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거미가 짙게 깔리는 보리저녁 무렵 설거지를 하고,
불린 현미를 씻어 안친 뒤 집을 나선다. 오랜만에 지인들과
모꼬지에 참석차 가는 길이다. 이미 입춘이 지났지만
아직도 옷속으로 파고드는 차가운 기운에 몸서리를 치며
옷깃을 여민다. 고삭부리인 아내를 남겨 두고 나온 터라
마음이 편치 않고, 바늘 방석에 앉은 기분이라서 저녁만
먹고 일찍 들어올 것이라 다짐한다. 흑태찜을 안주 삼아
여기저기에서 권하는 술을 거절하고 식사만 한 뒤 지인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날씨는 춥고,
총총걸음으로 집으로 오는 길이 이다지도 멀게 느껴지는 것은
무언지 모를 안타까움에 기인한 불안감이 밀려든 때문인 것
같았다. 내가 없는 동안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가
아니라 아무도 없는 넓은 공간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는
아내가 이날따라 더한 아픔으로 와 닿는지 모를 일이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 안도의 한숨이 길게 뿜어진다. 텔레비전을
켜니 북한의 미사일 발사 모습을 전하는 새 소식이 한창이다.
웬일이냐는 듯한 아내의 표정을 보니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남을 기쁘게 하는 것과 남의 기쁨, 세상의 기쁨은 자신의 수양과
같을 수 있다'라는 말이 어느 책에선가 읽은 것 같은 생각이
겹쳐져 떠오른다. 신문을 보고, 책을 읽다가 어느 틈엔지 모르게
잠드는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또 이 밤을 하얗게 지새워야 하는가
보다. 밤을 꼬박 지새워야 하는 처지에 놓인 내가 할일이라고는
그저 책을 읽다가 지루하면 라면을 삶아서 군입정질하고,
오만 가지 상상 속의 무언가가 되어 스스로 행복한 느낌에 도취되다
보면 어느새 여명이 동트고, 쌀을 씻어 안쳐야 하는 현실 속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꿈이 지속되었으면 좋으련만, 또는
현실에 실제 적용되었으면 좋겠지만, 꿈은 어디까지나 꿈일 뿐,
찬 물 한 잔 마신 뒤 속 차리고, 차가운 물로 세수하고,
"정신차려, 이 똥강아지!"라고 스스로에게 질책하면서
또 다른 하루를 열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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