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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용어500(10)면벽~무간지옥~무아
119. 면벽 (面壁)
면벽이란 좌선(坐禪)의 다른 이름으로 벽을 향하여 좌선하는 것을 말한다.
달마대사가 526년에 중국에 와서 무제(武帝: 梁나라)를 만나 문답하고 나서 서로 소견이 맞지 않아
양자강을 건너 위(魏)나라의 숭산 소림사(崇山 少林寺)에 숨어 있었다.
달마대사는 특별히 경론을 강설하지도 않고, 불상에 절을 하지도 않으며 종일토록 석벽을 향하여
좌선하는 일로 9년을 지냈다. 이를 면벽구년(面壁九年)이라 한다.
이렇게 9년이나 좌선한 뒤부터, 선승(禪僧)들이 선원에서 좌선하려면 습관적으로
벽을 향하여(면벽:面壁) 앉게 되었다.
120. 명색 (名色) ☀불교에서 나온 말
“명색이 주인인데”, “명색이 사장인데” 등의 말로 쓰이는 이 단어는 불교에서 온 말이다.
본래 산스크리트어 ‘나마루파(na-marupa)’에서 온 말로서 불가(佛家)의 12인연(因緣) 중의 하나를
가리킨다. 명(名)은 형체는 없고 단지 이름만 있는 것이요, 색(色)은 형체는 있으나 아직 육근(六根)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단지 몸과 뜻만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명색이라 함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명(明)은 정신이고 색(色)은 육체로써 합쳐서 사람의 형상을 뜻한다. 명색은 물질과 정신의 결합된
상태로 인식작용(認識作用)에 의해 일체의 존재가 현상적으로 나타남을 말한다.
121. 명절 (불교의 5대 명절)
불교에는 부처님이 이 땅에 나토신 의미를 되새기고 수행정진에 전념할 것을 다짐하는 5대 명절이 있다.
가장 큰 명절인 부처님 오신 날(음력4월8일)에는 부처님 탄생을 봉축하는 법요식 및 아기부처님을
깨끗한 향탕수로 목욕시키는 욕불의식과 화려한 연등을 켜고 탑돌이를 한다.
부처님이 출가한 것을 기념하는 출가절(음력2월8일)에는 부처님을 본받아 수행과 자비를 행하는
보살이 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기념법회를 갖는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신 날을 기념하는 성도절(음12월8일)에는 전국 선방에서 수행자들이 모여
일주일간 철야정진을 하며 일반 사찰에서도 철야법회를 갖고 사부대중이 모여 수행을 한다.
이밖에도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열반절(음2월15일)과
스스로의 허물을 참회하고 선망부모의 넋을 기리며 천도하는 우란분절(음7월15일)이 있다.
122. 목욕의례
<사분율>에 따르면 “특수한 때를 제외하고는 반드시 보름만에 목욕하라”고 되어있으며
<석문의범>에는 ‘문수목욕일(文殊沐浴日)’이라 하여 한 달에 두 번 목욕일을 정해놓고 있다.
그러나 현재는 대체로 삭발일날 목욕까지 행하게 된다.
목욕은 신수스님이 “때때로 쓸고 닦아 진애(塵埃)가 끼지 않도록 하라”고 했듯이
마음의 때를 씻는 것과 같이 몸의 때를 씻는 것으로 수행생활의 일환이다.
금기사항이 있다. <사분율>에는 ‘우물이나 개울처럼 드러난 곳이 아닌 담이 막힌 곳,
나무와 풀이 막힌 곳, 물이 몸을 가리는 곳에서 옷으로 몸을 가린 채 해야 하며,
차례로 앉아 목욕할 것이며, 속살을 드러낸 이가 속살을 드러낸 이의 등을 밀지 말며,
속인(俗人)과 함께 목욕하지 말되 불법승을 찬탄하는 사람이거든 같이 목욕해도 좋다’고 되어있다.
<교계신학비구호율의(敎誡新學比丘護律儀)>에는 입온실법(入溫室法)이 있어
목욕의 위의를 설명하고 있다.
처음 옷을 벗을 때 가사를 다른 옷 아래에 두면 안 된다. 욕실 안에 들어가면 정의(淨衣)는 벗어서
가사 걸이에 두어야 한다. 장삼이나 촉의(바지)는 벗어서 촉간(觸竿)위에 두어야 한다.
욕실에서 대소변을 보면 안 된다. 먼저 아래부터 씻고 다음에 위를 씻어야 한다.
조용히 해야 하며 웃고 떠들지 말라. 욕실 안에서 침을 뱉지 말라 등이다.
123. 목탁 (木鐸)
불교의 여러 의식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불구(佛具)로
목어가 변형화되어 생겨난 것이 목탁(木鐸)이다.
이 목탁은 목어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에 그 형태 또한 고기 모양을 하고 있다.
다만 긴 고기 모양을 취한 목어와는 달리 둥근 형태로 만들어지며, 사실적인 조각이나 색칠보다는
앞부분의 긴 입과 입 옆의 둥근 두 눈으로 고기임을 나타내고 있다.
결국 목탁은 목어에서 유래된 것이므로, 그 소리를 듣고 목어에 얽힌 전설이나 잠을 자지 않는 고기를
연상하여 더욱 열심히 수행할 것을 유도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목탁’이라는 단어는 우리나라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둥근 형태의 목탁도
‘목어(木魚)’라고 표기한다. 이것은 목탁이 목어에서 유래되었음을 입증하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만드는 재료로는 대추나무가 가장 좋으나, 굵은 대추나무를 구하기 어려우므로 박달나무ㆍ
은행나무ㆍ괴목(槐木,홰나무)등을 많이 이용한다.
종류로는 큰 목탁과 직접 들고 치는 작은 목탁이 있다. 큰 목탁은 다시 매달아 놓고 치는 것과
포단(蒲團:부들로 둥글게 틀어서 만든 방석)위에 놓고 치는 것이 있다. 대체로 매달아 놓고 치는 것은
대중을 모으기 위해서 사용되거나 끼니때를 알릴 경우에 사용되며, 놓고 치는 것은 법당에서 법당에서 염불, 예배, 독경 할 때 사용된다.
그리고 놓고 치는 목탁에는 손잡이가 없다. 손잡이 대신 고기 몸체의 비늘과 머리 부분 등을
나타내기도 하고 용두어신(龍頭魚身)의 형태를 보이기도 한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현재에도 포단 위에 이와 같은 목탁을 얹어 놓고 스님네가 앉아 두드리면서
염불하거나 독경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옛적에는 이와 같은 형태의 목탁을 사용하였으나,
차츰 손잡이가 있는 목탁을 많이 사용하여 오늘날에는 놓고 치는 목탁을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손잡이가 있는 우리나라 목탁. 그 목탁은 언제나 손과 함께 한다.
왼손에는 목탁을, 오른손에는 목탁채를 쥐고 있다.
왼쪽의 목탁은 불변의 체(體)요 오른쪽의 목탁채는 움직이는 용(用)이다.
중국의 선종(禪宗)에서는 전통적으로 왼쪽을 체, 오른쪽을 용으로 삼았던 것도 상기하여야 한다.
우리의 스님들은 이 둘의 마주침으로부터 생겨나는 목탁 소리에서 체와 용의 일체화를 읽었다.
이것이 우리 조상들의 슬기이다. 체와 용의 엄밀한 구분이 이루어지면서 수행자와 일체를 이루는
불구는 오직 이 목탁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탁은 어느 곳에라도 들고 다니면서 두드릴 수가 있다. 절하며 굽힐 때나 절한 뒤 일어날 때,
법당에서, 거리에서, 상가집에서…, 목탁과 구도자는 언제나 한 몸이다. 목탁과 구도자는 언제나
한 몸이 되어 그 소리와 함께 ‘너ㆍ나 없이 모든 중생이 함께 성불하는 길로 나아가기를
(自他一時成佛道)’ 기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큰 목탁이든 작은 목탁이든 모두 일정한 법도에 맞게 치도록 되어 있고,
목탁 소리 그 자체가 서로의 약속이 되기도 한다.
보통 길게 한 번을 치되 처음에는 소리를 크게하여 차츰 줄이면 공양(供養:식사) 준비가 완료되었으니
오라는 뜻이고, 두 번을 길게 치면 논밭을 갈거나 공동의 작업을 하기 위해 모이라는 신호이며,
세 번을 길게 치면 학습이나 입선(入禪)의 시간이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새벽에 사찰의 경내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뭇 생명을 깨우고
청정함을 깃들게 하는 도량석(道場釋)이나 새벽 예불 때에는 어둠이 가고 밝음이 오는 것을
상징화하여 처음에는 작은 소리로 약하게 두드리다가 차츰 크게 두드리게 되며, 저녁 예불 때에는
해가 지고 어둠이 깃든 것을 상징화하여 처음에는 크고 세게, 끝을 작게 두드리게 된다.
밝음과 어두움, 체와 용을 함께 거두고 일체화시키는 이 목탁, 목탁은 속이 비어 있다.
속을 비게 하여 공심(空心)이 되게 한다. 또한 속을 비게 하여 나무채로 두드릴 때
울리는 소리가 나게 한다. 그것이 곧 공음(空音)이요, 원음(圓音)이며, 불음(佛音)이다.
스스로의 진실을 체험하고 성불을 염원하는 그 숱한 구도자들 .... 그들이라면 목탁과 목탁 소리에서
공한 마음올 공한 기도를 올려야 한다는 가르침을 읽을 수 있으리라.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삼독(三毒)이 비어 있으므로 공한 마음이요, 그 공한 마음으로부터
삿됨이 없고 허망됨이 없는 공음(空音)이 우러나올 때, 모든 중생의 업을 녹이고 모든 중생에게
청량과 해탈을 심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목탁을 두드리는 모든 구도자. 그들은 진정 목탁이 되어야 한다. 목탁처럼 공한 마음이 되어서
모든 중생을 수용하고, 목탁과 같은 공한 음성으로 중생의 업장(業障)을 녹이고 미혹을 깨우쳐야 하리라.
☀
목탁은 물고기를 형상화하여 가지고 다니면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목어에서 비롯되었으며
깨우침의 뜻을 담고 있다. 물고기는 잠을 잘 때도 눈을 뜨고 자며 눈을 감는 경우가 없다.
우리 중생들도 물고기처럼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경책하는 의미이다. 특히 수중중생의
의식을 깨우치기 위해서 목어(목탁)를 친다. <본서 불전사물 목어 참조>
124. 몽환가 (夢幻歌) -나옹선사-
꿈결이요 신기루라 세상만사 몽환이요 거품이요 그림자라
모두가다 몽환이며 이슬이요 번개로다 몽환아님 다시없고
부운이요 부평초라 결국모두 몽환일세 천상락이 좋다하나
삼계가곧 화택이니 천상이든 지상이든 그도역시 몽환이요
인간세계 전륜왕이 만선복덕 제일이나 생노병사 못면하니
그도역시 몽환이며 역대왕후 고금호걸 당시에는 자재하나
우비고뇌 못면하고 죽어지면 허사되니 다시한번 돌아보면
그도역시 몽환이요 나의권속 지중하여 살아생전 보배이나
임종시에 이별하니 그도역시 몽환이며 출장입상 부귀인이
위엄세도 대단하나 임종시엔 속수무책 그도역시 몽환이고
진보복장 칠보영락 인간세상 큰보배나 죽은뒤엔 무용지물
그도역시 몽환이며 문장명필 백종기예 제일이라 자랑해도
임종시엔 쓸데없고 만반고통 뿐일지니 그러구러 생각하면
그도아니 몽환인가 여보세상 사람들아 사대육신 튼튼하고
여섯감관 견고할제 몽환세간 간탐말고 일체세간 천만사가
몽환인줄 꼭믿어서 몽환삼매 놓지말고 아미타불 대성호를
일념중에 잃지말고 십이시중 주야없이 부지런히 염불하여
저극락에 어서가세 우리세존 대법왕이 백천방편 베푸르사
화택중생 제도할때 금구소설 이른말씀 백천만억 국토중에
극락이라 하는세계 서편짝에 있사온데 시방세계 염불중생
임명종시 당하오면 아미타불 대성존이 그중생을 데려다가
연화대에 나게하니 신색광명 진금이요 대인상호 구족하며
칠보궁전 상묘의식 생각대로 절로생겨 마음대로 수용하고
생노병사 괴로움과 온갖근심 모두없고 목숨줄이 무궁하여
무상쾌락 받건마는 다시생사 아니받고 아미타불 수기얻어
무상보리 증득하고 지혜신통 자재하며 선근공덕 만족하고
보살도를 성취하니 대각세존 이아닌가 아미타불 대성존이
사십팔원 굳게세워 일체중생 제도하여 연화대로 인도할제
반야선을 크게지어 노자없고 배삯없는 애욕바다 빠진중생
반야선에 태워다가 나고죽음 고통바다 모두함께 건너갈때
아미타불 선주되고 관음세지 타공되어 사십팔원 노를저어
안양국에 들어가니 황금으로 땅이되고 백은으로 성이되어
칠중난순 둘러있고 칠중나망 덮혀있어 부는바람 요풍이요
밝은광명 순일이라 금은유리 칠보로써 곳곳마다 충만하고
백천풍악 진동하매 소리마다 염불이라 팔공덕수 연못에는
오색연꽃 피었거든 한결같이 광명이요 색채마다 찬란하네
여보세상 사람들아 생사장야 어둔밤에 오랜꿈을 어서깨어
노는입에 염불하되 가고오고 일하거나 말하거나 잠잠커나
움직이든 고요하든 언제거나 어디서나 아미타불 놓지말고
날이가고 달이가서 자꾸닦아 가노라면 저극락에 아니갈까
오래도록 하노라면 허다망상 없어지고 염불삼매 성취하여
십악업을 소멸하고 십만억토 극락세계 자심중에 나타나며
만덕존상 아미타불 방촌중에 뵈올지라 마음밖에 극락없고
극락밖에 마음없어 내마음이 아미타요 아미타가 자성일세
나의일념 진실하면 왕생극락 하는날에 사십팔원 아미타불
이자리서 아니볼까 인생일세 덧없으니 부귀영화 좋다한들
한바탕의 봄꿈이라 일장춘몽 다름없고 인간칠십 오래던가
아침이슬 다름없어 굳건한것 하나없고 진실한것 별로없네
허다망상 다버리고 부지런히 염불하여 극락정토 어서가서
미타품에 안겨보세 오탁악세 나는중생 과거죄업 지은대로
삼악도에 순환하며 무량고를 받삽나니 우리세존 대법왕은
그중생이 불쌍하여 참회문을 열어놓고 노소남녀 할것없이
참회발원 하게되면 무량죄업 소멸하고 자성미타 친견할줄
고구정녕 일렀건만 그말씀을 아니듣고 냉소하며 뿌리치니
죄업짓는 저중생이 근들아니 불쌍한가 불에드는 저나비와
고치짓는 저누에는 불보살의 대원인들 무슨도리 있겠는가
업보인과 지은대로 무간옥에 떨어지면 나올기약 망연하니
일념지성 참회하여 극락발원 굳게세워 시시때때 명심하여
쓸데없는 수다말고 노는입에 염불하소 극락가기 발원하면
염라대왕 문서중에 내이름을 에워내고 나의수행 하는대로
연화점점 자라나서 안광낙지 하는날에 그연화에 태어나니
근들아니 기쁠손가 애욕심에 사로잡혀 만당처자 애착하고
금은옥백 탐을낸들 목숨마쳐 돌아갈제 어느처자 대신하며
금은가져 노자할까 생사광야 험한길에 나의고혼 홀로가니
사자한쌍 동행되어 번개같이 몰아가네 선근공덕 없사오면
삼악도의 험한구렁 화살같이 들어가니 남섬부주 나는사람
결정신심 전혀없어 아침녘에 신심내다 저녁나절 물러서니
무슨효험 있을손가 염불신청 안할때에 연화대에 새긴이름
절로절로 없어지고 연화점점 말라버려 악도중생 도로되니
근들아니 원통한가 또한다시 어떤사람 평시에는 염불타가
병이들면 아주잊고 아픈것만 생각하여 살기로만 바라다가
생노병사 빠른길에 삼백육십 골절마다 무상살귀 날아들어
바람칼로 에워낼제 두려워서 손발젖고 호흡사이 죽는인생
맑은정신 벌써날아 저승세계 귀신계에 속절없이 던져진뒤
임종염불 하여준들 무슨효험 있을거며 도적간후 문닫으니
그무엇을 잡을손가 여보세상 사람들아 우리세존 대법왕이
일체중생 제도코자 대법고를 크게치고 삼계옥문 열어놓고
갇힌중생 벗어나라 대자대비 크신방편 제아무리 일러준들
문을벗어 아니나면 그중생은 할길없네 생전약간 염불타가
악한업을 못이겨서 업을좇아 떨어지니 평생적공 쓸데없네
살아생전 염불하여 임명종시 쓰쟀더니 바른생각 잊어버려
악업만을 쫓아가니 일생동한 닦은염불 그럴때엔 쓸데없네
병이만일 들거들랑 생사무상 가끔깨쳐 이내몸이 허환하여
괴로움이 무량하니 구품연대 상품상에 바로가서 태어나길
일념으로 기다리고 일심으로 염불하소 만일병이 중하여도
귀신에겐 빌지마소 수명장단 정한것을 작은귀신 어찌할까
장병있던 풍부인은 염불하고 병나으며 눈어둡던 장씨녀는
염불하고 눈떴으니 나의정성 지극하면 이런효험 아니볼까
염불비방 하는사람 부디부디 비방마오 전세적덕 하온고로
금시부귀 받거니와 금세비방 하는죄는 후세결정 받느니라
선성비구 시자되어 이십년을 시불타가 생함지옥 하였으니
근들아니 무서운가 예로부터 지금까지 하나하나 살피건대
승속남녀 존비귀천 내지죄악 범부라도 지성으로 염불하면
아니갈이 뉘있으리 만고호걸 남아들아 장생불사 하쟀더니
어젯날의 성튼사람 오늘황천 무덤이라 여보세상 사람들아
그무엇이 장구턴가 잠을깨소 잠을깨소 생사장야 잠을깨소
조개라도 잠을자면 천년만에 깨건마는 몇부처님 출세토록
어이여태 아니깨노 이제라도 잠을깨서 몽환세계 탐착말고
시시때때 염불하여 저극락에 어서가세 아미타불 계시옵는
그세계에 들어가면 삼계화택 잃은집을 여래실에 얻어들고
삼악도중 잃은옷은 인욕의로 갈아입고 육도순환 없던자리
법공좌에 얻어앉고 환망진구 모든때를 팔공덕수 목욕하고
탐진번뇌 더운땀을 보리수하 드리우고 몽환불과 증득한뒤
몽환비지 운전하여 몽환중생 제도하고 법성토의 너른뜰에
임운등등 등등임운 마음대로 노닐면서 나고죽음 모두떠난
무생곡을 불러보세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125. 무간지옥 (無間地獄)
무간지옥은 팔열지옥(八熱地獄)의 하나다.
범어를 아비(阿鼻), 아비지(阿鼻旨 Avici)라 번역한다. 남섬부주 아래 2만 유순 되는 곳에 있는
몹시 괴롭다는 지옥을 말한다. 괴로움을 받는 것이 끊임없이 이어지므로 이같이 부른다.
오역죄(五逆罪)의 하나를 범하거나, 인과를 무시하고 절이나 탑을 무너뜨리거나,
성중(聖衆)을 비방하고 공연히 시주 물건을 먹는 중생은 이 무간지옥에 떨어진다고 한다.
이 괴로움을 받는 모양이 여러 경전에 기록되어 있다.
옥졸이 죄인을 붙들고 가죽을 벗기며,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 수레에 싣고 훨훨 타는
불 속에 죄인을 넣어 몸을 태운다. 그리고 야차들이 큰 쇠창을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 코, 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진다고 한다. 또는 쇠매가 죄인의 눈을 파먹는 등 여러 가지
극심한 형벌을 받는다고 한다.
이 지옥에도 흑승(黑繩), 등활(等活) 등의 지옥과 같이 16별처(別處)가 있다고 한다. <오역죄: 본서 참조>
126. 무기공, 혼침, 도거, 산란 (無記空,昏沈,掉擧,散亂)
좌선 중에 화두를 잊어버린 상태(망각)를 ‘무기공(無記空)’이라고 합니다. 즉 좌선을 할 때 마음 상태가
고요(=적적寂寂)하면서도 화두가 생생(=성성惺惺)해야만 하는데, 고요함에 빠져서 화두를 망각해
버린 상태, 화두를 상실한 상태를 ‘무기공’이라고 합니다. 줄여서 ‘무기(無記)’라고도 합니다.
무기공에 대한 여러 선승들의 언급이 있지만 고려 말 나옹 선사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고요한 가운데 화두가 없는 것을 ‘무기공’이라고 한다.
(寂中無話頭, 謂之無記:적중무화두 위지무기).”
나옹 스님의 말씀대로 ‘무기공’이란 고요함만 좋아한 나머지 화두를 망각해 버린 상태, 그리하여
아무런 의식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좌선 중에 번뇌가 일어나지 않아서 마음이 고요한 것은
매우 좋은 현상입니다. 그런데 너무 고요함에 푹 빠져 화두를 망각한 상태가 무기공입니다.
그래서 옛 선승들은 “고요(寂寂)한 가운데 화두가 뚜렷(=惺惺)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기공은 ‘혼침(昏沈,혼몽함)’ ‘도거(掉擧,끝없이 잡념과 분별심이 떠오름)’ ‘산란(散亂,불안정)’과
함께 참선에서 가장 중시하고 있는 선병(禪病, 조심해야 할 사항)입니다.
혼침(昏沈)은 정신이 멍한, 흐리멍덩한 상태를 말합니다.
졸음이 쏟아져서 혼미몽롱(혼몽)한 상태, 비몽사몽 같은 상태도 혼침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무기공(無記空)과 비슷한 것 같지만 엄연히 다릅니다. 마음상태는 고요해야 하고 정신 상태는
말짱해야 하고 뚜렷해야 합니다. 뚜렷하여 화두가 마치 눈앞에 있는 듯해야 합니다.
이것을 선어로는 ‘적적성성(寂寂惺惺)’이라고 합니다. ‘적적’이란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
고요한 상태를 말하고, ‘성성(惺惺)’이란 ‘뚜렷함’ ‘생생함’ ‘분명함’을 말합니다.
‘도거(掉擧)’는 알음알이와 잡념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알음알이는 무작정 분별심이 아니라
지식을 바탕으로 한 분별심입니다.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언뜻 떠오르는 생각들입니다.
잡념은 부질없는 생각, 쓸데없는 생각들입니다.
‘산란(散亂)’은 마음이 들떠 있는 상태, 안정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마음이 산란하여 도무지 화두가
들리지 못하는 상태인데, 대부분 앞의 도거가 1차적으로 원인을 제공하고, 또 사색적인·문학적인 사람,
신경이 예민한 사람이 좀 더 심한 편입니다.
좌선(참선)을 해 본 사람들은 다 경험하는 바와 같이 처음 10분 정도는 화두를 잘 들고 있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졸음이 온다거나 멍하니 앉아 있는 때가 많은데
이것이 혼침(昏沈)이고, 또 번뇌는 일어나지 않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요함에 함몰되어
화두를 망각해 버린 상태가 무기(無記)입니다. 또한 잡생각이나 분별심이 끝없이 떠오르는 상태가
도거(掉擧)이고, 웬일인지 마음이 들떠서 화두도 잘 들리지 않는 상태가 산란(散亂)입니다.
이 가운데 특히 무기공(無記空)에 대하여 많은 선승들이 주의를 주고 있는 것은 ‘마음이 고요한 상태’
그것을 선으로 착각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대혜 스님이 묵묵히 앉아 있는 묵조선을
‘삿된 선(묵조사선,默照邪禪)’이라고 비판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고요한 가운데 화두가 없는 것’이 무기라는 정의는, 화두를 가지고 공부하는 간화선에서 내린
정의입니다. 조사선이나 묵조선에서는 그냥 멍하니 아무런 자각의식이 없는 상태, 정신이 혼몽하여
흐리멍덩한 정신 상태를 ‘무기공’이라고 합니다. 일체개공에 함몰되어 모든 것은 다 소용없다는 생각
즉 공무(空無, 허무)에 빠져 있는 것도 무기공의 일종입니다.
‘무기공(無記空)’은 ‘무기(無記)’와 ‘공(空)’이라는 두 단어가 합쳐진 것입니다.
‘무기’란 ‘분명하지 않다’는 뜻으로, 여기엔 두 가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 분명하게 말할 수 없는 것, 확언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 지 않음.
둘째,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 즉 업(業)의 결과가 선악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을 무기라고 합니다. ‘공’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공(空)과 용어는 같지만, 그 뜻은 ‘공무(空無)’로서 ‘공허함’에 함몰되어
모든 것은 소용없는 것이라는 생각, 그리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무사안일로 보내는 것을 말합니다.
참선이나 좌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혼침과 무기공을 없애는 방법은 찬물로 세수를 한 것처럼 본인 스스로 정신을 바짝 차려서
생생(=성성,惺惺)하게 화두를 참구하는 것 밖에 없고, 다음 도거와 산란은 쓸데없이 분별심과
잡생각 등을 일으키지 말고 마음을 고요(적적,寂寂)하고 차분하게 해서 들뜬 생각을 가라앉히는
것밖에 없습니다.
‘적적(寂寂)’과 ‘성성(惺惺)’은 참선수행에서 마음의 밸런스(균형)를 잡는 요체이기도 합니다.
무기나 혼침·도거·산란 등은 모두 탐구정신이 부족한데서 기인합니다.
화두탐구에 대한 생각이 간절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탐구정신(=의단,疑團)이 강하다면 무기나 혼침 등은 저절로 사라집니다.
127. 무문관 (無門關)
‘문 없는 관문’ 무문관.
불교는 말한다. 형상이 있는 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만약 모양으로 나(부처,불성)를 보려고 하거나 소리로 나를 구하고자하는 사람은 나쁜 길을 걷는
사람이니 부처님을 보지 못한다.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고 한 <금강경>‘법신비상분’에 나오는 구절이 대표적인 예다.
그래서 ‘붉은 몸뚱이 위에 있는 무위진인 (적육단상유일무위진인:赤肉團上有一無位眞人)’ (임제록)을
알아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선(禪)은 지적한다. 나아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마음,
정해진 문이 없는 것을 법문으로 한다고 (불어심위종무문위법문:佛語心爲宗無門爲法門)’ 강조한다(무문관).
때문에 ‘문 없는 마음의 관문을 뚫고 천하를 당당하게 걷는 사람이 진정한 자유인이다.
(투득차관 건곤독보:透得此關 乾坤獨步)’. ‘대도에는 문이 없지만 길은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대도무문천차유로:大道無門 千差有路)’.
다시 말해 ‘일심에 돌아가 중생들을 이롭게 한다 (귀일심원요익중생:歸一心源饒益衆生)’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기에 일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는 어떻게 일심에 돌아갈 것이냐인데,
‘문 없는 관문’(無門關)을 뚫어야만 가능하다.
어떻게 뚫어야 하나. 이를 책으로 묶어 놓은 것이 송나라 무문혜개(無門慧開:1183~1260)스님의
<무문관>이다. 부처님과 조사들의 어록 중에서 공안 48칙을 뽑고 여기에 평창(評唱:해석)과
송(頌)을 덧붙여 만들었다.
48칙의 총칙에 해당되는 제1칙에 ‘조주무자(趙洲無字)’에서
“무(無)를 종문(宗門)의 일관(一關)이라 부르고, 이 일관을 뚫고 나아가면 몸소
조주(趙洲)로 모실 뿐 아니라 역대조사와 손을 잡고 함께 행동하며 더불어 견문을 나누는
즐거움을 같이 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조주에게 한 스님이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묻자
‘없다’고 답한 것이 제1칙.
이에 대해 혜개스님은 “참선은 반드시 조사의 관문을 뚫어야 한다. 절묘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져야한다”고 설명했다.
무문관은 본래 ‘수행의 문’을 의미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3년, 6년, 10년 동안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기거하는 ‘선방’을 가리키는 말로 더 일반화돼 있다.
이곳에 들어가면 특정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정진한다. 오직 자신의 마음자리를 찾기 위한 수행만이
있을 뿐이다. 숙식도 이곳에서 해결해야 하며, 그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그 누구와도 말하지 않는다.
제주도 남국선원, 갑사 대자암 무문관이 유명하다.
128. 무상 (無常) ☀불교에서 나온 말
범어 ‘Asamjnin' 의 번역이다.
물심(物心)의 모든 현상은 한 순간에도 나고 변화하고 멸하므로 상주(常住)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기원정사(祇園精舍)의 범종소리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음향이니라’
‘무상’이란 말은 대체로 어려운 편인 불교용어들 중에서 일반인들에게 비교적 익숙해진 말이다.
대개의 경우 무상은 생명의 덧없음을 탄식하는 뜻의 말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하다.
또한 인생은 미덥지 못한 것,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것이므로 죽음과 결부시켜 생각하게 되고,
옛 글에서는 무상이 죽음 자체를 의미하는 말로 쓰인 경우도 있다. 아무튼 무상에는 자못 어두운
이미지가 있는 듯한데, 본래 무상이란 말에 그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
무상(無常)의 산스크리트 원어는 아니티아(anitya)이다. 아니티아는 니티아라는 말에 부정적인 뜻을
가진 접두어 ‘아(a)가 붙은 합성어이다. 그리고 니티아는 ‘언제나’ㆍ‘영구히’ㆍ‘항구적’ㆍ‘영원한’ㆍ
‘불변하는’ 등의 뜻으로 쓰이는 형용사이다. 아니티아는 그런 뜻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영구적이 아닌’ ‘변하는’ 등의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제행무상’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항구적인 것이 아니라 변화한다.’는 의미이지 직접 죽음과
결부된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불교의 제행무상은 만물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있는 것일 뿐 특별히 어려운 사상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살아있는 것은 반드시 멸하고, 모든 것은 변해간다는 사실을 바르게 파악하고, 그 유한한 생명에서
무한한 가치를 찾아내려는 것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만일 인간의 생명이 영원하여 무한히 지속된다면 어떻게 될까. 지구가 온통 인간으로 뒤덮일 것은
물론이고, 인간이 일할 필요도 없게 되고, 무엇인가를 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유한하기 때문에 생명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고 짧기 때문에 귀중하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무상하기 때문에 인간이 노력하여 변화, 향상할 가능성도 보이는 것이다. 모든 것은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한순간도 소흘히 할 수가 없다.
무상은 불교의 기본적 인생관을 나타내는 말이자, 노력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당위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129. 무상계 (無常戒 )
부무상계자 입열반지요문 (夫無常戒者 入涅槃之要門)
무상계는 열반에 이르는 요긴한 문이며
월고해지자항 시고일체제불 (越苦海之慈航 是故一切諸佛)
고해를 건너는 자비의 배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들께서도
인차계고 이입열반 (因此戒故 而入涅槃)
이 계를 인연하여 열반을 성취하셨고
일체중생 인차계고 (一切衆生 因此戒故) 모든 중생들도 이 계를 의지하여
이도고해 모령 (而度苦海 某靈) 고해를 건넜습니다. 000 영가시여
여금일 형탈근진 영식독로 (汝今日 逈脫根塵 靈識獨露)
이제 그대는 여섯 가지 감관과 여섯 가지 경계에서 벗어나
신령한 의식이 뚜렷해져
수불무상정계 하행여야 (受佛無上淨戒 何幸如也)
거룩한 부처님의 계를 받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모령 겁화통연 대천구괴 (某靈 劫火洞燃 大千俱壞)
000 영가시여, 세월이 흘러 오래되면 광대한 우주도 무너지고
수미거해 마멸무여 (須彌巨海 磨滅無餘)
수미산과 큰 바다도 없어져 남을 것이 없는데
하황차신 생로병사 (何況此身 生老病死) 항차 이 작은 몸이 생.로.병.사
우비고뇌 능여원위 (憂悲苦惱 能與遠違)
근심. 걱정. 고뇌를 무슨 수로 피하리오
모령 발모조치 피육근골 (某靈 髮毛爪齒 皮肉筋骨)
영가시여, 그대의 머리카락. 손톱. 이빨 그리고 가죽. 살. 힘줄. 뼈
수뇌구색 개귀어지 (髓腦垢色 皆歸於地) 때 같은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타체농혈 진액연말 (唾涕膿血 津液涎沫) 침과 콧물. 고름. 피 진액
담루정기 대소변리 (痰淚情氣大小便利)가래.눈물.원기와 오줌 같은것 들은
개귀어수 난기귀화 (皆歸於水 煖氣歸火)
다 물로 돌아가고, 몸의 더운 기운은 불로 돌아가고
동전귀풍 사대각리 (動轉歸風 四大各離)
활동하던 기운은 바람으로 변하여, 네 가지 요소가 다
각각 지. 수. 화. 풍으로 흩어져 제자리로 돌아가는 법이니
금일망신 당재하처 (今日亡身 當在何處)
오늘날 영가의 돌아가신 몸이 어디 있다고 하리오
모령 사대허가 비가애석 (某靈 四大虛假 非可愛惜)
금일. 영가시여, 이 몸뚱이는 네 가지 요소로서
거짓되고 헛된 것이니 조금도 애석해 할 것이 없습니다
여종무시이래 지우금일 (汝從無始已來 至于今日)
영가는 오랜 옛적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명연행 행연식 (無明緣行 行緣識)
어리석은 무명으로 말미암아 선. 악의 행업을 지었고
이 행업은 세상에 태어나려는 일념을
식연명색 명색연육입 (識緣名色 名色緣六入)
이 일념의 의식작용이 태중의 정신과 물질인 명색을
명색은 여섯 가지 감관을
육입연촉 촉연수 (六入緣觸 觸緣受)
이 여섯 가지 감관은 감촉을 감촉은 지각을
수연애 애연취 (受緣愛 愛緣取) 지각은 애욕을 애욕은 탐취심을
취연유 유연생 (取緣有 有緣生)
탐취심은 내세의 과가 될 업을 낳았고
이 업은 다시 미래에 태어나는 연이 되니
생연노사 우비고뇌 (生緣老死 憂悲苦惱)
태어나면 늙고 병들고 죽게 되어 근심하고
슬퍼하고 고뇌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명멸즉 행멸 (無明滅卽 行滅)
그러므로 무명이 없어지면 선. 악의 행업이 없어지고
행멸즉 식멸 (行滅卽 識滅)
선. 악의 행업이 없어지면 고정관념의 의식작용이 없어지고
식멸즉 명색멸 (識滅卽 名色滅)
고정관념의 의식작용이 없어지면 명색이 없어지고
명색멸즉 육입멸 (名色滅卽 六入滅)
명색이 없어지면 여섯 가지 감관이 없어지고
육입멸즉 촉멸 六入滅卽 觸滅)여섯가지 감관이 없어지면 감촉이 없어지고
촉멸즉 수멸 수멸즉 애멸 (觸滅卽 受滅 受滅卽 愛滅)
감촉이 없어지면 지각이 없어지고, 지각이 없어지면 애욕이 없어지고
애멸즉 취멸 취멸즉 유멸 (愛滅卽 取滅 取滅卽 有滅)
애욕이 없어지면 탐취심이 없어지고 탐취심이 없어지면 업이 없어지고
유멸즉 생멸 (有滅卽 生滅) 업이 없어지면 생이 없어지고
생멸즉 노사우비고뇌멸 (生滅卽 老死憂悲苦惱滅)
생이 없어지면 늙고 죽고 근심하고 슬퍼하는 고뇌도 다 없어지는 것 입니다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 (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이 세상 모든 것은 본래부터 스스로 고요하고 청정하므로
불자행도이 내세득작불 (佛者行道已 來世得作佛)
우리가 이와 같이 닦고 닦으면 내세에는 부처를 이룰 것입니다
제행무상 시생멸법 (諸行無常 是生滅法)
모든 현상은 한시도 고정됨이 없이 변하여돌아가는 것이
곧 생하고 멸하는 생멸의 법이니
생멸멸이 적멸위락 (生滅滅已 寂滅爲樂)
이 생멸에 집착함을 놓으면 곧 고요한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귀의불타계 귀의달마계 (歸依佛陀戒 歸依達摩戒)
부처님계에 귀의합니다. 가르침계에 귀의합니다
귀의승가계(歸依僧伽戒) 승가계에 귀의합니다
나무 과거 보승여래 응공 (南無過去 寶勝如來 應供)
과거의 보승여래 이시며, 마땅히 공양 받으실 님이시며
정변지 명행족 선서 (正邊知 明行足 善逝)
우주법계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님이시며 열반에 이르신 님이시며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世間解 無上士 調御丈夫)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님이시며
위없이 모든 중생을 잘 다스리시는 님이시며
천인사 불 세존 (天人師 佛 世尊)
하늘세계와 인간세상의 스승이신 님이시며 깨우쳐 부처 되신 님이시며
세상에서 가장 높게 존경 받으실 님에게 귀의합니다
모령 탈각오음각루자 (某靈 脫却五陰殼漏子)
금일 영가시여, 이제 당신께서는 오음을 벗어버리고
영식독로 수불무상정계 (靈識獨露 受佛無上淨戒)
신령한 의식이 뚜렷이 드러나 부처님의 거룩한 계를 받았으니
기불쾌재 기불쾌재 (豈不快哉 豈不快哉)
이 얼마나 기쁘고 통쾌한 일이옵니까
천당불찰 수념왕생 (天堂佛刹 隨念往生)
금일.영가시여, 이제 마음대로 하늘 세계나
부처님 계신 곳에 태어나게 되었으니
쾌활쾌활 (快活快活) 참으로 기쁘고 기쁜 일입니다
서래조의최당당(西來祖意最堂堂) 달마조사 전하신법 당당하여 으뜸이시니
자정기심성본향(自淨其心性本鄕)본래 청정한 마음자리 본성품의 고향이네
묘체담연무처소(妙體湛然無處所)
마음이란 맑고 묘해 있는 곳이 따로 없어 한마음의 나툼일세.
130. 무소의 뿔
무소는 몸길이가 4m 어깨높이가 2m 몸무게가 4톤 정도의 코뿔소를 말한다.
동물 중에서 코끼리 다음으로 몸이 큰 짐승으로 머리에 뿔이 하나만 달려있다.
전진성이 강하고 후퇴하지 않는 외고집으로 밀어부치므로 수행자의 정진심과
1승 불교(뿔이 하나임으로)의 실천을 상징한다. 1승이란 성문, 연각, 보살승의 3승에 대한
유일무이한 불승을 말한다. 자각, 각타, 각성원만의 불교를 무소의 뿔처럼 강한 의지로
실천해 가자는 뜻이다.
무소란 무슨 뜻인가?
ㆍ “탐내지 말고, 속이지 말며, 갈망하지 말고, 남의 덕을 가리지 말고.
혼탁과 미혹을 버리고 세상의 온갖 애착에서 벗어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ㆍ 세상의 유희나 오락 혹은 쾌락에 젖지 말고 관심도 가지지 말라.
꾸밈없이 진실을 말하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ㆍ 물속의 고기가 그물을 찢듯이 한번 불타버린 곳에는 다시 불이 붙지 않듯이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ㆍ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ㆍ 탐욕과 혐오와 헤맴을 버리고
속박을 끊어 목숨을 잃어도 두려워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윗 글은 우리가 많이 사랑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숫타니파타』라는
초기 경전에 나오는 말씀의 아주 일부만을 써 놓은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그래서 종교를 가리지 않고 많이 읽고 있는 이 글은 시 형식을 띄고 있는데다가
서로가 서로를 대할 때 남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경쟁의 사회에서 욕심을 내며 남을 속여서라도
나의 이익을 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현대인에게 주는 메시지가 강하기 때문에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리라.
131. 무소유 (無所有)
불교에서는 모든 고통의 원인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에서 찾는다.
우유를 얻기 위해 소를 소유하고, 소를 지키기 위한 개와 초목이 필요해지고,
또 이를 돌볼 사람이 필요해지는 소유의 어리석음은 결국 고통과 번뇌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우리는 흔히 많은 재화 물건을 소유한 사람에게 부러움을 보낸다. 또한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안간힘을 기울인다. 그러나 정작 행복은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데서 오는 것임을
부처님은 가르치고 있다.
무소유상은 번뇌의 범위를 초월해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선정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132. 무심 (無心) ☀불교에서 나온 말
감정(感情)도 의식(意識)도 없는, 아무 생각 없는 마음 상태라는 의미다. 불교에서는 ‘허망(虛妄)하게
별하는 삿된 마음, 미혹한 마음’ 을 여윈 것을 가리켜 무심(無心)이라 한다.
⌾ 무심(無心): 백과사전
특별히 이렇다 할 생각 없이 무심하게 길을 지나쳐 버리는가 하면, 무심결에 한동안 않던 버릇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저 무심코 꺼낸 이야기가 큰 희망이 되기도 하고, 아내의 생일을 기억조차 못하는
남편을 더러는 무심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감정도 의식도 없는, 아무생각 마음상태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우리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단어무심은 불교에서 나온 말이다.
불교에서는 허망하게 분별하는 삿된 마음, 미혹한 마음을 여윈것을 가리켜 무심이라 한다.
부처님을 믿고, 향하여 그 마음에 더러움이 없고,
무심의 가르침을 또한 믿으면 이것이 굳은 믿음이다.[광박엄정경:廣搏嚴淨經] 온갖 그릇된 생각을 떠난
마음 상태, 망념을 떠난 진심[眞心] 그것이 무심이다. 허망하게 분별하는 마음이 마치 그림자 같아서
자성[自性]을 얻을 수 없기에 무심이라 하며 삼시 동안 심식[心識]이 쉬어서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 하여
무심이라 한다.
만약 망심[妄心]이 일어나지 않으면 깨달음에 이른다. 이를 무심이라 한다. [종경록:宗鏡錄] 무념무상의
상태로 수행에 정진하는 사람을 무심도인이라 한다. 이 경우에는 범상한 마음도 부처님의 마음도 없고
그저 무심한 상태다. 범심이 없어 일체 범부 안에 있고, 불심이 없어 일체 제불도 그 안에 있는
마음을 지닌 도인이라는 것이다.
133. 무아 (無我)
‘무아’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내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나’란 무엇인가?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옳다.
그러나 그 ‘나’ 라는 말이 사실은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중요한 철학적 용어이다.
여기서 이야기는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의 고대 인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무렵 인도의 지식계층
즉 바라문 사이에서는 ‘우파니샤드’라고 불리는 일련의 철학적 문헌이 만들어졌다.
그 여러 우파니샤드 문헌에서 범(梵, 브라만)과 함께 가장 중요시되고 있던 원리가 ‘나(atman)’였다.
‘범’은 우주의 근본원리이고 ‘나’는 개인의 중심주체이다. 그리고 그 양자는 하나인 것같이 간주되어
우주의 근본 원리가 곧 나의 본체라고 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이 우파니샤드의
중심 사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반면에 불교도는, 나(아트만)를 가장 항상적(恒常的)인 것으로 여겨 절대시하는 바라문교에 대항하여
특별히 무아설을 주장했다. 즉 무아의 원리는 아트만의 부정 아나트만(anatman)이다.
불교는 무상을 주장하고 나아가 항상적인 것의 존재를 부정했다.
불교에 의하면 절대적인 유일한 원리나 중심주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무아이다.
무아를 주장하는 불교는 당시의 지식인에게 있어서 획기적인 것이었고 매우 신선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무아의 원어는 산스크리트어의 아나트만, 팔리어로는 아나탄(anattan)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무아설이 공관(空觀)과 결부되어 무아란 것은 사물에 고정적 실체가 없는 것,
무자성(無自性)이란 뜻이라고 여겨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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