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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無窮花)는 장성(長城)을 한계(限界)로
○ 『진(秦)나라와 한(漢)나라의 강역(疆域)은 조선(朝鮮)의 땅이었는가?』 하는 문제(問題)에 있어, 대륙조선(大陸朝鮮)을 주장(主張)하는 “본인(本人)”의 입장(立場)에서 “당연(當然)한 것이다.”
○ 홍자옥편(弘字玉篇)에서 『 槿 』이란 자(字)를 찾아보면, 『무궁화(無窮花) 근(槿)』이라 하고, 『槿 (근) : 蕣 也 木 槿 / 무궁화이다. 무궁화 근. 【순(蕣=순(舜)) : 무궁화 순】』, 『花 開 朝 而 暮 萎 / 꽃이 아침에 피었다가, 해질 무렵에 시들어진다. 【위(萎) : 시들다.】』이라 하고는,
一 名 椵 : 일명 나무이름이다. 【가(椵) : 나무이름 가】
一 名 櫬 : 일명 오동나무이다. 【널 츤(櫬)】
一 名 舜 華 : 일명 무궁화(蕣華=순화(舜華)이다.【본인(本人) 주(注) / 일명 순임금의 꽃이다.】
一 名 日 及 : 일명 일급이다.
一 名 王 蒸 : 일명 왕 증(王蒸)이다. 【다른 곳에는 옥 증(玉蒸)이라고 하였음】
一 名 無 窮 花 : 일명 무궁화(無窮花)이다.
一 名 皇 漢 : 일명 『황한(皇漢)』 이다. 【본인(本人) 주(注) / 일명 진(秦)과 한(漢)나라를 뜻한다.】라고 하였는데, 그 밖의 것으로, 『목근(木槿, 木菫), 훈화초(薰華草), 근화 초(槿 花 草), 근 황 화(槿 黃 花), 츤 순(櫬 舜), 조 개 모 락 화 (朝 開 暮 落 花), 조 생 모 락 화(朝 生 暮 落 花), 일화 (日華), 주순(朱 蕣), 조근(朝槿), 조화(朝 華), 조순 (朝 蕣), 조생모근(朝 生 暮 槿), 목화 (木 樺), 부상(扶桑)』등이 그것이다
○ 무궁화(無窮花)는 ‘조선(朝鮮)’을 칭하는 말로 사용(使用)할 정도(程度)로 『옛 조선(古朝鮮)』으로부터 시작(始作)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산해 경(山海經)에도 기록(記錄)된 것을 보면, 최소한(最小限) 『4- 5 천년(千年)이전(以前)』부터 <무궁화=조선>이란 말이 회자(膾炙)되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 무궁화(無窮花)는 일명 순화(舜華)=순화(蕣華)라고 하여, 순(舜)자는 “순(舜)임금”을 뜻하는 말로, 또 무궁화(無窮花)를 뜻하는 말로 사용(使用)되는데, 순(舜)임금 역시 “조선(朝鮮)의 임금”이란 뜻일 것이다. 여기서 관심(關心)을 끄는 것이 『“무궁화(無窮花)”를 “일명(一名) 황한(皇漢)”』이라 했다는 것에 있다. 【일명(一名) : 본래(本來)의 이름 외(外) 따로 부르는 이름】
㉠ 황(皇) : 임금 황(皇)으로 천자(天子)나 천제(天帝)를 호칭(呼稱)하는데, 역사서(歷史書) 상에서 “황(皇)” 과 “제(帝)”를 칭한 것은 “진(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이다.
㉡ 한(漢) : 육국(六國)통일(統一)을 이룩한 진시황제(秦始皇帝)의 나라, 진(秦)나라 말기(末期)에, 『초 왕(楚王) 항우(項羽)』와 함께 천하(天下) 패권(覇權)을 놓고 다툼을 하다가, 북 맥(北貊=北貉)의 용감무쌍(勇敢無雙)한 기병대(騎兵隊)의 지원(支援)에 힘입어, 항우(項羽)를 몰아붙이자, 항우(項羽)는 B. C 202 년 패전(敗戰)으로 도주(逃走)하다가, 막다른 골목에서 자살(自殺)로 한(恨) 많은 생을 마감하자. 농사(農事)를 짓던 농민(農民)출신(出身) 『 유방(劉邦) 【양한(漢 : BC 206 ~ AD 220)】』 이 건국(建國)한 나라이다.
㉢ 『무궁화(無窮花)를 “황한(皇漢)”이라 지칭했다』 는 말은,
➊『 “진(秦)과 한(漢)”의 나라꽃과 같다는 말이며, 곧 무궁화는 진한(秦漢)을 뜻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➋ 『“고조선(古朝鮮)” 역시 “무궁화(無窮花)는 곧 고조선(古朝鮮)을 뜻하며, 동방(東方)의 나라였다.』
○ 왜 갑자기 무궁화(無窮花)를 설명하는 걸까 궁금할 것이나, 사실(事實)은 사신단(使臣團)의 연행(燕行)기록(記錄) “한 구절(句節)”을 설명(說明)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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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행록(燕行錄) 중에서,
고평(高 平)이나 사령(沙 嶺) : 모두 북경(北京)으로 가는 사신(使臣)이 육로(陸路)로 갈 때 지나가는 곳의 지명(地名)이다. ‘우가 장(牛 家 莊)과 반산(盤 山)’의 사이에 있는데, 비가 오면 진흙 수렁이 되어 건너기가 몹시 어려운 곳이다.
고 평(高 平) : 정 유 조 천 록(丁 酉 朝 天 錄) <원전/번역/고전번역원의 것을 인용함>
《 大 野 通 蒲 類 : 큰 들은 포 류(蒲類)와 통하는데 / 長 墻 限 槿 原 : 긴 담장은 근원을 한계선 쳤네. 》 하였다.
이것을 조선사(朝鮮史) 입장에서 다시 번역(飜譯)해 보자.
《 大 野 通 蒲 類 : 큰 들은 포 류 【蒲類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 현 신 강성(新疆省)의 “언 기(焉耆)와 이리(伊犁)” 근교(近郊)에 있는“박사등호(博斯騰湖)”가 『포 류 해(蒲類海)』 이다.】 와 통하는데 / 長 墻 限 槿 原 : 긴 담장(장성 : 長城)은 우리나라(무궁화)의 근원(根源)을 한계 하였네. 》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물론(勿論), 이견(異見)도 있을 수 있겠으나, 여러모로 생각하고, 찾아보았으나 대륙조선(大陸朝鮮)의 입장(立場)에서 바로 보는 관점(觀點)은 역시 같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고평(高平)”이란 지명(地名)은 현 “하 북 성(河北省) 북경(北京)의 동쪽지방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며, 이곳은 하서회랑(河西回廊)의 끝 ‘돈 황(燉煌)’지대를 말하는 것이다.
더하여 위의 것을 고증(考證)할 수 있는 연행록(燕行錄) 기록(記錄)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점을 상기(想起)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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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행기사(燕行記事) 상 정유년(1777, 정조 1) 12월 10일> / 거류 하 (巨 流 河) = 주류 하(周流河) : 거류 하(巨流河)는 주류 하(周流河)의 또 다른 이름이다. ❲주류 하(周流河)에 다다랐다. 옛날에는 일명 거류 하(巨流河)라고 일컬었다. 하수(河水) 서북(西北)에 작은 성이 있는데, 거의 무너지고 옛터만 남았다. 당(唐) 나라 때 쌓은 것이라고 하나 사실(事實)인지는 알 수가 없다. 수십(數十) 촌사(村舍)가 성(城)밖에 있고 하수(河水)의 너비는 혼 하(混 河)와 같은데, 하수(河水)가 얼어붙어 수레를 끌고 건널 만하였다. 봄여름에는 배로 간다고 한다. 하수(河水) 전후(前後) 10여 리가, 모두 가는 모래(사(沙)여서, 바람이 없는 날에도, 모래가 날아들어, 수레바퀴와 말 발자국 사이에, 안개같이 자욱하다. 흙의 성질이 본래 그러한가? <河之前後十餘里.皆是細沙.無風之日.亦自揚飛.車輪馬蹄之間.濛濛如霧.蓋土性本然耶。>❳하였다.
❲하루 종일 황량한 변방에 티끌 모래가 걷히지 않았다. 교자(轎 子)의 창을 비단 천으로 막았으나, 가는 가루가 날려 쉽게 스며든다. 갈수록 더욱 괴롭다. : 盡日荒塞塵沙.不開遮紗轎窓.而細屑飄揚.自易透入.日覺去去愈苦.❳
(2) <김 정중(金 正 中)의 연행(燕行)기 : 심양(瀋陽)에서 산해 관(山海關)으로>
❲곧 말을 재촉하여 나아가는데, 바람이 매우 사나워, 들판의 모래를 불어다가, 사람의 얼굴을 때리니, 눈 코, 입 속으로, 다 들어가서 지척 사이에 있는, 동행 인마(人馬)도 분간하지 못하겠다. / 卽催馬前進.風勢甚猛.吹野沙.撲人面.入眼中,鼻中,口中.咫尺之間.不辨同行人馬.❳
❲당시(唐詩)에서 이른바 : 唐詩所謂 / 되놈 땅의 모래가 얼굴에 휭휭 부니 : 胡 沙 獵 獵 吹 人 / 포로로 잡힌 한인들 마주쳐도 몰라보네. : 漢 虜 相 逢 不 相 見 之 句.❳하였다.
【 조선(朝鮮) 정조(正祖) 15년(1791)에, 정사(正史) 김이소(金 履 素), 부사(副使) 이조원(李祖源), 서장관 심 능 익(沈 能 翼)이 연공(年貢)ㆍ진하(陳賀)의 목적(目的)으로 연경(燕京)에 사행으로 갔을 때, 벼슬 없이 선비로 따라간 김 정중(金 正中)이 기록(記錄)한 것이다. 】
● 현재(現在)의 북경(北京)으로부터 산해 관(山海關), 심양(瀋陽)등지가 “되놈 땅이고, 모래바람에 휭휭 부는 곳”이라면, 『이곳의 지세(地勢)는 특이지형(特異地形)으로 “사막(沙漠)”지대였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며, 『북경(北京 : 燕京)은 사막(沙漠)지대(地帶)를 통과(通過)해야 도달(到達)할 수 있는 곳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당시(唐詩)에서 이른바 : 唐詩所謂 / 되놈 땅의 모래가 얼굴에 휭휭 부니 : 胡 沙 獵 獵 吹 人 / 포로로 잡힌 한인들 마주쳐도 몰라보네. : 漢 虜 相 逢 不 相 見 之 句.❳라는 설명(說明)은,
오늘날의 사막지대(沙漠地帶) 여행(旅行)을 해보면, 똑같은 경험(經驗)을 할 수 있는데, 위의 시(詩) 내용(內容)을 100% 이해(理解)할 수 있다.
곧 시야(視野)가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먼 하늘에 새까만 구름과도 같은 것이 몰려오는데, 원주민(原住民)들은 이미 그 기미(幾微)를 알아차리고는 안전(安全)한 곳으로 대피(待避)를 하지만, 이방인(異邦人)들은 한 발 늦어, 피하려고 하지만 이미 늦어, 자신들이 있는 곳에서 몇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태초(太初)의 어둠과도 같은 암흑(暗黑)이 지배(支配)하고, 얼굴과 머리를 천으로 완전히 밀봉한 것처럼 싸매지만, 모래바람은 조금이라도 틈이 있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들어온다. 그 악몽(惡夢)의 시간(時間)은 피할 수가 없으며, 바람이 자야만이 피할 수 있다.
바로 앞에 있던 언덕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멀리에 없었던 큰 모래언덕이 새롭게 만들어져 있다. 이것은 바람으로 인해 모래의 이동(移動)으로 만들어지는 현상이다. 포장(鋪裝)이 잘 된 도로(道路)는 이정표(里程標)만이 그것이 도로(道路)임을 표시할 뿐, 온통 사방(四方)이 모래뿐이다. 바람에 따라 “모래”는 이리 저리로 이동(移動)을 한다. 경험(經驗)하지 않고서는 이런 현상(現狀)을 100% 이해(理解)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반 초원(草原)지대나, 자갈이 많이 있는 사막(沙漠)에서도 큰 바람이 불면, 황사(黃沙)가 날리는 모습은 장관(壯觀)을 연출(演出)하는데, 그것은 악몽(惡夢)이다. 바로 옆의 사람도 알아 볼 수 없으며, 얼굴을 때리는 모래는 견딜 수 없다. 귓속, 콧속, 입안, 목 부위, 머리털 속등 등, 취약(脆弱)한 곳으로 스며드는 ‘가는 모래’는 정말 견디기 힘들다.
● 이러한 지방(地方)은 특이(特異)한 지형(地形)을 가진 곳으로, 『산서(山西)성 북방(北方)이나, 하 북 성(河北省)이나, 요 녕 성(遼寧省), 길림성(吉林省), 흑룡강 성(黑龍江省)등지에서는 이러한 현상(現狀)을 발생(發生)시키는 근원지(根源地)는 없다.』 “사막(沙漠)”이라는 특이지형(特異地形)을 갖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이것은 역사서(歷史書)로 볼 때, 그 지형지리(地形地理)를 설명(說明)한 것으로 파악(把握)할 수 있으며, 옛 왕조(王朝)시대의 것을, 현재(現在)의 것으로 판단(判斷)치 말라는 것은 기본자세(基本姿勢)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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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事實) 이러한 것들은 수차례에 걸쳐 소개(紹介)한 것이다. 하나하나의 의문(疑問)점을 파헤치고 나면, 또 의문(疑問)이.........? 계속되기 때문에 보통 답답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중단(中斷)한다는 것은 너무도 아쉬운 일이다.
○ 올바른 조선사(朝鮮史)를 위해 무엇인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보면, 그곳에서 위안(慰安)을 찾는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 예나 지금이나, 외침(外侵)에 대한 나라의 방비(防備)수단(手段)은, 다양(多樣)한 형태(形態)와 다양(多樣)한 방법(方法)이 있을 것이나, 근본(根本)이 되는 것은 “사람 곧 장정(壯丁)이다.” 옛날 옛 적에도 외침(外侵), 내란(內亂)등의 위험(危險)한 사태(事態)에 대비(對備)하고자, 다양(多樣)한 형태의 모병(募兵)제도가 있었으며, 그것은 강제적(强制的), 강압적(强壓的) 성격(性格)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 역사서(歷史書)를 보면,
당 고종(高宗) 용삭(龍朔) 2년 무인(戊寅), 좌 효 위(左驍衛)장군이며, 백주(白州)자사(刺史)였으며, 옥저(沃沮)도 총관(總管)으로 임명(任命)된 “방 효 태(龐孝泰)” 는 출정(出征)시 그의 아들 “열 셋”과 함께 하였는데, ❲“방 효 태(龐孝泰)군(軍)과 고구려(高句驪)군(軍)”이 『사수(蛇水) 위』에서 전투(戰鬪)가 벌어져, “방 효 태(龐孝泰)와 함께 출전(出戰)한 그의 ”열 셋 아들“이 모두 함께 전사(戰死)했다.❳고 적고 있다.
나라의 위기(危機)는 곧 종족(種族)의 위기(危機)와 같다. 군(軍)에 갔다 오지 못한 젊은 분들은 싫어하겠지만, 군(軍)에 입대(入隊)하여, 기본(基本)훈련(訓練)과 전투(戰鬪)훈련(訓練)을 거쳐, 적(敵)과의 전투(戰鬪)에서 80% 이상의 기량(技倆)을 유지(維持)하려면, 충분한 훈련(訓練)으로 숙달(熟達)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군(軍)복무(服務)기간(其間)은 최소한 30개월 정도(程度)는 되어야 한다.
근대조선(近代朝鮮)시절에도 “구분전(口 分 田)”이란 것이 있어,『자손(子孫)이 없이 죽은 관원(官員)의 아내와, 부모(父母)가 모두 죽은 출가(出家) 전(前)의 딸이나, 또는 전장(戰場)에 나가서 자손(子孫)이 없이, 죽은 군인(軍人)의 아내에게, 품등(品等)을 따라 나누어 주던 전지(田 地)를 말한다.』
이렇듯 예나 지금이나 『병역(兵役)』 은 『국가(國家)와 종족(種族)을 지키기 위한 필수적(必須的) 조건이었다.』
2012년 12월 13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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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결론을 잘 모르겠습니다. 무궁화가 어떻다는 말씀인지 잘 ?
당연한 의문입니다. 아직 결론을 맺지 못한 글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진과 한과 무궁화가 관계가 있을 것이란 것입니다. 차 후 결론을 낼 두 번째 글을 준비하겠습니다. 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