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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마지막날 9.13일 남양주시 조안면 소재 운길산에 다녀왔습니다.
아침 일찍 7호선 전철 상봉역에 도착하여 용산발 용문행 중앙선 전철을 오전 8시 11분 (아래 열차시간표 하행선) 환승하고 30여분후에 운길산역에 도착 운길산역 옆 굴다리를 지나 조안면 진중, 중리 마을 뒷편으로 올랐습니다. 가파른 능선을 넘어 몇번을 쉬고 다시 한참 올라 사찰 수종사에 도착했습니다. 절 바로 동편 아래에 550년된 은행나무 아래에서 땀을 식히고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북한강, 남한강 합류지점 양수리 부근 풍광을 눈에 가득 넣고 절상봉(520M) 을 거쳐 운길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수종사에서 내려다 본 양수리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풍광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일찌기 이조 초기 유명한 학자 서거정 선생이 여기에 올라 동방에서 이렇게 풍광이 뛰어난 사찰이 없었다고 극찬했다고 합니다.
운길산(610m)은 한강 두물머리(양수리)가 지척이라 구름을 모으는 곳으로 알려집니다. 태조 이성계는 이 산에서 구름이 흘러가다 쉬어가는 곳이라 해서 운길산이라 불렀다 합니다. 운길산에서 적갑산(560m), 철문봉(630m) 등을 지나면서 예봉산(683m)으로 연결되는 장거리 산행을 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예봉산의 지명 유래를 보면 조선시대 경기 동부, 강원 중북부 선비들이 한양으로 갈 때 임금이 사는 도성을 향해 신하로서 예를 표해 예봉(禮峰)이라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운길산~예봉산 능선은 다산능선이라고 할 정도로 다산 정약용 선생 형제들과 인연이 많은 곳인데, 특히 철문봉 정상에는 ‘정약용, 약전, 약종 형제가 집 뒤 능선을 따라 이곳까지 와 학문을 밝힌 곳’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다산은 40세 때인 1801년 강진으로 유배생활을 떠나기 전에 약전·약종 형들과 현재의 팔당호 인근 생가를 나서 능선길을 산책하며 학문에 관해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약용·약전(귀양지서 사망)의 귀양과 약종의 순교로 삼형제는 이후 함께하지 못합니다. 천주교 박해와 관련되었던 안타까운 가족사입니다.
다산은 생가 앞 두물머리 풍경에 대해 18년 유배생활을 했던 전남 강진군 다산초당이나 백련사에서 바라본 강진만의 풍경과 유사해 늘 고향을 생각하곤 했다고 회고했던것으로 전해집니다. 다산의 생가는 예봉산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지요. 우리 산우회에서 가끔 가던 서초동 교대역 기와집 순두부집의 본점이 바로 다산 정약용 선생 생가 부근 길 옆에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에 관한 책중에 이덕일님이 쓴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김영사)이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당시 다산 선생과 형제들이 천주교와 연관된 국문(鞠問) 이야기등이 나옵니다. 다산 선생은 천주교 서적들을 관심있게 읽었지만 어디까지나 실용적 자세였고 나중에 한 천주교도가 제사를 거부하고 부모의 신주를 태우는 사건이 발생하자 천주교를 배교하는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다산 선생은 끊임없이 당시 노론의 붕당에 의해 천주교도로 지목받아 정치적 박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정조왕이 살아 생전에는 구명이 되었으나, 정조가 죽고난뒤에는 박해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인들의 역겨운 당파, 정적제거 음모로 위대한 행정가이며, 학자이고 사상가였던 다산 선생은 유배생활로 가장 활동적이어야 할 자신의 인생기를 보내며 저술활동에 진력했습니다.
그는 동부승지 사직상소 등에서 몇 차례 자신이 천주교를 버렸음을 언명한 바도 있었으나, 정조왕 서거후 순조가 들어서자 수렴청정하던 대비가 연결된 반대파들로 부터 처절하게 규탄당합니다.
다산의 정적들은 그가 천주교도냐 아니냐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정약용의 숨통을 끊어놓는 데만 몰두했다고 볼 수 있지요. 다산은 절박한 상황에 빠집니다.
정약용은 살기위해서는 죽음 앞에서도 천주교도임을 굽히지 않았던 형 정약종을 비난해야 했습니다.
국청에서 정약용은 다음과 같이 울부짖습니다.
"어찌 감히 위로는 임금을 속일 수 있으며 아래로 형을 증거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 "
"형제 사이는 천륜이 중하거늘 어찌 감히 혼자만 착한 척 하겠습니까. 오직 같이 죽기만을 원합니다."
정양용의 죽음은 기정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약용이 자신의 죽음과 바꾸지 않기 위해 증거하지 않으려던 형 정약종이 체포되고
정작 그 형의 입에서 정약용의 ’배교’에 대한 비판을 듣게되자 정적들도 정약용을 죽이지 못하고
정약용은 오랜 세월 귀양살이를 하며 대단한 저술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의 마음속에는 천주교에 대한 뚜렷한 신심이 살아있었다고 합니다.
그랬던 이조의 당쟁으로 얼룩진 정치판이 2011년 현재에도 그대로 아닌가요? 보수와 진보, 친이, 친박, 주류, 비주류, 민주노동당 vs 진보신당 분열과 대립 뿐인 정치판입니다. 우리 사회에 관용과 화합, 통합이 절실한 시점임을 되새겨줍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 생가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바다같은 강을 내려다 보고있는 운길산 수종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로 창건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1459년(세조 5) 세조와 관련된 창건설화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세조가 금강산을 구경하고 수로(水路)로 한강을 따라 환궁하던 도중 양수리(兩水里)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갑자기 종소리가 들려와 기이하게 여겨 다음날 조사해보니 운길산에 고찰(古刹)의 유지(遺址)가 있다고 하여 가보았다고 합니다. 그 바위굴 속에서 16나한을 발견했으며 굴 속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암벽을 울려 종소리처럼 들린 것임을 알게 되어, 이곳에 돌계단을 쌓고 절을 지어 수종사라고 했다는 내용인데, 이 절에는 1439년(세종 21)에 세워진 정의옹주(貞懿翁主)의 부도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창건은 아마 그 이전이며 세조 대에 와서 다시 중창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1939년 일조태욱화상이 중수 하였으나 6.25전쟁때 불탔고1974년 혜광화상이 대웅보전을 1981년 약사전과 종각을 지었습니다. 1999년부터 현 주지이신 금해동산 스님께서 응진전, 선불장, 삼정헌, 경학원, 미륵불, 일주문등을 세워 서거정이 천하제일의 명당이라 찬탄했던 절의 풍광을 다시 복원 하였습니다.
수종사는 조선조 임금중 가장 잔혹한 인간으로 알려진 세조와 연관이 많은 곳인데,요즘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 다루어지는 계유정난을 보시면 대충 아시겠지만 세조는 왕권을 찬탈하고 형제(안평, 금성대군등)는 물론 수많은 충신들과 그 수족들을 처참하게 죽인 인간성이 결여된 사악한 군주입니다. 이런 인간 밑에 빌붙어 신념과 지조를 버리고 호의호식 하면서 '왕권강화가 필요했고 조선의 나라 기틀을 잡고 태평성대를 이루기 위한 불가피한는 선택' 이었다고 주절대는 신숙주와 추종세력들이 있지요. 권력에 눈이멀어 인륜과 천륜을 저버린 인간들에 의한 살륙극으로 임금이 된자가 세조입니다. 조선 시대 임금중 위대한 성군으로 평가받는 세종대왕의 18남 4녀 자녀중 두번째로 태어난 세조, 위대한 성군의 자식중에 이런 막가파같은 자식이 나왔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세조는 그 처절했던 살륙극으로 인한 저주를 받았을까요, 말년에 문둥병으로 고생많이 했습니다. (드라마 공주의 남자는 그 내용에 픽션을 일부 가미한 퓨전 드라마입니다)
수종사에는 조선후기 사회변혁을 꿈꾸던 선각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초의선사,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 선사와 묵객들이 종파와 당색, 신분을 따지지 않고 사회변혁의 꿈을 다듬은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운길산 정상에서 보니 북쪽으로 멀리 수락산도 보이고 덕소 지역의 아파트도 눈에 들어옵니다. 서남쪽으로 보니 예봉산, 적갑산, 철문봉 방면 능선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추석 마지막 연휴 가족단위 산행객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 생가가 가까워서인지 운길산 정상에는 정약용 선생이 지었다는 결혼 60주년 회혼시 한편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무패에 적혀있습니다. 후손들에게 부부애에 대해 의미있는 말씀을 하시는 다산 선생의 인품과 경륜이 느껴집니다. 다산은 정실 부인 홍씨와의 결혼 60주년 회혼잔치에 맞춰 ‘회혼시’ 한 편을 지어 주었고 회혼잔치 날 아침 영면했다고 합니다.
결혼 60주년 회혼시 내용:
六十風輪轉眼翩
穠桃春色似新婚
生離死別催人老
戚短歡長感主恩
此夜蘭詞聲更好
舊時霞帔墨猶痕
剖而復合眞吾象
留取雙瓢付子孫
“60년 풍상의 바퀴 눈 깜짝할 사이에 굴러 왔지만
복사꽃 화사한 봄빛은 신혼 그 때와 같네.
살아서도 이별하고 죽어서 이별하려 늙음을 재촉하나
슬픔은 짧고 즐거움은 길었으니 임금님의 은혜로다
오늘밤 뜻 맞는 대화가 새삼 즐겁고
그 옛날 붉은 치마엔 먹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네.
나눠졌다 다시 합해진 내 모습 같은
술잔 두 개 남겨 두었다 자손에게 물려주려네.
한글로 풀어 쓴 다산 적약용의 결혼 60주년 회혼시
상봉역에 비치된 중앙선 전철 시간표. 토,일요일 및 휴일은 우측 빨강색 하행선 시간 적용.
상봉역에서 하행선은 오전 8시대엔 11분,46분 출발한다. [ ] 속 시간은 덕소 종착역인 전철출발시간이다.
팔당, 운길산, 양수,국수, 양평, 용문 등으로 갈려면 [ ] 속이 아닌 시간을 참고하여야 함. 토,일요일, 휴일에
운길산역에 오전10시 이전 도착하려면, 늦어도 상봉역에서최소한 9시 14분 발 하행선을 승차해야 한다.
운길산 ~ 적갑산~철문봉 ~ 예봉산으로 이어지는 코스 안내도 . 예전엔 45번 국도가 지나는 송촌리에서 많이 들어갔으나 운길산
전철역이 생기고 난뒤엔 운길산역 뒤 진중, 중리 마을 뒤로 해서 올라가는 코스로 많이 올라간다. 그러나 산행로 경사가 너무
가파르고 산행로 대부분 예리한 돌들이 많고 정상부근에 날카로운 바위가 많아 어린이, 노약자들 산행코스로는 무리다.
어린이나 노약자들은 송촌리에서 올라가는 콘트리트 포장로를 이용 수종사 절까지 올라갈 수 있다.
수종사 일주문
수종사 입구 부도
소박한 모습의 수종사 대웅전
다실
경내에서 500년 넘은 은행나무 방향에 있는 출입문인 해탈문
500년 넘은 은행나무
사찰 뒤에서 내려다 본 양수리 전경
절상봉(520M) 정상의 고사목과 소나무
멀리 덕소 뱡면 아파트 단지가 희미하게 눈에 보인다
운길산에서 적갑산 예봉산 철문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운길산 정상. 왼편 멀리 보이는 곳이 덕소, 와부 지역 아파트 단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사상가이며 학자다.
거중기 등을 발명하여 수원성 축조에 사용하는등 실사구시의 학문을 펼쳤다. 각 분야에 걸쳐 500여권을 저술한
저자이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18년의 전라도 강진 등 긴 유배지에서 다시 여유당으로 돌아온 정약용 선생은
1836년 75세로 이곳에서 묻혔다. 이 곳 생가와 뒷동산에 있는 묘역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다산
생가는 여유당(與猶堂)이라 불렀는데 본래 생가는 홍수에 떠내려가 1975년에 복원한 것이다. 오늘날
자기 아집과 욕심에 가득판 이 나라 정치인, 행정가, 학자들이 본받아야 할 우리나라의 대표적 사상가이다.
참고로, 운길산, 적갑산, 철문봉, 예봉산 연결산행을 하실분을 위해 관련 지도 소개합니다.
운길산역->수종사->운길산 정상-> 수종사->운길산역(3~4시간)
운길산역->수종사->운길산 정상-> 새재고개->적갑산->예봉산->남서릉->팔당역(7~8시간)
운길산역->수종사->운길산 정상-> 적갑산-> 예봉산->예빈산(직녀봉)->승원봉->천주교묘지(8시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운길산의 산행지도/등산지도
http://san.gagopatour.com/domestic/san/detail.html?no=918
<< 부근 맛집 >>
남양주맛집 옛나루터오리집 031-576-5233
한방녹두백숙,오리불고기,훈제오리이며 도토리묵, 동동주, 감자전, 녹두전, 오리완자
천마산곰탕 (031)591-3657
첫댓글 참으로 부지런하시고 즐거운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언제나 건강하고 좋은 곳 많이 담아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운길산 수종사 일주문의 단청이 정말 곱습니다. 그리고 사족으로 정다산의 딸 홍임이와 그 부인(첩)은 강진땅에서 해배되어 한양으로 올때 같이 올라오지만, 다산의 부인 홍씨의 야멸찬 냉대에 강진땅으로 도로 가야만하는 운명으로 그 이후론 다산도 두번 다시 볼 수 없었다는군요.
권식님, 저도 그 내용 어디서 읽었습니다. 홍임이와 그 어머니 (다산의 강진 유배시절 소실) 는 해배후 다산을 따라왔다가 같이 살지못하자 다시 강진 다산 초당에 내려가 살았다고 되어 있지요. 유배중에도 첩실 ! 전남 강진 다산초당에 가보면 현지 안내자료등에도 전혀 소개되지않는 이야기입니다. 훌륭한 관직에 있었고, 뛰어난 사상가이고 학자였다고 소실을 두지못할 이유는 없었겠지요. 아마, 당시 사회에서 첩실과 그 자녀들이 받은 차별대우를 가늠케 하는 안타까운 이야기임에 틀림없습니다. 다산 선생은 유배지에서도 따르던 제자나 지역 유지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조 총무님, 추석 잘쇠셨습니까. 대모산, 구룡산, 청계산만 오르는게 조금은 답답했던지 모처럼 북한강변 산에 가봤습니다. 역시 강변을 낀 우리 산하 경관 참 아름답다는 것을 느낍니다. 다만, 중앙선이나 경춘선 라인 전철 타는 사람이 너무 붐벼서 일요 등산하기가 좀 꺼려지긴 합니다. 산우회에서 가을에 중앙선 국수역 청계산에도 한번 갈까합니다. 국수역엔 유명한 된장 부추칼국수집이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