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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또 다른 이름, 창덕궁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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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1392~1910)는 한국에서 가장 최근까지 존재했던 마지막 왕조였다. 그런 조선왕조의 중심무대는 국왕의 공식적 통치공간과 사적인 생활공간이 함께 존재했던 ‘궁궐’을 꼽을 수 있다. 때문에 “조선의 궁궐을 보면 조선왕조가 보인다”는 말도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일지 모른다.
조선왕조의 수도는 한양, 즉 오늘의 서울 한복판이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당시의 한양은 오늘날 서울과는 비교할 수 없는 훨씬 작은 규모였다. 당시 한양은 동서남북 사방으로 둘러 쌓인 4개의 산과 그 산을 끼고 약 16㎞ 길이로 성곽을 두른 성곽도시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한양에 조선왕조의 전 기간 동안 5개의 궁궐이 각각의 시기에 따라 차례로 조성되었던 것이다. 경복궁(1395), 창덕궁(1405), 창경궁(1485), 경희궁(1622), 덕수궁(1897)이 그 다섯 개의 궁궐인 셈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조선의 국왕이 가장 오랫동안 머물며 생활했던 곳이 바로 창덕궁이다. 창덕궁은 조선왕조의 세 번째 임금인 태종에 의해 1405년 처음 창건되어 무려 505년간 국왕이 국정을 운영하는 중심적인 궁궐로써 그 기능을 이어왔던 것이다.
그런 창덕궁이 나머지 조선의 궁궐들과 비교할 때 가장 큰 특징으로 꼽히는 것은 인공의 아름다움과 자연의 아름다움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공간의 구성과 배치이다. 창덕궁을 둘러 싼 주변의 산과 계곡 등 자연공간이 궁궐 속 인공건물들과 조화를 이루어 그 조화된 아름다움을 한껏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의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의 궁궐들에서도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힘든 한국만의 매우 독특한 사례로 꼽히고 있다.
특히 창덕궁 후원은 가장 한국적인 정원의 특색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곳이기도 하다. 1997년 12월 창덕궁이 유네스코에 세계유산에 등재될 당시에도 이러한 한국적인 아름다움의 요소들이 원형에 가깝게 창덕궁 곳곳에 많이 남아있다는 점이 높게 평가받기도 하였다.
창덕궁의 현재 면적은 약 14만평(462,000㎡) 가량. 그 가운데 약 10만평(330,000㎡) 가량의 면적이 창덕궁 북쪽 산줄기로부터 흘러 내려와 숲과 계곡으로 이루어진 창덕궁 후원영역이다. 창덕궁의 정원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웠다. 그중 대표적인 이름이 바로 후원(後苑)이다. 왕의 통치공간이자 생활공간인 창덕궁의 주요 건물들 북쪽 뒤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후원이라고 불리웠던 것이다. 또한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궁궐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해 있다고 하여 금원(禁苑)이라고도 일컬어졌다.
이는 다른 궁궐도 마찬가지였으며, 궁궐 후원의 일반적인 특징을 이름에서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당신이 만약 지금 창덕궁 후원을 직접 가본다면, 창덕궁의 또 다른 이름은 곧 ‘자연’이라는 점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창덕궁 후원이 처음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년 전인 1406년경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규모는 아니었다. 창덕궁 북쪽 후원의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며 정리하기 시작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자리 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후원을 감싸고 있는 주변 자연의 산세를 최대한 살리는 가운데 작은 정자와 연못을 하나 둘 조성하며 후원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창덕궁 후원의 기본적인 개념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인공과 자연이 하나가 되어 그 속에 녹아 들어간 자연 그 자체를 닮고자했던 "자연정원’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의지와 미적 감각에 따라 자연을 변화시킨’ 중국과 일본의 ‘인공정원’과는 아주 대조적인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창덕궁 후원 가운데 백미로 꼽히고 있는 ‘옥류천(玉流川)’ 일대일 것이다. 옥류천 일대는 1636년경 처음 조성되었는데, 창덕궁 후원의 가장 깊숙한 이곳에 현재 6개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자연지세의 흐름에 따라 세워져 있다. 왕과 신하는 이곳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며 자연과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옥류천 일대 한가운데에는 이곳을 둘러보고 그 아름다움에 반한 숙종임금(1661~1720)의 시가 커다란 화강암 바위에 아름다운 글씨로 새겨져 있다.
"폭포수 삼 백 척을 날아 흘러 / 아득히 구천에서 내려오누나 / 보고 있노라니 문득 흰 무지개가 일어나고 / 일만 골짜기에 우뢰소리 가득하다"
옥류천의 중심부에 위치한 화강암 바위에서 계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작은 한 줄기 물길이, 하늘 높은 곳에서 지상으로 떨어지는 커다란 폭포가 연출하는 장관 같다며 극찬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왕이 이곳을 찾아 자연과 하나 된 후 떠오른 영감들을 아름다운 시로 옮긴 것이다.
그럼 이처럼 자연을 닮은 창덕궁에서 후원의 조성목적과 주된 기능은 무엇이었을까? 왕조사회에서 궁궐의 주인이 왕이듯, 후원 역시 왕의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처음 조성되었다. 그러나 후원은 그저 단순히 왕의 사적인 정원으로서 휴식처 역할만 한 것은 아니었다. 국왕이 신하들과 더불어 보다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국정운영을 구상하던 재충전의 공간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또한 장차 보위에 오를 왕세자가 학문을 연마하고 자기수련을 쌓아가며 다음세대를 준비하던 곳 역시 이곳 후원 영역의 기능이었다.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인재 선발을 위한 시험장소로 활용하거나, 시험을 통해 선발된 인재들을 모아 국정운영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근거지로 삼기도 하였다.
실제로 18세기 후반 정조임금(1752~1800)의 경우 후원 일대에 왕립도서관과 왕립연구기관 용도를 겸한 규장각을 짓고, 이를 거점 삼아 조선후기 과학과 인문학의 부흥을 이끌기도 하였다. 조선후기를 꽃피운 르네상스가 이곳 후원에서 싹을 틔웠던 것이다. 이처럼 후원은 단순한 휴식공간으로서 정원의 의미를 뛰어 넘어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국정운영의 또 다른 장이었다.
창덕궁관리소 측에 따르면 현재 창덕궁 전체에는 50여종의 조류와 29만여 그루의 크고 작은 나무가 있다고 한다. 또한 생태전문가들의 조사에 의하면 자연생태계의 보존 또한 매우 잘 보존되고 있다며, “인구 1천2백만이 거주하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 이와 같이 자연이 살아 숨쉬는 공간이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라는 한결같은 반응이다.
그러나 애초부터 창덕궁 후원이 이처럼 보존상태가 뛰어났던 것은 아니다. 지금과 같은 창덕궁 후원의 놀랄만한 보존상태가 있기까지 남다른 노력과 기다림의 세월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한국전쟁(1950)의 참화를 고스란히 겪으면서 잿더미가 되기도 했었고, 도시개발의 값비싼 대가로 수많은 도시 속 녹지를 잃기도 하였다. 다행히 창덕궁은 치명적인 훼손의 위기를 피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창덕궁은 수많은 관람객들의 발길로 몸살을 앓아야만 했다. 특히 1960~70년대 창덕궁 후원은 마치 유원지와 같은 무분별한 관람방식이 적용되면서 그 피해는 매우 심각하였다. 창덕궁 후원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계기는 1976년에야 비로소 마련되었다. 창덕궁 후원의 일반관람을 전면 통제한 가운데 원래의 모습에 따라 복원작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면서 자연 스스로의 자정능력 또한 창덕궁 후원 자연생태계 회복에 결정적인 치료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지난 5월 1일 창덕궁 후원은 28년간 굳게 닫힌 문을 다시 열고 일반관람객들을 맞이하기 시작하였다. 창덕궁 후원의 복원작업이 어느 정도 완료되었다는 판단 하에 관람객들에게도 창덕궁 후원의 원래 모습을 되돌려주고자 문을 다시 열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관람방식만큼은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인 ‘제한관람방식’을 선택하였다. 즉 하루 3차례 각 50명의 제한된 인원만 인터넷 홈페이지(http://cdg.go.kr)로 선착순 예약을 받아, 예약당일 안내원의 인솔 하에 창덕궁 후원의 제한된 지역만 관람하는 제한관람방식을 시행했던 것이다.
이 방식의 가장 큰 장점은 과거의 잘못된 관람방식으로 인한 심각한 부작용인 자연생태계의 훼손을 최소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친절한 안내원의 전문적인 설명 역시 창덕궁 후원의 역사적, 생태적 가치를 깨닫기에 부족함이 없다.
실제로 창덕궁 안내원고 함께 관람동선을 따라 후원지역으로 들어가는 순간, 일체의 마이크 확성기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낮은 목소리의 육성으로만 설명을 관람객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마이크 확성기의 큰 소리가 창덕궁 후원에 서식하는 조류들을 자극하여, 후원의 자연생태계에 조금이라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관람방식은 한국의 궁궐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되는 낯선 방식이지만, 관람객들의 호응은 기대이상이었다. 분명한 이유가 있는 관람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창덕궁 후원의 새로운 관람방식은 관람객들의 인식마저 새롭게 바꾸어 놓았다.
현재 창덕궁은 외국인을 위한 전용 안내시간을 마련해 놓고 있다. 하루에 영어안내 3회, 일어안내 5회, 중국어안내 2회가 숙련된 안내원들에 의해 1시간 20분가량 창덕궁 관람코스를 돌며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새롭게 공개된 창덕궁 후원은 외국인을 위한 외국어안내가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다. 28년만의 창덕궁 후원 개방이 아직은 실험적인 시도로 인식되고 있고, 이러한 실험이 일정한 기간동안 성공적인 결과를 보여줄 때 외국인을 위한 관람제도가 마련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창덕궁 후원을 다녀간 사람들은 반드시 두 번 놀라게 된다. 그 첫 번째는 창덕궁 후원에 들어가서 놀라게 된다. 서울이라는 대도심 한복판에 이와 같이 잘 보존된 훌륭한 후원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 놀라워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창덕궁 후원을 관람한 뒤 밖으로 빠져 나와서 놀라게 된다. 창덕궁 후원을 빠져 나오고서야 비로소 이곳이 서울이었다는 점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창덕궁 후원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한 또 다른 세상과 같기에 그 존재 자체가 경이롭게 느껴지는 공간인 것이다.
창덕궁 후원은 자연의 또 다른 이름이다. 때문에 과거로부터 전해 받은 축복 받은 선물이자, 지금의 우리 모두가 미래에게 물려주어야 할 아름다운 유산인 것이다. 이 아름답고 경이로운 유산을 세계 모든 이들과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 글/사진. 강임산 (한국의 재발견 사무국장)
첫댓글 왕의 통치공간이자 생활공간인 창덕궁의 주요 건물들 북쪽 뒤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후원이라고 불리웠던 것이다. 또한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궁궐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해 있다고 하여 금원(禁苑)이라고도 일컬어졌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