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10월이 벌써 중순이네요.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 하죠. 그런 의미에서 책을 추천하지 않고 그냥 지나간다는 건 안 된다는 말씀.
특히 점자문헌정보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는 더 안 된다는 거죠. 그래서 책을 권하려고 합니다.
도서명: 속죄의 소나타
저자: 나카야마 시치리
* 이 소설은 아이프리 도서관 9번 문학에 3번 추리 부문에서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 소개글 서평
‘나카야마 시치리’란 작가는 내게도 친숙하다. ‘우라와의대 시리즈’로 통칭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히포크라테스 우울을 읽었기 때문이다. 물론 서평도 남긴 바 있다.
어쩌면 낯익은 이름 탓에 ‘속죄의 소나타’를 선뜻 다운받았는지도 모른다. 나중에야 알았는데 이 작품은 ‘추억의 야상곡’으로 이어지는 시리즈물이란다. ‘미코시바 변호사 시리즈’로 지칭된다고 한다.
물고 물리며 반전에 반전으로 진행되는 속죄의 악장
주인공은 ‘미코시바 레이지’라는 중년 변호사이다. 그는 법조계에서, 또 범죄계에서 퍽 유명하다.
검찰은 일단 미코시바가 변호사로 떴다고 하면 욕부터 한다. 의뢰인이 어떤 죄를 저질렀든, 심지어 살인이라도 무죄 내지는 최소 집행유-예를 만들기 때문이다. 경찰이 고생고생해서 수사해 검사가 이를 벅벅 갈며 선고한 형량을 엎어버리니 미운털이 박힌 건 당연하다.
한편 범죄자는 그가 사건 수임을 하면 일단 안도한다. 그리고 나중에는 아파오는 속을 붙잡고 우거지상이 된다. 무죄방면 혹은 집행유-예를 받아내는 대신 고객의 돈을 최대한 많이 뜯어가기 때문이다.
어느 쪽으로든 악명 자자하고 능력 또한 출중하다. 그러한 미코시바가 돈도 안 되는 피해자의 살인사건 국선 변호인을 맡았다.
거액의 보험금이 걸려 있다지만, 또 세간의 주목을 받는 사건이라지만, 평소 그의 행보와는 영 딴판이다. 게다가 피해자의 상황도 좋다고 말할 수 없다. 막대한 보험료를 노리고 남편의 인공호흡기를 뗐다는 의혹에 휩싸인 아내, 도조 미스코. 그런 그녀에게는 왼손밖에 자유로이 쓸 수 없는 장애인 아들, 도조 미키아가 있다. 여론도, 평가도, 검찰의 관점도, 재판부의 견해도, 뭐 하나 선뜻 뒤집기 어려운 현실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변 이목에는 아랑곳없이 미코시바 레이지는 차근차근 변론 준비를 시작한다. 그런 미코시바를 요주의 인물로 지켜보는 시선이 있다. 그들은 바로 와타세와 그의 파트너 고테가와 형사 일행이다. 왜냐, 미코시바 레이지가 살인으로 의심되는 시체 유기 사건에 유력 용의자기 때문이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밤, 옷이 몽땅 벗겨진 채 강에 유기된 시체, 그는 프리랜서 기자 가가야 류지였다. 그런데 범인은 왜 옷을 벗겼을까? 피해자의 신원을 감추기 위해서? 그렇다면 얼굴을 훼손하면 그만이다. 미국 추리 소설이라면 지문이니 뭐니 해서 손가락을 어떻게 처분했을 테고. 이 의문은 나중에 중요한 실마리가 되니 기억하는 게 좋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시체 유기의 범인은 첫 장에서부터 밝혀진다. 책은 미코시바 레이지가 시체를 운반해 강물에 던지는 장면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사실 본인은 그 장면만 보고 ‘아, 이놈이 범인이구나. 이 놈은 나쁜 놈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중에 미코시바 레이지의 본명이 ‘소노베 신이치로’라는 것, 그가 겨우 14살 때 순전히 죽여보고 싶어서 5살 아이를 죽인 살인자라는 것, ‘시체 배달부’라고 불렸다는 것이 밝혀지고 나서는 고테가와 형사와 와타세 형사를 열렬하게 응원했다. 속죄는 무슨, 이놈은 속죄하게 만들어야 하는 놈이잖은가.
한편 형사 일행 외에 미코시바를 예의 주시하는 이목이 또 있다. 야스타케 사토미, 미코시바 레이지 때문에 자신의 아들이 자살을 선택했다 믿는 왕따 피해자의 어머니. 과연 그녀의 목적은 무엇일까?
어쨌든 강가 시체 유기 사건과 현재 신문의 1면을 장식하는 보험금 사건, 일명 도조 미스코 사건이 ‘미코시바 레이지’라는 인물로 연결되면서 이야기는 급물살을 탄다. 병실에서 사망한 남편, 그의 사인은 무엇일까? 기계 오작동으로 죽은 것인가. 아니면 보험금을 노린 부인에 의한 의도적인 살해인가. 강가에 유기된 시체, 그를 죽인 인물은 누구인가? 미코시바 레이지인가. 아니면 제3의 인물인가. 과연 미코시바 레이지는 속죄의 길을 걷고 있는 인물인가?
“사법고시는 말이지, 인격은 상관없어. 어때, 재미있지 않냐? 곤경에 처한 사람 돕는 일일 텐데 인간성은 고려하지 않는다 이 말이야.”
변호사가 주인공이니만큼 법정신은 뺄 수가 없다. 논리 정연하게 자신이 반박해야 할 부분에서 적절히 치고 빠지는 센스, 하나하나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한방에 다 허물고 그 위에 다시 새로운 것을 얹는 형태의 변호사이자 승부사 주인공.
이렇게 말하니 미코시바가 멋진 인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질이 좋지 않다. 글속에서 미코시바는 죄가 발각되어 법의 심판을 받으면서도, 소년원에 들어가서도, 그에게서는 죄책감도, 갱생을 위한 의지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런 그가 20년 후에 변호사가 되어 활동하고 있다. 그것도 악명이 자자한 변호사가 되어서. 돈 있는 사람들에게서 거액의 수입료를 거둬들이며 승소를 위해서 약간의 편법도 마다하지 않는 미코시바. 따지자면 회색이요, 더 깊이 들어가자면 하얀 회색보다는 검은 회색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소설을 읽다 보면 ‘미코시바’라는 인물을 규정하기가 좀 난해할 때가 종종 있다. 과연 악인은 선해질 수 있을까? 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들어간 사람이 변화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교정을 받고 감화를 거쳐 그들이 교화되고 결국 선해지리라고 믿어줘야만 하는 것일까?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옛말도 있지만 아무래도 쉽게 여겨지지는 않는 일이다. 오히려 교도소에서 다른 범죄자와의 교류를 통해 더욱 진화해 사회의 골치가 되는 놈들도 분명 있다. 소년원에서 만난 라이야의 말마따나 사법시험은 인성 평가를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어떤지 몰라도 적어도 일본은 그렇단다. 그래서인가, 책을 읽으면서 계속 생각하게 된다. 사람은 정말 바뀔 수 있을까? 아니, 살인자는 정말 바뀔 수 있을까? 살인자가 선해진다는 게, 최소한 진심으로 선한 행동을 한다는 게 가능할까?
어딘가 심히 수상쩍은 미코시바를 보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일까 끊임없이 저울질했다. 선인인지 악인인지 알 수 없는 미코시바뿐 아니라, 사건을 파헤치며 노련한 수사를 펼치는 와타세와 그의 파트너 고테가와, 그리고 소년원 시절 미코시바의 교관이었던 이나미 등의 캐릭터들도 매력적이라 더욱 흥미로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점점 드러나는 여러 사실들과, 이러한 사실들의 끝에 마주하게 되는 의외의 진실이 가장 쇼킹했다.
“이유가 뭐든 사람 하나를 죽였으면 그 녀석은 이미 악마다. 법이 용서해도, 세상 사람들이 잊어도,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아. 악마가 도로 사람이 되려면 계속해서 속죄하는 수밖에 없는 거다. 죽은 사람 몫까지 열심히 살아라. 절대로 편한 길을 택하지 마라. 상처투성이가 돼서 진흙탕을 기어 다니면서 고민하고, 방황하고, 괴로워해라. 자기 안에 있는 짐승을 외면하지 말고 끊임없이 싸워라.”
소설은 전체적으로 소나타의 구성을 따른다. 예전 중등 음악시간에 악곡 구성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그 흐릿한 기억을 더듬자면, 소나타는 한 주제에서 2개 정도의 다른 주제가 갈라져 나오고, 그 상태로 한동안 진행되다가 다시 합쳐지는 구성이라고 한다. 물론 순전히 본인 기억에 의존한 거라 전문가가 본다면 ‘이건 아닌데?’ 싶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소설은 적어도 내 기억이 얼추 맞는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내용 구성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속죄의 소나타’라는 제목에 힌트를 얻어 이 이야기를 음악에 비유한다면 느림, 빠름, 느림, 빠름으로 이루어진 4악장의 교회 소나타로 연주되는 소설이라고 볼 수 있겠다. 왜 하필 교회인가 하면, ‘속죄’라는 말 때문에 연상이 된 것 같다. 제1악장 ‘죄의 신선도’는 느리지만 장엄하게, 살해된 자의 신원이 드러나면서 사건과 또 다른 사건이 서로 맞물려 들어가는 제2악장 ‘벌의 발소리’는 독주하는 악장처럼 빠르게, 과거로 돌아가 사건 속의 사건,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잇는 제3악장 ‘속죄의 자격’은 숨을 고르며 한 템포 느리게, 반전의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4악장 ‘심판받는 자’는 몰아치는 듯한 빠른 리듬 속에 결말을 향해 질주한다.
사실 개인적으로 1악장과 3악장이 제일 읽기가 벅찼다. 느림, 느림의 성향이라 그런가, 조금 지리하다 싶은 감이 있었다. 그러나 3악장이 이야기 구성에서 꼭 필요한 대목이라는 건 인정한다. 게다가 소나타답게 반전의 반전, 반전의 반전이 거듭되고, 이야기는 결말이 아닌 또 다른 사건을 암시하며 끝난다.
사실 미스코가 범인인가 아닌가, 이 문제만 생각하고 있어서 막판에 밝혀진 진실이 더 쇼크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미코시바가 어쩐지, 조금은 애처롭게 보인다는 생각도 했다.
이 소설은 법정 공방뿐 아니라 제목이 시사하는 바처럼 ‘속죄’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 간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속죄는 아무 이유 없이 여아를 죽인 미코시바의 죄만이 아닌 것 같다. 기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속죄에서 자유로운 인물이 거의 없다. 협박을 일삼다 살해당한 가가야, 트럭 사고로 의식불명이 된 남편을 보험금을 노려 살해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도조 미쓰코, 선천성 뇌성마비로 태어난 미키야, 나쁜 놈들을 변호하는 미코시바 때문에 자신의 아들이 자살을 선택했다고 믿는 사토미, 모두 죄와 속죄의 굴레 속에 있다.
문제는 각자 자신이 ‘정의’의 기준이 될 때이다. 자신이 가진 정의의 기준으로는 누구도 심판할 수 없다. 선과 악의 경계에 선 ‘미코시바’가 그 증인이다. 그럼에도 그가 법정에 서는 이유는 하나, 속죄할 기회를 얻기 위해, 누군가가 끝에 끝에서 내미는 손을 잡아 그에게 혹시나 찾아올지 모를 ‘속죄’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책은 속죄란, 후회가 아니라고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속죄를 하려면 후회가 아니라 행동으로 보상을 해야 한다고 말이다.
“전에도 말한 적 있지. 후회 따위 하지 마라. 후회해 봤자 과거는 수복되지 않아. 사죄도 하지 마라. 잘못을 아무리 빌어도 잃어버린 생명이 돌아오는 건 아니다. 대신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러.”
왠지 머릿속에 남는 이나미의 말이다. 솔직히 미코시바 다음으로 가장 선호하는 인물이다. 이 책의 등장인물이 죄와 속죄의 굴레 속에 있는 인간들이라는 점에서, ‘속죄의 소나타’는 우리 삶의 비극의 한 토막을 연주하는 슬픈 음악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와타세 반장과 고테가와 콤비가 좀 더 활약을 했더라면 훨씬 더 흥미진진한 법정 수사 추리극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와타세, 노련한 사냥개 포스를 풍기면서도 화략이 적은 것 같아 섭섭하다.
좌우간 소설을 덮은 후에도 여전히 궁금하다. 과연 진정 악인이 변할 수 있는지. 참회와 속죄가 가능할지.
‘속죄의 소나타’, 마지막까지 반전을 선물하는 작가의 이야기 덕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었다. 그러나 주제가 주제인 만큼, 또 인물이 인물인 만큼 답답함은 어쩔 수 없다. 통쾌한 활극을 원하는 독자라면 조금 꺼릴 수도 있겠다.
앞서 말했듯, 이 책은 시리즈물로, ‘추억의 야상곡’으로 연결된다. 그 작품도 아이프리에 올라와 있다. 사실 ‘속죄의 소나타’를 진작에 보긴 했다. 그러나 다운은 받았어도 바로 읽지는 않았다. 시리즈 2탄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느라고 그랬다. 그리고 ‘추억의 야상곡’이 올라오고 시리즈 1~2를 죄다 독파해 버렸다. 참고로 미코시바 시리즈 3탄 ‘은수의 레퀴엠’은 아직이다. 전자도서로 언제 제작될까? 시리즈니까 언제고 등록될 것 같지만 영 기미가 없으면 신청이라도 해볼 거다. 어쨌든 다음 감상은 시리즈 2부인 ‘추억의 야상곡’으로 찾아올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