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복이 축복인가
김 아가다
뚝배기 자장면을 먹으러 갔다. 건너편 테이블에 앉은 매무새 단정한 노파가 내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더니 무슨 띠인지 물었다. ‘말띠’라고 했더니 깜짝 놀라면서 태어난 시간을 말하란다.
“오시午時에 태어났다던데요.”
지그시 육갑을 짚어보던 노인이 눈을 번쩍 떴다. 천복과 천기가 있다면서 한 개도 쉽지 않은데 두 개나 타고났단다. 내 두 손을 잡으면서 노인이 고개까지 숙였다. 탄복하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천복이 만무하다.
박복한 내 인생이 한스러웠는데 하늘로부터 받은 복이 그것도 두 개씩이나 있다니 아이러니한 사실이다. 내 나이 열여덟에 아버지가 죽고 동생 넷과 엄마와 살았다. 멀쩡한 두 눈에 콩깍지 씌어 한량 남편 만나 마음고생 푸지게 하면서 살다가 오십 대 초반에 과부가 되었고, 30년 모시던 시어머니와, 마음자리 의지하던 친정어머니도 귀천하셨다.
처음에는 노인의 말을 의심하면서 사이비 종교의 추수꾼으로 생각했다. 잔뜩 사람을 기분 좋게 호려놓고 발톱을 내밀려는 수작인 줄 알고 장난삼아 건성건성 말대답했다. 노인은 나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당신의 신상까지 털어놓았다. 정정하신 노인의 연세는 92세라고 했다. 당신은 모 대학 사회교육원에서 명리학을 공부했고 어느 대학 교수의 어머니란다.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고 눈빛도 초롱초롱했다. 아무튼 명리학도 학문이니까 생각해 볼 문제다.
천복과 축복을 같이 아우르면 되려나? “당신이 누리는 축복을 세어보라”라는 말이 있다. 누구든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축복은 셀 수 없이 많다는 말이 아닐까. 나의 축복을 짚어보자. 건강한 육신으로 하느님을 믿는 가정에 태어났다.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좋아하는 일을 하며 이 멋진 세상 하루하루 잘 살아가고 있으니, 천복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흡족하게 받아들인다.
요즘에 와서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첫째, 남편이 없어서 어디를 가든지, 구애받지 않아 자유롭다는 것이다. 둘째, 자식들이 외국에 살고 있어서 손자를 키워주지 않아도 되니 홍복이란다. 셋째, 양가 부모님을 다 여의었다. 노쇠한 부모님이 계시지 않아서 불효스럽지만 축복이라는 소리가 맞긴 하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제야 무릎을 친다. 과부에다 독거노인이며 천애고아가 되었으니, 천복이로구나!
천기를 타고나 복을 많이 받은 모양이다. 하늘의 복을 타고 났으니 내 발바닥은 땀이 난다. 자유로운 시간이 많아 불려 다니면서 여기저기 봉사하러 다니느라 종종걸음이다.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을 방문하고 외로운 이들을 만나 즐겁게 해주면서 내가 받은 달란트를 아낌없이 나눈다. 궂은일 좋은 일에 봉사하는 것이 소임이라 생각하니 몸이 지쳐 허덕이다가도 아침이면 언제나 팔팔하다.
남편을 보내고 허허로워하는 나에게 위로를 한답시고, 오십 대 과부는 삼대가 공덕을 쌓아야 얻게 되는 행운이라고 하던 친구가 있었다. 외할머니 이십 대 과부 우리 엄마 삼십 대 과부. 두 분의 갖은 고초와 외로움을 이겨내고 살아온 공덕으로 나는 오십 대 과부가 되었다. 과부가 행운이라니? 그 말이 비수가 되어 친구와 강산이 변하도록 등을 돌렸고, 오랜 시간 미움이 나를 괴롭혔다.
이제 생각해보니 네 말이 맞았다며 고맙다 해야 할까? 알고 보니 천복이었다면서 화해의 손을 내밀어 볼까?
“우리 점심 같이 먹을래?”
유월의 하늘빛이 맑고 푸르다. 천복과 천기를 받은 여자는 공덕을 쌓느라고 오늘도 바쁘다.
첫댓글 예전에 가끔 들었던 '내 복에 웬 상처'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오십대 과부는 삼대가 공덕을 쌓아야 된다'는 말도 있나 봅니다.
3가지 공덕이 과부, 독거노인, 천애고아도 되는 마술의 세계입니다. ㅋㅋ
천복! 그러고 보니 시대 세태에 따라서 달라졌네요. 지금의 복이 천복입니다.
선생님 존재 자체가 복입니다. 공감하며 보고픔 전합니다~
최고수는 유머!
아가다선생님의 유머 제조는 깊이가 있습니다. 탐나는 능력!
천복과 천기를 받은 그여자를 나는 잘알고 있으니 천에 가까이 있어 바람따라 세월따라 조금씩 쪼끔씩 괜찮은 인생이 될것 같은 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