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타래속의 자화상
(원서문학관에서 만난 ‘나’)
솜다리
명지바람에 살살이꽃이 몸을 비비고, 진초록 콩잎 위로 가을빛이 간질인다. 가을 들녘은 농부의 땀으로 영글어진 충만으로 풍요로움을 더한다. 시골 한적한 곳, 폐교에 때 아닌 승용차가 즐비하고, 사람들의 복작거림이 수선스럽다. 궁금증에 발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보니 ‘원서문학관’이란 표지석이 눈에 큼지막하게 들어온다. ‘문학관’이란 푯말에 심연 깊숙한 곳으로부터 울리는 두근거림을 진정하고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보니 "시인이자 소설가인 오탁번 교수님이 폐교를 구입해 원서문학관을 만들었다."고 한다.
문학관은 옛적 재잘거리던 어린아이들의 소리는 세월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교실엔 땟국 꾀죄죄한 앉은뱅이 책걸상, 주인의 손때 묻은 애장품, 고서, 원고지등은 말없이 세월을 말해주는 듯하다.
세월의 강을 건너, 기억의 저편에 있는 소싯적 나를 이 작은 공간에서 떠올려본다. 방학숙제로 쓴 일기는 일상의 소소한 이야깃거리로 가득했으며, 독후감은 쓸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어린 시절이 빛바랜 필름처럼 다시금 되살아난다. 세월이 지난 지금도 기껏해야 산행하면서 쓴 산행기, 또 사진촬영하면서 느낌을 짤막하게 쓴 게 전부였던 내가 문학의 마당에서 기웃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실소할 수밖에 없다. 다만 독서를 소일거리로 삼는 것이 나의 유일한 문학세상이다. 문학의 대가 앞에서 이런 나의 문학적 초췌함이 실오라기 한 가닥 걸치지 않은 적나라함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사진은 수년 전부터 하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실경사진이 아닌 물체의 빛을 이용해서 내면의 심안으로 형상화하는 창조적인 사진 만들기를 좋아하는데 그 과정이 어쩌면 문학의 수필과 비슷할 거란 깨달음은 며칠 전 수필쓰기에 대한 책을 읽고 난 후였다.
생각하는 사진, 나만의 사진은 예리한 눈으로 관찰하고 사유하는데서 멋진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수필 또한 몸소 체험에서 오는 느낌이나 생각을 글로 풀어내는 작업이라 한다. 즉, 현실을 바탕으로 하되 창조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또, 사진은 뺄셈의 예술이다. 수필 또한 덜어내는 훈련이 잘 되어야 한다고 한다. 인간의 본성은 본디 더하기보다 빼는 훈련이 훨씬 힘들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수필은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창조적인 사진을 만드는 과정에 있어서 귀한 초석이 되리라 믿어진다.
‘문학’이란 단어가 내 발걸음을 머물게 하고, 가슴 깊숙한 내면에서 뜨겁게 풀무질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일상의 무미건조한 삶의 잔잔한 감흥을 위해서, 아님 텅 빈 내 속 뜰에 꽃 하나 피워보고 싶어서, 그것도 아니면 문학을 바탕으로 보다 창조적인 사진을 만들고 싶어서... 가을빛이 완연해져가는 문학관 뜰에서 내 자신에게 묻고 또 물어본다. 아직은 희미할 뿐, 나의 삶을 한 땀, 한 땀 글타래로 엮으면서 그 물음의 답을 찾아보리라.
- 몽당연필로 쓴 솜다리의 첫 번째 이야기 2011. 9.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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