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40-53
그때에 예수님의 40 말씀을 들은 군중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하고, 41 어떤 이들은 “저분은 메시아시다.”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42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43 이렇게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44 그들 가운데 몇몇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45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46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47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48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49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50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51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52 그러자 그들이 니코데모에게 대답하였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53 그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n aquel tiempo, muchos entre la gente, que habían escuchado a Jesús, decían: «Éste es verdaderamente el profeta». Otros decían: «Éste es el Cristo». Pero otros replicaban: «¿Acaso va a venir de Galilea el Cristo? ¿No dice la Escritura que el Cristo vendrá de la descendencia de David y de Belén, el pueblo de donde era David?».
Se originó, pues, una disensión entre la gente por causa de Él. Algunos de ellos querían detenerle, pero nadie le echó mano. Los guardias volvieron donde los sumos sacerdotes y los fariseos. Estos les dijeron: «¿Por qué no le habéis traído?». Respondieron los guardias: «Jamás un hombre ha hablado como habla ese hombre». Los fariseos les respondieron: «¿Vosotros también os habéis dejado embaucar? ¿Acaso ha creído en Él algún magistrado o algún fariseo? Pero esa gente que no conoce la Ley son unos malditos».
Les dice Nicodemo, que era uno de ellos, el que había ido anteriormente donde Jesús: «¿Acaso nuestra Ley juzga a un hombre sin haberle antes oído y sin saber lo que hace?». Ellos le respondieron: «¿También tú eres de Galilea? Indaga y verás que de Galilea no sale ningún profeta». Y se volvieron cada uno a su casa.
«Jamás un hombre ha hablado como habla ese hombre»
Abbé Fernand ARÉVALO
(Bruxelles, Bélgica)
Hoy el Evangelio nos presenta las diferentes reacciones que producían las palabras de nuestro Señor. No nos ofrece este texto de Juan ninguna palabra del Maestro, pero sí las consecuencias de lo que Él decía. Unos pensaban que era un profeta; otros decían «Éste es el Cristo» (Jn 7,41).
Verdaderamente, Jesucristo es ese “signo de contradicción” que Simeón había anunciado a María (cf. Lc 2,34). Jesús no dejaba indiferentes a quienes le escuchaban, hasta el punto de que en esta ocasión y en muchas otras «se originó, pues, una disensión entre la gente por causa de Él» (Jn 7,43). La respuesta de los guardias, que pretendían detener al Señor, centra la cuestión y nos muestra la fuerza de las palabras de Cristo: «Jamás un hombre ha hablado como habla ese hombre» (Jn 7,46). Es como decir: sus palabras son diferentes; no son palabras huecas, llenas de soberbia y falsedad. El es “la Verdad” y su modo de decir refleja este hecho.
Y si esto sucedía con relación a sus oyentes, con mayor razón sus obras provocaban muchas veces el asombro, la admiración; y, también, la crítica, la murmuración, el odio... Jesucristo hablaba el “lenguaje de la caridad”: sus obras y sus palabras manifestaban el profundo amor que sentía hacía todos los hombres, especialmente hacia los más necesitados.
Hoy como entonces, los cristianos somos —hemos de ser— “signo de contradicción”, porque hablamos y actuamos no como los demás. Nosotros, imitando y siguiendo a Jesucristo, hemos de emplear igualmente “el lenguaje de la caridad y del cariño”, lenguaje necesario que, en definitiva, todos son capaces de comprender. Como escribió el Santo Padre Benedicto XVI en su encíclica Deus caritas est, «el amor —caritas— siempre será necesario, incluso en la sociedad más justa (...). Quien intenta desentenderse del amor se dispone a desentenderse del hombre en cuanto hombre».
«Jamás un hombre ha hablado como habla ese hombre»
Rev. D. Antoni CAROL i Hostench
(Sant Cugat del Vallès, Barcelona, España)
Hoy notamos cómo se “complica” el ambiente alrededor del Señor, pocos días antes de la Pasión ocurrida en Jerusalén. Por causa de Él se genera como una suerte de discusión y controversia. No podía ser de otro modo: «¿Pensáis que he venido a traer paz a la tierra? Os digo que no, sino división» (Lc 12,51).
Y no es que el Redentor desee la controversia y la división, sino que ante Dios no valen las “medias tintas”: «Quien no está conmigo, está contra mí; y quien no recoge conmigo, desparrama» (Lc 11,23). ¡Es inevitable! Ante Él no hay ninguna postura neutra: o existe, o no existe; es mi Señor, o no es mi Señor. No es posible servir a dos señores a la vez (cf. Mt 6,24).
Juan Pablo II consideraba que ante Dios hay que optar. La fe sencilla que nuestro buen Dios nos pide implica una opción. Hay que optar porque Él no se nos quiere imponer; vino a la Tierra de manera discreta; murió empequeñecido, sin hacer alarde de su condición divina (Flp 2,6). Es lo que expresa maravillosamente santo Tomás de Aquino en el Adoro Te devote: «En la cruz se escondía sólo la divinidad, aquí [en la Eucaristía] se esconde también la humanidad».
¡Hay que optar! Dios no se impone; se ofrece. Y queda para nosotros la decisión de optar a favor de Él o de no hacerlo. Es una cuestión personal que cada uno —con la ayuda del Espíritu Santo— ha de resolver. De nada sirven los milagros, si las disposiciones del hombre no son de humildad y de sencillez. Ante los mismos hechos, vemos a los judíos divididos. Y es que en cuestiones de amor no se puede dar una respuesta tibia, a medias: la vocación cristiana comporta una respuesta radical, tan radical como fue el testimonio de entrega y obediencia de Cristo en la Cruz.
♣ 힘이 아닌 연약함으로 주님을 따름 ♣
예수님께서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7,37) 하고 말씀하시자 그분의 정체에 대한 군중들의 반응이 엇갈리며 논란이 일어납니다. 조상들이 광야에서 나그네 되어 지붕 없는 초막에서 지내던 때를 회상하고(레위 23,40-43), 종, 나그네, 과부, 가난한 이들도 다 함께 기쁨을 나누는 축제인 초막절에 그런 논쟁을 한다는 것은 구원의 역설입니다.
군중들 가운데 예수님을 참 예언자라고 하는 이들도 있고 메시아라고도 말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대자들은 메시아가 갈릴래아 나올 리가 없다며 묵살해버립니다(7,40-44). 또한 그들은 예수를 잡으러갔다가 그냥 돌아온 성전 경비병들이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7,46)라고 말하자, 오만에 가득 차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7,49)라고 경멸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적대시하며 죽이려드는 이들의 메시아를 대하는 방식과 기준은 자신의 생각과 지식의 힘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살아야 할 인간이 자신의 힘과 지식에 의존할 때 그 결과는 뻔합니다. 사랑과 정의의 하느님과의 단절이 일어나고 이웃들 위에 군림하여 지배하려들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수석사제들이 우선시했던 지식의 힘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과학과 정보의 힘을 접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이 결국 최고의 프로바둑기사마저 꺾어버리는 결과에 사람들은 허탈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느님을 향한 엄청난 도전과 비인간화를초래할 수 있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첨단 과학의 발달과 스마트기기의 등장으로 이미 사람들은 천재 인간들이 만든 과학과 기술에 밀려 비인간적 처지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기계가 인간의 일자리를 차지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길거리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자본가들은 과학의 힘을 빌러 더욱 더 쉬운 방법과 적은 투자로 거대한 부를 단시간에 축적해나가고 있습니다.
과학의 힘은 곳곳에서 불평등과 소외, 비인간화를 촉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로봇의 파괴, 자동화기기의 폐기처분을 위한 강력한 저항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합니다. 우리도 지식과 권력, 재물의 힘에 기대고 편리함의 단맛에 젖어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이웃의 아픔에도 무관심한 채 살아가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강력한 힘이나 세상의 지식이 아니라 연약함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세상의 거센 도전 앞에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11,19)과 같은 처지에 내쳐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약해질 때에 비로소 세상을 사랑으로 창조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일하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오늘도 세상 권세와 인간을 비참한 벌판으로 내모는 과학의 힘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2코린 12,5)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십자가를 매일 지는 일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날이길 희망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지도자들>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요한 7,45-49)"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잡아 오라고 성전 경비병들을 보냈었는데(요한 7,32)
경비병들이 그냥 돌아옵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다는 경비병들의 말은,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압도당했음을 나타냅니다.
(경비병들의 말을 "그분의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니다. 하느님의 말씀이다."
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동안 자기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신적인 힘과 권위를 느꼈고,
그래서 예수님을 체포할 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몹시 놀랐다는 말이 나옵니다(마르 1,22).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가르침입니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라는 바리사이들의 말에는
"예수는 사람들을 속이는 사기꾼이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 말을 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소문만 듣고서 예수님을 사기꾼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판단했을까?
예수님이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것이 그 이유일 수도 있고(요한 7,41),
또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과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요한 7,42).
(우리는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갈릴래아의 나자렛 출신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또 요셉이 다윗 가문의 후손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예수님의 활동이 제도권 밖에 있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자기들의 통제를 받지 않는 한낱 '야인'으로만 보였을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을 인정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으로 통제하지 못했던 세례자 요한의 활동도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최고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라는 말은,
지도층에서 예수를 인정하지 않고 있고, 믿지 않고 있으니
예수는 가짜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메시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자기들 마음대로 결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말은 신성 모독에 해당됩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기득권층 사람들,
즉 사제들과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교만과 위선을 자주 비판하셨는데,
그들은 그 비판을 듣기 싫어했고, 예수님께 적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는 옳게 살고 있다." 라는 교만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듣기 싫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기득권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요한 11,47-48).
그래서 그들은 회개하기는커녕 예수님을 박해했습니다.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라는 말은,
"율법을 모르고 율법대로 살지 않는 어리석고 천한 자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압도당해서
예수님을 체포하지 않고 그냥 돌아온 경비병들은
율법도 모르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라는 사기꾼에게 속은 것이라는 뜻으로 말한 욕설입니다.
그러나 경비병들이 실제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바리사이들이 하는 말은
다른 사람의 신앙생활을 함부로 심판하고 단죄하는 죄를 짓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겉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위선자들이라고 비판하셨습니다(마태 6장).
그런데 그들은 "예수는 사기꾼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을 제3자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어떻게 될까?
바리사이들의 말 뒤에 니코데모의 말이 이어지고 있는데,
니코데모가 한 말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요한 7,51)"
이 말은 신명기 1장과 17장 등에 있는 규정을 바탕으로 한 말인데,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한 것은,
또 조사도 하지 않고 예수님을 죄인 취급하는 것은
율법을 위반한 일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니코데모의 말에는, 경비병들을 꾸짖고 있는 바리사이들 자신들이 더
율법대로 살고 있지 않다는 비난도 들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탐욕과 교만과 위선을 버리지 않고,
또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행복이 진리가 아니라
지상에서의 부귀영화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또 세속의 기득권을 지키는 일에만 집착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들을 자기에게 아무 쓸모가 없는 말이라고 생각하거나,
사람들을 속이는 허황한 말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신앙인이라고 해도,
기득권에 집착하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받기만을 바란다면,
그것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본의 아니게)
예수님을 '사람들을 속이는 자'로 만드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