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 사시 합격자, "세상에 버릴 사람은 없습니다
1620년 미국 폴리마우스 해변에서 시편 100편을 가사로 한 찬송이 울려 퍼졌습니다. 감격의 눈물과 감사로 가득 찬 찬송이었습니다. 모래 바람을 일으키며 찬송을 부르는 이들, 바위를 끌어안고 큰소리로 흐느끼는 이들. 너무나 벅찬 기쁨의 찬양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146명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라는 배를 타고 평균 2마일의 시속으로(이 속도는 걷는 속도 보다 느린 속도입니다) 117일간 세 달이 넘는 동안을 극심한 파도와 싸우며 항해한 끝에 다다른 땅이었습니다. 항해 도중 2명이 죽고, 한 아이가 태어난 것을 감사했습니다.
배 멀미와 싸우면서 돌아가자고 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음을 감사했습니다. 폭풍으로 돛이 잘려 나가고, 여자들이 파도에 휩쓸려 바다 속에 곤두박질했는데도 모두 구조되었음을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도달한 땅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이제 행복이 시작은 아니었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아메리카 미국 땅에 도달했지만 그들을 기다린 것은 굶주림과 질병뿐이었습니다. 그해 겨울을 넘기기 전에 60명이 배고픔과 전염병으로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감사를 잃지 않았습니다. 장례식을 치르면서도 저들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들은 나무를 찍어서 통나무집 오두막을 일곱 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통나무집에 들어가서 저들은 불을 피워 놓고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그들은 가지고 온 종자 몇 가지, 보리와 밀을 심어보았지만은 토양이 달라서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이태가 지나자 반절도 안 되는 사람들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배와 찬송, 감사를 잃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들 옥수수를 얼마 추수할 수가 있었습니다. 옥수수를 갖다 놓고 그리고 들에 뛰어 다니는 칠면조를 잡아서 그걸 구워놓고 감사절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미국 사람들은 추수감사절이 되면 어느 식당 어느 가정이든지 온통 칠면조입니다. 아무리 먹어 봐도 칠면조는 별 맛 없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추수감사절에는 칠면조 고기를 먹습니다. 왜 칠면조를 먹느냐. 우리조상들이 이것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했기 때문에 그 전통을 따라서 먹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국의 첫 번 추수감사이고, 미국의 출발이었습니다. 끊이지 않는 감사가 지금의 미국을 이루어 놓은 것입니다. 가장 어렵고 절박한 고난 중에 진실한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메튜 헨리는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요 성경 주석자입니다. 그가 어느 날 지갑을 소매치기 당하는 환난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감사해서' 다음과 같은 일기를 남겼습니다.
1) 오늘 처음으로 소매치기 당한 것이 감사하다. 2) 소매치기는 지갑을 훔쳐갔지만 내 생명은 훔쳐가지 않았다. 3) 무엇보다 신앙과 영생을 빼앗기지 않았다. 4) 설령 내게 있는 모든 것이 털렸다고 하더라도 아깝지 않은 것들이다.
고통을 맛본 사람만이 고통 받는 자를 위로할 수 있고, 눈물의 떡을 먹어본 사람만이 배고픔을 당한 자를 위로할 수 있고, 실패를 경험한 사람만이 실패자의 아픔 가운데 참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시각 장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사법시험 합격의 9부 능선을 넘은 최영 씨는 “어려운 사람들 입장에 선 변호사가 될 꿈”에 부풀어 있다고 합니다.
최영 씨(27, 서울대 법대 졸)의 사법시험 합격 소식을 전하기 위해 50여명의 취재진이 최 씨의 4평 남짓한 고시 원 방으로 몰려들었지만, 정작 주인공인 최 씨는 자신을 인터뷰하고 있는 기자들이 몇 명인지 알 지 못합니다.
인터뷰를 하다 말고 갑자기 방 안에 몇 명이 들어와 있느냐고 묻는 사법시험 2차 합격자 최영 씨는 “세상에 버릴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방안에 몇 명이나 들어와 계시죠?”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3급 시각장애인인 최 씨는 지난 3년여 동안 책을 읽는 대신 “음성 낭독 파일”을 들으며 사법시험을 준비했고, 결국 제50회 사법시험 2차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사법시험 제도가 시행된 이래 시각장애인으로서는 첫 2차 합격자입니다.
어릴 시절부터 시력이 나빴던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시야가 점점 좁아지는 ‘망막색소변성 증’ 진단을 받았습니다.
2000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할 때만해도 그럭저럭 일상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사법시험 준비를 시작하면서부터 눈은 급속도로 악화됐다. 시야가 점점 좁아져, 한 줄씩 보이던 글씨가 한 단어씩 그리고 한 글자씩밖에 보이지 않다가, 결국 2005년 무렵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는 “‘어릴 적 봤던 얼굴을 이젠 영원히 다시 볼 수 없게 돼 버렸다’는 절망감에 모든 것을 포기하기도 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도전에 나섰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방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최 씨를 위해 끼니때 마다 찾아와 식당에 데려다 줬던 친구들이 큰 힘이 됐습니다. 또 식당일을 하는 어머니와 운전을 하는 아버지의 사랑과 격려에서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최 씨는 “시각 장애를 겪은 뒤 서로 도와가며 사는 세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며 “단지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이 있을 뿐, 세상에 버릴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시각장애인으로서 공부를 시작해 보니 역시 책이 문제였습니다. 점자를 배우지 못한 그는 오직 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저작권법과 연관돼 텍스트 파일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한 복지재단의 도움으로 필요한 책을 한자 한자 컴퓨터에 쳐 넣은 뒤, 음성 낭독 프로그램을 돌려 무한반복 해서 들었습니다.
밥 먹는 시간만 빼고, 듣고 또 들었습니다. 최씨는 “시험 준비에만 몰두하느라 보행 연습도 제대로 못했다”고 고됐던 수험 생활을 돌아봤습니다.
그러나 최씨는 “나를 불쌍한 사람으로 묘사하거나 동정의 시각으로 보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남들이 볼 때는 적은 돈이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부모님이 보내주신 풍족한 용돈이었고, 친구들과 복지재단의 도움을 받은 것은 크나큰 행운이었다.”고 그는 밝게 웃었습니다.
그는 다만 “단지 장애를 이유로 아예 기회를 갖지 못하고 포기해버리는 사람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사회적인 시스템이 갖춰진다면 장애인 사법시험 합격자가 연달아 나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왔을 때 우연히 온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우리에게 많은 은혜와 감사 제목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큰 감사를 주기 위해 잠시 허락하신 것을 기억하시고,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분노하지 마시고, 장차 받을 영광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기뻐하며 찬양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 내가 어둠 속에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