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이전 세대들이 평화를 일시적인 전쟁 부재 상태로 생각했다면, 지금
우리는 평화를 전쟁을 생각하지 않는 상태로 여긴다. 1913년에 사람들이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평화가
존재한다고 말한 것은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현재는 전쟁이 없지만 내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평화가 존재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현재의 정황상 그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일은 없다는 뜻이다. 그런 평화가 프랑스와 독일뿐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들에(모두는 아니지만) 퍼져 있다. 내년에 독일과 폴란드,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또는 브라질과 우루과이 사이에 심각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다.
(56)
1985년에 한국은 비교적 가난한 나라였고, 전통에 얽매여 있었으며, 독재체제하에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은 경제강국이고, 국민들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교육받은 사람들이며, 안정된 상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민주정권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1985년에 10만
명 당 아홉 명 정도의 한국인이 자살한 반면, 현재 한국의 연간 자살률은 10만 명당 서른여섯 명이다.
(92)
역사 공부의 목표는 과거라는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머리를 이쪽저쪽으로 돌려, 조상들이 상상할 수 없었거나 우리가 상상하기를 원치 않았던 가능성들을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를 지금 여기로 이끈 우연한 사건들의 연속을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생각과 꿈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깨닫고, 다른 생각과 다른 꿈을 품을 수 있다. 역사 공부는
우리에게 어떤 선택을 하라고 알려주지 않지만, 적어도 더 많은 선택의 여지를 제공한다.
(212)
역사는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사람들은 의미의 그물망을 짜고 그것을
진심으로 믿는다. 하지만 그 그물은 곧 풀리고, 되돌아보는
우리는 그런 헛소리를 어떻게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천국에 가기를 바라며 십자군 원정에 나선다는 것은 완전히 미친 짓으로 보인다.
어째서 30년 전 사람들은 공산주의 낙원에 대한 믿음 때문에 핵 대학살을 불사할 생각까지
했을까? 그러므로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우리의 믿음도 백 년 뒤 우리 후손들에게는 똑같이 이해할 수
없는 소리로 들릴지도 모른다.
(236)
정기적으로 엄밀한 평점을 매기기 시작한 것은 산업시대의 대중교육제도이다. 공장과
정부 부처가 숫자언어로 사고하는 데 익숙해지자 학교가 그 뒤를 따랐다. 학교는 숫자언어로 사고하는 데
익숙해지자 학교가 그 뒤를 따랐다. 학교는 평균점수에 따라 학생 개개인의 가치를 평가하기 시작했고, 교사와 교장의 가치는 그 학교의 전체 평균에 따라 평가되었다. 그리고
관료들이 이런 척도를 채택하자마자 실제가 변했다.
(261)
일부 과학적 발견들이 종교적 교의를 뿌리째 뒤흔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논리적 필연이 아니다. 예컨대 이슬람 교의는 7세기 아라비아에서
선지자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했다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풍부한 과학적 증거들이 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과학이 잘 동작하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종교의
도움이 항상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연구하지만,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과학적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은
우리에게 인간이 산소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하지만 범죄자들을 질식시켜 처형해도 괜찮은가? 이런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과학은 알지 못한다. 종교만이
이런 질문들에 필요한 지침을 제공할 수 있다.
(283)
중세 사람들은 역병이 발생하면 하늘을 쳐다보며 신에게 자신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오늘날 치명적인 새 유행병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사람들은
휴대폰을 붙들고 주식 중개인과 통화한다. 주식거래에는 유행병조차 호재이다.
(294)
하지만 실은 세 종류의 자원이 존재한다. 원재료, 에너지 그리고 지식이다. 원재료와 에너지는 고갈된다. 사용하면 할수록 줄어든다. 반면 지식은 성장하는 자원이다. 사용하면 할수록 늘어난다. 실제로 당신이 지식의 총량을 늘리면 그
지식은 당신에게 더 많은 원재료와 에너지를 준다.
(314-315)
감정은 우리의 사적인 삶뿐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절차에도 의미를
제공한다. 누가 국가를 통치해야 하는지, 어떤 외교정책이
채택되어야 하고 어떤 경제조치가 취해져야 하는지 알고 싶을 때 우리는 성경에서 답을 찾지 않는다. 교황의
명령이나 노벨상 수상자 협회의 결정에 복종하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민주적인 투표를 통해 국민들에게
당면 문제에 대한 생각을 묻는다. 우리는 유권자가 가장 잘 알고, 개개인의
자유선택에서 정치권력이 나온다고 믿는다.
(323)
의미와 권위의 원천이 하늘에서 인간의 감정으로 옮겨오면서 우주 전체의 성질이 변했다. 신, 뮤즈, 요정, 악귀 들로 바글거리던 외부 우주는 텅 빈 공간이 되었다. 반면 지금까지는
날것의 감정들을 처박아두던 별 볼일 없는 공간이던 내부세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깊고 풍부해졌다. 천사와
악마는 세상의 숲과 사막을 떠도는 실제하는 실체에서 우리 심리 안의 내적 힘으로 탈바꿈했다. 천국과
지옥도 구름 위 어딘가에 있고 화산 및 어딘가에 있는 실제 장조에서 마음의 내적 상태로 해석이 달라졌다. 우리는
가슴 안에 분노와 증오가 불붙을 때마다 지옥을 경험하고, 적을 용서하고 잘못을 뉘우치고 가난한 사람들과
가진 것을 나눌 때마다 천상의 기쁨을 누린다.
(331)
인본주의적 삶의 최종 목표는 광범위한 지적, 정서적, 육체적 경험을 통해 지식을 온전히 발현시키는 것이다. 19세기 초
근대 교육제도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빌헬름 폰 훔볼트는 존재의 목표는 “가능한 한 가장 폭넓은 인생
경험을 증류해 지혜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인생에는 오직 하나의 정점이 있는데, 그것은 느낌으로 인간의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경지”라고 말했다. 인본주의의 모토로
삼기에 딱 알맞은 말이다.
(380)
스스로 자문해보라.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발견, 발명, 창조가 무엇이었나? 이
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운 이유는 항생제 같은 과학적 발견, 컴퓨터 같은 기술적 발명, 페미니즘 같은 사상적 창조를 포함해 후보 목록이 많아 고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이렇게 자문해보라. 20세기에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 같은 전통 종교들이 이뤄낸
가장 영향력 있는 발견, 발명, 창조는 무엇인가? 이것 역시 어려운 질문인데, 고를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410)
사실을 말하면, 경험하는 자아와 이야기하는 자아는 별개의 실체가 아니라
긴밀하게 얽혀 있다. 이야기하는 자아는 경험을 이야기를 구성하는 중요한 (하지만 유일하지는 않은) 원재료로 이용한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은 다시 경험하는 자아가 실제로 느끼는 것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라마단 때의 금식과 건강검진을 위한 금식, 돈이 없어서 먹지
못하는 배고픔을 다르게 경험한다. 이야기하는 자아가 배고픔에 부여하는 각기 다른 의미들은 매우 다른
경험을 불러일으킨다.
(462)
그러면 구글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나는 네가 태어난 날부터 너를
알고 있었어. 네 이메일을 모두 읽었고, 네 통화를 모두
기록했고, 네가 좋아하는 영화들, 네 유전자 정보, 네 심장 기록도 모두 갖고 있어. 네가 데이트한 정확한 날짜도 보관하고
있으니, 존이나 폴과 만날 때마다 네 심장박동, 혈압, 혈당수치를 초 단위로 기록한 그래프를 원한다면 보여줄 수 있어. 필요하다면
네가 그들과 가진 모든 성관계의 정확한 순위도 제공할 수 있어. 그리고 당연히 나는 너를 아는 것만
큼 그들도 잘 알아. 이 모든 정보, 내 뛰어난 알고리즘, 수많은 관계에 대한 수십 년에 걸친 통계자료를 토대로, 나는 너에게
존을 선택하라고 권해. 장기적으로 그와 함께할 때 더 만족스러울 확률이 87퍼센트야.”
(474)
자유주의가 직면한 세 번째 위협은, 일부 사람들은 업그레이드되어 필수불가결한
동시에 해독 불가능한 존재로 남아 소규모 특권집단을 이룰 거라는 점이다. 이런 초인간들은 전대미문의
능력과 전례 없는 창의성을 지닐 것이고, 그런 힘을 이용해 세계적으로 중요한 대다수의 결정들을 계속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시스템의 유지보수를 담당할 것이고, 시스템은
그런 사람들을 이해하고 관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업그레이드되지 않을 것이고, 그 결과 컴퓨터 알고리즘과 새로운 초인간 양쪽의 지배를 받는 열등한 계급이 될 것이다.
(497)
마음을 조작하는 기술과 마음의 스펙트럼에 대한 우리의 무지 그리고 정부, 군대, 기업의 편협한 관심이 합쳐질 때, 우리는 틀림없이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이다. 우리는 몸과 뇌를 업그레이드하는데는 성공한다 해도, 그
과정에서 마음을 잃게 될 것이다. 사실 기술 인본주의는 결국 인간을 다운그레이드할 것이다. 시스템은 다운그레이드된 사람들을 선호할 텐데 그것은 그런 사람들이 가지게 될 초인간의 특성 때문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은 시스템을 방해하고 속도를 떨어뜨리는 성가신 성질을 갖고 있지 않아서이다. 모든 농부들이 알고 있듯이, 염소 무리에서 가장 골치 아픈 존재는
대개 가장 똑똑한 염소이다. 농업혁명 과정에서 동물의 마음 능력을 떨어뜨리는 일이 반드시 필요했던 이유가
이것이다. 기술 인본주의자들이 꿈꾸는 두 번째 인지혁명은 똑 같은 일을 우리에게 할 것이다. 즉 그 어느 때보다 효과적으로 데이터를 전달하고 처리할 수 있지만, 집중하고
꿈꾸고 의심하지 못하는 인간 톱니를 생산할 것이다. 수백만 년 동안 우리는 성능이 향상된 침팬지로 살았다. 그리고 미래에는 특대형 개미가 될지도 모른다.
(503)
데이터교는 우주가 데이터의 흐름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떤 현상이나
실체의 가치는 데이터 처리에 기여하는 바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한다. 이색적인 비주류 개념 같다는 인상을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이 개념은 이미 과학계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데이터교는 두 과학 조류의 격정적 합류에서 탄생했다.
(505)
이렇게 보면 자유시장 자본주의와 국가가 통제하는 공산주의는 서로 경쟁하는 이념,
윤리적 신조, 정치제도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이 둘은 경쟁하는 데이터 처리 시스템이다. 자본주의는 데이터를 나누어 처리하는 반면, 공산주의는 중앙에서 모두 처리한다. 자본주의가 데이터를 처리하는
방식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해, 그들이 자유롭게 정보를 교환하고 독립적으로 결정을 내리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자유시장에서 빵 가격은 어떻게 정할까? 우선
모든 빵집이 원하는 만큼 빵을 생산하고, 원하는 만큼 가격을 매길 것이다. 소비자들이 여력이 되는 한 얼마든지 많은 빵을 살 수 있고, 경쟁관계인
빵집에 가서 빵을 사도 된다. 바게트 한 개에 천 달러를 매겨도 불법이 아니지만 아무도 그 빵을 사지
않을 것이다.
(513)
앞으로 몇십 년 동안 우리는 기술이 정치보다 한발 앞서 우위를 점하는, 인터넷
같은 혁명들을 더 많이 보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은 곧 우리 사회와 경제 그리고 우리의 몸과
마음까지 앞지를 텐데도, 우리의 정치적 레이더망에는 좀처럼 포착되지 않는다. 현재의 민주적 구조들은 관련 데이터를 충분히 빨리 수집해서 처리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적절한 여론을 형성할 수 있을 만큼 생물학과 사이버네틱스에 대해 잘 모른다. 따라서
전통적인 민주정치는 중요한 사건들을 제어할 수 없고, 미래에 대한 유의미한 비전들을 우리에게 제공하지
못한다.
(537)
21세기에는 더 이상 감정이 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알고리즘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전례 없는 연산력과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하는 우월한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있다. 구글과 페이스북 알고리즘들은 당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정확히 알 뿐 아니라, 당신에 대해 당신은 짐작도 하지 못하는 백만 가지 다른 점들을 알고 있다. 따라서
당신은 이제 자신의 감정에 귀 기울이는 것을 그만두고, 이런 외부 알고리즘에 귀 기울이기 시작해야 한다. 유권자들이 민주당에 투표하는 반면 다른 유권자는 공화당에 투표하는 정확한 신경학적 이유까지 안다면, 무엇하러 투표를 하는가? 인본주의의 계명이 “네 감정에 귀 기울여라!”였다면, 데이터교의
계명은 “알고리즘에 귀 기울여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