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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걱정 끊임없고
겨레 근심 쉴 새 없다
우리 님 계신 앞에
근심 걱정 뉘 더하리
그 정신 이어 받아
길이 길이 빛내리
서릿발을 차다하리
대 마디를 곧다하리
우리 님 계신 앞에
차다 곧다 어이 있으리
그 절개 이어받아
길이 길이 빛내리김석진 추념 시, 김창현 작(作)
김석진(金奭鎭, 1843. 1. 21~1910. 9. 8, 음력 기준)은 경기도 광주에서 생부 낙균(樂均)과 남원윤씨(南原尹氏)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생부 김낙균의 족형인 김도균(金道均)과 연일정씨 사이에 후사가 없자 그 아들로 들어가 후사를 이었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경소(景召), 호는 오천(梧泉)으로 출생 시 본래 이름은 태진(泰鎭)이다.
그의 가문은 조선 중기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강경하게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였던 김상용(金尙容)ㆍ김상헌(金尙憲) 형제가 그 선대이며, 김석진은 그들의 11세 손이다.
김상용(1561~1637)은 1590년 급제하여 검열에 등용되면서 관직에 입사하였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호체찰사(兩湖體察使) 정철의 종사관으로 왜군 토벌과 명나라 군사접대의 공로로 1598년 승지로 발탁되었다. 이후 대사성을 거쳐 예조ㆍ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1627년 정묘호란 시에 유도대장(留都大將)을 역임하였다. 우의정으로 재직 중이던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족과 종묘의 위패를 모시고 강화도로 갔다가, 1637년 청군에 의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적에게 무기를 내주지 않기 위해 성 남문의 문루에 화약을 쌓아 놓고 스스로 불을 붙여 순국ㆍ산화하였다.
김상헌(1570~1652)은 1596년 급제하여 예조 및 이조좌랑, 홍문관 수찬,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고, 강직한 성격으로 여러 차례 시사(時事)를 비판하다가 귀향으로 사직과 출사를 반복하였다. ‘석실산인’이라는 호도 중년 이후 경기 양주의 석실에 은거해 있으면서 사용하였고, ‘서간노인’이라는 호는 만년에 안동에 은거하면서 사용하였다.
그는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였다. 이때 청나라에 대해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세가 청나라에 항복하는 쪽으로 기울고 화의가 성립되어 최명길(崔鳴吉)이 항복문서를 작성하자, 인조 앞에서 이를 찢어버리고 통곡하였다. 척화론이 좌절되자 이후 두문불출 하다가 1639년 청의 파병 요구에 강력히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로 인해 청나라로부터 척화파의 영수로 지목되어 1641년 71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심양으로 끌려갔다가 끝내 굴복하지 않고 1645년 귀국하였다. 이후 효종대 북벌론의 이념적 상징으로 대표적인 척화신(斥和臣)으로 추앙받았다.
이러한 김상용ㆍ김상헌 형제의 절의정신과 척화론은 이후 그들 가문의 학자적 가풍으로 자리 잡아 대를 거듭하여 이어져 내려왔다. 조선후기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시문과 문장, 글씨에 능하여 소위 ‘6창(昌)’이라 추앙받는 김창집(金昌集, 1648~1722), 김창흡(金昌翕, 1653~1722), 김창업(金昌業, 1658~1721), 김창집(金昌緝, 1662~1713), 김창립(金昌立, 1666~1683) 형제가 바로 김상헌의 증손이다.
이들 ‘6창’은 김석진에게 8대조가 된다. 김석진의 집안은 김상헌 계열의 ‘6창’ 중 여섯 번째인 김창립의 후손이며, 생부 김낙균은 울산부사(蔚山府使)를 역임하였고 김상용 계열이다.
이렇듯 김석진의 가문은 김상용ㆍ김상헌의 척사적 절의정신과 충의정신이 누대로 면면히 계승되어 온 학자 집안이자 충신열사(忠臣烈士)의 가문으로서, 이러한 정신은 김석진에게도 자연스럽게 배양되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의기를 좋아하여 충신ㆍ열사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통분의 눈물을 참지 못하고 목메어 울었다고 한다. 또한 증조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였고, 됨됨이가 겸손하여 아무리 미천한 사람이라도 정성을 다하여 대접하였으며, 평소 말수가 적어 자신을 잘 들어내지 않으며 검소하고 소박하여 높은 관직에 있어도 그를 고관으로 알아보는 사람이 드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의리(義理)에 관계되는 일에 있어서는 매우 강경하여, 자신의 뜻을 남에게 조금도 굽히지 않았고, 잘못된 점이 있으면 반드시 바른말로 교훈하여 주변 사람들이 ‘지나치게 고집스럽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김석진은 개인적인 행적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아 그의 관직생활을 통해 생의 일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14세 되던 1856년 3월 해평윤씨(海平尹氏, 1844. 8. 4~1865. 9. 28)를 부인으로 맞았으나 21살의 나이에 사망하였고, 후사가 없었다. 이에 족제(族弟) 김홍진(金鴻鎭)의 아들 김령한(金甯漢, 1878~1950)을 들여 후사로 삼았다.
1860년 18세에 과거에 급제한 김석진은 승정원에서 정7품의 가주서(假注書)로 처음 입사하여, 20대에는 홍문관 교리, 종6품 홍문관 부수찬ㆍ사간원 정언ㆍ정5품 호조 정랑, 정4품 홍문관 응교를 거쳐 정3품 병조참의ㆍ형조참의ㆍ우부승지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의 20대(1863~1872) 시기는 대원군이 집정하였던 시기로, 위와 같은 승진과 출사는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조선후기 삼정(三政)의 문란과 세도정치의 폐해로 민생이 매우 불안하였던 시점에서, 그가 세도정치가의 중심 세력이었던 안동김씨 척족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이는 곧 시세와 권력을 좇지 않고 묵묵히 책임을 다했던 김석진의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평소 그는 ‘선비는 차라리 정도(正道)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권력의 길[권도(權道)]을 좇아 살지 못한다’라고 하면서 시세에 민감하게 권력을 좇는 것을 극히 경계하였다.
30대(1873~1882)에 들어서는 평안북도의 병영소재지 안주(安州)의 목사(牧使)를 역임하였고, 황해도 수안군수(遂安郡守)ㆍ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냈다. 이어 정2품 5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 副摠管), 종2품 동지의금부사ㆍ승문원 제조ㆍ동지춘추관사ㆍ한성부 좌윤을 역임하였다. 이때 외직을 지내면서 수안에서 탐학한 관리들을 처리하였고, 1876년에는 경주에서 흉년이 들자 백성들의 구휼과 관리들의 부정 방지에 힘을 써 지역 주민들의 호응과 칭송을 얻었다.
김석진이 34세 되던 해인 1876년 2월,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될 즈음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면서 그는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사직소를 내었다. 16년 여의 관직생활 끝에 처음으로 사의를 표명한 것이다. 이는 외세에 대한 정부의 미온한 태도에 대한 비판이자 개방정국으로 향하는 정권에 대한 비판을 함께 한 것으로, 이후 그는 10여 차례 이상 사직소를 내어 시사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40대(1883~1892)에 들어서도 여러 차례 관직에 사직하고자 하였으나, 그때마다 받아들여지지 않아 직임을 계속하였다. 이 시기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공조ㆍ이조ㆍ호조ㆍ예조ㆍ형조참판 등을 역임하였고, 독권관(讀券官) ㆍ고관(考官) 등 과거시험을 관장하는 직책을 맡기도 하였다. 또한 호조ㆍ형조판서,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를 역임하였고, 1892년에는 3도 육군통어사(三道 陸軍統禦使)로서 충청ㆍ전라ㆍ경상도의 육군을 총괄하는 등 국가의 중요 대소사를 관장하였다.
이 시기 그는 개인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기간이었다. 1884년 42세 되던 해 3월 생부 김낙균이 사망하였고, 반면 후사가 없던 차에 1886년 44세 때 신정왕후(神貞王后)의 명으로 면천군수(沔川郡守)를 역임하였던 친척 동생 김홍진(金鴻鎭)의 아들 김령한(金甯漢)을 아들로 들여 후사를 이었던 것이다.
그는 평소 자손들에게 ‘황금이 바구니 가득 있더라도 한권의 책만 같지 못하다’, ‘상업은 일시의 이익이요, 농업은 1년의 이익이요, 독서는 평생의 이익이다’라고 하면서 평생 책 읽는 즐거움과 교육의 중요성을 논하고 학자적 삶과 절의정신을 강조하였다.
52세 되던 해 1894년 6월 소위 ‘갑오변란’이 일어나자 그는 경기도 양근 연양(陽根 延陽, 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연양리)으로 내려와 1896년 5월 사안당(思安堂)을 짓고, 그곳에서 두문불출하며 술을 마시면 통분을 참지 못하고 눈물로 밤을 새우는 등 시세를 한탄하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하염없이 통한의 세월만 보낸 것은 아니다. 김석진은 사안당을 완공하였던 그해 7월 무렵 같은 고민을 갖고 있던 홍만식(洪萬植, 1842~1905, 홍영식의 형)을 만나 시류를 논하였다. 그 논의 내용은 전해지지 않으나 홍만식이 을사조약의 늑결에 비분강개하여 자결, 순국한 인물임을 감안한다면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또한 1895년 직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반대하여 자결을 시도하고, 1904년 해주관찰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고 사직소를 내는 등 정부의 미온한 태도와 일제의 침략에 강력한 반대의사를 갖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사직소에도 자신의 이름 대신 ‘죽지 않은 신(未死臣)’이라는 글귀를 써 나라의 원수에 죽음으로 대처하지 못한 죄인임을 자처하였다.
이러한 고민은 김석진도 마찬가지였다. 김석진은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을미년 나라의 변고에 한 목숨을 구차히 보전하여,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고 조금도 다른 사람과 다름없이 살아가니 타고난 양심이 어찌 이렇겠습니까? 을미년의 변고는 만고에 없는 일이니 우리나라 삼천리에 무릇 혈기 있는 자 와신상담하여 복수할 것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신처럼 임금의 은혜를 많이 입은 자로서 비록 먼저 하찮은 목숨을 버리지 못하였지만 어찌 차마 사모를 쓰고 다시 벼슬 길을 찾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원수를 갚지 못한 몸으로 죽었어야 하나 구차히 살아있는 마당에 차마 관직에 나아갈 수 없다면서 관직을 거부하였다.
이 시기 관직을 거부하면서 낙향하여 은둔ㆍ자적하는 행동양상은 한말 의병장이었던 유인석(柳麟錫, 1842~1915)이 제시한 ‘처변삼사(處變三事)’의 거의소청(擧義掃淸, 의병봉기), 거지수구(去之守舊, 은둔 또는 망명), 자정수지(自靖遂志, 자결) 가운데 거지수구에 해당하는 저항 방법론이었다. 김석진은 위 세 가지의 방법론 가운데 은둔과 자결로 대처하였던 것이다.
한편, 민영우(閔泳雨)가 일본과 내통하여 몰래 월미도를 팔았음에도 왕의 외척이라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은 사실에 김석진이 매우 분개하여 어전에서 참형으로 다스릴 것을 주장한 것도 1896년 이 시기쯤의 일이었다. 그는 “오늘 한 섬을 팔고, 내일 또 한 섬을 팔면 삼천리 강토를 어떻게 보존 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매국노에 대해 한 치의 용납 없이 엄벌로 다스릴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주변에서 ‘법관도 아니면서 어찌 그러한 주장을 하는가’라고 하자 “난신적자를 모두 없애겠다는 것인데, 어찌 법관을 운운하는가”라고 하여 조정이 숙연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혼란 속에 급기야 김석진은 1902년 모든 관직에서의 사퇴 의사를 밝힌다. 이로써 보다 강력히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일제의 침략을 반대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였다. 곧바로 다음해 1903년 11월에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폐후(廢后)의 글을 작성한 이승오(李承五)와 폐후조서를 위조하여 외국 공관에 통보하였던 김윤식(金允植)에 대한 처단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소위 ‘을미사변’ 당시의 죄로 이미 1897년 12월 제주도로 유배조치 되었으나 감옥에 유치되지 않고 자유롭게 생활하고 있었다. 이에 김석진은 김윤식, 이승오 두 사람을 처단하여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을 것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의리(義理)의 분별에 강직한 평소의 태도처럼 일본의 침략과 관련된 일체의 매국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김석진 선생의 순국지, 서울 강북구 번동 창녕위궁재사. 선생이 일제 총독부가 수여하는 남작 지위를 거절하고 순국자결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 건축물이다. 서울시 등록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경제적 우위를 점한 일본은 조선을 둘러싼 강대국들과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면서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주변국들의 묵인을 이끌어냈다. 급기야 1905년 제2차 영일동맹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영국과 미국의 불간섭을 용인 받고,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전락시키고 통감정치를 실시하여 식민지 조성의 전초를 마련하였다.
을사조약의 늑결과 신분고하를 막론한 우국지사들의 자결ㆍ순국 소식은 김석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에 그도 노구의 몸을 끌고 급히 서울로 상경하여 을사늑약의 파기와 5적의 처단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을사늑약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먼저 ‘토역소(討逆疏)’를 올려 “외척과 재상과 일반 신하와 군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순국함에 (정부에서) 그 충성을 포상하는 것을 극진히 하니, (정부가) 이 여러 신하들을 충신이라 하면 저들(을사 5적)이 역적임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하여 지사들의 자정ㆍ순국이 을사조약의 가결에 서명한 다섯 명을 역적으로 판명하는 중요한 근거임을 제시하였다.
또 “신은 의(義)에 저들(을사 5적)과 한 하늘을 함께 하지 못하겠으며 … 신의 의효전 향관(懿孝殿 享官)을 삭제하여 신이 올린 글의 뜻을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여 적신들과 한 하늘아래 함께 할 수 없으니, 그들을 처형하지 못한다면 그에게 봉해진 관직의 명을 아예 지워달라고 강경한 입장을 취하면서 조약의 파기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을 더욱 확고히 하고자 그는 재차 상소를 제기하였다. 이렇게 강경한 그의 태도에 주변에서 ‘너무 지나친 처사가 아닌가’ 하는 말이 있자, 김석진은 “나라가 남의 수중에 들어가 당장 망하게 되었는데 어찌 서서히 하라고 하는가?”라고 하면서 오히려 만류하는 자들을 엄하게 꾸짖었다고 한다.
이렇게 을사늑약 반대 투쟁을 펼치면서 이미 그는 자정으로 순국할 결심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05년 11월 자결ㆍ순국한 조병세(趙秉世, 1827~1905)의 문상에 김석진을 시종하여 다녀왔던 박해대(朴海大)에 의하면 “조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대감(김석진)께서 남문(南門)의 청시(淸市)에 들어가 저에게 ‘내가 잠시 구경할테니 너는 밖에서 기다려라’고 하시어, 기다리며 창틈으로 살짝 보았더니 대감께서 청나라 상인과 필담을 주고받고 나서 무엇인가 봉지 하나를 구매하여 품에 숨기셨는데, 지금(1910년 9월) 생각해보니 그것이 약봉지(필자 주: 아편 봉지)였습니다”라고 1910년 9월 김석진의 자결 후 증언하였다. 이 증언에 의하면 김석진은 이미 1905년 11월 아편을 구입하여 자정, 순국의 때를 계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국 각지에서의 상소와 지사들의 반대 투쟁에도 을사늑약의 파기가 이루어지지 않고, 고종의 강제퇴위ㆍ정미조약ㆍ군대강제해산 등 오히려 일제의 식민지 기반 구축이 더욱 강화되자 그는 1907년 여름 양근 덕소(현,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에서 재차 자정하여 순국할 결심을 확고히 하였다. 당시 김석진을 시종하였던 송순회(宋淳晦)에 의하면, “대감이 통분하여 눈물을 삼키며 이르시기를 ‘내(김석진)가 죽을 때가 머지 않았다 … 구차한 목숨을 참아가며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라고 하시어 제(송순회)가 이미 순국할 것을 알았습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강제로 대한제국을 병합한 일제는 식민정책 강화의 일환으로 고위 관료와 명망 있는 지도자들을 포섭하기 위해 1910년 8월 29일 소위 ‘조선귀족령’을 내어 76명의 관료 및 유학자들에게 작위를 수여하고 은사금을 주는 포섭책을 펼쳤다. 그러나 김석진을 비롯한 윤용구, 홍순형, 한규설, 민영달, 조정구, 조경호 등은 작위를 거부하면서 이러한 일제의 식민정책에 항거하였다.
1910년 9월 4일 일본의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가 작위를 준다며 다음날 총독부에서 만나자고 초청하자 김석진은 일단 영문을 몰라 병을 핑계로 거절하였다. 그리고 이어 9월 6일 윤용구에게 당도한 문서를 통해 비로소 일제가 고위관료와 명망 있는 유학자들에게 남작(男爵)의 작위를 주고 25,000원(圓)의 은사금을 주어 회유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윤용구를 통해 일제의 작위와 은사금 수여 소식을 들은 김석진은 다음날 9월 7일 자식들과 자신의 처신을 논하면서 어찌할까를 묻자, 큰 아들 령한(寗漢)이 ‘어찌 두 임금을 섬기겠습니까’하니, 김석진은 기뻐 웃으며 ‘바로 그렇다’라고 하여 일본의 지배하에 한시도 살아갈 수 없음을 밝혔다. 또한 “이미 윤용구에게 총독부로부터 서류가 당도하였으니 그와 함께 처신을 논해보면 어떻겠습니까?”라는 자식들의 의견에 김석진은 “이 일의 처리는 어렵지 않다. 다만 받지 않음을 받을 뿐이다. 나의 일이니 내가 거절하면 될 것이지 다른 사람의 동정을 살필 필요가 없다”라고 하여 마음속의 결심을 굳혔다.
다음날 1910년 9월 8일, 아침 문안을 온 큰 아들 령한에게 평소와 다름 없이 ‘날씨가 어떠한가’ 묻고, 이후 5년 전 미리 구입해 둔 아편을 먹고 오후 5~7시 경 오현(梧峴, 현 서울시 강북구 번동 93)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일제의 회유책에 분연히 자정하여 죽음으로 항거하였던 것이다.
그의 죽음은 당시 일반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순국 소식에 외국 공사들과 상인들도 ‘오로지 충신은 김석진 뿐이다’라고 하면서 칭송하는가 하면, 사우(士友)들은 집에서 스스로 조상하며 애석해 하였다고 한다.
또한 각지에서 홍주 의병장 김복한(金福漢, 1860~1924), 5적을 처단하려다 실패하여 유배생활을 했던 김인식(金寅植, 1879~1926), 갑오변란 이후 은둔자적하고 최익현을 스승으로 모신 윤긍주(尹兢周, 1853~1912) 등 당대 우국지사들의 애통해 하는 제문(祭文)과 애장(哀章)이 속속 도착하였다. 곧 김석진은 죽음을 통하여 일제의 침략정책에 항거하는 동시에 의(義)롭지 못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는 자신의 신념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고, 대중 일반에게 일제와 맞서 싸울 것을 자각시켰던 것이었다.
이렇게 그의 순국은 단순히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었다. 한말 독립운동의 귀감을 삼기 위해 우국지사들의 행적을 모은 각종 기록물에 김석진의 행적이 열거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박은식의 [한국통사], 조희제의 [염제야록], 송상도의 [기려수필] 등에 일제의 침략정책에 항거하였던 대표적 인물로 소개되어 후일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이러한 김석진의 우국과 절의정신은 지금도 표상이 되어 충절사(忠節祠, 경기도 용인시 민속촌 충현서원(忠賢書院) 내), 조선후기 우국지사 40위(位)가 모셔져 있는 영광사(永光祠, 전북 진안군 마령면 마이산 이산묘(餌山廟) 내)에 그가 배향되어 애국충절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이상 김석진의 절의 정신과 학자적 면모는 후손들에게 가풍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김석진의 큰아들 김령한(金寗漢, 1878~1950)은 비서원 승(丞)을 역임하였고, 당대 거유였던 송병선, 인척 윤용구 등과 교류하면서 1905년 함께 고려 말 충절지사 김균(金稛, ?~1398)의 신도비를 쓰는 등 서예와 문장에 매우 능하였다.
또한 강직한 절의정신으로 부친 김석진과 함께 을사늑약 이후에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특히 김석진 사후에 일제가 작위를 받지 않은 사실을 문제 삼아 상(喪) 중에도 난입하는 등 그에게 작위를 주려고 시도하였으나, 김령한은 오히려 일본인들에게 부친의 순국 사실을 들면서 훈계하고 끝까지 거부하면서 당당하게 일제에 항거하였다.
아버지를 이은 아들의 이러한 정신은 그 손자와 증손, 고손 등 후대에까지 큰 영향을 주어 김석진의 후손들은 대개 한학과 서예ㆍ문장에 능통하고, 주로 교육계에 종사하며 후진 양성에 헌신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김석진의 절의정신과 충의정신은 후대에 세(世)를 거듭하면서 명문가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한 시대 한 인물의 큰 정신과 교훈이 후대에 어떻게 이어지고 승화해 가는지를 김석진 가문은 잘 보여주고 있다.
결국 김석진은 조국을 지키지 못한 망국의 한과, 그 조국을 침략한 일제에 항거하여 죽음의 길을 선택하였지만, 그의 정신과 유업은 후대에 깊이 새겨져 오히려 죽지 않고 그의 가문 속에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출처:네이버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