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하는 바위
삼상23:19-29
(삼상 23:19, 개정) 『그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이르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쪽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삼상 23:20, 개정) 『그러하온즉 왕은 내려오시기를 원하시는 대로 내려오소서 그를 왕의 손에 넘길 것이 우리의 의무니이다 하니』
(삼상 23:21, 개정) 『사울이 이르되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삼상 23:22, 개정) 『어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그는 심히 지혜롭게 행동한다 하나니 너희는 가서 더 자세히 살펴서 그가 어디에 숨었으며 누가 거기서 그를 보았는지 알아보고』
(삼상 23:23, 개정) 『그가 숨어 있는 모든 곳을 정탐하고 실상을 내게 보고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리니 그가 이 땅에 있으면 유다 몇 천 명 중에서라도 그를 찾아내리라 하더라』
(삼상 23:24, 개정) 『그들이 일어나 사울보다 먼저 십으로 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광야 남쪽 마온 광야 아라바에 있더니』
(삼상 23:25, 개정)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찾으러 온 것을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아뢰매 이에 다윗이 바위로 내려가 마온 황무지에 있더니 사울이 듣고 마온 황무지로 다윗을 따라가서는』
(삼상 23:26, 개정)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
(삼상 23:27, 개정) 『전령이 사울에게 와서 이르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삼상 23:28, 개정) 『이에 사울이 다윗 뒤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삼상 23:29, 개정) 『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머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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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라하마느곳',
‘분리하는 바위’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관여하셔서
다윗 무리와 사울 무리를
분리시켰다는 뜻입니다.
지명에다
아예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양쪽을 달리 다루신다는 겁니다.
성도가 세상을 살면서
늘 느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세상 사람과는 달리
다루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성도가 그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세상사람과 다르게 다루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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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에 보면,
다윗이 사울에 쫓기면서
새롭게 알게 된 하나님에 대해서
여러 모양으로
고백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분통이 터질 노릇이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상황을
낱낱이 하나님께 고합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특징은
문제만 알고
해답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하나님께 고하기 보다는
자신이 스스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자꾸만 되풀이해서 하나님께 되묻습니다.
즉 이 일을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일입니까?
그러니까 다음의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쓰시는대로
제가 쓰여지기를 원합니다”는 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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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에서 다윗은
늘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병주고 약주는 식입니다.
그 와중에서 다윗은
미처 몰랐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우리들에게 일일히 전달하는
중매인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운명도
다윗과 다를 바 없습니다.
위기가 없으면
성도는 하나님께 묻지 않습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묻는 분이 계시다는 것이
불신자와의 차이점입니다.
즉 홀로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사건 속에
놓여 있는 것이
곧 성도의 삶입니다.
분리의 삶이란
이런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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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란 엘리야 시대에서 나옵니다.
어느 가난한 과부가
밀가루통에서 마지막 양의 밀가루를 탁 털어서
자식과 함께 먹고 죽으려고 했을 때,
엘리야 선지자가 들이닥쳐
그 마지막 죽음의 식사까지
자기가 먹어치웁니다.
이는 그 과부의 죽음마저
스스로 하지 못하게 하시는 겁니다.
즉 엘리야가 먹은 셈이 되어,
죽지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죽음마저
자기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됩니다.
즉 자기결정이 철저히 하나님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난 뒤,
그 밀가루통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아무리 퍼내고 퍼내도
밀가루가 도로 가득채워지게 하십니다.
즉 우리가 그저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결정하신 분에 의해서
우리는 지금도 매일같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다윗을 다루시는 방식이며,
성도를 다루시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분리된 자들의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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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리는
처음 창세기 3:15부터 나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러분 쌍방간에 싸움을 하면서
한 사람은 발꿈치를 상했고
다른 한 쪽은 정수리가 상했다면
이게 공평하게 끝난 것이겠습니까?
한쪽에게 완전히 지배당한 겁니다.
우리는 지금 발꿈치 정도 밖에 안되는 상처에
겁을 집어먹고 악마편에 서 있습니다.
발꿈치를 상하는 것이
우리 보기에는
죽어서 더 이상 보지 못할 분으로
영원히 이별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죽음 자체에 대해서
우리 인간들은 그렇게들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인
창세기 3:15에 보면,
메시아가 침노를 당하는 것은
영원한 이별이나 죽음이 아니라
도리어 그 어떤 세력으로 부터도
죽지 않음을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이나 아벨의 죽음도
모두 ‘여자의 후손’을 보여주는 죽음이라서
‘발꿈치 상함’에 해당될 뿐입니다.
성도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위기란
성도로 하여금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고 것을
저주하시는 겁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요, 산성이요
구원의 반석임’을
현장 속에서 느끼게 하시는 겁니다.
이 분의 삶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어떤 식으로 적용이 될까요?
그것은 바로 자유함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무서워서
누리지도 못하면서,
성도에게는 자유스러움을 누리게 하시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9:19-23에 보면,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고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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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종이 되어도
신분상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도가 세상에 억매이지 않는다는 말은
원래 하나님께서도
세상에 억매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의 평가나 윤리나 도덕의 지적에 신경 쓸 이유가 없지요.
어떻게 피조물이
창조주를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놀라운 사실은
성도도 이러한 대우를
세상으로 받아 마땅하다는 겁니다.
즉 세상이 성도를 평가할 자격이 없고
도리어 성도는
세상을 평가할 위치에 있다는 겁니다.
단 여기서 성도는
자기를 옹호하는 처지에서
세상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기준에서 볼 때
그러하다는 겁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기준에 머물려고 한다면
자신은 늘 죽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할 일이요 임무입니다.
이런 자기 죽음이 없으면
방종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쌉니다.
즉 하나님의 분리란
딴 게 아니라
이미 죽은 자라는 사실을 아는 자와,
그렇지 않고 자신이 살았다고
팔팔거리는 자들 간의
구분이요 분리입니다.
본문에서 이런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다윗으로 하여금
늘 죽음의 궁지로 몰아세우게 됩니다.
다윗에게는 위기가 떠날 날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은 어떤 하나님의 뜻을
얻을 수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기적을 만나게 됩니다.
분명 세력이 큰 자는 사울인데
결국 그 큰 힘으로도
다윗을 제거할 수 없다는 그것도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기적이 기적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이는 다윗의 배후에
사울마저 조종하는 힘센 분이
따로 계시다는 것을
다윗과 사울의 관계를 통해서 보게 됩니다.
이 관계 안에서
하나님께서 살아 움직이시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