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리를 만든다' 진공관앰프 제작 50년, 이광수
1942년생이니 올해로 67세. 그 세월 가운데 30년 동안 진공관 앰프를 만들었다. 가난했던 10대 때 고등학교 다니다가 전자 기술학교에 들어가 앰프랑 TV 제작기술을 배웠으니, 앰프와의 인연은 50년이 넘는다. 그가 ‘다마’라고 부르는 신통방통한 물건, 진공관. 트랜지스터가 발명되기 전에 전기 제품에 쓰이던 뭉툭한 부품이다.
메모리와 CPU가 설쳐대는 이 시대에, 그의 ‘다마’를 음악이 통과하면 유장한 선율과 육중한 진동음으로 바뀌어 가슴을 후벼 판다. 1970년대에 그가 만든 앰프가 지금도 인기리에 거래가 되고 있는, 칠순을 바라보는 소리의 장인(匠人) 이광수 이야기.
서울 용산에 있는 원효전자상가 4동 209호에는 ‘이연구소’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이광수가 1982년에 설립한 대한민국 최초의 진공관 앰프 제작소다. 지금이야 진공관앰프 제작사가 우후죽순처럼 많지만, 이연구소는 이 땅에 토종 진공관 오디오 문화가 태동한 태실(胎室) 같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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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공관 앰프 이연구소 입구 / 박종인 기자
문을 열자 고전음악감상실처럼 생긴 공간 속에 중년 사내가 반긴다. 혹시 이광수 선생은…? “접니다.” 깜짝 놀랐다. 당신이 정말 예순 일곱 먹은 노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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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기가 만든 앰프 뒤에 앉은 이광수. 자신감과 겸손함이 섞인 표정이었다. / 박종인 기자
고교 때 음악에 미쳐 앰프를 만들다
한두번 들은 소리가 아니라는 듯 장인이 껄껄 웃는다. 새치 몇 올 빼고는 검은 머리에 검은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세련된 중년사내가 자기를 예순 일곱 된 이광수라고 했다. “관리도 좀 하지만, 음악 듣고 산 게 노화를 막는 촉매제쯤 된 거 같습니다.” 이후 그와 대화를 나누며 그의 정체를 확신하게 됐지만, 그 순간에는 이광수의 아들뻘처럼 보이는 이 사내 말을 믿기로 했다.
“제 고향이 부천이에요. 1950년대 말에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관두고 서울에 있는 기술학교에 들어갔어요. 뭘 만드는 게 좋았는데, 그 때 ‘텔레비전’이라는 최첨단 가전제품이 나온 거죠.”
금성사 텔레비전이 갓 나왔을 무렵이었다. 텔레비전을 만들고 싶어서 기술학교에 들어가 회로 설계하는 법, 납땜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텔레비전을 분석하며 젊은 미래를 준비했다. 그런데.
“텔레비전에 영상신호가 있고, 음향신호가 있잖아요. 두 신호를 분리해서 보니까, 영상신호보다 음향신호가 더 품질이 좋더라고요. 우리는 기술자니까, 더 좋은 것에 관심이 가게 됐고, 그게 오늘까지 왔어요.” 자질이 취미로, 취미가 평생의 업이 되었다는 소리다.
집에 있는 텔레비전, 라디오는 수십 번을 분해했다가 조립하고 망가뜨렸다. 엄마는 그런 아들이 못 마땅해서 셀 수 없이 야단을 쳤다. 한번 ‘필’ 꽂힌 아들, 야단으로 되겠는가. 어쩌다 돈이 생기면 냉큼 청계천으로 달려가 중고 부품을 사서 앰프를 만들곤 했다. 군대를 갔다 와서 아들 이광수는 서울 오류동에 가전제품 대리점을 내고, 대놓고 음악을 듣고 앰프를 만들기 시작했다.
“잘 될 때는 트럭 3대를 굴리면서 장사를 했어요. 주택가 돌아다니며 TV며 라디오 팔고 다녔죠. 대리점에 돌아와서는 사무실에 음악 틀어놓고, 진공관 뺐다 꽂고 하며 앰프를 만들었고요.” 자작한 앰프로 음악을 듣고, 개중에는 아는 사람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다. 훗날 세기가 바뀌어 용산에 이연구소를 차린 이광수에게 누군가가 와서 말했다. “당신이 70년대에 만든 앰프가 흘러 흘러 나한테까지 왔는데, 지금도 잘 듣고 있다”라고. 흐뭇했다.
그런데 성에 차지가 않았다. 텔레비전 팔아먹는 인생이지만, 텔레비전 만들면서 들었던 고품질의 음악이 귓전을 날아다녔다. 결국 1977년 이광수는 대리점을 때려치우고 인천 인현동에 음악감상실을 만들었다. 이름은 ‘콘체르트’.
대놓고 음악을 듣고 돈도 벌게 되었으니 좋았고, 기존에 만들어놓은 앰프를 감상실에 놓고 그 앰프로 음악을 틀었으니, 앰프 테스트하기에도 좋았다. 그때 다니던 교회에서 음악 좀 안다는 이광수에게 성가대 지휘를 맡겼다. 그래서 지휘를 하기 위해서 더 열심히 음악을 들었다. 그때 사귄 베르디와 베를리오즈 작품들은 지금도 즐겨 듣는 곡들이다.
3년 동안 감상실을 운영하며 앰프를 만들었는데, 또 성에 차지 않았다. 자작(自作)에 만족하는 아마추어의 삶은 그가 원하던 삶이 아니었다. 결국 이광수는 음악감상실까지 처분해버리고 1982년 부천에 아예 앰프 공장을 차려버렸다. 이름은? ‘이연구소’.
무슨 무슨 복잡한 브랜드는 싫었다. “나는 기술자니까, 소리를 연구하는 기술자니까 더 좋은 이름이 뭐 있을까, 뭐 그랬다.” 한 건물 지하 30평 공간에 작업실 차려놓고 직원 4명과 앰프를 만들었다. 국내 최초의 진공관앰프 제작사였다. 지금은 쇠락했지만, 이게 커져서 몇 년 뒤에는 100평 규모에 직원 25명이 있는 중견 기업으로 자랐다. 이광수는 음악의 핵심을 향해 다가갔다.
감정을 전하는 생명체, 진공관
이미 80년대 초반에는 국민소득이 증가하면서 오디오 시장이 커가고 있었다. 태광, 인켈, 아남 등 대기업들이 트랜지스터 앰프를 제작하고 있었고, 외국 제품들도 대거 수입되고 있던 와중이었다. 그런데 그는 진공관을 고집했다. 왜?
“일단 50년대에 내가 배운 것이 진공관이라 쉬웠고, 트랜지스터 앰프는 반응이 제깍제깍 와요. 소리가 쉴 틈이 없죠. 그런데 소리라는 것이 귀로 듣는 거지, 기계로 듣는 게 아니거든. 기계는 귀로 듣는 소리를 충실하게 재현해주면 되는 거죠. 그런 면에서는 진공관이 트랜지스터보다 훨씬 나아.” 디지털 시대에 LP판을 비롯한 아날로그적 감성이 이어지고 있는 가장 큰 이유다. 그가 덧붙인다. “30와트짜리 진공관 앰프랑 30와트짜리 트랜지스터 앰프로 들으면 진공관 음이 더 풍부해요. 물리적인 품질은 뒤질지 모르지만, 적어도 귀로 느끼는 감정은 그래. 소리 밀도(임피던스)가 높다는 이야기지. 이건, 말로 설명 못해요. 직접 들어봐야지.”
선율은, 전기신호가 아니다. 바이올린의 유장한 현음, 트라이앵글의 금속 파열음, 가죽과 가죽이 부딪히는 팀파니의 북소리가 전기신호로 녹음이 되어 다시 현음과 파열음과 북소리로 부활해 고막을 때려야 하는 것이다. 한번 예열하는 데만 5분, 15분이 걸리는 ‘느린’ 진공관은 그 선율을 부활시키는 데 훨씬 좋은 도구라고 이광수가 말했다. “근데, 리듬을 즐기는 팝음악은 반응이 빠른 트랜지스터가 좋더라”고 덧붙였다.
이광수가 말하는 진공관의 상대우위, 또 있다. “에이징(aging)이라는 게 있습니다. 진공관은 사람처럼 늙어요. 맛이 가는 게 아니라 세월의 흔적이 소리에 남는 거죠. 사람이 늙으면서 지혜가 생기듯, 같은 진공관도 세월이 농축되면서 더 깊은 소리를 내게 되는 거예요.” 이쯤 되면 진공관은, 생물(生物)이다.
100년 가는 앰프를 위하여
고급 앰프에 목말라하던 오디오 마니아들이 이연구소에 몰려들었다. 마란츠, 매킨토시 같은 세계적인 진공관앰프는 비싸도 너무 비쌌다. 디자인은 떨어지지만 음질에서는 이들에 버금가거나 가끔은 능가하기도 하는 이연구소 앰프가 출시되면서 당시 세운상가에 있던 서울사무소는 마니아들의 사랑방이 됐다. 그때 오디오 전문잡지들을 찾아보면 이광수가 쓴 진공관 앰프 제작 논문이 여럿 실려 있다.
이연구소의 앰프를 사가고 세월이 지나면, 마니아들은 응용을 시작한다. 멀쩡한 진공관을 뽑아내 자기 마음에 드는 진공관을 사다 끼우기도 하고, 위치를 바꾸기도 한다. “트랜지스터 앰프가 꽃밭에 있는 꽃이라면, 진공관 앰프는 꽃꽂이죠. 납땜해 놓은 게 아니니까, 자기 마음에 들 때까지 뺐다 끼웠다 하면서 완성을 볼 수 있으니까.”
그래서 진공관앰프는 “부서지기 전까지는 절대 버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말했다. “내 앰프가 100년 간다는 생각으로 만듭니다. 자동차야 10년 지나면 용도 폐기되지만, 오디오야 아무리 고물이고 깨져도 소리가 나면 안 버리잖아요. 지금도 20년 전 앰프 가져오면 고쳐주죠. 그게 보람이에요.” 그런데 돈이 되지 않는 것이다. 도대체 로봇 태권 브이처럼 천하무적인데다가 마니아들이 새 앰프 살 생각은 않고 자기 입맛대로 앰프를 개조해 10년이고 20년이고 사용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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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공관 앰프 / 박종인 기자
이광수가 말했다. “내가 진작 70년대부터 앰프 만드는 데 뛰어들었으면 지금 진짜 부자가 됐을 것”이라고. 그럼 돈을 못 버셨다는 말씀인지. 허허, 하고 웃으며 그가 말한다. “이상하게 떼먹힌 게 많아서….”
이광수는 기술자, 엔지니어다. 유통과 영업은 그의 전문분야가 아니다. “좋은 소리 만드는 게 좋다 보니 그 이후는 업자들에게 맡기는 거고, 그러다 보니.” 젊디 젊은 외모의 칠순 장인 입에서 인생 달관한 말이 선율처럼 흘러나온다. 그럼 요새는 한달에 얼마나 버시나요? 씩, 하고 웃더니 그가 짧게 대답했다. “음, 그건 비밀이고요.”
혼자 걸은 오솔길이 어느덧 대로로
모든 오솔길은 계속 걸으면 대로로 변한다. 50년을 소리와 더불어 산 장인의 발걸음이 어느덧 대로로 향하게 되었다. 당신의 인생 철학은? 하고 물었다.
“어려운 이야긴데…, 그런 거는 내가 얘기하면 교만할 거 같고…. 나중에 이걸 하면서 만난 사람들이랑 여러 관계들을 정리할 때쯤에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참 다른 이야기를 물었을 때, 그의 ‘인생 철학’쯤 되는 말이 튀어나왔다.
“나, 게을러요. 게으른데, 이 일에 대해서는 게으르지가 않아요, 절대로. 흔히 말하는 일 중독증이 있어요. 아, 물론 내가 이 일을 좋아하니까 그리 했지.”
철학이라는 게 뭐 거창한 건가. 게으르지 않기. 자기의 오솔길을 한없이 걸어서 큰길로 만들기, 그게 이광수의 철학이 아닌가. 게으르지 않는 기술자 이광수가 꿈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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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0년 동안 소리를 만들어온 이광수, 작업실에서 /박종인 기자
“아직은 없는데, 금년 가을 정도 되면, 아주, 내가 세계에서 최고 좋은 앰프를 만들 겁니다. 일생에 이거 하나 만들고 끝내려고요. 정말 좋은 앰프 하나. 공연장에서는 들리지 않던 소리가 내 앰프로 들으면 들리는 그런 앰프. 물건 만드는 거는 내가 이걸로 끝을 맺을라고 합니다. 아, 나뿐 아니라 남이 들어서 최고라고 평가할 거라는 거까지 합쳐서.”
세계 최고의 앰프 만들고 내 인생 끝
영민하게 생긴 젊은 이광수가 눈을 반짝이더니 사무실 맞은편 선반으로 간다. 선반 위에는 미완의 앰프가 하나 놓여 있다. 옆에 있는 CD플레이어에 베를리오즈의 곡을 걸고서 이 앰프의 볼륨을 높인다. 뒤에 있던 거대한 스피커에서 선율이 흐르기 시작하더니 팀파니가 두드려대는 부분에서 갑자기 내 등 뒤에 있던 철문이 부르르 떨어대는 게 아닌가. 그 초저음, 가청주파수 바깥에 있는 진동을 이 앰프가 잡아내서 내 몸을 관통해 등 뒤 문까지 울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오케스트라 단원 80명이 연주를 하면 소리가 뭉쳐서 나오지요. 연주장에서도 잘 안 들리는데 오디오에서 구분이 되겠어요? 그걸 하나하나 분리해서 또렷하게 들리게 재생한다는 건, 참, 불가능한 일인데, 그걸 해보고 싶소. 연말까지.”
오디오에 대해서도, 음악에 대해서도 일자무식인 내가 그의 말을 100% 이해했을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지금도 분명한 것은, 마치 스피커 뒤에 초대형 오케스트라가 숨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들리지도 않는 초저음의 타악 소리가 내 가슴을 흔들고 굳게 닫힌 철문을 사정없이 흔들어댔다는 사실이다.
첫댓글 진공관 을 통한 소리의 창조자 를 만날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