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은 주일마다 '바이블25'와 '당당뉴스'에 연재 중입니다.
등불이 된 사람
‘성 가족’은 아기 예수를 중심으로 한 가족을 구분하는 이름이다. 세 식구의 얼굴은 모두 밝은 후광을 두르고 있다. 물론 세 식구만 특별하다고 구분 짓는 것이 아닐 것이다. 세상의 모든 가족이 그런 복된 가정임을 모범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성 가족 중 요셉의 머리에만 후광이 없다. 그동안 아버지 요셉의 역할은 소홀하게 다루어진 측면이 있다.
누가복음의 수태고지가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 온 것이라면, 마태복음의 수태고지는 매번 요셉을 향하고 있다. 맨 앞에 수록된 복음서에 따르면 아기 예수의 출생 과정에서 요셉의 구실을 빼면 설명이 가능하지 않다. 그럼에도 세간에서 아버지 요셉에 대한 평가가 박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중세시대 이래 예수 탄생 성화들은 공통적으로 요셉의 위치를 초점에서 비껴 놓고 있다. 요셉의 역할은 외양간 구석에 쭈그린 채 밥을 짓거나, 여러 손님들의 방문을 지켜보며 문간에 서 있다. 물론 복음서에서도 요셉은 한 마디 대사가 없다. 다만 묵묵하게 듣고, 행동하고, 목숨을 걸고 움직일 뿐이다. 사실 아버지는 말이 별로 없다.
렘브란트(1606-1669년)는 이러한 요셉을 잘 조명한 화가이다. 그의 에칭화를 보면 여러 차례 요셉의 얼굴이 등장한다. 어둠 속에서 겨우 실루엣만 비치는 요셉은 등불을 들고 있다. 세 식구는 깊은 어둠 속에서 애굽으로 피난하거나, 혹은 나사렛으로 귀환 중이다. 역사의 어둠이 얼마나 짙고 살벌한 지 아버지 요셉 없이는 모두 불가능한 일이다.
지난해에 유화작품 하나를 구입하였다. 진흥카렌다가 일산으로 이사하면서 창고대방출을 한다기에 들렀다가 한 점 건졌다. 지난 30여 년 동안 성화달력을 만들기 위해 그린 원화 작품들이었다. 화가 이요한은 평생 성화에만 매달렸다. 그는 자신이 그린 대형 작품 250여점을 자랑하면서, 앞으로 개인 성화미술관을 만들고 싶어 하였다. 작은 액정화면 속 성화들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내가 구입한 그림은 이요한의 ‘예수 피난’이다. 요셉은 아기 예수와 마리아가 탄 나귀를 앞서 이끌고 간다. 어색한 것은 광야길이 틀림없을 피난길을 화가는 푸른 수풀로 바꾸어 놓았다. 이의를 제기했더니 작가는 ‘화가 마음대로’라는 식이다. 푸른 들판의 한 켠에 우뚝 서 있는 삼나무는 선배 화가 고흐에 대한 오마주란다. 뜬금없지만 작가의 상상력은 흥미롭고, 연민이 가상하다.
세상의 화가들은 늘 상상력을 발휘하였다. 화가 조르주 드 라 투르(1593년-1652년)는 ‘목수 성 요셉’으로 유명하다. 이 작품은 어둠과 빛을 극명하게 대비하고 있다. 아버지 요셉은 들보에 구멍을 뚫고 있고, 어린 예수는 촛불을 비춘다. 아들은 일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1955년 교황 비오 12세는 해마다 5월 1일을 ‘성 요셉의 기념일’로 지키도록 하였다. 요셉은 모든 노동자들의 아버지로 존경을 받으며, 특히 목수의 수호성인으로 불린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이 성 야고보를 기억하듯이, 베들레헴에서 이집트까지 다녀온 성 가족의 왕복 피난길을 평화의 순례지로 재현하면 어떨까? 그 길은 분명 등불을 끌고 앞장 서 이끌었던 요셉의 수고를 기억하게 할 것이다. 아기 예수의 피난길은 지금 긴급하게 몸을 피해야 하는 온 세상 난민들의 어두운 처지를 비추는 등불이 될 것이다.
이집트 카이로에는 예수피난교회가 있다. 아마 곱틱교회는 이러한 고난의 현장을 보듬으면서 출발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오랜 환대 전통이 세상에 오셨으나 환영받지 못했던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되었다면 역설적이다. 경험에 따르면 고난을 겪은 교회일수록 십자가의 모습이 더 아름답다. 곱틱교회의 가죽매듭 십자가가 대표적이다.
여행자든, 피난민이든 길을 떠나 순례자가 된다는 것은 낯선 경계를 넘어, 미지의 위험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고난과 위기 속에서 ‘성 가족’은 더욱 빛났으며, 공동체를 돌보아야 할 위협 가운데 어머니와 아버지는 몸을 던졌다. 그렇게 “걸어감으로 길이 만들어진다”(안토니오 마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