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來神力品(여래신력품) 第二十一
3. 경전을 찬탄하고 유통을 부촉(咐囑)하다
오늘은 여래신력 품 ‘경전을 찬탄하고 유통을 부촉하다.’그랬습니다.
어떤 불자님이 우리 생활에 실천할 수 있는 그런 법문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말씀을 했어요.
참 중요한 말이기는 한데,
법화경 같이 일상생활에 반드시 실천해야 되고,
인간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는,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인 그런 실천 법!
다시 말해서 상불경보살을 우리가 흉내 내고, 그것이 내 삶이되고 닮아 가는 것,
그것은 법화경 사상이 깔려있고, 그 사상을 몸소 실천하는 것이고,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고
아니, 부처님까지로는 받들어 섬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하고 기본예의와 기본적인 인간대우는 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자세! 그런 실천! 그것이 가정의 행복의 열쇠이고,
이웃 간의 행복의 열쇠이고, 나라의 평화의 열쇠이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어떤 평화를 유지하는 열쇠!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으며
또 그것을 실천하는 것 보다 더 훌륭한 수행이 어디 있겠나?
그렇게 누누이 이야기 했음에도 불구하고,
뭐 좀 사람이 실천할 수 있는 것 그런 걸 이야기해 달라고 하는데,
아마도 또 다른 어떤 특색 있는 수행법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아요.
사람 사는 일! 그보다 더 우선하는 수행은 없고,
그보다 더 훌륭한 일도 없고,
불교니 뭐니 해도 사람 사는 일인데,
사람 사는 일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가 생각하지 않고 있다가,
또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불교라는 것이 참 막연하고 손에 잡히지 않고...
그러니까 엉뚱하게, 실컷 이야기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 좀 해주었으면 어떻겠는가?
이런 부탁도 듣습니다.
그런 조언이 다 저에게는 참고가 되고,
아울러 내가 제대로 깨우치지 못하고, 제대로 설명을 못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또 한 쪽으로는 실컷 이야기할 때는 어디 갔다가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하는가?
얼마나 역설을 해야 이 법화경의 실천수행사상을 정말 제대로 마음에 새길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생각이 새삼 들기도 합니다.
여기서 ‘경전을 찬탄하고 유통을 부촉하다.’그랬습니다.
그러면 이 말 한마디 좀 제대로 우리가 마음에 한번 새겨볼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경전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도록 전해지려고 하고,
또 이것이 전해져서 많은 사람들에게 삶에 이익과 행복을 주려고 한다면,
일단은 널리 또 많은 사람에게 유통이 되어야 됩니다.
부처님이 그것을 염려하신 것이지요.
그러니까 유통되기를 부촉하는 것이지요.
당부하는 것입니다.
그런 내용이 여기에 잠깐 실려요.
이 때에 부처님께서 상행(上行) 등 보살대중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종지용출품에서,
땅이 찢어지면서 올라온 수많은 보살대중들 중에서
대표되는, 리더가 되는 네 보살이 있었지요.
그중에 상행보살 등 네 보살이 있었습니다.
그런 인솔자(네 보살)에 의해서 함께 올라온 보살대중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부처님의 신통한 힘이 이렇게 한량이 없고 그지없어 불가사의하니라.
만약 내가 이러한 신통의 힘으로써 한량없고 그지없는 백천만억 아승지 겁 동안에
뒷사람들에게 부촉(咐囑)하기 위하여 이 경전의 공덕을 말하더라도
오히려 다할 수 없느니라.
'뒷사람들에게 부촉(咐囑)하기 위해서 이 경전의 공덕을 말한다’라고 하는데,
그렇습니다.
공덕을 말해야, 무엇인가 소득이 있고 이익이 있고 돌아가는 것이 있다고 이야기를 해야,
그것 때문에 법화경을 널리 전하고 출판하고 법보시도 하는 것이
대체적인 사람들의 심리이거든요.
뭔가 돌아오는 것이 없으면 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돌아온다고 하는 것이 바로 공덕입니다.
그래서 공덕을 그렇게 많이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유통하기를 부촉하는 뜻에서 공덕을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이 공덕이 그만큼 많기 때문에 공덕을 말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부처님이 그동안 공덕만 쭈~욱 말씀해 오시다가,
중요한 점만을 들어서 말하자면,
여래의 가지신 법과 여래의 온갖 자재하신 신통의 힘과
여래의 온갖 비밀하고 요긴한 법장(法藏)과
여래의 매우 깊은 온갖 일들을 모두 이 경에서 펼쳐 보이며 드러내어 말씀하셨느니라.
부분 부분으로 세부적인 것은 쭉 말씀해오셨지만,
또 여기서는 요점만 들어서 이야기하자면 이렇게 정리할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여래의 온갖 자재하신 신통의 힘!
여래의 온갖 비밀하고 요긴한 법장!
여래의 매우 깊은 온갖 일들을 모두 이 경에서 펼쳐 보였다.'
또 '여래의 가지신 법’다 나타나있다.
이렇게 하면 이야기 다 한 것이 아니냐는 의미지요.
글쎄요, 어떻게 생각하면 이런 것은 막연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우리의 분에 적합한 그런 어떤 것을 가지고 유혹을 하면 잘 넘어갈 텐데,
이렇게 진실하게 순수한 본래의 의미대로만 이야기를 하니까,
오히려 중생들이 잘 따르지 못하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법화경을 쓰면 수명이 길어지고, 건강이 좋아지고, 소원이 성취되고,
학생들이 공부 안 해도 저절로 좋은 학교에 척척 입학하고,
온갖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하면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따르지 않을까...
어떤 분이 말씀하시기를
스님의 불교는 어떻게 생각 하니까 아주 어렵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그런 식으로, 무엇을 빌면 성취되고,
예를 들어서 법화경도 공덕을 자꾸 이야기하면 세속적인 공덕,
그것 때문에 아주 편안하게 무조건 덮어놓고 믿고,
그런 줄 알고 따르고 그렇게 하면 훨씬 불교가 쉽고 편안할 텐데
왜 그렇게 스님은 불교를 어렵게 말씀하시냐?
일부러 찾아와서 그런 말씀을 하신 분이 계셔요.
그것 참 의외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듣고 보니까 그렇기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이럴 때는 반성을 해야 옳을지 나는 내 나름대로 내 소신을 가지고
정말 내 인생을 다 바 받쳐서 공부를 했고,
또 공부한대로 정말 양심적으로 이야기 한다고 하고 있는데도,
그야말로 불교 안에서 내 소신껏 이야기 한다고 하는 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이해하는 분이 있어서
“왜 그렇게 어렵게 이야기 하느냐,
덮어놓고 믿고 그렇게 하면 세속적인 속된 소원이 다 이루어진다고
다른 사람들처럼 말하지 않고
왜 그렇게 어려운 소리를 자꾸 해서 사람을 힘들게 하느냐?”
아~, 이런 소리를 들었어요.
그러니까 참, 잠깐은 좀 생각을 하게 합디다만,
그렇지만 제 자신이 생긴 것이 그렇게 생겼고, 내 소신이 그것인데,
그렇다고 뭐 달라질 리도 없고, 달라져서도 안되지요만,
참 중생들의 성향이 가지각색이구나...
그런 장사를 하는 상점은 참 많은데,
왜 나한테까지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할까 하는 그런 생각도 또 했어요.
딴 상점에서도 파는 것을 스님 상점에서도 같이 좀 팔아주면 어떠냐는 이런 표현이겠는데,
글쎄요. 해석하기 나름이긴 하겠습니다만, 그렇습니다.
여기에 이 법화경에 대한 온갖 좋은 점을 다~아 말씀하시고 말씀하시다가
최후에 와서 요점만 들어서 말하자면,
‘여래의 가지신 법과 여래의 온갖 자재하신 신통인 힘과
여래의 온갖 비밀하고 요긴한 법장과 여래의 매우 깊고 온갖 일들을
모두 이 경에서 펼쳐 보이며 드러내어 말씀하셨느니라.’
이렇게까지 정리를 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래라고 하는 것,
부처님이 스스로 여래라고 할 때는 진리의 입장으로 지칭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곧 우리들 마음에 이러한 것을 다 지니고 있다는 것이고
그 지니고 있는 것을 다 부처님은 그 능력으로 드러내서
보여주고 열어주고 깨닫게 해주고 그 속에 들어가서 그 속에서 삶을 펼칠 수 있도록
그렇게 해 주신 것이거든요.
그럴 가능성을 우리가 다 가지고 있고,
또 우리들 마음속에 고스란히 다 있는 것을 부처님이라고 하는 분은,
세존이라고 하는 분은 실증해 보이신 것이
차이가 있다면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들이 여래가 열반한 뒤에
한결같은 마음으로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해설하고 쓰고 출판하여
말한 대로 수행(修行)할지니라.
바로 이거 아닙니까.
경전에서의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따로 있지 않습니다.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해설하고 쓰고 출판하는 것.' 이것이 수행 이예요.
그래서 그 속에서 한 마디 깨달으면 그대로 깨달은 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아는 대로 살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제도 말씀하셨지만, 安心法門(안심법문)!
초기 선종에서는 안심법문을 많이 말씀하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달마와 혜가 의 관계가 그렇고,
혜가 와 승찬 의 관계도 그렇고
다 안심법문 이예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가르침!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그것이 정말 바람직한 불교거든요.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들처럼, 무슨 운동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의 어떤 자세처럼,
아니면 생사를 걸고 격투기를 벌이는 사람들처럼,
무슨 종교가 그런 식으로 수행을 하고,
그런 식으로 하게끔 가르친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종교가 못 됩니다.
불교라고 하는 간판 밑에서 그런 식으로 권하고,
그런 식으로 수행이랍시고 하고, 하는 사람들,
그런 식으로 절하고 기도하고 정진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있기는 있지만 그것이 과연 온전한 수행일까?
종교가 가는 길이 그래야 할까?
생명을 걸고 전투에 임하는 것처럼,
무슨 격투기를 벌이는 것처럼,
생명을 걸고 자폭테러라도 하고자하는 것 같은 그런 결연한 심정으로
그렇게 할 일이 있을까? 과연...
그렇게 해서 뭘 하자는 것일까?
참,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아무리 살펴봐도 安心法門(안심법문) 이고,
부처님의 그 정신이 온전하게 내려오기까지는
사실은 초기 선도 전부 看話禪(간화선)이 생기기 이전까지는
전부 편안하게, 그냥 자연스럽게 수행을 했습니다.
그것이 안 되니까 간화선이 생겨서,
정말 이마를 마루에다 탕탕 찧어서 유혈이 낭자하는 광경을 보아가면서 화두와 씨름하고,
몸부림치는 광경들을 우리가 선방에서 흔히 보게 되는데,
그런 것 들은 根基(근기)가 하열해서 그렇기도 하려니와,
뭔가 수행을 잘 몰라서 그런 점도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수행이란 참, 옛날 스님과 같이 불안한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무엇인가 죄책감에 있는 그 무게를 덜어 줘서, 가볍게 해주면 그것이 곧 수행이고,
그것이 법문이고, 그것이 진리를 아는 사람의 가르침이라고
저는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느 국토에서나 이 경전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해설하고 쓰고 말한 대로 수행하는 이가 있거나
이 경전이 있는 곳이면, 동산이거나 숲 속이거나 나무 아래거나 승방(僧坊)이거나
신도(信徒)들의 집에서거나 전각이거나 산골짜기거나 넓은 들판이거나
모두 다 탑을 쌓아 공양하여야 하느니라.
이 경전이 있는 곳이면,
‘이 경전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해설하고’
읽거나 이 경전이 있는 곳이면 그렇게 하라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부처님 당시부터 우리나라로 치면 신라 고려에 이어지기까지
얼마나 찬란한 그 문화유산을 남겼습니까.
그 때 무슨 경제력이 풍부해서 먹고 남아서 그렇게 훌륭한 문화유산을 남겼습니까?
아니지요.
그 때하고 지금하고 경제력으로 따진다면
아마, 어림잡아서도 만 배는 더 잘 살 것입니다.
신라 때 보다도 만 배는 잘 살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손들에게 남겨 줄만한 아무런 문화유산을 남기지 못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입니까?
옛날이 그렇게 어렵게 살던 때도, 여기에서 생각한 대로
'승방 이거나 신도들의 집이거나 전각이거나 산골짜기거나
넓은 들판이거나 모두 다 탑을 쌓아 공양하여야 하느니라.'
이건 뭐 꼭 탑을 쌓아야 무슨 문화유산을 남긴다는 뜻이 아니라,
이렇게 살았던 사람들의 그 삶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그 마음이 참, 정말 어떠했겠는가?
부럽기 그지없고, 그런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살았기에
찬란한 문화유산을 오늘날 이렇게 남겼다는 뜻이고,
그때에 비해서 지금 만 배나 더 사는데도 불구하고,
후손들에게 남겨줄만한 문화유산을 하나도 남기지 못하는 것,
참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어서, 곁들여서 말씀드립니다.
왜냐하면, 마땅히 알아라.
이곳이 곧 깨달음의 도량(道場)이니라.
모든 부처님들이 다 여기에서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으며,
모든 부처님들이 다 여기에서 법륜(法輪)을 굴리며
모든 부처님들이 다 여기에서 열반에 드시느니라."
금강경에 ‘의법출생 분’ 이라고 하는 대목이 있지요.
법에 의해서 출생하다.
금강경의 가르침을 통해서 여래가 출생했고,
여래의 가르침과 여래의 깨달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다 皆從此經出(개종차경출)!
다 이 경전으로 통해서 나왔다는 표현이 있는데,
여기도 이곳, 법화경이지요?
'이 곳이 곧 깨달음의 도량이다.
모든 부처님들이 다 여기에서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
바로 법화경의 가르침! 바로 거기에서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 모든 부처님들이 다 여기에서 법륜을 굴리며
모든 부처님들이 다 여기에서 열반에 드시느니라.'
무슨 탑을 쌓고 법화경이 있는 곳이고 장소를 말하지만,
장소 가지고 하는 소리겠습니까?
바로 법화경의 이치를 두고 하는 소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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