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5일 화요일
철쭉꽃
삶이 고단하고 힘겹거나, 불안스럽고 공포심으로 평정심을 잃고 방황할 때
인간은 안식할 곳이나 안전한 도피처를 물색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생물체에게는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와 질병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데 심혈을 기울이는게 정상이다.
이러한 인간의 숙명적인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유사이래 인간이 모색하고 몰두한
연구의 결과는 종교를 만드는 일이었다. 정상적인 인간사회의 구성원을 구원할 수 있는
신비롭고 경외스러운 초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존재를 삼라만상에서는 물론이고
자연환경으로까지 손을 뻗혀나가며 꾸준하고 지루하게 해결책을 찾으려고
수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수만 명의 신(神)을 모시고 있었던 고대 로마가 대표적이고
유일신을 고집스레 유지한 유대인이 있는가 하면 세계 곳곳에 우후죽순의 신격화한
존재의 출현은 지구의 역사만큼이나 유구하다.
그들 대부분은 철학,종교,심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앞장을 서게 마련이고,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서양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마호멧,소크라테스,
플라톤 등을 꼽을 것이고,동양에서는 석가모니,공자 등을 떠올릴 것이다.
이들의 고결한 사상과 논리적인 이론은 수많은 추종세력을 이루게 되며 전설이 생겨나고
역사가 탄생하며 인류의 심령을 지배하기에 이른다.성당과 교회 그리고 사찰과 모스크 등이
그들을 추종하고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장소가 될 터이다.
인류의 진화는 이러한 고결한 현자들의 몰두와 희생을 바탕으로 바람직한
유토피아를 기원하고 꿈꾸며 유유히 흘러갈 것이리라.
오늘 오르려는 만뢰산은 진천의 명산이다.들머리로는 만뢰산 기슭의 가람인
보탑사다.보탑사는 창건주 지광스님과 삼선포교원 주지 묘순 스님,그리고
보탑사 주지 능현스님의 발원으로 1988년 절터를 마련하였고,
1996년 신라의 황룡사 9층목탑을 모델로 하여 통일대탑으로 명명된 3층 목탑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통일대탑이란 명칭은 삼국통일의 일등공신인 김유신 장군의 탄생지 인근에
자리하고 있는 지리적 위치를 감안한 작명이리라.
3층목탑의 높이는 42.7m로,1층의 금당에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탑의
심주(心柱)를 중심으로 사방에 약사보전,극락보전,대웅보전,적광보전 등 사방불을 모셨다.
2층 법보전에는 8만대장경을 모신 윤장대와 4면 벽에 한글 법화경을 새긴 석경을 비치했고
3층 미륵전에는 미륵삼존불을 모셔놓고 있다.건물 역사는 오래지 않지만 불교문화재로
가치가 높다 하겠다.
1992년 대목수 신영훈을 비롯하여 여러부문의 장인들이 참여하여 불사를 시작하여
1996년 8월 3층목탑을 완공하였고,그 후 지장전 영산전 산신각 등을 건립하고
비로서 2003년 불사를 마쳤다고 전한다.
3층목탑의 통일대탑
-산길은 보탑사 주차장 좌측에서 숲으로 드는 임도를 따르면 된다.흐드러진 벚꽃그늘의
비교적 널찍한 수랫길을 들어서면 산행안내 팻말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된다.
산길은 골짜기를 따르다가 슬며시 지능선으로 바뀌며,청태와 물때가 거뭇하게
묻어있는 상석과 연화석을 구비한 오래 묵은 묘지를 지나면 가풀막진 모습을 띄며
가뿐 숨을 요구하기 시작한다.하지만 된비알의 거친 오르막의 모습은 아니고
순하며 너그러운 순박함을 띄고 있다.
이제 겨우 연두빛 새싹을 내놓은 참나무 식솔들이 숲길을 이끌어 나간다.
진보라빛의 제비꽃,하얀 별꽃,노랑나비꽃 등의 꽤 작은 들꽃들이 두텁게 쌓여있는
가랑잎 사이로 앙증맞으며 천진무구하고 은밀한 미소를 보낸다.
눈 밖에 나려고 곧추 세운 아금맞은 그들 꽃잎에는 삶의 치열함이 숨어있고 애절함이
묻어있다.능선삼거리에 오르니 산행안내팻말이 만뢰산 정상이 1.7km 남았음을 넌지시
알린다.그리고 진천소방서에서 세워놓은 119 신고안내(제2지점)팻말도 슬쩍 얼굴을 내민다.
만뢰산 정상으로 향하는 우측의 산길은 이제 막 돋기 시작하는 연두빛 새싹으로
짙푸름을 연모하는 참나무를 비롯한 활엽수목들의 소리없는 치열함이 은연중에
감지되는 활기넘치는 숲길이다.숲길은 비교적 널찍하고 다소곳하다.
아침안개가 봄햇살을 맞아 만리장천으로 흩어지는가 했더니 만뢰산 보련골에 엷은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골안을 뿌옇게 물들이며 망령처럼 떠돈다.
490m봉 쉼터봉,고단한 산객을 위한 벤치 두어 개가 참나무 그늘에 다소곳하고
맞은 쪽 진달래 꽃 옆으로는 곤고한 입산객을 위한 구급함이 친절함을 드러내고 있으나
구급함은 텅 비어버린지 이미 오래된 모습이다.
붕긋하고 언덕같은 봉우리와 쉼터를 오르내리면 삼거리 갈랫길이 나오는 봉우리에
닿는다.엽돈재 삼거리봉이다.10시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산줄기는 엽돈재를 바라보며
이어지는 산길이다.엽돈재까지 7.5km를 표시하고 있다.이곳에서 만뢰산과 태령산으로
향하려면 우측15시 방향으로 발길을 바꿔야 한다.만뢰산의 멧부리가 턱밑에서 손짓한다.
만뢰산 정수리에는 헬기장이 널찍하게 닦여져 있고 산행안내지도도 큼지막하게
세워져 있다.만뢰산은 진천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옛지명으로는 만노산,이흘산이었으며,
충남북의 도계에 위치하고 있다.동국여지승람에는 "김유신장군의 부친인 김서현장군이
돌로 이곳에 성을 쌓았는데,둘레가 약 1300m이고 성안에 샘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라고 전한다. 현재 샘터와 신라시대의 토기조각이 발견되고 있는 이곳은 백제의 침입을
방어하였던 신라 서북국경지대의 요충지였다고.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지는 해발 612.2m의 멧부리에서 가볍게 목을 적시고
인증샷도 마친 후 태령산을 향하여 발길을 재촉한다.곧바로 팔각정이 나온다.
팔각정을 뒤로하면 산길은 갑자기 가파른 내리막으로 모습을 바꾼다.
흙먼지가 풀풀 솟아오르는 내리막을 내려서면 보현골을 거쳐 연곡리로 내려서는 산길이
나 있는 삼거리가 나오고, 얼마 못가면 우측으로 산길이 갈라지는 삼거리가 거듭 나온다.
백곡면 하수문 마을로 이어지는 하산길이다.삼거리를 뒤로하면 오르막 산길이 이어지면서
멧부리 하나를 내놓는다.삼거리 갈랫길을 알리는 팻말이 보인다.우측으로 나 있는
하산길은 연곡저수지를 가리키고 있다.등산지도에는 이 멧부리가 해발 568m의
갈미봉이라고 가리키고 있는데, 멧부리 이름을 알리는 표식은 없고, 다만 팻말 기둥에
어느 산객이 "갈미봉"이라고 매직으로 써놓은 것이 전부다.갈미봉을 뒤로하면
거대한 송전철탑이 골리앗처럼 서 있는 임도로 내려서게 된다. 연곡리에서 백곡면 방향으로
연결된 이 임도는 송전철탑설치를 위한 작업로 역할을 수행하던 도로다.
태령산으로 이어지는 산길은 이 임도를 가로지르면 된다.임도를 뒤로하면 농염한 진달래 틈새에
연분홍색의 철쭉꽃들도 이따금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각시붓꽃과 현호색도 덩달아 산길을
수 놓는다.만화방창 꽃대궐이 따로 없다.이내 안부삼거리가 나오는데 우측으로는
생태공원을 가리킨다.쥐눈이 고개다.
쥐눈이 고개를 지나게 되면 산길은 노송들이 그늘을 드리운 숲길로 안정감이 배여있는
수준높은 산길로 바뀌며 고즈넉함마져 스며있는 숲의 모습을 보여준다.
곧바로 손에 잡힐 듯 눈앞에 어른거리며 모습을 드러내곤 하는 태령산의 멧부리는
손쉽게 오름을 허용하지 않으려는지 솔가지 사이로 모습을 내밀다가는 사라지고
턱밑으로 다가왔는가 하면 저 만치서 손짓을 한다.좌측으로 깊숙히 휘돌며 이어지는
산길은 이내 봉우리 하나를 내 놓는다.이 멧부리는 등산지도상에는 해발 454m의
태령산으로 되어있는데 소나무 그늘에 덮혀있으며 아무 표식이 없는 걸 보면
뭇 봉우리에 불과한 무명봉 신세의 멧부리인 모양이다.청아대장은 연신 고개를 갸웃 거린다.
무명봉을 뒤로하고 소나무 그늘의 산길을 따르면 이윽고 삼거리 갈랫길을 만난다.
우측의 가파른 내리막 하산길은 김유신장군의 유허비와 탄생지가 있는 장소로 내려설 수 있는
하산길이다.태령산 정상 한복판에는 김유신 장군의 태실이 차지하고 있다.
김유신 장군의 태실(태령산 정상)
태실(胎室)이란 아기가 태어날 때 나온 태(胎)를 따로 보관하는 시설이다.
태령산 멧부리에 자리한 김유신 장군 태실은 자연석으로 둥글게 기단을 쌓고 무덤처럼
납작하게 봉토를 올렸다. 이곳 김유신 장군의 태실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태실 축조의
형식을 가진 것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 사적으로 사적 제414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커피 한잔으로 가볍게 목을 적신 후 태령산을 뒤로한다.
아직도 만뢰산을 비롯한 보련골에는 엷은 연무가 유령처럼 머물러 있다.
이제 김유신 장군 탄생지를 찾아가려면 조금전 삼거리로 되돌아가야한다.
삼거리에서 내려서는 하산길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통나무 계단길을 조심스레 내려서면
재차 고정로프의 도움을 받아가며 하산을 해야한다.
철쭉꽃의 아름다운 미색은 언제 보아도 변함이 없다.복사꽃의 화사함이라고 어찌 다르다 하겠나?
국궁장인 화랑정을 뒤로하면 산길 좌측 깊숙히 들어간 곳에 자리한 연보정을 찾아간다.
연보정(連寶井)은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인 김서현공이 신라시대 만노군 태수로 있을 때
치소(治所;지금의 관청)에서 사용한 우물이라 전해진다.
자연석을 이용하여 둥글게 쌓은 이 우물의 규모는 직경 1.8m에 최고깊이는 2.6m에 달한다고.
연보정을 나서면 김유신장군 탄생지는 우측으로 이백여 미터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태령산 남서쪽 아래 위치하고 있는 김유신 장군 탄생지는 김유신 장군의 부친인 김서현 장군이
만노태수로 있을 때 살던 곳이다.
신라역사 상 가장 높은 관등인 태대각간(太大角干)에 올랐으며, 그의 사후 흥덕왕 10년에는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된 김유신은 생전에는 임금을 제외한 가장 높은 지위까지
오르는 영예를 누렸고, 사후에는 대왕의 지위까지 오른 불세출의 인물이기도 하다.
김유신 장군의 탄생터에는 네 칸짜리 기와집이 남아있다.최근에 복원해 놓은 건물이 틀림없는데,
정면에서 왼쪽 한칸과 오른편 끝의 한칸은 방으로 꾸며놓았고 가운데 두 칸은
대청마루로 꾸며 놓았는데,대청 마루에는 문짝을 달아 툇마루와 구분을 두었고,
네 칸 전면에는 툇마루를 기름하게 달아놓았다.
그리고 널찍한 마당에는 옛 건축물의 주춧돌만 흔적을 보일 뿐 쓸쓸하고 휑뎅그렁 하다.
그러나 허전하고 휑한 빈집의 쓸쓸하고 드넓은 공터에는 그러한 분위기에 아랑곳 없이
천진난만하고 자유스러우며 애교스러운 보라빛깔 제비꽃이 제멋 대로 이곳 저곳으로
흩어져서 그들만의 꽃대궐을 꾸며 놓으려 분주하다.
파란 하늘을 젖빛으로 물들이며 온종일 심술을 부리는 미세먼지인지 연무(煙霧)인지는
아직도 고집을 꺾을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이 심술쟁이들을 깨끗히 쫓아버리려면
봄비가 제격이다.그러면 봄맞이에 여념이 없는 수목들이나 기화요초들도
덩달아 신이 날 것이다.
태령산 정상에서 바라 본, 만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