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에스프리>, 2024년 가을호
꽃에서 연필로
― 김수영의 「구라중화(九羅重花)」
맹문재
1
완전한 대체는 불가능하지만
꽃을 버려야 나는 살 수 있다
꽃을 소유하지 않으면
나는 아름다운 별이 되리라
꽃을 떼내고 앞을 바라보면
세상을 채우는 별이 되리라
어둠으로 둘러싸인 원망의 벽을 넘어
자유로운 별이 되리라
2
꿈속에서 유혹의 눈길을 보내는 꽃
손에 달라붙는 반죽같이 떨어지지 않는다
어둠 속으로 사라진 풀벌레 같은 운명인데
꽃은 마법처럼 물수제비를 뜬다
자기연민으로 밤바다에 뛰어든 날
투자와 수익을 결코 폄훼하지 말자는 결심으로
나는 꽃을 버렸다
축복의 고통을 사랑굿으로 풀어내었다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꽃을 찾아 헤맨다면
얼마나 억울한가?
3
내가 꽃을 생각하는 것보다 나를 생각하면
슬프지만 다행이지 않는가?
창공에서 빛나는 꽃이
내가 걸어가는 사막 위에서 피어나지 않는가?
선택받지 못한 내가 선택한 꽃은
다정한 반려견처럼
나를 지켜주지 않는가?
나와 꽃은 한몸인 적이 없지 않은가?
4
연약하고 한스러운 힘으로
나는 별을 키운다
괜찮은 미래는 어디에도 없지만
그것이 나에게는 자원이지 않는가?
별은 나무가 되어
거대한 뿌리를 내리고
마침내 나의 연필이 되리라
몸을 움직이는 연필
잊힐 권리를 쓰는 연필
낙관성 상담일지를 적는 연필
꽃과의 거리를 숙명으로 단절하는 연필
약력
1991년 『문학정신』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책이 무거운 이유』 『사과를 내밀다』 『기룬 어린 양들』 『사북 골목에서』 등. 전태일문학상, 윤상원문학상, 고산문학상, 김만중문학상, 효봉윤기정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