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4일 연중 15주일 설교
마르 6:14—29. 아모 7:7-15
생각보다 앞서는 기도
오늘도 우리는 대단히 역동적이면서 실감 나는 마르코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입니다. 이 사건은 화가들에 의해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그림으로 남겨졌고, 많은 음악가에 의해 작품으로 남겨졌습니다. 사실의 해석보다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과 헤로데의 행위를 영적으로 받아들여 성찰적으로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1독서에 나오는 아모스(하느님의 짐을 진 사람)는 흔히 ‘정의의 예언자’라고 불립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져 있었고, 아모스는 남쪽 유다의 드고아라는 곳에서 양을 치고 농사를 짓던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야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북이스라엘에 가서 힘껏 외칩니다. 형식에 빠진 종교, 부패하고 향락에 빠진 지도자들을 향해 그것은 ‘야훼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라. 그렇지 않으면 멸망하리라.’
당시 부패한 종교 권력의 상징이었던 사제 아마지야는 아모스에게 ‘다시는 하느님을 팔아 성전에서 입을 열지 마라. 여기는 왕의 성소요, 왕실 성전’이라고 경고합니다.
두 사람 중 누가 진정 하느님의 뜻을 말하는 걸까요!
자신의 욕심과 바람을 하느님의 뜻이라 왜곡하는 어리석음에 사로잡힌 모습입니다.
엘리트 권력층에서 보면 이름도 모를 하찮은 사람의 외침은 그저 소수자의 목소리일 뿐입니다. 너 따위가 무얼 안다는 것이냐? 라고 말이죠.
그저 양을 치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평범한 농부로 살 수도 있었을 아모스 그의 삶에, 야훼 하느님께서 개입하셔서 고단한 삶을 계속 살게 됩니다.
이를 저는 야훼 하느님께 붙들린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느님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지만 더 큰 고난을 겪고, 회한과 후회 그리고 두려운 마음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저 자기의 자리에서 맡겨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습니다.
아모스, 그는 하느님께 붙들린 사람이었고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세례자 요한도 죄가 없는 사람입니다. 불의한 일에 저항하였고 외쳤습니다.
아모스처럼 하느님의 뜻을 대신하여 왕의 권력에 기생하여 호가호위하는 거짓 예언자 그리고 어리석은 백성을 향해 외쳤을 뿐입니다. 담대하게 진리를 증언했는데 결국 고난을 당합니다.
아모스와 세례자 요한의 닮은 점은 사람들이 바라보고 기대하던 허상을 부정한 것입니다.
아모스는 자신은 예언자가 아니라고 했고, 요한도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느님께 붙들려서 원치 않는 길을 갔고, 그로 인한 고난을 겪지만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역할과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잊지 않았습니다. 많은 유혹이 있었을 텐데도 말이죠.
두 사람은 모두 자기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하느님께 그들을 붙잡고 계셨고, 하느님께 붙들려 자기 자리를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을 우러러보고 떠받드는 많은 사람의 환호가 유혹처럼 들렸을 법한데도, 그들은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생각이 너무 많으면, 기도보다 생각이 앞서기 시작하면 우리 모두 이런 유혹이 빠질 수 있음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제 헤로데가 했던 맹세와 그의 행동을 묵상해 봅니다.
헛된 맹세와 미숙한 언행이 악한 자들의 음모와 결합하여 악행이 됩니다. 사람에 대한 존중이 전혀 없는 평소의 마음가짐과 태도로 인한 가벼운 맹세는 중대한 범죄를 낳게 됩니다.
쉽게 다짐한 맹세가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결과가 된다는 오늘 교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우리의 입 밖으로 나오는 말로 인해, 아주 자주 우리 스스로가 얽매이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의무가 이제 너무 무거운 걸림돌이 되었다고 하죠.
그래서 사탄은 우리가 자유롭게 말하도록 놓아둠으로써 우리 스스로 유혹에 빠지게 만듭니다. 사탄은 자신의 욕구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많은 말을 하게 유혹하고, 더 많은 의무에 사로잡히게 하는 존재입니다. 함부로 맹세한 가벼움의 결과가 어떤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말이 조금 더 거룩해지기를 간구하고 노력하는 이유입니다. 말문을 닫아걸고 침묵으로 드리는 기도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이미 많은 분이 경험하셨기에 잘 아실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 그는 목이 잘렸습니다. 허나 그의 죽음은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줍니다.
그의 죽음으로 장차 예수님께서 당하실 고난을 미리 체험하게 합니다. 그는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의 길을 닦는 예비자라고 선언합니다. 그 맹세를 지켜 낸 것입니다.
살아서도 주님의 길을 예비했고, 먼저 죽음으로써 주님의 수난을 또한 예비하였습니다.
지도자들의 탐욕과 교만으로 희생을 당했지만, 그 역시 자신의 자리를 지킨 사람일 뿐입니다.
그의 잘린 목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생각이 너무도 많은 세상입니다. 어떤 일(사람)에 직면하면 우리는 수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단순하게 살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 붙들려 그 자리를 지킨 요한을 통해,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보내십니다. 요한의 잘린 머리처럼 너의 생각을 잘라 버려라.
그의 잘린 머리가 나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고, 나의 결단이 됩니다. 그래서 기쁨입니다.
자기 자리를 지켰고 그로 인해 고난을 받더라도 두려워 맙시다. 두려움은 생각일 뿐입니다.
우리는 특별하게 내세울 것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킴으로 그리고 자신과 공동체를 신뢰함으로 아모스처럼, 요한처럼 하느님께 붙들려 사는 사람으로 살기를 소망합니다.
생각하는 것에 앞서 먼저 기도를 함께 바칩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많은 일들은 기도하고 나서 행동해도 늦지 않음을 아주 잘 알기에 오늘도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기도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일도 기도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생각을 잘라내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붙드십니다. 그 길이 마냥 쉬운 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기에, 자기 자리를 지키며 사는 우리 앞에 만약 태산과 같은, 파도와 같은 어려움이 닥친다면 함께 스크럼을 짜서 맞서고 헤쳐가는 강한 공동체, 그런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