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코라손 아키노 여사 필리핀 대통령에 취임
1986년 2월 25일. 필리핀 국민이 20여년에 걸친 독재정권으로부터 빼앗겼던 자유와 권리를 되찾았다. 혼란이 계속되고 있던 필리핀에서 이날 코라손 아키노 여사가 임시정부를 수립, 대통령으로 실권을 장악한 것이다. 마르코스 필리핀 전 대통령은 이날 밤 부인 이멜다 여사 등 가족 ㆍ측근들과 함께 하와이로 망명했다. 이로써 20여 년간에 걸친 ‘마르코스 왕조’가 붕괴됐다. 마르코스의 망명과 아키노 정권탄생을 접한 시민들은 대통령궁주변에 모여 ‘피플 파워’에 의한 독재자타도에 열광했다. 아키노 여사는 1983년 3월 필리핀 마닐라공항에서 마르코스 전 독재정권의 흉탄에 쓰러진 베니그노 아키노 전 상원의원의 부인으로 1972년 남편 아키노가 마르코스에 의해 투옥되자 8년간 옥바라지를 했는데, 이 시기에 남편과 야당지도자들간의 교량역할을 하면서 정치를 배웠다. 그러던 3년전 남편의 죽음으로 그녀는 평범한 가정주부에서 정치가로 변신해 반(反)마르코스 대열에 가담하게 된다. 1985년 야당의 단일 대통령후보로 추대되어 반마르코스열풍을 일으키며 이듬해 2월 대통령선거에 도전하지만, 마르코스의 조작에 의해 부정부패로 물든 선거에서 패배한다. 이후 시민불복종운동을 전개, 일부 군부세력과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이날 필리핀 최초 여성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대중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경제난 등 계속적인 소요를 통제하지 못해 결국, 1992년 5월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라모스에게 패배한 후 대통령직을 인계했다.
[1942년] 독립운동가 송병조 선생 사망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낸 신암 송병조 선생이 1942년 2월 25일 사망했다. 1877년 평북 용천에서 출생한 선생은 한학을 배우다 30대 중반에 서북지역 독립운동 본거지인 평양신학교에 입학, 민족의 독립의지를 키웠다. 이어 1914년 목사가 되어 향리인 용천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고 중국으로 망명한 선생은 1921년 안창호 선생의 주선으로 임시정부에 참여, 이후 임시의정원 의원과 의장을 지냈다. 또 한국독립당을 결성,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으며 애국단체를 규합해 1940년 광복군을 창설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선생은 1941년 중경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재선출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1942년 신병으로 서거했다. 국가보훈처는 선생을 1997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2007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79회 아카데미상 시상식 2007년 25일(현지시각) 미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79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가장 많은 상을 받은 작품은 홍콩 누아르 ‘무간도’를 리메이크한 ‘디파티드’다. 마틴 스콜세지의 감독상 수상을 비롯,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편집상 등 트로피 4개를 가져갔다. 남녀 주연상은 포레스트 휘태커(Whitaker. ‘라스트 킹’), 헬렌 미렌(Mirren. ‘더 퀸’), 조연상은 앨런 아킨(Arkin. ‘리틀 미스 선샤인’), 제니퍼 허드슨(Hudson. ‘드림걸즈’)에게 돌아갔다. ‘판의 미로’는 미술상, 분장상, 촬영상 등 3개 부문을 수상했다. ‘리틀 미스 선샤인’(남우조연상, 각본상), ‘드림걸즈’(여우조연상, 음향상), 앨 고어 주연의 ‘불 편한 진실’(장편다큐멘터리상, 주제가상)이 두 부문씩 나눠가졌다.‘ 바벨’은 작곡상 수상에 그쳤다.
[1956년] 흐루시초프, 스탈린 격하 발언
1956년 2월 25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20차 전당대회에서 소련 공산당 제1서기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의 1인 독재정치의 비리에 대한 연설을 통해 스탈린의 '불관용·야만성·권력남용' 등을 비난했다. 스탈린 사후 게오르기 말렌코프와의 권력투쟁을 통해 1953년 9월 공산당 제1서기 자리에 오른 흐루시초프는 1955년 유고슬라비아 티토 대통령을 만나 스탈린의 정책을 사과하면서 이미 그 유연성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흐루시초프는 이 연설을 통해 1930년대에 일어난 대숙청의 잘못된 처형 실례와 비밀경찰의 비리 및 탄압사태를 폭로했다. 이후 수천 명에 달하는 정치범 석방, 처형된 사람들의 명예회복 등으로 이어진 탈스탈린화 운동은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로 파급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866년] 크로체 Benedetto Croce 태어남
1952년 11월 20일 죽음 크로체는 20세기초 이탈리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으로, 역사가이자 철학자이다. 그는 1903년 사회 및 문화 비평지 <크리티카 La Critica>를 창간했고, 이후 40여 년 동안 이 잡지를 통해 자유 민주주의의 윤리적 이상을 제시했다. 미학·논리학·윤리학·역사철학 등 다방면에 걸친 저술 활동으로 언론을 이끌어, '현대 이탈리아의 스승'이라고까지 불렸다. 파시즘 시절에는 반(反)파시즘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베니토 무솔리니의 패전 이후에는 공직자로 활동하면서 이탈리아의 재건에 힘썼다.
[1932년] 정치인 이만섭(李萬燮) 출생
대구 대륜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다가, 1963년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6대 국회의원(전국구)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하였고, 그 후 제7·10대 국회의원(대구 중구)에 당선되었다. 1981년 구 공화당 출신의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한 한국국민당의 창당에 참여하여 부총재가 되었고, 제11·12대 국회의원에 연속 당선되었으며, 1985년에는 한국국민당 총재를 지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낙선하였으나, 그 후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여 제14대 국회의원(전국구)에 당선되어 국회의장을 지내기도 하였으며, 그 후 신한국당의 제15대 국회의원(전국구)로 다시 당선되었다. 1997년 이인제를 지지하면서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국민신당의 총재가 되었으며, 1998년 국민신당과 새정치국민회의의 합당 이후 새정치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을 지냈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제16대 국회의원(전국구)에 당선되어 다시 국회의장을 지냈다.
[1928년] 영화배우 최무룡 출생
한국영화의 전성기인 1950~60년대의 대표적인 남자 연기자였다. 개성상업학교를 나와 조선상업은행에서 근무하던 중 1945년 문맹퇴치를 위한 소인극(素人劇)을 시작하면서 연극에 매료되었다. 1952년 중앙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53년 신상옥 감독의 〈젊은 그들〉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이후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0), 김수용 감독의 〈혈맥〉(1963)과 같은 사회문제를 다룬 문제작에 출연해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신상옥 감독의 〈빨간 마후라〉(1964)와 김기덕 감독의 〈남과 북〉(1966)에 출연하면서 대중 스타로 부각되었다. 그는 대중에게 집단에 동화되지 못하는 강인한 성격의 아웃 사이더 역으로 인식되었다. 연기뿐만 아니라 영화 연출에도 관심을 보여 〈나운규의 일생〉(1966)을 주연·감독했다. 1980년대 들어 영화인협회 연기분과위원회 위원장과 영화배우협회 명예회장 등을 역임했고 영화제작사인 '초이스프로덕션'을 설립해 〈덫〉(1986)을 주연·감독하기도 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신민주공화당 공천으로 경기도 파주지역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당선되었으며, 1990년 민주자유당에 입당했다. 1993~94년 한국영상자료원 이사장을 지냈으며 보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1947년] 미국의 단거리 육상선수 에번스 Lee (Edward) Evans 출생 1947. 2. 25 미국 캘리포니아 마데라~ .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대회에서 400m 독주와 1,600m 계주에서 각각 43초 80, 2분 56초 10의 세계기록으로 금메달을 땄다. 에번스는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새너제이주립대학에 다녔고, 미국 아마추어 경기연맹(AAU) 주최 대회에서 샌타클라라 유스 빌리지에 입소하기 위해 경기를 치렀다. 1968년 올림픽 대회 직전에 에번스와 팀 동료 몇몇은 미국 내에서의 인종편견에 항의하기 위해 흑인 운동선수들의 출전거부를 계획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상식 도중 몇몇 흑인 수상자들은 주먹을 꽉 쥔 손을 치켜올리면서 블랙 파워를 과시하는 인사를 했고, 이로 인해서 그들은 미국 올림픽 위원회로부터 견책을 당하고 올림픽 선수촌에서 퇴촌시키겠다는 압력을 받았다. 에번스는 1972년 뮌헨 올림픽 대회에 출전할 1,600m 계주 미국 대표 팀에 선발되었으나, 다른 2명의 선수들의 출전이 정지되고 에번스가 참가를 거부하자 미국 팀은 참가하지 못했다. 1966~69년과 1972년 AAU 주최 육상대회의 400m 독주 종목에서 우승한 그는 1972년까지 이 종목의 세계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계주 부문에서 그가 수립한 세계기록은 여전히 깨지지 않고 있다. 1973년 프로로 전향해 인터내셔널 트랙 협회에 소속되었으나 이 협회는 바로 해체되었다. 1975~80년 나이지리아 트랙 팀의 체력단련 상담가 및 코치를 지냈다.
[1905년] 손기업 (한국 독립운동가)[孫基業] 출생 1905. 2. 25 황해 장연~1985. 9. 21. 독립운동가. 호는 일정(一丁). 1928년 베이징[北京]에서 이상일(李尙逸)과 함께 친일주구 숙청과 일제 고관의 암살을 목적으로 조선혁명당총동맹을 조직하고 톈진[天津]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8월 동맹원 전창국(全昌國)에게 명령하여 톈진 일본 조계 내에서 이태화를 사살하게 했다. 또 1930년 동맹원 장기준(莊麒俊) 등을 시켜 톈진 일본은행을 습격하고 거액의 돈을 탈취하게 해 군자금에 충당했다. 1931년 일어난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의 대륙침략이 노골화되자, 중국 국민의 대일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조선혁명당총동맹 간부들은 비밀회의를 열어 일본제국주의 침략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세계대전이 일어나 민주진영이 승리하는 것만이 최선의 해결책이라는 점에 의견의 일치를 보고, 세계대전 유도책으로 열강의 조계가 많이 있는 톈진에서 일본 조계를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먼저 만주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를 총살하고자 손기업의 총지휘하에 동맹원 이창용(李昌用)·박민항(朴敏杭)·최윤식(崔潤植)이 결사대로 선출되었다. 결사대 3명은 폭탄 4개, 권총 3정 등을 휴대하고 만주에 가서 창춘[長春]·펑톈[奉天] 등지를 전전하며 사살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창춘 중앙여관에서 무기가 발각되어 이창용·박민항은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었다. 고문 끝에 총지휘자인 손기업의 비밀장소가 발각되어 톈진에서 체포되어 창춘으로 압송되었다. 일본 헌병에게 고문을 당한 후, 1933년 5월 27일 창춘 일본군법회의 관동군법무부에서 10년 형을 받고 뤼순[旅順]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박민항은 같은 해 10월에 옥사하고, 그와 이창용은 만기출옥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1890년] 헤스 (영국 피아니스트) [Hess, Dame Myra] 출생
1890. 2. 25 런던~1965. 11. 25 런던. 영국의 피아니스트. 바흐·모차르트·베토벤·슈만의 해석으로 유명하다. 길드홀 음악원과 왕립 음악원에서 저명한 선생 토비아스 마테이에게 배웠다. 팔의 무게와 근육 이완과 관련된 마테이의 터치 이론은 그녀의 연주 양식 확립에 도움을 주었다. 1907년 런던에서 데뷔했으며, 잠시동안 사촌 아이렌 샤러와 듀엣 리사이틀 활동을 했다. 1939~46년 독일의 공습이 있었던 동안에도 런던 사람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내셔널 갤러리에서 매일 연주회를 개최했다. 젊은시절에는 친숙한 실내악 연주를 많이 선보였으며, 특히 슈만의 작품을 잘 소화해냈다. 나이가 들면서 보다 강력한 연주 양식을 추구하여 베토벤과 브람스의 협주곡 연주에서 그 면모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1941년 대영제국의 데임 작위를 받았다.
[1841년] 르누아르 (프랑스 화가) [Renoir, Pierre-Auguste] 출생
←자화상. 1841. 2. 25 프랑스 리모주~1919. 12. 3 카뉴. 인상파에 속했던 프랑스의 화가. 그의 초기 작품들은 반짝이는 색채와 빛으로 가득 차 있는 현실생활의 단편을 그린 전형적인 인상파 그림이었다. 그러나 1880년대 중엽부터는 인상파와 결별하고 초상화와 인물, 특히 여인상(예를 들면 〈목욕하는 여인들 Bathers〉, 1884~87)에 좀더 엄격하고 형식적인 기법을 적용하게 되었다. 그는 만성류머티즘 으로 결국 붓을 손가락에 묶고 그림을 그려야 했다. 젊은시절 르누아르는 장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7명의 자식을 거느린 양복장이였던 아버지는 1845년경 가족을 데리고 파리로 이주했다. 르누아르는 어릴 적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으며 부모는 아들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차리고 13세 때 도자기 공장에 보내어 훈련을 시켰다. 이곳에서 그는 접시에 꽃다발 그리는 법을 배웠다. 그뒤에는 부채에 그림을 그렸고, 그 다음에는 교회에 걸 헝겊 패널에 종교적 주제를 다룬 그림을 그렸다. 그는 그림솜씨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그림을 그릴 때면 커다란 기쁨을 느꼈기 때문에 정식으로 그림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약간의 돈을 모은 그는 1862년 에콜 데 보자르의 야간부에서 소묘 및 해부학 강의를 듣는 한편, 19세기 신고전주의 화가 앵그르의 제자였던 스위스의 화가 샤를 글레르의 화실에서 그림 교습을 받게 되었다. 스승의 전통적 화풍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화가가 되는 데 필요한 기본 지식을 얻기 위해 그는 아카데미 예술의 규칙을 받아들였다. 르누아르는 몇 달 뒤 화실에 들어온 세 학생, 즉 알프레 시슬레와 클로드 모네 및 프레데리크 바지유에게 훨씬 더 친밀감을 느꼈다. 이들은 모두 현실생활에 좀더 충실하고 과거의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예술을 꿈꾸고 있었다. 네 젊은이의 공통된 이상은 곧 강한 우정으로 이어졌다. 같은 무렵, 스위스 아카데미의 또다른 실기실에서는 폴 세잔과 카미유 피사로라는 젊은 화가들이 똑같은 문제에 몰두해 있었다. 바지유의 소개로 두 그룹은 서로 자주 만났다. 인상파 화가들과 제휴 르누아르는 이런 상황에 용기를 얻어 표현 양식에서 새로운 자유와 실험적인 방식을 시도했다. 그림을 심지어는 풍경화까지도 화실에서 그리는 것이 그 당시의 전통이었다. 그러나 1864년 봄 글레르의 제자 4명은 퐁텐블로 숲으로 거처를 옮겨, 자연을 직접 보고 그리는 작업에 몰두했다(외광회화, 퐁텐블로파). 퐁텐블로 숲은 전에도 테오도르 루소와 장 프랑수아 밀레 같은 화가들을 매혹시켰는데, 이들은 예술이 일상 생활의 현실을 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전통적 표현 양식의 제약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못했다.1863년 에두아르 마네는 훨씬 더 대담한 방법을 택했다. 〈풀밭 위의 식사 Le Déjeuner sur l'herbe〉(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라는 그의 그림은 맹렬한 비난을 받았는데, 이 그림의 주제와 기법은 현실 관찰을 통한 그림의 부활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담성으로 인해 젊은 예술가들은 마네를 새로운 운동의 지도자로 생각하게 되었다. 새로운 회화 언어가 탄생할 수 있는 상황이 무르익자 갑자기 나타난 이 인상주의는 1874년 살롱전과는 별도로 열린 첫번째 인상파 전시회에서 물의를 불러일으켰다. 이 운동의 명확한 형식과 독자적인 시각, 독특한 통찰력을 얻기까지는 10년의 세월이 걸렸지만, 근대 예술이 낳은 이 인상파 운동의 출발점은 1874년이라고 볼 수 있다. 르누아르의 작품은 구상과 기법에서 이 새로운 접근 방식을 완벽하게 나타내 보이는 한 예이다. 그는 공기의 진동, 잎사귀의 반짝이는 효과, 그리고 특히 야외에서 빛을 받은 젊은 여인의 살갗을 섬세하고 다채로운 붓놀림으로 훌륭하게 묘사했다. 르누아르와 그의 동료들은 검은색을 배제한 밝은 색깔의 그림을 그리려고 애썼지만, 이러한 노력 때문에 그들은 숱한 좌절을 겪어야 했다. 그들의 그림은 전통적인 규범에서 너무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살롱전 심사위원들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그림을 팔기도 무척 어려웠다. 반면에 일부 인상파 화가들은 계속 비난을 받으면서도, 비평가들 뿐 아니라 일반 대중한테도 자신들의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르누아르는 인체에 흥미가 있었기 때문에, 풍경에 더 매혹되어 있는 다른 화가들과 거리를 두고 지냈다. 얼마 후 그는 초상화를 몇 점 주문받았고 출판업자인 조르주 샤르팡티에게서 중상류층 사람들을 소개받아, 그 계층에 속하는 여자와 어린이의 초상화를 그렸다. 르누아르는 점차 자신의 기술에 숙달되었고, 경제적으로 심각한 어려움에 시달리면서도 생기에 가득 찬 그림을 그렸다. 그의 걸작 가운데 〈객석 La Loge〉·〈물랭 드 라 갈레트 Le Moulin de la Galette〉·〈뱃놀이에서의 점심 The Luncheon of the Boating Party〉·〈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 Mme Charpentier and Her Children〉 등은 이 시기의 작품이다. 샤르팡티에는 1879년 '현대생활'(La Vie Moderne)이라는 화랑에서 르누아르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인상파와의 결별 1881년과 1882년 르누아르는 알제리와 이탈리아 및 프로방스 지방을 몇 차례 여행했는데, 이 여행은 결국 그의 예술과 생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인상주의 기법을 체계적으로 이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조되는 색채들을 섬세한 붓놀림으로 나란히 칠하는 기법으로는 매끄럽고 윤이 나는 살갗의 인상을 충분히 전달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인상파 화가들은 그가 검은색을 사용한 것을 비난했지만, 르누아르는 검은색의 사용이 그런 비난을 받을 이유가 없으며 어떤 경우에는 인상적인 효과를 낼 뿐만 아니라 주변의 색채들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어준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동안 그는 라파엘로의 그림들을 보았고 거기에서 고전주의의 매력, 즉 소묘의 아름다움, 형태를 규정짓는 또렷한 윤곽의 순수함, 인체의 유연함과 입체감을 더해주는 부드러운 채색의 표현력을 배웠다. 이무렵 그는 우연히 첸니노 첸니니가 쓴 〈회화론 Il libro dell'arte〉(1437, 1844 A Treatise on Painting으로 영역)을 읽게 되었는데, 이 논문은 그의 새로운 생각을 뒷받침해주었다. 그가 이들을 통해 배운 것은 너무나 강력하고 대담하며 예기치 못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켰고, 그는 이미 의문을 품기 시작한 인상파와 결별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느낌을 가졌다. 1883~84년에 그가 제작한 작품들의 대부분은 새로운 규칙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예술사가들은 앵그르의 기법과 막연한 유사점을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 작품들을 '앵그르 시대'라는 이름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르누아르의 인상주의적 시도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의 팔레트는 여전히 여러가지 색채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인상주의에 대한 그의 강한 반발은 1890년경까지 계속되었다. 그동안 엑스앙프로방스와 마르세유 및 마르티그 같은 프랑스 남부 지방을 몇 차례 여행했다. 햇빛 찬란한 이 지역의 자연은 인상주의와의 결별을 더욱 촉진시켰다. 그는 인상주의를 센 강 유역의 풍경과 연결지어 생각했다. 남부 프랑스는 색채와 관능으로 가득 찬 풍경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와 동시에 고전주의의 엄격한 규칙에서 떠나 자연의 자연스러움을 그리고픈 욕망을 불어넣었다. 남부 프랑스에 있는 동안 그의 예술은 타고난 참신함을 되찾았다. 그는 목욕하는 여인들을 마치 꽃다발을 그릴 때처럼 건강하고 아름답게 묘사했다. 그의 경제 사정은 상당히 좋아졌다. 1890년 알리스 샤리고와 결혼했고, 1892년 뒤랑 뤼엘이 열어준 개인전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미래는 보장되었고, 이 시기에 그린 작품에서는 새로 찾은 안정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자신감도 보여주었다. 후기 그로부터 2년 뒤, 르누아르는 첫번째 류머티즘 발작을 일으켰고, 발작이 점점 잦아질수록 프랑스 남부지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곳의 날씨가 건강에 더 좋았기 때문이다. 1899년경 그는 카뉴라는 작은 마을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1907년 레콜레트라는 영지를 사들여 카뉴에 정착했고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1910년 더이상 걸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몸의 자유를 구속하는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결코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손가락이 움직여지지 않자 손에 붓을 묶은 채 그림을 그렸다. 이런 불운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은 여전히 삶에 대해 쾌활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는 파리 부르주아지의 미소띤 초상화에 만족하지 않고,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하녀인 가브리엘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가브리엘은 그를 위해 자주 나체로 포즈를 취해주곤 했다. 그의 정물화는 정원에서 따온 꽃과 과일로 이루어졌으며, 풍경화는 주변 경치를 그린 것이 많다. 특히 누드화는 그가 평생 동안 일하는 즐거움에서 찾아낸 평온함을 보여준다. 그는 젊은 리샤르 기노의 도움을 얻어, 여성의 육체에 대한 찬미를 조각으로 표현하려고 애썼다. 이무렵 르누아르는 손수 조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1913년경 기노를 조수로 삼았다. 기노는 르누아르의 지시를 기꺼이 따르는 솜씨좋은 도구가 되었다. 그는 르누아르의 개성 앞에 굴복했고 솜씨가 좋았기 때문에, 그가 조각한 작품들은 르누아르의 표현 양식이 갖고 있는 특성을 모두 가지게 되었다. 르누아르의 아내는 1915년 전쟁에서 중상을 입은 아들 장을 만나러 제라르메르에 갔다가 돌아온 뒤 세상을 떠났다. 르누아르는 아내보다 4년 더 살았는데, 죽기 몇 달 전 국가가 구입한 〈조르주 샤르팡티에 부인의 초상 Portrait de Mme Georges Charpentier〉이라는 자신의 그림을 보러 파리에 갈 수 있었다. 그때 몇몇 친구들은 그를 루브르 박물관으로 데려가, 그가 평생 존경해왔던 걸작들을 마지막으로 보여주었다.(R. Cogniat 글 | 金碩禧 옮김)
그밖에 2006년 이규태 조선일보사 전 고문 별세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제16대 대통령으로 공식 취임 2003년 청와대 경제수석실 35년 만에 폐지 1999년 미국의 핵화학자 시보그 사망 - 우라늄보다 무거운 원소들 분리로 노벨화학상 수상 1998년 김대중 제15대 대통령에 취임 1995년 북한 정치관료 오진우 사망 1993년 김영삼 제14대 대통령에 취임 1993년 황인성 제25대 국무총리 임명 가결 1990년 니카라과 대통령선거에서 차모르 여사 당선 1988년 노태우 제13대 대통령에 취임 1988년 이현재 국무총리 서리 취임 1986년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 대통령 하와이로 망명 1983년 미국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 사망 1975년 김성곤씨 사망 1964년 미국 제트여객기 뉴올리언즈호수에 추락 58명 사망 1954년 프랑스 건축가 페레 사망 1941년 영국 삽화가 존 테니얼 사망 1899년 세계 최초의 통신사인 로이터 통신사의 창설자 로이터 사망 1866년 이탈리아 철학자 베네데토 브로체 출생 1713년 프로이센의 초대 왕(1701~13 ) 프리드리히1세 사망
첫댓글 ㅎㅎㅎ..신난다~~요..구름님 고맙습니다..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