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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기 93년 6월 21일 토요정례법회 ○
청년강연
하면된다 9단 박은전 교우님의 대종경 불지품 16장 강연이 있었습니다.
김인식 예비교무님 감상담
반갑습니다.
저는 원불교 대학원대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인 김인식입니다.
방학이 되어서 교무님과 청년 여러분들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저도 일반 대학을 다니다 편입을 해서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는데 가끔씩 그때 동기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종사님 말씀처럼 이 세상은 계속적으로 물질이 개벽되고 있고,
사람들은 물질개벽을 위해서 시간과 정성을 쏟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오기 전에 잠실 교당에서 실습을 했는데, 학생법회를 보면서 참으로 놀랐다.
학생들이 시험기간이 되면 법회를 나오지 않는다.
아까 강연하셨던 박은전 교우님께서는 토요일에 법회 나오는 것이 의례적으로 되었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쉽지는 않더라.
나도 청년회 활동을 할 때 법회는 의례적으로 나가는 곳이라고 생각하여 그 때 신심이 많이 났었다.
그런데 이제는 사회적 성적, 의식주, 이런 것이 더 중요하게 생각되고 있는 것 같다.
물질 개벽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경쟁률이 몇 만대 일이라고 하여도 거기에 온 정신을 쏟으며 가는데,
정신개벽을 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필요성을 느끼고 몰입하려고 하는가.
나도 능력도 없지만, 정신개벽을 해 보려는 생각에 출가까지 하고 공부하고 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나와 같은 갈등을 하는 분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며, 지금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니더라도 물질 개벽은 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정신개벽을 하려는 사람은 없다, 그리 많지 않다.
여기에 계신 분들이 한번 나의 인생을, 나의 인생이 물질개벽을 위하여 쏟고 있는지,
정신개벽을 위해 온 인생을 투자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대종사님 교법이 일상생활 속에서 의식주를 하면서 공부를 해나갈 수 있는 방법이지만
지금 원기 93년이고 우리 교단은 아직 초창기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다시 한번 물질 개벽의 선봉자가 되고, 대종사님의 교법을 전하는 정법사도가 되면 어떨까.
공부를 하면 할수록 그런 마음이 우러난다.
내가 죽기로써 한다면 나도 대종사님이 전하는 정법사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음주에 신성회 훈련이 있다고 들었다.
나도 신심과 서원이 유별나서 출가한 것이 아니다.
법회와 공부방에서 교무님의 설법을 들으면서 신심이 나고, 나도 한번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여러분도 고민하고 있다면 고민하지 마시기 바란다.
물질개벽은 내가 아니라도 누구라도 하고 있다,
이 세상에 인류의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은 물질개벽만이 아니며, 오직 정신개벽을 통한 물질의 선용이다.
질문과 답변
Q. 김명선 교우님 : 지금 출가하신 지 3년 정도 되셨다.
그러면 세상에서 동떨어진 곳에서 자기 수행을 4년간 하셨는데 무엇이 가장 달라진 것 같으신가?
A. 김인식 예비교무님 : 4년간 변화된 것은 많지만, 그 변화가 미세하고, 특별하게 잡을 수 있는 변화가 많은 것 같다.
우리는 전문적 수행, 마음공부도 더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마음공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가장 큰 변화는. 갈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더 커지고 마음도 더 넓어지는 것 같다.
기도와 수행이, 출가를 했지만 나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많았었는데
시간이 지날 수록 세상을 위한 수행,신앙,기도 그런 걸로 변화하였다.
가장 큰 변화는 그것이다.
이 길이 처음에는 내가 출가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에 수행이나 신앙이 더 프로이기 때문에
성불과 제중에 빠질 수 있다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 길은 지극히 나를 놓고 세상을 위해 희생하는 길이다.
나의 욕심이 점점 더 놓아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특별 공연 : 원신영 예비 교무님과 장혜안 예비교무님
전에 안암교당에 와서 공연을 한 이후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서 영산에 돌아가서도 자랑을 많이 했으며,
동영상도 보고 기분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행사만 있으면 불려나가게 되었습니다.
훈련 때 좌산상사님께서 내려주신 법문으로 노래를 만들었고, 의두요목으로도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노래 :
- 순간마다 공부찬스 경계마다 공부거리
- 의두요목 10조 노래
김제원 교무님 설법
오늘 풍성한 법회입니다.
아까 노래를 미리 한번 들어보니까 너무나 좋았다.
좌산상사님께서 저 법문을 해주셨는데 내가 너무나 좋아서 프린트 해서 농짝에다가 붙여놓기도 하였었다.
순간마다 공부찬스, 경계마다 공부거리가 너무나 좋은 법문이라서 어떻게 활용할까 생각했었는데
노래로 만드니 너무나 좋고, 앞으로도 저 노래가 상당히 히트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까 박은정 교우에게 어서 악보로 그려보라고 채보하라고 하였었다.
오늘 하고 싶은 것이 많네요.
지난 주에 주례를 하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물어봤더니,
어떤 내용을 말해야 하는가를 물었더니 뒤에 앉은 사람이 “짧게”를 이야기하더라.
아, 내용을 떠나서 ‘짧게’가 중요하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요즘 사람들이 설교하지 말라는 소리를 많이 한다. 알 것 다 안다고 한다.
여기 오신 분들은 내가 길게 설교해도 잘 들으시니 항상 고맙고 죄송한 마음이다.
은전교우님 강연을 하는데 여러분 어떤 생각 들으셨는가.
조금 배 아프지 않으셨는가.
저 친구가 안암교당에 온 지 이제 7개월 되었다.
그리고 춘천에서 대학 졸업할 때쯤 원불교 만나서
까페에 법문을 타이핑해 올리지 않나, 그리고 오늘 강연 내용을 보면 7개월짜리가 아닌 것 같다. 왜 그러한가?
능숙한 표현력과 언어구사력도 훌륭했지만, 그것을 떠나서 내용에 있어서 우리 법의 기초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저항, 비판, 불신 의식이 없이 그대로 수용하는 모습들, 그리고 그 속에서 얻어갈 것을 얻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 친구는 교무님을 해도 나보다 더 잘하겠구나 하는 생각도 살짝 하였다.
불지품.
불지(佛地))라는 것은 부처님의 땅이 불지이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영화를 보았는데, “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는 노래가 나온 적이 있다.
그것을 듣고 눈물을 왈칵 쏟았었다.
우리가 가는 곳은 사실 불지이다.
불지품은 불지에 가신 분들의 삶, 불지에 사시는 분들의 모습. 그 분들의 생각에 대해서 나온 것이 바로 불지품이다.
부처님의 삶은 어떤 모습인가.
불지품에 보면 먼저 대자대비에 대해 나온다.
부처님의 대자대비는 저 태양보다 다습다고 한다. 부처님은 꽁꽁 얼은 얼음도 녹여버린다.
부처님의 마음은 우리 양심의 그늘진 마음도 밝게 비추어진다.
원망심과 꽉 막힌 마음에 대자대비가 들어가면 녹아나니 어찌 태양보다 밝지 않고 다습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화물즉덕 승건곤(化物則德勝乾坤) 이라고 한다. 만물이 건곤보다 밝다. 덕화가 건곤보다도 더 밝은 것이 부처님의 법이다.
오늘은 인간락(人間樂)과 천상락(天上樂),극락(極樂)에 대한 공부를 하려고 한다.
인간락이란 유형의 세계, 보이는 세계, 감각의 세계에 대한 것이다.
사람이란 누구나 그것을 원하는 것이며 그것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오늘 신시중 교우가 건장한 남자를 한 사람 데리고 왔었다. 박정현이라는 분이었다.
까페에 인근에 살고 있는데 원불교에 오고 싶다는 이야기를 써놓았다. 거기에 여럿분들이 리플을 다 달아주었다.
저 분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이 아버지가 원불교고, 친구가 원불교고, 교무님과 인연이 있어서 원불교에 가자고 하여도
인간락, 가치의 락에 심취해 살아서 영혼의 세계에 사는 마음은 뒤로 하고, 헛소리 하지 말라, 나는 안 갈란다
때론 조롱하고 불신하기도 한다.
그런데 저 친구는 누가 가라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알아서 왔다는 것이다. 얼마나 예쁜가.
그 한마음. 그 마음이 이 세상에 얼마나 소중한가 싶다.
여러분 태어날 때 언제부터 원불교를 알았는가.
부모님이 원불교였던 친구가 원불교였던 떠나서 나는 인간락을 넘어서 맑은 영혼을 소유하고 싶다,
내 심성에 기쁨이 충만하고, 재미도 뭔가 근원적인 재미, 가치가 있는 재미, 보람이 있는 재미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행복도 있다가 거품같이 사라지는 행복이 아니라, 보다 크고 넓은 깊은 행복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만 가지고 있을 수도 있는데, 그것을 책으로 찾아보고,
인터넷으로 찾아서 여기까지 오는 것은 사실 어려울 수도 있는 일이다.
여러분, 원불교에 입교하면 “불지출발(佛地出發)”이라는 말을 붙여준다.
입교를 함과 동시에 불지를 향하여 출발한다. 불문에 입문(入門)한 것이다.
여러분들은 다 불지에 출발하신 것이다.
설사 말로 표현을 하든 안 하든
사실 여러분 내부의 깊숙이에는 정말로 불지를 향하고자 하는 그 마음, 간절한 구도심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돈도 따라온다. ‘돈’ 자에 ‘ㄴ’ 한 자만 빼면 ‘도’이다.
여러분들은 사실 다 도를 구하고 싶어 하는 욕심쟁이들이다.
토요일 이 시간에 나 역시 주말을 반납하고 하면서 느끼는 바가 많다.
저를 위해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토요일날 이렇게 하는 것이다.
아까 홈쇼핑 이야기를 했는데,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 있으시죠?
텔레비전 볼 시간은 있으면서도 헌배나 사경하기는 힘들죠.
아침에 일어날 때는 어찌나 방바닥에서 떨어지기가 힘든지요.
이 세상에 가까이 해서 손해 보지 않고 이득 얻을 분이 첫째가 부모다.
그리고 스승님이다. 스승님의 말씀이고 진리고, 법이다.
내 중생심은 싫어할지 몰라도 양심과 온전한 마음은 가까이 하고 싶어 한다.
객관적으로 보면은 그 대상 진리와 스승과 법, 원불교라는 회상, 우리 부모님과 천지자연은 사실 알고 보면
나를 위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중생심으로 그것을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 뿐이다.
우리가 마음을 깨끗하고 살고 싶고, 밝은 마음으로 살고 싶고,
덕 있는 사람으로 마음의 실행력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은 마음이 다 있을 것이다.
옥돌도 장인의 손이 들어가야 멋있는 보물이 되듯이,
무형한 마음도 손길이 가야지 보배인 이 마음이 훨씬 더 큰 인격으로 향기 나는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자기가 생각해도 자기가 예쁜 모습으로 만들어진다.
그런데 묘하게 주위 인연들은 만들도록 안내해 줄 뿐이지, 결국 깎게 되는 것은 자기다.
자력. 자력이 없다면, 계속 타력만 받다가 나중에 힘이 없는 사람이 되기 쉽다.
이 세상 사람들은 주로, 어떻게 사는가. 인간락을 향해서 살게 된다.
나도 그랬다.
인간락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좋은 집에서 좋은 차 사고, 좋은 가구나 좋은 옷 입고 맛있는 것 입고
멋있는 사람 만나서 세계여행도 다녀보는 것이 된다. 그것이 기본적인 욕구이다.
그런데 이것만이 낙인가. 이것을 위해서 나는 일생을 살 것인가.
여러분들은 어릴 때 인생은 수단적 존재가 아니요 목적적 존재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좋은 집, 좋은 차는 수단 아닌가. 나의 행복을 위한 조건. 수단. 외형적인 것들 뿐이다.
이른바 좀 지식이 들었다는 사람은 나도 좀 베풀어볼까, 사회단체 활동을 해 볼까, 학교에 기증을 해 볼까,
하는 생각을 가지기도 한다. 이것이 가치락 이라는 것이다.
인간락을 오감락(五感樂)이라고 한다.
육신의 감각적 락을 추구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요양원에서 봉사하고 돌아올 때의 그 기쁨, 교당에 와서 청소도 하고, 교도님을 도와드리기도 하고,
때로는 북한도 아프리카를 도와주는 것도 가치락이요 천상락이다.
그런데 이것이 단계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락을 추구하는 사람도 오직 형상있는 세계만, 일체의 모든 것이 나의 감각적 기쁨만을 위해 존재한다.
내 기쁨만을 달려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도 조금 생각해보니 함께 살아야 겠구나. 인간은 사회적 존재구나.
때론 대운하를 생각하면서 자연환경에 있어서 중요한 영향력이 있겠다하여 국가를 위해서 촛불을 들어볼까. 하는 등
인간락을 추구하다가도 아주 가끔씩 가치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뭔가.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한 봉사”가 빠져 있다.
돈을 벌어서 가족을 먹여 살리고 세금을 내는 것도 좋다.
그러나 진정한 나를 위한 투자,봉사
예를 들면 요가를 해서, 선을 해서, 사경, 헌배를 해서 그러면서 내 마음이 이렇게 편하구나, 이런 자리가 있구나,
나라는 존재가 느끼고 생각하는 존재가 아닌 그것을 바라보는 내가 있구나.
느끼는 내가 있는 반면에 그 느끼는 것을 바라보는 나. 그 나를 위한 시간을 갖추기 시작한다.
그것이 신앙과 수행 세계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기도를 하고, 산에 가서 적공을 한다.
불가에서는 수행에 대해 잘 밝혀져 있는데,
천상락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가치락을 넘어서서 수행의 낙이 있다.
수행의 낙
1. 이생희락지(離生喜樂地)
천상락에는 기쁨의 낙이 있다. 기쁨 중 첫째 기쁨이 바로 이생의 기쁨이다.
생이란 번뇌를 이야기하나. 수많은 분별, 번뇌, 망상을 이별시켜 버린 것이 바로 기쁨이다.
온갖 생각들을 잠시 놓았더니 솟아 나오는 기쁨이 있다.
단원을 위한 봉사에서도 기쁨을 일어낸다. 그런데 나를 위한 봉사로서의 기쁨이 바로 이생희락지이다.
번뇌를 놓아버렸을 때 쾌락이 있다.
그 번뇌를 놓는 방법은 무엇인가?
소리에 놓아버리는 방법은 염불이다.
그 번뇌를 육신의 단전에 모으기도 하니 좌선이다.
어떤 사람은 요가로 하기도 하고, 춤으로 여의기도 한다.
일반인들은 술을 마셔서 괴로웠던 무시 받았던 그 마음이 한 잔에 넘긴다.
그런데 이생이라는 것은 술의 힘을 빌려 잠시 번뇌를 녹여버리는 것이 아니다.
2. 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
정(定)이라는 것은 선정(禪定)의 준말이다.
온갖 번뇌들을 여의고 원적무별한 진경에 들어버렸다. 원적무별한 진경에 들었을 때의 기쁨은 정말 희락이다.
사람들은 집 사고, 차 사고, 영화 재밌는 거 보고, 맛있는 것 먹고 이것도 기쁨이다. 인간락의 기쁨이다.
하지만 이생만 해도 마음이 편하고, 그것만 해도 마음이 괜찮다.
그런데 거기에서 선 자리에 들어가 보았다.
청지불문이라, 밖에 소리는 듣기는 들으나 그 소리에 내가 뺏기지 않는다.
시지불견이라, 눈에 보이지마는 내 마음을 빼앗을 수 없다.
이 기쁨이란 것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 대한 불공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3. 이희묘락지(離喜妙樂地)
내가 말씀드리는 이 네 가지는 사선락(四禪樂)이라고 한다.
네 가지 선을 할 때 느끼는 락이다.
그 기쁨이 묘락에 들어가는 것이다. 승(勝)묘락이다. 즉 그 기쁨을 넘어서서 간다.
이생희락까지는 감성적 기쁨이다.
노래는 이생희락까지는 갈 수 있다. 그러나 이희묘락은 감성을 넘어선다.
승묘락, 승하다.
이것은 바로 한가한 즐거움이다. 왜냐하면 내 마음에 걸리고 막힌 것이 없다.
4. 사념청정락(思念淸淨樂)
점점 단계가 깊어지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사실 이런 것을 잘 모른다. 무시해서가 아니라.
원불교에서는 이러한 수행의 깊이가 있다.
사념청정. 온갖 생각이 청정하다.
이것은 염불, 좌선, 반복하고 모든 경계를 공부거리로 사용하다보니 오토(auto)가 된다.
용솟음 치는 기쁨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유형의 낙이다. 상대적인 낙인 것이다.
불교의 깊이는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다.
이것도 잘못하면 가치락도 추구하면 잘못하면 그것이 나중에 상이 나온다.
왜, 청정함을 예뻐하고, 청정하지 않은 것을 미워하게 된다.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과 어울리려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은근히 배제하려 한다.
진리라는 것은 그런 상대를 다 포함하고, 그것을 다 안을 수 있는게 절대적 진리이다.
그것이 바로 뭐냐면 극락(極樂)이다.
천상락이 지속되서 계속 힘이 타면요, 툭 넘어 버리는 것이 있다.
여기는 낙을 넘어섰다.
극락은 인간락과 천상락이 다 있는데 그것을 넘어섰다.
천상락을 추구하는 사람은 인간락을 배제하면서 추구할 수 있다.
청정한 것, 옳은 것, 선한 것, 기쁜 것만 쫒아간다.
그런데 극락의 세계라는 것은 그런 낙조차 없다.
기독교 방송에서 어떤 목사가 우리는 원수도 사랑한다.
너희는 그런 뜨끈 뜨끈한 사랑이 있느냐.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사랑이 있다.
그러니 옆에 있던 스님이 하는 말이 ‘우린 원수가 없어요’ 라고 했다.
하나님을 통해서 원수도 사랑하라는 것이 천상락이다.
그런데 원수가 없다는 것은 극락이다.
원수라고 할 것도 없고 원수로 볼 것도 없다. 사랑한다는 것도 넘어선 것이다. 이것이 극락의 세계이다.
극(極)자는 지(至)와 같은 것이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나중에는 착하게 살고자 하는 것까지도 넘어서버린다.
착함을 추구하면 악함을 자꾸 상대하게 된다.
선악을 넘어선 것이 있는데 바로 지선(至善)이다.
선을 넘은 선이다. 계산이나 바라는 것, 흔적의 찌꺼기가 없다.
보통은 말이죠 선공후사(先公後私).
똑똑한 정치인들은 공을 먼저하고 내 사적인 것을 뒤로 하겠다.
이것은 공과 사가 두 가지를 병행한다고 하지만 우선 순위를 두는 것이다.
그런데 일원상 자리는 때로는 사가 없을 수도 있고 때로는 공과 사를 넘어서는데
그것을 지공무사(至公無私)라 한다.
사실은 지금 제 목소리를 듣고 있는 여러분들의 참 마음이라든지
듣는 그것은 무엇이 있어 듣는 줄 아는데 사실은 나가 아는 것이다. 사(私)는 소아(小我)라 한다.
작은 나. 나가 있다. 나가 듣는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그 나를 위해 산다.
그런데 본래는 어쩌느냐. 극락의 일원상 자리다. 지공무사의 자리다.
지공무사에 바탕하여 선공후사가 나올 수 있고 때로는 선사후공이 나올 수 있다.
세상에 이런 세계가 어디에 있는가 생각했다.
겨우 산다는게 인간락 추구하다가 살고 좀 여유 있으면 다른 사람 도와 주겠다 이 생각으로 살다 죽을 뻔 했는데,
이 깊은 세계가 있고 이것은 영생이 있어 내가 어떻게 마음을 썼느냐 내가 몸을 어떻게 지었느냐에 따라서
내가 받게 되는 것이 인과와 영생의 이치가 탄탄히 받쳐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따, 좋네’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먹고 살기 바쁘다 생각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인간락을 향해서 매달려 간다.
때로는 목적을 향해서 갈 수도 있다. 겨우 간다고 하는 것이 가치락을 추구하고 천상락을 추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다가 마는 것이다.
천상락이 지속하다 보면 극락의 세계로 갈 수도 있다.
천상락을 반복하는 일이 바로 원불교의 상시응용주의사항 1조다.
내 본래 마음을 위해 수양을 하고
낮에는 만나는 대상 대상마다 정성을 다해 그 은혜에 보은하고
저녁에는 정리하여 일기로 추슬러보고
이것이 반복되어 하다보면 천상락도 넘어서 극락의 세계.
부처의 세계로 갈 수 있다.
지공무사의 세계가 바로 불지이다.
이 세계에는 한번쯤 가도 좋은데, 한번 가볼만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다 한번 맛보고 괜찮았는데 라는 생각 말고.
처음부터 불지만 보지 말고 화요공부방 빠지지 말고, 훈련 빠지지 말라. 결혼하면 잘 되지 않는다.
습관이 안 되면 또 안된다.
내가 우연히 어떤 사람의 강의를 들었는데 상당히 똑똑하시더라. 성공학 강의를 하시는 교수님이셨다.
그분이 이렇게 이야기한다. 많은 건강 학자들이 건강하려면 1주일에 3-4일 동안 1시간 동안 운동해야 한다 한다.
그런데 나는 하루에 30분을 매일하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저 사람이 거기까지 알까” 생각하였다.
거기까지는 무엇이냐면
실제로 일주일에 3~4일 운동이 가능한가. 날마다 하면 하지, 3-4일로는 안된다.
현실로 가면, 밥 그 시간에 먹어야 한다. 잘 시간에 자야 잘 수 있다.
매일 30분동안 하면 그것이 바로 체질화 습관화가 된다.
우리 원불교의 훈련법이라는 것이 습관화 체질화다. 그것이 무서운 것이다.
계속 반복을 통해서 체질화 돼서 훈련을 통해 기질변화가 확실히 되었을 때 그 사람이 뭔가가 된다.
사경도 쓰다 말다 하다 보면 안 되고, 헌배도 하다 말다 하면 안된다.
가능한 정해진 시간에 하라.
헌배, 바쁘면 사(四)배라도 하라.
사경, 바쁘면 한자라도 써라.
나는 가는 곳마다 경전봉독을 공동유무념으로 했다.
내가 군대에서 매일 교전을 보았다. 군대에서 전서를 6번 봤다. 그때 원불교 만난 지 얼마 안되었다.
매일 보다 보니깐 매일 대종사님을 만나고 매일 나의 참 마음을 만나게 되고, 매일 나를 챙기게 되어 습관화 체질화가 된다.
법회 출석 통계를 보자. 1년에 반타작 하는 사람 별로 없다.
아예 무결석하거나, 정 특별한 사정이 있어 몇 번 결석한 사람이고 아니면 1년에 너덧번 오고 만다.
내가 천도재를 지내면 참으로 열심히 한다.
그런데 천도재를 지내고 나면 제주가 나에게 “교무님 감사합니다. 제가 바쁘지만 한달에 두 번은 나오겠습니다” 하기도 한다.
그 마음 속에는 여유 있을 때 오겠다, 한 발 뒤로 두고 있는 것이며 고마워서 오겠다 라는 것이다.
결국은 이 핑계 저 핑계로 안나온다.
세상이 얼마나 바쁜데, 우선순위를 어디에 둘 것인가.
인간락의 가치를 우선으로 둘것이냐.
천상락에 가치를 우선으로 할 것인가. 극락에 둘 것인가. 인간락만 쫓아가면 쫓아갈 수록 도망가 버린다.
천상락과 극락은 묘하게 알아서 오게 되어있다. 알아서 돈이 오고, 직장에서 뽑아 가려 하고, 여자도 온다.
나도 교무로서 인기가 많았다.
나는 인기가 많으려는 생각이 없었다. 다만 내가 할 일을 열심히 하니 다 뽑아가려고 했던 것이다.
경계는 경계일 뿐이요, 환경은 환경, 조건은 조건일 뿐이다.
내가 힘이 약하면 환경이 강하게 다가오고 조건이 강하게 다가온다.
내가 하려거든 헌배도 사경도 단회도 법회도 공부심으로 일단 최소한 몇 년 해봐라.
10년만 해보시기 바란다. 10년만 하면 내가 느껴진다.
내가 설사 능력이 부족하여도 진리가 위력이 있고 사은님이 역력한 힘이 있으시다면 은혜를 안 주고 일이 안 되게 할 것인가.
내가 힘이 없어도 사은님이 되게 하시리라고 생각한다. 10년만 해 보라.
말이 10년이지, 결국은 유무념을 잡아서 매일 체크하고 상시일기로 점검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까 명선 교우가 질문 하더군요. 4년 동안 무엇이 달라졌는가.
나한테 만약 출가해서 4년동안 무엇이 달라졌느냐 묻느다면
나는 오늘 법문으로 말하자면, 내가 추구해서 달려가는 방향이 인간락이냐, 천상락이냐, 극락이냐, 그것이 다르다. 달라졌다.
인간락을 향해서 아니면 천상락을 어디에 에너지를 쓰느냐
사실 방향이 다르다.
회기 분기점에서 경부선을 타냐, 호남선을 타냐. 잠깐 타버리면 유턴도 힘들다.
여러분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몰랐다면 모르지만 알았으면 한번 해보고 싶지 않은가.
먹을 때는 달라들고 수행할 때는 왜 다른가.
전산님께서 정성은 간단이 없는 것이 정성인데, 간단이 없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정성은 그것을 잇는 것이다.
내가 무시선법을 이야기할 때 나는 부동심을 그렇게 이야기하였다.
다시 일어서면 되는 것이 부동심이지, 흔들리지 않는 것이 부동심은 아니다.
그래서 종법사님께서 교화대불공 이야기를 하시면서 신분의성 이야기를 하셨다.
결국은 일어선 놈이 이긴다.
어떤 사람이 가장 싸움을 잘 하는가.
일본 무사하고 싸울 때 끝까지 일어난 놈이 이기는 것이다.
진리도 에이 질렸다. 너 가져라 한다.
더군다나 못된 길도, 하다보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가장 내 마음의 근원자리가 좋아하는 일을 이 세상의 모든 기도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을
내가 하겠다고 하는데 그 진리가 외면하겠는가. 외면하면 진리가 진리가 아닌 것이지 않겠는가.
질문과 답변
Q. 박순명 교우님 : 교무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것 때문에 출가하셨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나는 내가 행복한 것은 별로 안 중요한 것 같다.
예를 들어 산에 올라갈 때 어떤 목적이 있는데, 길을 올라갈 때 즐거운 일일 뿐이지
목적자체는 산에 올라가는 일이다.
산에 올라가다가 거기서 느껴지는 행복은 그 느낌일 뿐이지 목적이 아니다.
이것이 욕심이 없는 것인지.
천상락에 욕심보다는 산에 빨리 올라가야겠다 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A, 교무님 : 행복이 목적이 아니지 않느냐고 했는데 사실은 수단이면서 목적이다.
부처님이 원하시는 것은 복과 혜이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것도 사실은 복과 혜이다.
훈련이 필요하다, 반복이 필요하다. 일과에서 정리하다.
그것은 뭐냐면은 한편으론 인간락이 요구되고, 고통이 수반되고 유혹도 되겠지만
그런 것을 마음의 힘으로 때로는 동지들과 함께, 우리 혜향 교우 단이 저렇게 열심히 하는구나.
서로 심고와 사경을 챙겨주고. 너무나 보기가 좋았다. 나뿐만 아니라 다 함께 하니 얼마나 좋은가,
만약 단상에 섰는데 아무도 안 오고 그러면 서로 얼마나 팍팍하겠는가.
똑같이 기도를 해도 같이 기도하면 서로 은혜가 되는 것이다.
함께 할 때 생각하지 못한 위력과 시너지가 오는 것이다.
헌배도 보자, 혼자는 100배 못하는데, 같이 하니 천배를 해도 백배보다 더 쉬웠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다.
다같이 하면 더 좋다. 그것이 함께 할 때 나타나는 위력이다.
첫댓글 김인식 예비 교무님 반갑습니다~! 아이구~! 벌써 세월이 그리 되었네요. 옛친구는 왜 이리 반가운지 그런데 만나지 못하여 애탑니다. 우리 양천이를 끌어주시기 위해 노력하신 분으로 저에게는 특별합니다. 그때 대~단하다 느꼈는데, 기어이 '차돌'이 되셨네^^ 언제 한번 뭉칩시다~! 상경하시면 꼭~~ 연락하세요 네? 제발 수줍어하시지 말고...ㅎㅎ
김제원 교무님은 늘~ 부처님 말씀을 웅변하신다. 그런데 우리에게 결국 토하는 요지... '너를 위해 살아라. 너 지금 뭐하고 있냐' 고 질타하는 그 대목에서, 청년들은 강한 매력(?)을 느낄 것이다 '조고각하' 라는 불가의 말씀이 잠시 생각난다. 무식한 내 짐작으로는 '네 무릎 밒을 살피라' 뭐... 그런 말인데, 의역하면 너 지금 뭐하고 있냐? 의 반문이다. 우리 공부인에게는 그럼 무엇이겠는가? 단전에 일념을 모으는 일이 수염에 타는 불을 끄는 지름길이다. ㅎㅎㅎ...요즘 좌선하면서 느끼는 애타는 감상입니다~! ^^ 스승의 애탐을 짐작하는 제자 한사람 등장이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