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씨에게는 예림이라는 9살 짜리 조카가 있습니다. 예림이는 종종 미라씨에게 이렇게 말하곤 하죠.
"고모는 좋겠다!"
왜냐고 물었더니 예림이의 대답이 정말 걸작입니다.
"고모는 부잣집 딸이잖아?"
아마도 예림이가 비싼 물건을 사달라고 하면 예림이의 부모(미라씨의 오빠 내외)가 할아버지를 조르라고 해서 예림이는 할아버지가 정말 부자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신발 상표로 빈부가 판가름나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미라씨의 초등학교 시절이었는데 미라씨 같은 평민 출신들은 대부분 W마크가 새겨져 있는 "월드컵" 운동화를 신었습니다. 좀 되는 집 애들은 프로스펙스를 신었고 그 당시 최고의 부의 상징은 나이키였답니다. 미라씨도 나이키신발을 신은 애들이 정말 부러웠지만 차마 부모님께 말은 못하고 몇 년 동안 속앓이를 한 끝에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드디어 프로스펙스 운동화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 운동화에 얽힌 지상에서 가장 슬픈 영화를 봤습니다.
바로 마지드 마지디 감독의 이란영화 "천국의 아이들"입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이후로 우리는 이란 영화에 대해 남다른 애정과 기대를 갖고 있지요. "천국의 아이들"은 그런 기대를 결코 저버리지 않는 영화입니다.
'99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후보, 몬트리올 국제영화제 그랑프리&관객상, 파지르 국제영화제 그랑프리, 뉴포트 국제영화제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싱가포르 국제영화제 실버스크린상 등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알리는 엄마 심부름으로 감자를 사러 갔다가 여동생의 신발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협박 반 애걸 반으로 여동생의 입을 막아서 다행히도 부모님은 그 사실을 모르고 계십니다. 비록 신발은 없지만 학교에 가긴 가야하겠고, 그때부터 오전반 여동생과 오후반 알리의 눈물겨운 신발 교대식이 시작됩니다.
여동생은 오빠에게 신발을 벗어주기 위해 시험도 보는 둥 마는 둥 중간에 뛰쳐나오고 알리는 숨이 턱에 차도록 뛰어 학교에 도착하지만 매일 지각을 면치 못합니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 전국어린이마라톤대회의 3등 상품이 운동화라는 사실을 알게 된 알리는 팔자에도 없는 마라톤에 도전하게 됩니다. 목표는 1등도 2등도 아닌, 오직 3등을 향해서 말이죠.
누구나 어렸을 때 억울한 누명을 쓴 적이 한 번씩은 있으실 거에요. 누명까지는 안 가더라도 어른들이 내 맘을 너무 몰라줘서 속상할 때가 정말 많았지요. 영화 속의 알리 또한 그랬습니다. 식료품 가게에서 신발이 없어진 걸 알고 그 신발을 찾느라 실수로 과일상자를 뒤엎게 되자 주인아저씨는 발악을 합니다. 여동생의 신발을 잃어버린 남의 애타는 심정은 모르고... 어른들은 왜 들어보지도 않고 자기 식대로 화부터 내는 건지... 내 심정을 아냐구요?
알리가 신발을 찾으러 식료품가게에 가느라 어머니의 카펫 빨래를 못 돕게 되자 저녁때 아버지는 알리를 호되게 야단칩니다. 어머니는 저렇게 아파서 누워있구만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칠랄레 팔랄레 놀러나 다닌다고... 참 억울하죠?
어른들은 어린이들이 아무 생각 없이 산다고 생각하지만 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어 보니 미라씨도 나름대로 참 생각이 많았습니다. 프로스펙스 운동화를 사달라는 말을 꺼내기까지 4년이란 세월이 필요했으니까요. 그러니 알리의 심정은 오죽했을까요?
오빠의 신발은 여동생에게는 너무 컸습니다. 어느 날 여동생은 그 헐거운 신발을 신고 뛰어오다 벗겨져서 신발이 하수구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올 것이 오고야 만거죠. 빨리 오빠에게 신발을 교대해줘야 오빠가 학교에 갈 수 있는데 입술은 바짝바짝 타들어가는구만 하수구 물살은 왜 이리도 날쌘 것인지...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하수구에 젖은 신발을 건져서 또 뛰기 시작하죠. 여동생이 도착하자 초조해질 대로 초조해진 오빠는 여동생을 구박합니다. "왜 이리도 늦었니? 신발은 왜 젖었니?"
이쯤 되니 서서히 미라씨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합니다.
여동생은 드디어 서러움에 울음을 터뜨립니다. 커다란 남자 운동화 신고 다니느라 체육시간이 악몽 같구만 남의 속도 모르고 정작 신발 분실의 원흉이 나에게 이런 소리를...! "내 신발 찾아내! 엄마한테 이를 거야."
다음 대사에서 드디어 미라씨의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흐릅니다. "엄마한테 일러! 엄마한테 혼나는 게 무서워서 이러는 줄 알아? 그러잖아도 가난한 우리 집은 신발을 사느라 또 빚을 저야 돼!"
참 슬프죠?
마라톤대회에 출전한 알리는 죽을 힘을 다해 뜁니다. 록키 1,2,3,4,5탄의 힘을 다 합친 만큼 사력을 다해서 말이죠. 그런데 너무 열심히 뛴 나머지, 달리다 보니 1등을 하고 있었던 거에요. 우리의 알리는 2명을 먼저 보내고 3등으로 뒤쳐집니다. 하지만 문제의 4등하던 놈이 알리의 발을 걸고 알리는 넘어지고 말죠. 그 후에 어떻게 됐을까요?
알리는 다시 일어나서 뜁니다. 화면은 동생이 커다란 남자운동화를 신고 오빠의 등교시간을 맞춰주기 위해 정신없이 달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알리는 동생을 생각하며 정말 열심히 달리고 마지막 골인지점에 알리를 포함한 4명의 학생들이 동시에 도착합니다.
몇 등일까요?
알리는 1등을 하고 말았습니다. 극장에서 관객들은 박수를 치며 좋아했지만 미라씨 눈에서는 눈물이 주루룩 흘렀습니다. 아! 3등이어야 하는데...
시상대에서 알리는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3등을 해야 하는데 1등을 해버렸으니까요. 방송국 카메라맨은 알리에게 고개를 들고 포즈를 취해줄 것을 부탁합니다. 고개를 든 알리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알리역을 맡은 아미르 파로크는 "박하사탕"의 설경구씨 이래로 가장 칙칙하고 심난한 얼굴을 보여줍니다. 박하사탕을 보면서 설경구씨의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그 분위기에 "인상이 저러니 저런 삶을 살지. 저건 연기가 아니야. 설경구란 사람은 틀림없이 사연 많은 삶을 살았을 거야!"라는 의심을 했는데 이 한없이 선량한 눈빛의 어리버리한 듯 하면서 우수에 찬 소년을 보니, 다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기가 아닐 거라고 말이죠.
감독은 이 알리역을 찾기 위해 3만 5천명을 오디션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미술수업 중인 어느 학교 교실에서 스케치북이 없어서 벌을 서고 있는 이 소년을 발견하고 운명적인 캐스팅을 했다고 합니다. 소년은 머리를 다쳐서 스케치북을 못 가져왔다는 독특한(?) 이유를 댔다는군요. (???) 아마 스케치북을 못 가져올 수밖에 없었던 그 사연 덕택에 이런 뛰어난 연기와 외모를 보여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영화는 또한 마지드 마지디 감독 자신의 어린 시절을 토대로 한 이야기라고 합니다. 역시 자신의 진실된 경험을 바탕으로 썼을 때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작품이 나오는가 봅니다.
어린 시절 운동화에 얽힌 비화가 있는 분들이라면 꼭 보시기 바랍니다.
별 거 아닌 내용 같지만 이 작고 소박한 이야기에 미라씨는 감히 별 5개를 주고 싶습니다.
지상에서 가장 슬픈 영화 "천국의 아이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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