허공에서 떠돌던 손바닥들이 하나로 뭉쳐지며 우유빛으로 변했다.
동시에 그것은 허무영을 향해 빛살 같은 속도로 쏘아져 왔다.
쾅--!
문짝이 부서지며 허무영의 몸은 그대로 선실 밖으로 튕겨져 나가고 말았다.
등줄기에 지독한 통증이 일었다.
중년인의 장력이 정확히 그의 명문혈(命門穴)에 적중되었던 것이다.
"커억!"
허무영은 피분수를 뿜어내며 배에서 추락했다.
그가 떨어지자 장강의 물결 위에는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푸르디 푸른 수면은 금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애초의 도도한 흐름을 회복했다.
슷--!
갑판 위에 중년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가느다란 눈을 빛내며 수면을 면밀히 살폈다.
그러다 허무영의 모습을 찾지 못하자 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무영, 너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너만한 재목을 다시 구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점이다."
중년인은 단념한 듯 미련없이 돌아섰다.
섭선을 부치며 선실을 향해 유유히 걸어가는 그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영락없이 고고한 선비의 그것이었다.
잠시 후.
범선은 닻을 올리고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강한 회오리 바람이 간혹 물결 위에 굵은 주름을 만들었으나 배는 포말을 일으키며 당당하게 전진해 나갔다.
이 때, 선미(船尾)에서 사람의 머리 하나가 불쑥 솟아 올랐다.
그는 방금 전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다가 되돌아온 허무영이었다.
물기로 인해 번들거리면서도 새파랗게 질려 있는 그의 얼굴이 그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환생(還生)에 대해 이렇게 읊조렸다.
"후후... 미리 천호신갑(天護神甲)을 입지 않았더라면 염라사자가 영 놓아주지 않았을 텐데......."
허무영의 입과코에서는 계속해서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핏물은 그의 가슴으로 흘러내려 잠시나마 온기를 전달하는 듯했으나 이내 차디차게 식어버리고 말았다.
"사부, 당신은 위선자요.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그의 가슴에 빙결된 한(恨)은 천하의 그 무엇으로도 녹일 수가 없었다.
이를 짓씹는 그의 모습에서는 섬ㅉ한 귀기(鬼氣)마저 느껴졌다.
그는 억양이 없는 음성으로 다시 중얼거렸다.
"하지만 당신은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오. 이 허무영이 살아 숨쉬는 한. 후후... 나는 오히려 감사하고 있소. 당신은 이 일장(一掌)으로써 고맙게도 당신과 나의 인연을 끊어 주었소이다."
허무영은 냉소와 더불어 범선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는 수면 위로 머리만을 드러낸 채 강안을 향해 헤엄쳐 나갔다.
바위덩어리 같은 구름이 낮게 드리워진 수면 위로 어둑어둑한 땅거미가 겹쳐 들고 있었다.
동굴(洞窟).
깊은 산곡의 오지 속에 위치한 이 동굴은 온통 흑암 속에 묻혀 있다.
음산한 귀기(鬼氣)와 더불어 역겨운 냄새가 배어 있어 섣불리 근접했다간 금새 신경이 마비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크크크......."
동굴 깊숙한 곳으로부터 간간이 소름끼치는 괴성이 울려 나왔다.
높아졌다 낮아졌다를 반복하면서 흘러 나오는 그 음향은 듣는 이로 하여금 절로 소름이 돋게 했다.
그러다 문득 동굴 전체가 무너질듯 뒤흔들렸다.
우르르릉--!
동굴 안.
방원 일장여에걸쳐 그 근역에는 자욱한 혈무(血霧)가 깔려 있었다.
마치 피바다를 이루듯 검붉게 일렁이는 핏빛 안개는 몸에 닿기만 해도 살을 녹여 버리는 독무(毒霧)였다.
닿기만 하면 여하한 생명체도 그대로 한줌의 핏방울로 화하고 말리라.
혈무 속으로부터 흡사 극락계를 오가는 망령처럼 한 인영이 걸어 나왔다.
아니, 그는 걷는 것이 아니라 전혀 동작을 취하지 않고 미끄러져 나오고 있었다.
일신에 청삼을입은 인물이었다.
웬지 연륜이 느껴지는 그의 용모는 보기 드물게 단아하고 청수했다.
전신에는 물처럼 담담하면서도 유현한 분위기가 배어 있었다.
그는 입을 열어 무감동한 음성으로 말했다.
"동방노인(東方老人),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되었구려. 아마도 당신의 대답 여하에 따라 당신은 이승과 저승 중 한 곳을 선택하게 될 것이오."
그는 바로 괴성이 흘러 나오던 곳으로 다가가고 있는 중이었다.
천정에는 바늘 끝처럼 날카로운 종유석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 한층 기괴한 느낌을 더해 주었다.
휘류류류륭--!
갑자기 뼈를 에일 듯한 한기가 전신에 엄습해 왔다.
그것은 일종의 회오리를 형성하며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크아아아... 크크크크......!"
괴성은 가까워질수록 더욱 소름끼치는 울부짖음으로 화해 가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단지 소리만으로도 고막이 파열되거나 심마(心魔)에 빠져 들 정도였다.
동굴의 통로는그야말로 미로(迷路)였다.
사방으로 가늘고 좁은 길이 뚫려 있었는데, 그곳은 일견하기에도 예측불허의 불안이 도사리고 있는 듯한 그런 음침한 곳이었다.
그러나 중년인은 익숙해져 있는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자연스럽게 진입해 갔다.
잠시 후.
동굴 내부에 있다고는 상상도 못할 넓은 광장이 나타났다.
사방에는 기괴한 모습의 탑이 천정까지 닿도록 쌓여 있었다.
자세히 보면 그것은 이름도 알 수 없는 괴수(怪獸)들의 뼈였다.
아마도 상고 시대에 존재하던 거대한 동물들의 화석인 듯했다.
중년인은 광장의 한 귀퉁이에 있는 작은 석실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한 괴인이 벽에 몸을 찰싹 붙인 채 좌정하고 있었다.
그자는 벽에 깊숙이 박혀 있는 쇠사슬에 의해 팔과 다리가 묶여 있었으며, 칠흑같은 머리칼은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었다.
얼굴 또한 해골을 연상시킬만큼 바짝 말라 있었다.
그러나 정기(精氣)가 번뜩이는 그의 눈을 본다면 그가 결코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중년인을 보자 그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크크크... 오랫만이다. 너를 본지도 무척 오래된 것 같구나."
괴인의 음성으로 인해 석실 안이 가벼운 진동을 일으켰다. 중년인은 그를 향해 읍하며 침착하게 답했다.
"그렇소이다, 동방노인. 꼭 반년 만이외다."
"크크... 그동안 너는 많은 진전이 있었던 것 같구나. 흐흐흐... 이리 가까이 와 보아라."
괴인의 음성에는 묘한 감회가 깃들어 있었다.
중년인은 묵묵히 괴인에게로 다가갔다.
이때, 괴인이 그를 향해 팔을 뻗어왔다.
스슷--!
중년인의 미간이 슬쩍 찌푸러 들었다.
부지불식간에 엄청난 흡인력이 자신을 사정없이 끌어 당겼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는 어느덧 괴인의 면전에 이르러 있었고, 무력하게 괴인의 갈고리 같은 손에 맥문을 내놓아야 했다.
괴인이 맥문을조이자 한 가닥 가공할 마기(魔氣)가 중년인의 전신을 휘감았다.
이로 인해 담담한 기운을 흘려 내던 중년인의 눈은 서서히 흐려지며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으음......."
급기야 중년인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괴인이 그를 향해 열 손가락을 뻗었다.
그 때문일까?
중년인 몸은 대번에 붕 떠오르더니 허공에서 반듯이 누운 자세가 되었다.
츠츠츠츠--!
괴인의 십지(十指)에서 각각 색깔이 다른 기운이 뻗어나와 중년인의 전신 삼백육십 개 요혈을 찔렀다.
지력이 혈도를 관통할 때마다 중년인은 심한 경련을 일으키곤 했다.
그 광경을 보며 괴인은 회색이 도는 얼굴에 야릇한 미소를 떠올렸다.
"크크크... 전화위복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노부가 비록 천승만기대우주력(天乘萬氣大宇宙力)의 결함으로 주화입마했지만 크크... 그로 인해 역혈수라마인공(逆血修羅魔人功)을 창안하게 되었으니 천지간에 적수가 없을 것이다. 크크크
그는 몹시 만족한듯 계속 해서 중년인을 주시했다.
우르르르--
그의 십지에서발출되는 기운은 갈수록 짙어지더니 곧 한 가지 색으로 귀일되었다.
무려 열 가지에 이르던 색채가 무색투명한 하나의 빛으로 뒤바뀐 것이었다.
그 투명한 지강은 엷은 안개처럼 퍼져 종내에는 환강(幻 )인양 중년인의 몸을 에워쌌다.
괴인의 눈에서 가공할 백광이 쏘아져 나온 것은 그 때였다.
"갈(喝)!"
짧은 외침과 더불어 괴인은 쌍장을 합쳤다.
우우웅--!
굉음과 함께 환강이 무서운 속도로 중년인의 몸을 휘돌았다.
그러자 실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중년인의 전신이 갑자기 얼음 조각처럼 투명하게 변해버린 것이었다.
체내의 핏줄까지 다 비쳐 보일 정도였다.
변화는 비단 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괴인의 모습 역시도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칠흑같이 검었던 장발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안면에는 깊은 주름살이 무수히 패여 있었다.
그러기를 한참여.
중년인이 혼미상태에서 깨어났다.
괴인을 향한 그의 눈빛도 몸처럼 투명해져 있었다.
그는 특유의 무감동한 어조로 물었다.
"이로써 전부 끝난 것입니까?"
"크크... 그렇다. 이제 너와 나 사이의 빚은 없어졌다. 당년에 네가 노부의 목숨을 구하지 않았다면 노부도 이런 고생을 자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괴인의 눈에는언뜻 회한의 빛이 스쳐갔다.
"흐흐... 천하도인, 천검불패, 만상군자, 그리고 만박과 취화상, 현고말코의 합공은 정녕 대단했지. 그 때문에 노부는 혈맥이 가닥가닥 끊어지고 진기가 역혈되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 때 노부를 구한 것이 바로 너, 흐흐... 비로소 그 빚을 갚았구나."
중년인의 투명한 눈에 이채가 번쩍였다.
하지만 괴인은 그것을 미처 보지 못한 채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노부는 성취하고자 하는 무공에 중대한 결함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 신공을 열심히 연성하다 이 꼴이 되었지. 만일 그대로 두었다면 마성(魔性)이 격발해 그때마다 세상에 나가 쓸데없이 피보라를 일으켰을 것이다. 다행히도 네가 곁에 있어 노부는 그 지경을 면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억제시켜 주었으니, 흐흐... 그러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어서 이 천금삭(千金索)을 끊어 다오."
괴인은 고소를머금은 채 자신의 팔과 다리에 감겨 있는 쇠사슬을 지그시 내려다 보았다.
"물론이오, 동방노인."
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품속에 손을 넣었다.
아울러 그는 웬지 비장함이 느껴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일월맹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출관을 하시면 당연히 태상의 자리에 오르셔야 할 것이오."
하지만 괴인의 대답은 그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크크크... 고맙다만 노부는 일월맹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다. 천하(天下)! 크크크... 천하 전부를 원한다. 알겠느냐, 중서(重書)?
그리고 노부의 은인인만큼 너로 하여금 그 대업의 뒤를 잇게 해 주겠다."
중년인은 안면을 차갑게 굳혔다.
"저야말로 말씀은 고마우나 사양하겠소이다."
"사양한다고?"
괴인의 눈에 일순 커다란 의혹이 떠올랐다.
중년인은 그의 표정 변화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우선 천금삭을 열겠소이다."
"어서 열어 다오. 흐흐... 오랫동안 묶여 있었더니 답답하구나."
중년인은 품속에서 손을 뺐다.
그런데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천금삭을 여는 열쇠가 아니라 한 자루의 비수였다.
슉--!
시퍼렇게 날이선 비수가 섬전처럼 괴인의 목을 찔렀다.
"컥! 네, 네가......!"
비수는 여지없이 그의 목 한 가운데, 즉 천돌혈에 손잡이까지 푹 박혀 버렸다.
그 곳은 바로 그의 유일한 급소였다.
꽈르릉--!
굉음과 함께 천정의 일각이 붕괴되었다.
괴인은 남은 힘을 다해 무시무시한 일장을 내쳤고, 중년인이 이를 피하자 애궂은 천정이 내려앉고 만 것이었다.
괴인은 핏발이선 눈으로 중년인을 노려 보았다.
"네, 네 놈이 감히 배신을 하다니!"
꽈르르릉--!
괴인은 또다시이를 악물고 양팔을 떨쳐냈다.
죽음 직전에 이르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장력은 가공할 신위를 발휘했다.
콰콰콰쾅--!
천정이고 벽이고 할 것 없이 쩍쩍 갈라지며 종유석들이 마구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대로 있다가는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과연 중년인은어느새 밖을 향해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꽈르릉--!
경천동지할 폭음에 이어 동굴이 무너졌다.
"크아아아--!"
흡사 절규와도같은 처절한 비명이 동굴의 잔해를 뚫고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흙먼지와 함께 곧 잦아 들고 말았다.
스스스--!
중년인은 허공을 가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죄송하오, 동방노인. 당신이 아직도 천하를 제패하고자 하니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구려. 게다가 당신은 새로운 마공을 창안함으로써 마성을 초월했노라고 자부했었지만 그것은 단지 당신의 착각이었을 뿐이오. 어쨌든 당신은 세상에 나와서는 절대로 아니 되었소. 마인(魔人)은 나 하나로도 족하오."
동굴 밖.
중년인은 담담한 얼굴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장심에서 혈광이 번쩍 일며 붕괴의 잔해 위에 뿌려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무수한 돌무더기가 가루로 화하기 시작했다.
푸스스스.......
곧 그 자리에는 고운 돌가루만이 수북히 쌓이게 되었다.
중년인의 조용한 음성이 그 위로 부어졌다.
"기다리시오, 두 분 사형. 이마제마(以魔 制魔)를 위해 오랜 세월을 바친 이 아우가 가고 있소. 더 이상 당신들은 세상을 멋대로 조롱할 수 없을 것이오. 우리는 향후 무림을 위해 다 같이 사라져 주어야 할 존재들이오."
휘류류류--!
핏빛 회오리가일더니 순식간에 그의 모습을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씁쓸한 읊조림도 더 이상은 들려오지 않았다.
첫댓글 ``@-@``
즐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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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감사합니다.
늘 감사합니다.
즐독하구갑니다
즐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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쟴납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줄겁게 열독하고 갑니다.감사 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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