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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진)나라
周(주) 왕실과 동성인 姬(희)성 제후로 작위는 후작이었으며 동천 이전 분봉 초기부터 魯
(노), 宋(송)나라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중원의 대제후 중 하나였다. 시조는 唐叔 虞(
당숙 우)로 아주 어릴 적에 주 성왕이 소꿉놀이를 하면서 동생 희우에게 흙과 풀로 작위
를 내린 걸 사관이 보고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장성한 후에 어쩌지 못하고 영지를 수여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희우는 진나라의 시조로서 당숙 우라고 불린다.
춘추시대
晉(진) BC, 1042〜BC, 349) 위치: 산서성(山西省) 성씨: 姬(희) 작위: 후작
| 대수 | 재위기간 | 위 | 휘 | 관계 | 수도 | 현재지명 |
| 제1대 | BC, 1042〜BC, 739 | 唐叔(당숙) | 叔虞(숙우) | 무왕의 삼남 | 唐 | 산서성 |
| 제2대 | 晉侯(진후) | 燮(섭) | 당숙의 아들 | (당) | ||
| 제3대 | 武侯(무후) | 寧族(영족) | 진후의 아들 | |||
| 제4대 | 成侯(성후) | 服人(복인) | 무후의 아들 | |||
| 제5대 | BC, ?〜BC, 859 | 厲侯(여후) | 福(복) | 성후의 아들 | ||
| 제6대 | BC, 858〜BC, 841 | 靖侯(정후) | 宜臼(의구) | 여후의 아들 | ||
| 제7대 | BC, 840〜BC, 823 | 釐侯(희후) | 司徒(사도) | 정후의 아들 | ||
| 제8대 | BC, 822〜BC, 812 | 獻侯(헌후) | 蘇(소) | 희후의 아들 | ||
| 제9대 | BC, 811〜BC, 785 | 穆侯(목후) | 費王(비왕) | 헌후의 아들 | ||
| 제10대 | BC, 784〜BC, 781 | 殤叔(상숙) | 家父(가보) | 목후의 동생 | ||
| 제11대 | BC, 780〜BC, 746 | 文侯(문후) | 仇(구) | 목후의 아들 | ||
| 제12대 | BC, 745〜BC, 739 | 昭侯(소후) | 伯(백) | 문후의 아들 | ||
| 제13대 | BC, 738〜BC, 724 | 孝侯(효후) | 平(평) | 소후의 아들 | ||
| 제14대 | BC, 723〜BC, 718 | 卾侯(악후) | 郤(극) | 효후의 아들 | ||
| 제15대 | BC, 717〜BC, 709 | 哀侯(애후) | 光(광) | 악후의 아들 | ||
| 제16대 | BC, 708〜BC, 705 | 小子侯(소자후) | 애후의 아들 | |||
| 제17대 | BC, 704〜BC, 678 | 晉侯(진후) | 緡(민) | 애후의 아우 | ||
| 곡옥 | BC, 744〜BC, 731 | 桓叔(환숙) | 成師(성사) | 문후의 아우 | ||
| 곡옥 | BC, 730〜BC, 716 | 莊伯(장백) | 鱓(선) | 환숙의 아들 | ||
| 곡옥 | BC, 715〜BC, 677 | 武公(무공) | 稱(칭) | 장백의 아들 | ||
| 제18대 | BC, ? | 武公(무공) | 稱(칭) | 장백의 아들 | ||
| 제19대 | BC, 676〜BC, 651 | 獻公(헌공) | 詭諸(궤제) | 무공의 아들 | ||
| 제20대 | BC, 651 | 奚薺(해제) | 헌공의 아들 | |||
| 제21대 | BC, 651 | 悼子(도자) | 헌공의 아들 | |||
| 제22대 | BC, 650〜BC, 637 | 惠公(혜공) | 夷吾(이오) | 헌공의 아들 | ||
| 제23대 | BC, 637〜BC, 636 | 懷公(회공) | 圉(어) | 혜공의 아들 | ||
| 제24대 | BC, 636〜BC, 628 | 文公(문공) | 重耳(중이) | 헌공의 아들 | ||
| 제25대 | BC, 627〜BC, 621 | 襄公(양공) | 歡(환) | 문공의 아들 | ||
| 제26대 | BC, 620〜BC, 607 | 靈公(영공) | 夷臯(이고) | 양공의 아들 | ||
| 제27대 | BC, 606〜BC, 600 | 成公(성공) | 黑臀(흑둔) | 양공의 아우 | ||
| 제28대 | BC, 599〜BC, 581 | 景公(경공) | 據(거) | 성공의 아들 | ||
| 제29대 | BC, 580〜BC, 573 | 厲公(여공) | 壽曼(수만) | 경공의 아들 | ||
| 제30대 | BC, 572〜BC, 558 | 悼公(도공) | 周(주) | 양공의 손자 | ||
| 제31대 | BC, 557〜BC, 532 | 莊平公(장평공) | 彪(표) | 도공의 아들 | ||
| 제32대 | BC, 531〜BC, 526 | 昭公(소공) | 夷(이) | 평공의 아들 | ||
| 제33대 | BC, 525〜BC, 512 | 頃公(경공) | 去疾(거질) | 소공의 아들 | ||
| 제34대 | BC, 511〜BC, 475 | 定公(정공) | 午(오) | 경공의 아들 | ||
| 제35대 | BC, 474〜BC, 452 | 出公(출공) | 鑿(착) | 정공의 아들 | ||
| 제36대 | BC, 451〜BC, 434 | 哀公(애공) | 驕(교) | 소공의 증손 | ||
| 제37대 | BC, 434〜BC, 433 | 幽公(유공) | 柳(유) | 애공의 아들 | ||
| 제38대 | BC, 433〜BC, 416 | 烈公(열공) | 止(지) | 유공의 아들 | ||
| 제39대 | BC, 415〜BC, 389 | 孝公(효공) | 頎(기) | 열공의 아들 | ||
| 제40대 | BC, 388〜BC, 357 | 靜公(정공) | 俱酒(구주) | 효공의 아들 |
주 성왕 시대에 당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 주공 희단이 당나라를 멸하고 그곳을 주
성이 봉지로 주어 당나라의 군주가 되었다고 한다.
제1대 당 숙우(BC, ?〜BC, ?) 周 武王(주 무왕)의 삼남이며, 成王(성왕)의 아우이다.
어머니는 邑姜(읍강)이며, 자는 子於(자오)이다.
제2대 진후(BC, ?〜BC, ?) 당 숙우의 아들이다
진후 섭이 뒤를 이으면서 국호가 당에서 진나라로 바꿔었는데, 그 이유는 진후 대
에 晉水(진수)유역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제3대 진 무후(BC, ?〜BC, ?) 진후 섭의 아들이며, 진 성후의 아버지
그가 죽자 아들 복인이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진 성후다. 시호가 확인되는 첫 진
나라 군주이다.
제4대 진 성우(BC, ?〜BC, ?) 진 무후의 아들이며, 진 여후의 아버지
기원전 860년에 진 성우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이 뒤를 이으니 그가 진 여후다.
제5대 진 여후(BC, ?〜BC, ?) 진 성후의 아들이며, 진 정후의 아버지
기원전 859년에 진 성후가 죽자, 그 뒤를 이었으나 그도 그 해에 죽었다. 그리고
그 뒤를 아들인 의구가 이으니, 그가 바로 진 정후다.
제6대 진 정후(BC, ?〜BC, 841) 진 여후의 아들이며, 진 희후의 아버지
진 여후 원년(기원전 858년), 아버지 진 여후가 죽고 그 뒤를 이었다. 진 정후 17
년(기원전 842년), 주 여왕이 폭정을 자행해 국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왕을 쫓아내
고 주 정공과 소 목공이 나라를 대신 다스리는 공화 시대 때 군주가 되었다.
진 정후 18년(기원전 841년), 진 정후가 사망하고 아들 사도가 뒤를 이었다. 그가
바로 진 희후다. 진 정후의 서손 난빈이 훗날 진나라의 유력가문인 圞氏(난씨)의
시조다.
제7대 진 희후(BC, ?〜BC, 823) 진 정후의 아들이며, 진 헌후의 아버지
진 정후 18년(기원전 840년), 아버지인 진 정후가 죽고 그 뒤를 이었다. 진 희후
14년(기원전 827년), 주나라의 중흥군주인 주 선왕이 즉위했다. 진 희후 18년(기
원전 823년), 진 희후가 죽고 그 아들인 희소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진 헌후다.
제8대 진 헌후(BC, ?〜BC, 812년), 진 희후의 아들이며, 진 목우의 아버지
주 선왕 13년(기원전 814년)인 진 헌후 9년, 주 선왕이 동쪽에 순수를 해 진나라
에 이르자 진 헌후는 병사를 거느리고 주 선왕의 명을 받들어 산동 지방의 오랑캐
들인 숙이족을 정벌하였다. 주 선왕이 진 헌후에게 명령하여, 2개 읍을 점령하게
한 뒤, 왕이 전장에 이르러 순수를 하였다. 진나라 군대는 대승을 거두었다. 본국
으로 돌아와 개선한 뒤, 주 선왕은 진 헌후의 공로를 치하해 향기로운 술, 활과
화살, 수레 끄는 말을 하사 했고, 그것을 받은 진 헌후는 매우 기뻐했다. 그리고는
즉시 공을 세운 이들에게 무서운 상을 내렸다. 주 선왕 15년(기원전 812년)인 진
후 11년, 진 헌후가 사망했고, 그 뒤는 아들인 비왕이 이으니 그가 바로 진 목후다.
제9대 목후(BC, ?〜BC, 785) 진 헌후의 아들이며, 진 문후의 아버지.
진 목후 4년(기원전 809년), 제나라 여자 강씨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진 목후 7년(
806년), 條(조)를 쳤으며, 태자 희구를 낳았고, 진 목후 10년(기원전 803년), 천무를
치는데 공을 세웠다. 그리고 같은 해에 희성사(姬成師)를 낳았다. 후일 진나라가 익
과 곡옥으로 갈라지게 된다, 진 목우 28년(기원전 785년), 진 목후는 죽었다. 동생인
희가보가 진나라 군주가 된다.
제10대 상숙(BC, ?〜BC, 780) 진 헌후의 아들이자 진 목후의 아우이다.
진 목후가 죽었을 때 원래 태자인 희구가 진후가 되어야 했으나 그가 희후를 몰아
내고 진후 자리를 빼앗으니 그가 바로 진나라의 군주인 진 상숙이다. 진 상숙 4년
(기원전 780년), 상숙이 힘을 기른 조카 희구의 습격을 받아서 축출당하고, 진 상
숙은 바로 죽었다. 그리고 희구가 진후가 되니 그가 바로 진 문후이다.
제11대 문후(BC, 805〜BC, 746) 진 목후의 태자.
진 문후는 진 목후의 태자였다. 그런데, 진 문후의 숙부인 진 상숙인 희가보가 진
목후가 죽자마자 정권을 탈취했다. 그러나 훗날 진 문후가 될 희구는 쫓겨난 동안
힘을 길러서 진 상숙 4년(기원전 780년), 상숙을 기습해 시해하고 진후 자리에 오
르니 그가 바로 진 문후다. 세월이 흘러 진 문후10년(기원전 770년), 周 幽王(주 유
왕)이 무도했다. 犬융(견융)이 침공해 주 유왕을 시해했다. 평왕이 즉위한다. 진 문
후는 그를 구원하기 위해 친히 병사를 거느리고 정 무공, 秦 襄公(진 양공)과 함께
평왕의 동천을 돕는 공로를 세운다. 그런데 이틈을 타서 다른 왕족인 姬余臣(희여
신)이 왕을 자칭하니 그가 휴왕이다. 그리하여 동주는 이분 된다. 秦 襄公(진 양공)
이 처음으로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진 문후 25년(기원전 757년), 진 문후는 韓(한)
나라를 쳐서 멸망시켰다. 진 문후 35년(기원전 746년), 진 문후는 사망하고 그 뒤
를 아들 희백이 즉위하니 그가 진후가 되었다.
제12대 소후(BC, ?〜BC, 739) 진 문후의 아들이며, 진 효후의 아버지
진 소후 원년(기원전 745년), 자신의 숙부인 희성사의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그 세력
이 두려워 희성사를 공옥의 백작에 봉했다. 희성사는 후세 사람들로부터 고옥환숙이
라 불리게 된다. 곡옥의 城邑(성읍)이 翼城(익성)보다 컸다. 익성은 진나라 도성이다.
성사가 곡옥에 봉해지자 桓叔(환숙)이라 불리었다. 진 소후 6년(기원전 739년), 진나
라의 대신 潘父(반보)가 곡옥환숙과 내통하여 진 소후를 시해하고 진나라의 수도인
익으로 곡옥의 환숙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진나라 백성이 이에 반발하여 군사를 일
으켜 곡옥환숙을 익에서 내쫓았다. 진나라 사람들은 진 소후의 아들인 희평을 진후
로 모시니 그가 바로 진 효후이다. 진 효후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반보를 주살했
다. 진 소후의 죽음은 곡옥대전의 시작에 불과했다.
제13대 효후(BC, ?〜BC, 724년) 진 소후의 아들이며, 진 악후의 형이다.
진 소후 6년(기원전 739년), 진 소후가 대부 반보에게 죽고 곡옥과 내통한 반보가
곡옥환숙을 맞이했으나 진나라 사람들은 곡옥환숙을 내쫓고는 희평을 진후로 모셨
다. 진 효후 15년(기원전 724년), 곡옥환숙의 아들인 곡옥장백이 진의 도성인 翼
(익)을 쳐서 진 효후를 살해했다. 그러나 진나라 사람들은 곡옥장백에게도 반발해
곡옥장백을 내쫓고 그 아우인 희극을 군주로 모시니 그가 바로 진 악후다.
제14대 악후(BC, ?〜BC, 718년) 진 소후의 아들이며, 진효후의 동생
진 효후 15년(기원전 724년), 진 효후가 곡옥장백에게 살해되자 진나라 사람들이
곡옥장백을 몰아내고 효후의 아우인 그를 즉위시키니 바로 진 악후이다. 《사기》
에 의하면 곡옥장백이 진 악후의 상을 틈타 翼(익)을 공격했으나 주나라 천자인
주 환왕이 曲沃(곡옥)을 쳐서 장백을 내쫓고는 공자 희광을 진후로 올리니 그가
바로 진 애후다. 다만 《춘추좌씨전》에서는 달리 전한다. 곡옥 장백은 刑(형)나라
鄭(정)나라와 연계해서 익을 쳤다. 주 환왕은 원병을 파견해서 곡옥을 도왔다. 결
국 압박을 견디지 못한 진 악후는 증나라로 달아났다. 후에 곡옥이 주나라에 반
기를 들자 주 환왕은 虢公(괵공)으로 하여금 곡옥을 치게했다. 그 틈에 진나라는
여유가 생겨 진 애후가 즉위했다. 진나라의 大夫 嘉父(대부 가보)는 진 악후를 악
땅으로 맞아들였다. 진 악후가 죽자 그에게 악후라는 시호를 주었다고 한다. 여담
이지만 곡옥 계열의 晉(진)나라가 아닌 진 문후 계열의 진나라의 최후의 군주인
진 후민이 곡옥무공에게 살해당한 설을 받아들일 경우 유일하게 곡옥의 군주에게
살해당하지 않는 유일한 진후가 된다.
제15대 애후(BC, ?〜BC, 710) 진 악후의 아들이며, 소자후의 아버지
진 애후 8년(기원전 710년), 곡옥의 백작이자, 진나라 통일의 주인공인 곡옥무공(진
무공)에게 분수 유역에서 패해 사로잡힌 뒤에 진나라 수도 익에서 그 아들 소자후
를 옹립하자 진 무공에게 살해당했다. 살해된 이유는 아마도 진 애후의 아들인 소
자후가 진나라 군주로 즉위해서 인질의 가치가 없어서라고 판단한 듯 싶다.
제16대 소자후(BC, ?〜BC, 705년) 진 애후의 아들
소자후 원년(기원전 709년), 곡옥의 무공이 한만을 보내 포로로 잡힌 진 애공을 죽
였다. 진 소자후 4년(기원전 705년), 곡옥의 모공이 진 소자후를 유인해 죽였다. 그
러자 주 환왕이 괵중을 보내 곡옥 무공을 치니 무공은 곡옥으로 퇴각했다. 주나라에
서 진 애후의 아우인 희민을 진후로 임명하니 그가 진후 민이다.
제17대 진후(BC, ?〜BC, 679년), 진 애후의 아우이다
진후 민 원년(기원전 704년), 周 桓王(주 환왕)은 진 무공 즉 곡옥무공을 翼(익)에
서 몰아낸 뒤 민을 진후로 세웠다. 그는 주나라와 괵나라의 원조를 받으며 나름대
로 선전했다. 진후 민 28년(기원전 679년), 결국은 익이 함락되어서 진, 즉 익나라
는 멸망했다. 곡옥무공은 진나라의 모든 보화와 기물을 周 釐왕(주 희왕)에게 뇌물
로 바쳤다. 주 희왕이 곡옥의 무공을 진나라의 군주로 임명하며, 제후로 삼았다.
참고로 이때 진후 민은 쫓겨났다고 한다. 일설에는 진 무공에게 살해되었다고도 한
다.
곡옥환숙(BC, 802〜BC, 731) 진 문후의 동생
곡옥의 초대 백작이며, 본명은 成師(성사)며 시호는 桓(환)이다. 진 문후위 동생이며
진 소후의 숙부였기 때문에 곡옥환숙이라 불린다. 곡옥환숙 5년(기원전 739년), 이
때는 성사가 백작이 된지 약 5년째 되는 해였다. 곡옥환숙 14년(기원전 731년), 곡
옥환숙이 죽었다. 그가 죽은 뒤 그 아들 선이 곡옥의 백작이 되니 그가 곡옥장백이
다.
곡옥장백(BC, ?〜BC, 716) 곡옥환숙의 아들이며 진 무공 즉 곡옥무공의 아버지
곡옥환숙 14년(기원전 731년), 곡옥환숙이 죽자, 그가 뒤를 이어 곡옥의 백작이 되
니 그가 바로 곡옥장백이다. 곡옥장백 7년(기원전 724년), 곡옥장백은 국력을 키워
진나라의 수도인 익을 쳐서 진 효후를 살해했다. 그리고 아버지 곡옥환숙처럼 진을
먹으려고 했으나, 진나라 사람들의 반발로 곡옥으로 되돌아갔다. 곡옥장백 13년(기
원전 718년), 진 아후가 죽은 상중을 틈타 익을 다시금 쳤으나 주 환왕이 곡옥장백
의 곡옥 당을 쳐서 곡옥장백은 수비에 급급해야 했다. 그리고 주나라 조정과 진나
라 사람들은 그 아들인 희광을 진후로 세우니 그가 진 애후다. 곡옥장백 15년(기원
전 716년), 곡옥장백이 사망했다.
제18대 무공(BC, ?〜BC, 677년) 곡옥장백의 아들이며, 진 헌공의 아버지
곡옥 무공이 재위 37년 때 君號(군호)를 바꾸었다. 진 무공은 진나라 도성으로 옮
겼다. 전에 곡옥에서 즉위한 것을 합쳐 총 38년이 된다. 진 무공 칭은 진 목후의
증손이고 곡옥환숙의 손자다. 환숙이 곡옥에서 처음으로 봉작을 받았다. 진 무공은
곡옥장백의 아들이다. 곡옥환숙이 곡옥에서 봉작을 받을 때부터 진 무공이 진나라
를 멸망시킬 때까지 도합 67년이 걸렸다. 이때 비로써 진나라를 대표하는 제후가
된 것이다. 진 무공은 나라를 대표한지 2년만에 죽었다. 곡옥에서 있을 때부터 합
산하면 제위 39년이 된다.
제19대 진 헌공(BC, ?〜BC, 651) 진 무공의 아들이며 공자 중이의 아버지.
그는 즉위전 당시 춘추오패로 군림하던 제 환공의 딸인 齊姜(제강)과의 혼인이 약조
되었으나 아버지인 진 무공이 차지해버렸다. 하지만 진 무공은 이미 늙어 제강을 제
대로 데리고 있을 수 없어 원래 혼인하기로 한 그와 정을 통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
에게서 장남 신생을 얻는다. 그리고 적족 여자인 狐姬(호희)와 결혼하여, 훗날 진 문
공이 되는 중이를 얻었다. 진 헌공 원년(기원전 676년), 진 헌공은 진 무공의 뒤를
이어 진후가 되었다. 진 헌공 5년(기원전 672년), 이때는 진 헌공이 곡옥의 공족들
을 숙청하여 자신의 권위를 다지기 전이라서 먼저 기초를 쌓기 위해 이민족 정벌
에 나섰는데, 麗戎(여융)을 정벌해 여희와 여희의 여동생을 얻은 뒤 두 여인을 총
애했다. 진 헌공 7년(기원전 670년), 유씨의 자손들을 제거했다. 진 헌공 8년(기원
전 669), 史蔿(사위)의 설득을 받아 공족들을 숙청하고 聚(취) 땅에 성을 쌓아 그
이름을 絳(강)이라 했다. 진 헌공 9년(기원전 668년), 공족들을 숙청한 사위의 공
을 기려 그를 사공에 봉했다. 같은 해에 공족들 중 이룹가 괵으로 달아나자 괵공
은 이들의 원수를 갚아준다는 명분으로 진을 공격했으나 진 헌공은 이들을 능히
막아냈다. 진헌공 10년(기원전 667년), 괵나라의 행위에 분노한 진 헌공은 괵을
치려 했으나 사위가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한편 극숙호(郤叔虎)라는 자가 적사국의
어지러움을 사위를 통해 토로하자 괵나라 대신에 적사를 쳐서 이겼다. 진 헌공 12
년(기원전 665년), 진 헌공은 여희에게서 아들인 희해제를 보게 되었다. 진 헌공 1
6년(기원전 661년), 진 무공이 1군을 허락받은 후 처음으로 2군을 창설하여, 상군
은 자신이, 하군은 자신의 태자 신생에게 주었다. 그리고 신생에게 명하여 霍(곽),
耿(경), 魏(위)를 정벌하고 경나라 땅은 조숙에게, 위나라 땅은 필만에게 주었다. 그
런데 그 해에 가뭄이 들었으므로 곽나라 군주였던 곽공 구를 불러 곽나라의 제사를
다시 잇도록 했다. 진 헌공 17년(기원전 660년), 신생에게 북적인 고락씨를 치게해
그들을 직상 땅에서 격파했다. 진 헌공 19년(기원전 658년), 모사인 筍息(순식)에게
명해 굴읍에서 난 명마를 虞(우)나라에게 바치고 길을 빌리려고 했는데 우나라의
대부인 궁지기가 순망치한을 말하며 반대했으나 우나라 군주는 듣지 않고 뇌물에
혹해 들어주었다. 그리고 진 헌공은 괵을 멸한 뒤 복귀하는 길에 우나라도 멸하였
다. 이것이 바로 假道滅虢(가도멸괵) 일명 借道滅虢(차도멸괵)의 어원이다. 그리고
우공과 그의 대부 井伯(정백)과 百里奚(백리해)를 포로로 잡아 헌공의 딸인 秦穆姬
(진목희)의 몸종으로 삼았다. 진 헌공 21년(기원전 656년), 신생은 친어머니인 제강
의 제사를 지내고 그 고기를 부친인 헌공에게 바쳤다. 그런데 여희는 헌공이 사냥
나간 사이에 독을 치고, 헌공이 오자 그의 눈 앞에서 개에게 먹여 개가 죽는 것을
보여주었다. 헌공이 크게 노하여 태부 두원관을 사형에 처하고 신생에게 자결을 명
했다. 진 헌공 22년(기원전 655년), 진 헌공은 중이를 죽이라고 명한다. 중이는 진
헌공이 보낸 자객 발제에게 소맷부리가 잘리지만 겨우 살아서 적나라로 달아났다.
진 헌공 23년(기원전 654년), 진 헌공은 희이오마저 죽이려 하니 희이오는 외가인
梁(양)나라로 달아났다. 그리고 그해 법령을 만들어 국내에 공적을 남겨두지 못하
게 했다. 진 헌공 26년(기원전 651년), 진 헌공이 병이 중하자 순식에게 해제를 맡
겼다. 이해 가을 진 헌공이 죽었다. 이극이 진 헌공의 장례를 지내는 곳에서 해제
를 죽였다. 순식이 곧 도자를 옹립한 뒤 진 헌공의 장례를 치렀다.
제20대 해제(BC, ?〜BC, 651) 진 헌공의 아들이며, 진 문공, 진 혜공의 이복형
여희의 소생으로 태자 신생, 진 문공, 징 혜공의 이복동생이다. 헌공은 여희에게서
해제를 얻었고, 여희의 여동생에게서 탁자를 얻었다. 그리하여 헌공은 여희를 더욱
총애하게 되었다. 여희가 낳은 자식은 적자가 아니었으므로 헌공의 다른 아들을 죽
이거나 몰아내는 흉계를 꾸민다. 신생은 여희의 계략에 걸려 자결하고, 중이와 이
오는 각기 적나라와 양나라로 달아났다. 그 후 진 헌공이 병사하자 헌공의 총신인
순식과 여희는 전 헌공의 뜻대로 해제를 진나라 군주로 삼았다. 그러나 해제는 대
부 이극에 의해 살해되었다. 해제의 뒤는 이복동생인 탁자가 이었다.
제21대 도자(BC, ?〜BC, 651) 진 헌공의 아들
진 헌공 26년(기원전 651년), 진 헌공이 죽고, 대부 순식은 여희와 함께 희해제를
진나라 군주로 옹립했다. 같은 해 10월 대부 이극이 희해제를 살해했다. 같은 해
11월, 이극은 또 희탁자와 순식을 척살했다. 그리고 이극은 여희를 채찍질한 뒤 처
형하고 희이오를 진나라 군주로 모셨다.
제22대 혜공(BC, ?〜BC, 637) 진 헌공의 아들이며, 진 문공의 동복아우
진 헌공 21년(기원전 655년), 여희의 계략에 넘어간 진 헌공이 자신을 암살한다고
의심하여, 신생을 자결케했다. 그리고 2년 뒤 여희는 후환을 뿌리뽑기 위해 이오와
중이에게 신생의 폐륜 음모를 뒤집어 씌우니 이오는 형세가 이롭지 못해 양나라로
달아났는데, 그 이유는 진과 양이 가까운 나라이기도 하지만 중이와 같이 적나라
땅으로 달아났다가 암살 협의가 짙어질 것을 우려해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곳에서
양나라 군주의 딸과 결혼해 훗날 진 회공이 되는 희어와 딸 하나를 얻었다.
이극은 처음 공자 중이를 영접해 옹립하고자 했으나 중이의 사양으로 양나라에 사
람을 보내 영접하고자 했다. 이오가 가려고 하자 여성과 극례가 만류했다. 이에 대
부 극예에게 후한 예물을 가지고 진나라로 가 이같이 약속했다. “만약 환국할 수
있게 해주면, 晉(진)나라의 하서 땅을 진나라에 주겠소.” 동시에 이극에게 사신을
보내 이같이 말했다. “실로 보위를 이을 수 있다면 汾陽(분양)의 성읍을 봉토로 주
겠소.” 진 목공은 곡 이오에게 군사를 보내 환국할 수 있게 했다. 진 혜공 원년(기
원전 650년), 비정을 보내 5성을 주겠다는 약속을 철회했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을
즉위시키는데 기여한 공신인 이극에게 줄 분양의 땅도 주지 않을뿐더러 그의 권력
을 빼앗았다. 또한 이극에게 자진을 명했다. 진 혜공 4년(기원전 647년), 晉(진)나
라에 기근이 들었다. 진 혜공은 진 목공에게 곡식을 팔라고 청했다. 진 목공이 말
했다. 그 나라의 국왕은 과인도 싫어하지만 그의 백성에게 무슨 잘못이 있느냐. 마
침내 이들에게 양식을 주기로 하고 진나라 도성 雍(옹)에서 진나라의 絳邑(강읍)까
지 수송해 주었다. 진 혜공 5년(기원전 646년). 秦(진)나라에 기근이 들었다. 진나
라에 식량을 청했다. 그렇치만 진 혜공은 그것을 거절하고, 대부 괵사의 말을 들어
진 혜공 6년(기원전 645년), 진 목공의 진나라를 쳤다. 晉(진)나라는 대패했다.
진나라가 晉 惠公(진 혜공)을 사로잡아 귀환했다. 장차 그를 죽여 하늘에 제사를 올
리고자 했다. 진 혜공의 누이가 바로 진 목공의 부인이다. 소복을 입고 통곡하며 눈
물을 흘리며 진 혜공을 살려달라고 했다. 진 목공은 진 혜공을 풀어주는 대신 태자
희어를 인질로 요구했다. 그리고 하외 5성을 챙겼다. 진 혜공 13년(기원전 638년),
혜공은 병이 들었고, 그것을 핑계로 희어가 돌아왔다. 진 혜공 14년(기원전 637년)
진 혜공이 죽고 그 아들 희어가 즉위하니 그가 진 회공이다.
제23대 회공(BC, ?〜BC, 636) 진 혜공과 양나라 공녀의 아들이자 회영의 첫 남편
진 혜공 8년(기원전 643년), 한원전투에서 혜공이 秦(진)나라의 군주인 진 목공의
포로가 되자 석방을 조건으로 진(진)희어가 대신 볼모가 되었고, 진 목공은 진 혜
공을 도운 양나라를 멸했다. 진 혜공 13년 진 혜공이 병이 들자 아내인 회영에게
외가가 외가가 멸망당할 정도로 업신여김을 받고 또 본국에 도울 사람이 없다는
핑계를 대고 秦(진)에서 빠져나갔다. 물론 회영이 같이 가기로 했으나 비밀을 지키
라는 당부를 받고 거절되었고, 희어만이 돌아가 그 다음해에 혜공이 죽자 진후가
된다. 진 회공 원년(기원전 637년), 이 일을 안 진 목공은 당연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으며, 희중이를 진나라의 군주로 세우려 했다. 진 회공은 그것을 좋아할 리
없어서 망명한 자에게 소환령을 내라고 그것을 듣지 않으면 남은 일가를 몰살하겠
다고 명령했다. 호돌의 아들 狐毛(호모)와 狐偃(호언)이 중이를 따라 秦(진)나라에
가 있었다. 狐突(호돌)은 아들을 돌아오게 하지 않았다. 그러자 진 회공이 호돌을
죽였다. 진 목공은 군사를 파견해 중이를 보내고, 사람을 난지, 郤穀(극곡)의 무리
와 내응하고는 高梁(고량)에서 진 회공을 죽이고 중이가 즉위했다. 그가 진 문공이
다.
제24대 문공(BC, 697〜BC, 628) 진 헌공의 둘째 아들
헌공의 아버지인 진 무공은 제 환공의 딸과 결혼했는데, 나이 차가 매우 났다. 그래
서 무공이 죽자, 헌공은 계모를 자신의 비로 삼고 신생을 낳았다. 이후 제강이 죽자
진 헌공은 다시 포로로 잡은 狄(적)여인으로부터 딸 한명과 아들 두명, 즉 중이와
이오를 낳았다. 딸은 진 목공에게 시집보냈다. 또한 진 헌공을 여융을 공격하여 그
들을 멸망시키고 두 공주를 취해 언니 여희에게서 해제를, 동생 소희에게서 탁자를
낳았다. 그러니까, 진 헌공은 신생, 중이, 이오, 해제, 타자라는 아들을 각각 두게
된다. 여희는 자신의 나라를 멸망시킨 진 헌공에 한을 품고 진 헌공과 태자 신생
사이를 이간질했는데, 여기에 말린 헌공이 태자에게 자살을 명령했다. 태자는 자살
했고 불똥은 중이와 이오에게 튀어서 이 둘은 나라를 떠나 방황하게 된다. 여기에
이들을 따르는 진나라의 신하들이 동참하여 중이는 翟(적)나라로, 이오는 梁(양)나
라로 망명했다. 이 와중에 중이는 자객 발제의 암살 시도를 받았으나 옷 소맷부리
만 잘리고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해 탈출했다. 이때부터 중이는 1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방랑하게 된다. 한편 진나라에서는 진 헌공이 여희의 아들인 해제를 책봉한
뒤 곧 사망했다. 그러나 어린 해제는 곧 암살되었고, 이어 중이는 진나라 유신들로
부터 보위에 오르라는 청을 받지만, 자신을 해하려는 음모라고 생각하여, 아버지의
상중임을 빌미로 군위에 오르는 것을 거절했다. 그리하여 동복 동생인 이오에게 차
례가 돌아와 이오는 누님의 남편인 진 목공의 도움을 받아 진나라로 돌아와 군위에
올랐다. 그가 진 혜공이다. 그런데 진 혜공은 군위에 오르는데 도움을 주면 5성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이를 배신하여 秦(진)나라는 이걸 괘심하게 여겼지만 쳐
들어 가지는 않았다. 이후 晉(진)나라에 흉년이 들어 진나라에 도움을 청했다. 진 목
공은 이를 수락해 엄청난 원조를 해줬는데, 공교롭게도 晉(진)나라에 다음해에 처지
가 반대가 되었다. 목공은 혜공에게 식량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혜공은 이를 기회로
진나라의 영토를 빼앗으려 군사를 이끌고 침공했다가 한원대전에서 진 목공에게 대
패를 하여 포로가 되었다. 진 목공은 배은망덕한 혜공을 죽이려고 했으나, 혜공의
누님인 비의 간곡한 청으로 원래 약조한 5성을 할양받고 세자 어를 인질로 받은 조
건으로 석방했다. 그동안 중이는 동생인 진 혜공이 보낸 자객들을 피하며 계속 방
랑하고 있었는데, 이때 재미있는 일화들을 많이 남겼다. 중이는 망명한 적나라에서
환대를 받으며 季隗(계외)라는 미녀와 결혼하고 자식까지 얻었다. 그러나 혜공이 자
객을 보내 목숨을 노리자 결국 적나라를 떠났는데 이때 계외에게 ‘뜻하지 않게 먼
길을 떠나야 하는데 25년만 기다려주고 그때가 지나도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재
가를 하라고’ 했다. 그러자 계외는 내 나이가 25살이라 25년 뒤면 할망구가 될 텐
데 어딜 가겠는가. 평생 당신을 기다리겠다. 이후 제나라로 가서 당시 패자였던 제
환공의 환대를 받고 제나라의 공여와 결혼하고 안정된 생활을 한다. 또 다른 기록
에선 문공을 따르던 신하 중 頭須(두수)라고 하는 자가 있었다. 원래 맡고 있던 일
이 궁궐에서 창고를 관리하는 일이었는데 숫자 세기가 빠르고 머리가 좋은 신하라
문공이 우대했던 인물이었다. 그런 두수는 문공이 망명할 때 따라 나섰으나 도중에
배신하여 돈과 심지어 먹을 것 까지 몽탕 챙겨 달아났다. 굶어죽기 직전에 처한 진
문공을 보다 못한 신하 개자추가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진 무공에게 먹게 했다.
그후 진 문공이 즉위 후 두수가 찾아왔다.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니 진 문공은 용서
하여 주고 궁중 창고를 관리하는 직을 맡겼다. 다만 진 문공은 망명 생활 중 진심
을 다해 자신을 보좌한 개자추라는 신하를 논공 해상에서 잊어버렸다. 원래 진 문
공은 논공행상을 하면서 혹시라도 누락된 사람이 있을까바 “포상을 못 받는 사람이
있거던 신고하라” 꼼꼼하게 포고까지 내렸다. 그런데 개자추는 이런 조치를 비루하
게 여겼다. 선군의 자식들 중 가장 영민한 중이가 군위에 오른 것은 당연한 일인데
도, 정작 그 신하란 작자들이 내 공이 크네, 작네 따지는 것은 하늘의 공을 탐하는
짓이 도적질보다 못하다고 비루하게 여겼다. 여기서 나온 고사가 貪天之功(탐천지
공)이다. 결국 개자추는 노모를 모시고 綿山(면산)에 은거했다. 훗날 진 문공이 개
자추를 잊은 것을 알고 그를 찾았으나 개자추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산에 불을
지르면 산에서 나올거라 생각하여, 결국 산에 불을 질렀지만 끝내 나오지 않고 노
모를 감싸 안은채 산불에 타 죽어버렸다. 진 문공은 산불을 낸 것을 후회하고 개자
추가 죽은 날에는 불을 피우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그날이 마침 청명이었
고 이것이 한식의 기원이 된다. 또한 면산 일대의 땅을 개자추에게 하사했다고 기
록 되었다. 진 문공 2년(기원전 635년), 周(주)나라에서 정변이 일어나 周 襄王(주
양왕)의 동생인 왕자 대가 주 양왕을 몰아냈고, 양왕은 정나라로 피신했다. 여기에
진 문공이 개입하여 희대를 토벌하고 주 양왕을 복위시켰다. 주 양왕은 그 공로를
높이 쳐서 河內(하내)의 陽樊(양번) 땅을 하사했다. 이로써 진 문공은 천자를 보위
하여 기세를 떨쳤다. 진 문공 5년(기원전 652년), 진 문공은 초나라 망명시절 3번을
후퇴하겠다는 초 성왕과의 약속을 지킨 후에 이어진 성북전투에서 초나라를 대파했
다. 그리고 진 목공의 진나라와 힘을 합쳐 정나라를 복속시켰다. 결국 진 문공은 즉
위한지 5년 만에 오랑캐에 맞서 천자를 지키는 “존왕양이”의 패업을 달성했다. 5월
에 초나라의 포로를 주 양왕에게 바치니 주 양왕은 진 문공에게 단술, 큰 저차 1대,
붉은 살 1대, 붉은 화살 100개, 검은 호라 10개, 검은 화살 1,000개, 거창과 규찬
및 호위무사 300명을 하사했다. 진나라는 진 문공이후 춘추전국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되었다. 5월 진 문공이 조나라와 위나라를 쳐서 曹 共公(조 공공), 衛 成公
(위 성공)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나중에 위 성공과 조 공공의 지위를 회복시켰다.
진 문공 8년(기원전 628년), 진 문공은 패업을 이룬지 4년 만에 훙하였다. 한편 진
문공은 태자 신생의 죽음으로 진 헌공에게 의심 받아 도망가기 전에 핍길과의 사이
에서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었으며, 핍길의 아들이 진 문공의 사후 장남이자 태
자로써 진 양공으로 즉위하게 된다. 계외에게서는 아들 둘이 있었으나 다들 어려서
죽은 것 같고 그 외의 후사는 전해지지 않으며, 제나라 공예에게서 아들 하나, 진
목공의 딸 회영에게서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제나라 공녀의 아들은 진나라로 보내
서 벼슬하게 했으며, 회영의 아들이자 진 목공의 외손자는 陳(진)나라로 보내서 벼
슬하게 하여 일찍감치 권력 투쟁에서 떼어 놓았다.
제25대 양공BC, ?〜BC, 621) 진 문공의 아들
핍길의 소생이며, 아내는 繆瀛(목영)이다. 진 양공 2년(기원전 627년), 秦(진)나라가
정나라를 습격하였다. 정나라와 진나라는 희성으로 성이 같았기 때문에 선군인 진
문공 휘하의 중군 원수 先軫(선진)이 정나라를 돕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진 양공은
진 문공의 장례도 미처 치러지 못한 채 진 목공이 보낸 장수인 孟明視(맹명시), 西
乞秫(서걸술), 白乙丙(백을병)을 효산전투에서 이겨 사로 잡는다. 그런데 秦(진)나라
공주이자진 문공의 아내중 하나로 진 양공에게는 적모가 되는 文嬴(문영)이 그에게
모국의 중신인 그들을 풀어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고, 이에 결국 진 양공은 세 장수
를 풀어준다. 그런데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된 선진이 격분해 포로를 풀어줌은 곧
적을 강하게 만듬이니 아녀자의 말만 듣고 어리석은 자가 일을 엉망으로 처리했다
며 진 양공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적족이 箕(기)를 침략해오자 진 양공은 이들을
물리쳤다. 하군의 대부 郤缺(격결)이 적족의 군주인 白狄子(백적자)를 사로잡았으나
총수인 선진은 이미 승기를 잡은 상황에서 일부러 적진에 뛰어들어 장렬히 전사했
다. 싸움이 끝난 뒤 진 양공은 선진의 아들인 先且巨(선차거)에게 아비의 직위인
중군의 원수를 그대로 잇게하였고, 결정적인 공을 세운 극결을 경으로 임명한다.
덕분에 극결은 아버지 郤芮(극예)가 진 문공을 암살하려다 발각된 이래 크게 실추
되었던 가문의 명예를 되찿고 잃었던 옛 식읍인 기(기) 땅도 돌려받게 된다. 더불
어 극결을 천거한 서신 또한 은상을 받았다. 같은 해 겨울에 진나라, 정나라와 함
께 허나라를 쳤다. 이유는 주나라에 입조하지 않았을뿐더러 진과 회맹한 정나라를
쳤기 때문이다. 선차거와 서신에게 위나라를 치게해 戚(척) 땅을 포위하고 6월에
점령해 위나라의 손소자를 사로잡는다. 진 양공 4년(기원전 625년), 진 목공이 효
산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맹명시를 보내 공격해왔다. 그런데 2월 팽아 땅
에서 진군은 도리어 이를 격퇴하였으며, 겨울에 송나라의 공자 자성, 진나라의 규
원선, 정나라의 공자 희귀생과 함께 진나라의 왕 땅을 빼앗고 팽아까지 쳐들어가
일전의 일전의 침입에 대해 톡톡히 보복한다. 다만 이때 획득한 땅들은 맹명시가
되찾아 간다. 진 양공 7년(기원전 622년), 趙衰(조쇠), 난지, 狐偃(호언) 선차거가
죽었다. 조쇠의 자리는 그의 아들인 趙盾(조돈)이 잇는다. 진 양공 8년(기원전 62
1년), 진 양공이 서거하고 세자인 이고가 즉위하니 그가 진 영공이다.
제26대 영공(BC, ?〜BC, 607) 진 문공의 손자며 진 양공의 아들.
아버지 진 양공이 그가 어린 시절 죽었기 때문에 정사는 대신 조돈이 담당했다.
그러나 그가 자라면서 군주의 도리는 다하지 않고 황음무도하게 굴었으며, 조세를
무겁게 하고 사치스럽게 놀아댔다. 거기다가 높은 누대에서 탄궁으로 쏘는 막장 행
각을 하니 행인들은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탄환을 피하기에 바빴다. 한번은 요리사
가 웅장을 덜 익혔다는 이유로 죽여버렸는데, 그 시신을 궁녀로 하여금 광주리에
넣어 버리게 했다. 조돈이 그것을 두고 간했으나, 진 영공은 그에게 반감을 가졌다.
그래서 자객 鉏麑(서예)에게 조돈을 척살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서예는 조돈을 보고
충정이 뛰어나 백성을 아꼈기 때문에 진 영공의 명을 집행하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
끼고 머리를 들이 받아 자결했다. 진 영공은 조돈을 잔치에 불러 복병을 풀어 조돈
을 척살하게 하려했다. 그러나 조돈의 거우인 제이명이 그것을 알고 조돈에게 그것
을 알렸다. 그러나 그것을 알리 없는 진 영공은 개에게 조돈을 죽여버리게 했다.
가까스로 도망간 조돈은 자신의 사촌인 趙穿(조천)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진 영공
14년(기원전 607년), 조천은 진 영공을 시해했다. 조돈은 조천을 보내 주나라에서
진 문공의 아들이며, 진 양공의 아우인 공자 흑돈을 모셔오니 그가 진 성공이다.
제27대 성공(BC, ?〜BC, 600) 춘추오패로 유명한 진 문공의 아들이다
진 영공 14년(기원전 607년), 조돈(조돈)의 아우인 조천(조천)이 진 영공을 시해한
뒤 조돈이 그를 진나라의 군주로 모시면서 그 시기에 정치가 바르게 되었다. 공자
가 이르기를 조선자인 조돈을 훌륭한 대부라 했다. 진 성공 원년(기원전 606년), 조
씨들을 대부에 봉했다. 진나라는 정나라를 쳤는데, 그 이유는 진나라를 등지고 초나
라를 섬기려 한 탓이었다. 진 성공 6년(기원전 기원전 601년), 진 성공은 秦(진)나라
를 쳐서 그 장수 적을 사로잡았다. 그 해에 조돈이 사망했다. 진 성공 7년(기원전 6
00년), 진 성공은 죽고 그 아들 희거가 뒤를 이어 진 경공으로 즉위했다.
제28대 경공(BC, ?〜BC, 581) 진 문공의 손자며, 진 성공의 아들, 진 여공의 아버지
진 경공 원년(기원전 599년), 진 경공은 아버지 진 성공이 죽은 뒤 진나라 군주가
되었다. 진 경공 3년(기원전 597년), 초 장왕이 병사를 거느리고 정나라를 쳐 그 수
도인 신정을 3개월간 포위했다. 정나라가 진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진 경공은 중
군장 筍林父(순임보)를 파견해 정나라를 구하게 했다. 그리고 진나라는 필 전투에서
초 장왕에게 패해 동맹국이 이반하였다. 그리고 그 틈을 노려 북적의 일파인 적적
이 진을 쳤다. 진 경공은 중군장인 순임보, 중군좌인 선갇을 보내 적적인 노씨족을
멸하고 그 포로를 주나라 천자에게 바쳐 체면치례를 했다. 진 경공 8년(기원전 592
년), 진 경공은 극극을 보내 제 경공에게 회맹에 참가하라고 했으나 제나라에서는
극극을 모욕하고 돌려 보냈다. 극극은 모욕을 참지 못하고 진 경공에게 제를 칠 것
을 권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이러했다.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오.” 하지만 정말로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한 진 경공은 위나라와 회맹하여 제를 쳐서 제나라의 영토인
양곡을 압박했다. 그러자 제 경공은 진 경공에게 회맹을 요청하였고, 진 경공은 그
것을 받아들여 양국의 공자를 인질로 보내고 병력을 물렀다. 진 경공 12년(기원전
588년), 노나라, 송나라, 위나라, 조나라를 포섭해 정나라를 쳤고 정나라를 돕는 초
나라를 이겼다. 같은 해 진 경공은 3군에서 6군으로 늘였고, 한궐, 조괄, 공삭, 한
천, 순추, 조전을경에 봉했다. 진 경공 13년(기원전 587년), 조동, 조괄이 모반을 도
모하다가 실패해 제나라로 달아났다. 진 경공 14년(기원전 586년), 초나라를 견제
하기 위해 오왕 수몽을 지원하였다. 진 경공 15년(기원전 586년), 수도를 絳(강)에
서 新田(신전) 땅으로 천도했는데 진 경공은 이곳을 신강으로 칭했다. 진 경공 18
년(기원전 581년), 점쟁이가 햇보리를 먹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해 진 경공은 고
민하다가 병이 나고 말았다. 이에 이웃의 진나라는 명의 고완을 보냈는데, 고완이
병을 고칠 수 없다고 했으나 진 경공은 오히려 그것 때문에 마음이 편해졌는지 병
이 가라 앉았다. 그리고 진 경공은 그 점쟁이를 참수하고 보리밥을 먹으려고 했다.
배가 아파 화장실에 갔는데 하지만 재수없게도 화장실 바닥이 부서져 빠졌다. 구조
되었으나 똥독이 올라 오래 못가 죽었다.
제29대 여공(BC, ?〜BC, 573) 진 경공의 아들
진 여공 원년(기원전 581), 아버지 진 여공이 죽은 뒤 그 뒤를 이어 진의 군주가
되었다. 진 여공 4년(기원전 578년), 진은 제나라, 송나라, 노나라, 조나라, 邾(주)
나라, 騰(등)나라의 군주들과 회합하였고, 여름에 위상을 보내 秦(진)과 단교했다.
진 여공 9년(기원전 573년), 진 여공이 아끼는 신하 서동으로 하여금 극지를 살해
하게 했다. 서동은 그 기세를 타고 난서와 순언을 협박했으나 여공에 의해 사면되
었다. 난서는 순언과 함께 여공이 놀라간 틈을 타 서동을 주살해 버렸다. 그리고
여공을 구금한 뒤 6일 후 그를 살해했다. 그리고 주나라에서 공손 주를 데려와 진
나라 군주로 모시니 그가 진 도공이다.
제30대 도공(BC, ?〜BC, 558) 진 양공의 손자이자 惠伯(혜백) 談(담)의 아들이었다
기원전 587년, 주나라 낙양에서 태어났으며, 주 왕실의 대신이었던 선양공을 섬겼
는데 이때 선양공은 손주의 몸가짐과 행실을 눈여겨보고 그가 장차 진나라의 군주
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진 도공 원년(기원전 573년), 진나라의 대신인 난서와
중앙언이 군주 여공을 시해하고 그를 옹립했다. 즉위 후 백성들의 노역을 면제하고,
세금을 감면하며 고아와 과부들을 구휼했다. 그리고 도공은 명장 한궐을 재상에 임
명하고, 조무, 위강 등 인재를 등용하였다. 진 도공 3년(기원전 571년), 도공이 계
택에서 제후들과 회맹했다. 진 도공 16년(기원전 558년), 제나라가 노나라의 성 땅
을 치니 주나라가 노나라의 남부를 쳤다. 노나라가 진나라에 구원을 청하니 그것을
도우려 했으나 진 도공이 병애 걸려 그 해 죽었다.
제31대 평공(BC, ?〜BC, 532) 도공의 아들이자 杞(기)나라 군주 환공의 외손자
진 평공 원년(기원전 557년)에 진 평공이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선대의 명군이
자, 진 평공처럼 어린 나이에 즉위한 아버지 진 도공과 달리 세금을 지나치게 많이
걷고, 백성들의 형편을 돌보지 않았으며, 음악 등을 즐기는 모습을 보이며 차차 실
권이 육경에게 넘어가는 것을 방조하게 되었다. 진 평공은 진 도공을 안장한 뒤 제
나라를 쳤다. 제 영공이 교전을 벌였으나 국력은 아직도 진나라가 강력했기 때문에
제나라가 패배했다. 그리하여 임치에서 포위당했다. 이후 진 평공이 성을 불사르고
성의 백성들을 도륙하자 교수와 기수의 제나라 성들이 방비를 엄하게 했다. 진 평
공은 결국 이득을 보지 못하고 퇴각했다. 진 평공 6년(기원전 522년), 제 장공이
전연 땅에서 진 평공, 송나라, 위나라, 정나라, 조나라, 거나라, 邾(주)나라, 등나라,
설나라, 杞(기)나라, 小邾(소주)와 회맹해 진나라는 패업을 회복했다. 이대 난씨 일
족이 경들에게 당해 결국 쫓겨났다. 그 명분은 진 여공을 처치한 죄목이라 했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닌 경들의 밥그릇 싸움이었다. 그리하여 난영은 살아 남아 제나라
로 도망갔다. 진 평공 8년(기원전 550년), 제 장공은 난영을 비밀리에 곡옥 땅에 보
내고 제나라의 본군은 태항산을 거쳐 난영을 돕게했다. 이에 진 평공은 크게 놀라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자결하려 했다. 사앙 즉 범앙은 진 평공을 말리고 군사를 거느
리고 난영을 물리쳐 곡옥을 뒤찾고 난영과 그 일족을 몰살시켰다. 진 평공 14년(기
원전 544년), 오나라의 연릉계자 즉 공작 계찰이 사신으로 와서 趙武(조무), 韓起(
한기), 魏舒(위서)와 이야기를 나누고 조씨, 한씨, 위씨에게 진나라가 넘어가리라고
예언했다. 진 평공 26년(기원전 532년), 진 평공이 사망하고 아들 희이가 그 뒤를
이어서 진나라 군주가 되었다.
제32대 소공(BC, ?〜BC, 526) 진 평공의 아들
진 소공 원년(기원전 331년), 진 평공이 죽자, 희이는 진나라의 군주로 즉위했다.
진 소공 3년(기원전 529년), 진 소공은 패업을 회복하고자 했고, 제나라가 그 틈새
를 노렸다. 진 소공 6년(기원전 526년), 진 소공이 갑작스럽게 죽으면서 아들인 기
질이 즉위하게 되었다.
제33대 경공(BC, ?〜BC, 512) 진 소공의 아들
진 소공 6년(기원전 526년), 소공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진나라 군주가 되었다. 진
경공은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6경의 권력이 강대해졌고, 희성
진씨 공실의 권력은 줄어들어갔다. 진 경공 12년(기원전 514년), 조간자는 지씨,
한씨, 위씨, 범씨, 중항씨와 더불어 공실과 가까운 기씨와 양설씨를 멸하였다. 진
경공13년(기원전 513년) 겨울 전국에서 철 480근을 모아 범선자가 그 철로 솥을
만들어 거기에 형법서를 새겼다. 그것이 진나라의 성문법이다. 그것을 사서에서는
‘주 형정’이라 했다. 진 경공 14년(기원전 512년), 진 경공이 측간에 빠져 죽으니
그 뒤를 희오가 이으니 그가 진 정공이다.
제34대 정공(BC, ?〜BC, 475) 진 경공의 아들
진 정공 12년(기원전 500년), 진의 경인 趙簡子 趙鞅(조간자 조앙)은 가신 董安(동
안)으로 하여금 太原(태원) 땅에 성을 쌓게 했고, 완성되자 진양이라 이름 붙였는데
대단히 경고하였다. 이후 이 진양성은 조씨 일가의 근거지가 되었다. 진 정공 15년
(기원전 497년), 조앙은 정경이 되었는데 동족인 조오를 감금했다가 살해했다. 진
정공 19년(기원전 493년), 갈등 끝에 조앙은 병사를 거느리고 범시와 일전을 벌렸다.
범시, 그리고 같은 편인 중앙씨는 저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조씨가 전투에서 이겼
고, 패배한 범씨와 중앙씨는 제나라로 도망갔다. 진 정공 37년(기원전 475년), 진 정
공이 사망하였다.
제35대 출공(BC, ?〜BC, 452) 진 정공의 아들
진 출공 원년(기원전 474년), 이 당시 진나라는 사실상 조씨, 한시, 위씨, 지씨, 중
앙씨, 범씨 6경이 나라를 6분할 해서 다스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진 출공 9년(기원
전 466년)과 진 출공 13년(기원전 462년)에 지백인 지요는 병사를 거느리고, 정나
라를 치고 세력을 떨치며 대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자기보다 세력이 약한 조씨, 한
씨, 위씨들에게 땅을 떼어줄 것을 요구했다. 진 출공 22년(기원전 453년), 조씨, 한
씨, 위씨들이 힘을 합쳐 지백을 공격해 지씨들을 공격해 멸하자 진 출공은 대노해
계책을 짜서 조씨, 한씨, 위씨 3경을 멸하려고 했다. 이 일을 제나라의 권신 전씨
와 노나라의 권신 계손씨에게 힘을 빌어 이들을 몰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조씨, 한
씨, 위씨 가문은 그것을 알아채고 진 출공을 공격했다. 결국 진 출공은 제나라로
도주했다. 그래서 진 소공의 증손자인 희교를 군주로 올리니 그가 바로 진 애공이
다. 일설에는 3경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제36대 애공(BC, ?〜BC, 434) 진 소공의 증손자
진 애공 원년(기원전 451년), 진 출공이 쫓겨나고 3경인 위씨, 한씨, 조씨가 옹립했
기 때문에 이렇다할 실권이 없었다. 그들은 진나라를 3개로 나눠 다스렸지만 아직
백작 이상의 제후를 칭하지는 않았다. 진 애공 14년(기원전 434년), 진 애공이 죽었
다.
제37대 유공(BC, ?〜416) 진 애공의 아들이며 진 열공의 아버지
곡옥과 絳(강)을 제외한 모든 땅을 위씨, 한씨, 조씨가 나누어 가지니 이들을 삼진
이라 한다. 진 유공 원년(기원전 433년), 진 애공이 죽자 즉위했다. 진 유공 대에 3
경은 진 공실의 영지를 곡옥과 수도인 강만 남기고 몽땅 빼앗았다. 이때부터 삼진
이 들어섰지만 이들은 아직 제후를 칭하지 않았다. 진 유공 14년(기원전 416년), 위
문후는 자객을 보내 진 유공을 살해했다. 「고본죽서기년」에 의하면 부녀자와 같이
자다가 죽었다고 한다.
제38대 열공(BC, ?〜BC, 389) 진 유공의 아들
진 유공 14년(기원전 416년), 진 유공이 피살되고 아들(혹은 동생)희지가 군주에 올
랐다. 진 열공 13년(기원전 403년), 3경(三卿)인 魏氏(위씨), 趙氏(조씨), 韓氏(한씨)
가 제후가 되어서 공식적으로 진나라 영토를 나눠갖었다. 그리하여 위에 개요에 나
온 것처럼 魏(위)나라, 韓(한)나라, 趙(조)나라가 공식적으로 건국되었다. 진 열공 2
3년(기원전 393년), 태자 희희가 가출했다. 진 열공 27년(기원전 389년), 진 열공이
죽었다.
제39대 효공(BC, ?〜357) 진 열공의 아들이며, 진 정공의 아버지
진 열공 23년(기원전 389년), 진 열공이 죽자 진나라의 군주에 올랐다. 이 당시 진
나라의 영토는 대부분 위나라, 조나라, 한나라에 의해 강탈당했다. 진 환공 20년(기
원전 369), 조나라에서는 진 환공을 屯留(둔류) 땅으로 옮겼고, 그 아들인 구주가
즉위하니 그가 진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진 정공이다.
제40대 정공(BC, ?〜BC, 349) 진 환공의 아들
진 정공 8년(기원전 349년), 조나라에게 진나라의 땅을 몽땅 빼앗겼다. 그리하여 진
정공은 한나라의 둔류 땅에 거주하게 되었다. 진 정공은 서인이 되고 제사가 단절
되었다.
수도 변천
唐叔(당숙) 唐叔 右(당숙 우) 唐(당) 山西省 太原市(산서성 태원시)
晉侯(진후) 燮(섭) 翼(익) 山西省 翼城縣(산서성 익성현)
成侯(성후) 服人(복인) 曲沃(곡옥) 山西省 臨汾市 聞喜(산서성 임분시 문희)
穆侯(목후) 費王(비왕) 絳(강) 山西省 翼城市(산서성 익성시)
景公(경공) 據(거) 新田(신전) 山西省 侯馬市 新絳縣(산서성 후마시 신강)
武公(무공) 稱(칭) 曲沃(곡옥) 山西省 臨汾市 聞喜(산서성 임분시 문희)
사료출처
史馬遷(사마천)의 史記世家(사기세가)와 曾先之(증선지)의 十八史略(십팔사략) 그리고
좌구명(좌구명)의 春秋左傳(춘추좌전), 또한 馮夢龍(풍몽룡)의 東周列國志(동주열국지)
와 司馬光(사마광)의 資治通鑑(자치통감) 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