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인계동 64
진철과 일행은 오전 8시나 되어서 사우나에서 나와 그 안 골목의 해장국 집에서 해장을 하고 헤어졌다. 진
철은 밤새 코고는 소리와 명혜에 대한 생각으로 잠을 설쳤고 더구나 이번 행사를 준비하고 하느라 신경을
써서인지 몸이 찌뿌듯하다.일행과 헤어진 진철은 집으로 돌아가 한 숨 자고 저녁 일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
으로 걷는데 핸드폰에 문자가 들어왔다는 음향이 들린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진철은 명철에게서 온 문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수신함을 열자
‘시간 내서 한번 다녀가라, 할 말이 있다.’
간단하게 보낸 문자였는데 그 문자를 보자 진철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분명 명혜에 관한 소식일 것이
라는 것을 직감한다. 지난 번 명철에게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면서 명혜에 대한 소식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부탁을 했기 때문이었다.
진철은 부지런히 걸어서 집으로 간다. 이미 사우나에서 씻었기에 행사 때문에 입었던 정장을 벗고 간편한
청바지와 티 차림으로 되돌아 나와 버스 터미널로 간다. 아무래도 빙 돌아가는 열차 보다는 고속도로로 가
는 버스가 빠르기 때문이었다. 지금 바로 가면 점심때 조금 지나면 명성에 도착하게 될 것이었다.
진철은 버스표를 구입 한 후 명철에게 문자를 보낸다.
‘오전 9시 버스로 내려감. 12시 조금 넘으면 도착 가능함’
커피를 한 잔 뽑아서 마신다. 호흡을 크게 한다. 그렇지만 떨리는 가슴은 안정이 되지 않았다. 분명 명철은
명혜에 대한 확실한 소식을 알았을 것이다. 어쩌면 오늘 저녁이라도 명혜를 만날지도 모른다. 만일 오늘 저
녁에 명혜를 만나게 된다면 처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아마 진철이 태어나서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며 떨
리는 것은 경험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어릴 적 부모님이 명혜 부모님과 함께 사고로 돌아가셨을 때 처음에
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었고 그 다음에 나는 어떻게 살아가나 하는 걱정이 었으며 그 다음이 다시는 부모
님을 보지 못할 것이며 집에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과 그리고 명혜는 어떻게 될까 하는 것들이었다.
그 후에는 보육원 생활을 하면서 명혜를 보호해야 한다는 절박한 사명감과 오직 세상에 아는 사람은 명혜
와 자기 둘 뿐이기에 어떻게 하든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뿐이었던 것이다.
버스가 수원을 벗어나 동 수원 진입로를 거쳐 동해 고속도로에 올라가자 진철의 눈에 가을이 보이기 시작
하였다. 하긴 낮에 자고 밤에 일을 하는 입장에서 계절을 만난다는 것은 덥다거나 춥다거나 비가 온다거나
눈이 온다는 것을 통하여 느끼는 것일 뿐 오늘처럼 나뭇잎이 단풍으로 물들어 간다거나 바람에 낙엽이 하
나 둘 떨어진다는 것을 통한 계절을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논에도 일부는 추수가 끝나서 벼 밑 둥만 보였고 그런 논에는 새들이 머리를 쉬지 않고 조아대고 있었으며
일부의 논에는 트랙터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그 곁에는 벼 포대를 받아내기 위한 농부가 바쁜 걸음으로 쫓
는 모습이 보인다.
버스가 문막 휴게소로 들어간다.
-승객 여러분 잠시 휴식 시간을 갖겠습니다. 지금 시간이 열시 40분, 열한시에 출발하겠습니다. 버스 위치와 시
간을 잘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버스가 휴게소에 멈추어 서자 승객들이 우르르 내려 화장실 쪽으로 몰려간다. 진철 역시 소변이 생각나서
화장실로 들어간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서자 악취를 없애기 위한 향냄새가 코로 스며들고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음악이 흘렀다. 화장실에서 나온 진철은 매점에 들러 캔 맥주를 하나사서 마셨다. 떨리는 가슴을
억제하기 위해서였다.
그 작은 아이. 심술궂은 아이가 식판을 툭 쳐서 국물에 옷을 버려도 눈물만 글썽일 뿐 아무소리도 못하던
아이. 명철이 뱀으로 짓궂게 그랬어도 주저앉아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울기만 하던 아이. 내일 헤어진다
는 말을 들으면서도 어깨가 흔들릴 정도도 울면서 소리조차 내지 못하던 아이. 얼마나 변했을까? 키는 얼마
나 될까? 나보다 크려나? 몸은 얼마나 날씬할까? 허리는? 화장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어디에서 살고 있을
까? 직업은? 결혼은?
수많은 생각들이 진철의 머릿속을 드나든다. 명성이 가까워 오면 올수록 진철은 이제 곧 명혜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착각 속을 헤맨다.
버스가 명성 시에 들어서고 잠시 후 터미널에 도착하자 장시간 버스 안에서 시달렸던 승객들이 하나 둘 내
리고 진철 역시 운전기사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를 하며 내렸다.
‘어떻게 할까. 점심을 먹고 명철에게 갈까? 아니면 그냥 갈까?’
생각을 하면서 담배를 꺼내는데 앞에 여자가 다가오면서
-명훈씨!
하는데 얼굴을 보니 지난 번 함께 밤을 보냈던 최양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그런데
-그게요.
최양은 말을 하면서 진철의 팔에 자신의 팔을 낀다. 진철은 선뜻 팔을 빼지 못하고 엉거주춤 거리자
-사장님이 전화를 하셨더라구요.
-전화를?
-예! 사장님은 지금 여기 안계시거든요. 명훈씨가 오늘 내려오실 거라고는 생각을 못 하셨나봐요. 전에 약속한
일이 있어서 영덕에 친구 분들과 부부모임을 가셨거든요. 명덕 대게도 먹고 골프도 치신다고 하면서, 내일 오실
텐데 명훈씨 오신다는 문자를 받고는 나한테 전화를 하셨어요. 오늘 잘 모시라고, 내일 오전에 오실 거예요.
실수였다. 차라리 전화를 해 보고 움직일 것을, 그렇다고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진철은 할 수 없이
오늘 명성에서 자고 내일 명철을 만나고 가야하겠다고 생각을 굳힌다.
-점심식사 하셔야지요?
-그런데 어떻게 이 시간에?
-9시 버스를 타신다고 하셨잖아요? 터미널에 전화를 해 보았거든요. 수원에서 오는 버스가 그리 많지 않아서
금방 시간을 알 수 있었어요. 그래서 20분 전에 여기 와서 기다렸거든요.
최양은 그렇게 말하면서 팔짱낀 팔에 힘을 주며 밖으로 진철을 이끌더니 택시 승강장으로 가서 뒷자리의
문을 열더니 타라고 밀어 넣는 바람에 얼떨결에 올라타자 곧 최양도 올라타 진철 곁에 바짝 다가앉으며
-아저씨! 자인리로 가주세요. 거기 생고기집 아시지요? 거기 갈 거예요.
-예! 자인리 생고기집 말이지요? 알았습니다.
-자인리를 간다고?
진철은 말끝에 요 자를 붙이지 않은 것이 마음에 조금 걸렸으나 자신에게 그렇게 가까이 대하는 여자에게
경어를 쓰는 것이 더 불편 할 것 같아서 말 꼬리를 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