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나비 히트는 모두가 부처님의 공덕” 독실한 불자였던 어머니의 조언으로 90년대 불자가수 초대 회장직 역임 군부대·교도소 등 위문공연 ‘음성포교’
2000년 김흥국 장학재단 설립하고 지금까지 150여 학생들에게 장학금 전달 5년전부터 원로가수 후원금 전달도
2015년 신곡 ‘불타는 금요일’ 발표 예정 ‘사찰 순회 노래자랑’등 불자가수 양성 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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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자가수 김흥국 씨는 … 1959년 서울 강북구 번동에서 태어났다. 서라벌고등학교 시절 밴드부 생활을 했고, 해병대 전역후 그룹 ‘오대 장성’을 결성해 활동했다. 1985년 발라드 풍의 노래 ‘창백한 꽃잎’으로 솔로로 전향했고 1989년 3집 ‘호랑나비’를 발표 전성기를 맞았다. 1992년에는 ‘59년 왕십리’로 정통 트로트 장르까지 선보이며 인기가도를 이어나갔다. 이후 라디오 진행은 물론 영화와 드라마에도 다수 출연했으며 월드컵 때마다 국가대표 축구선수를 위해 열띤 응원을 펼쳐 ‘월드컵 가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현재는 ‘김흥국 장학재단’을 통해 매년 소외 이웃에게 장학금을 전해 주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저서로는 〈김흥국의 축구이야기〉(2002년), 〈김흥국의 우끼는 어록〉(2005년) 등이 있으며 주요 수상으로는 MBC 10대가수상과 KBS 가요대상 올해의 가수상(1989년), 국민봉사 장려상(1993년), 자랑스러운 서울 시민상(1996년), MBC 라디오 골든 마우스상(2010년) 등이 있다.사진=노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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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새천년을 맞은 대한민국은 온통 축제의 분위기였다. 하지만 불자 가수 김흥국 씨는 이 축제의 현장을 뒤로하고 강원도 양양 낙산사 홍련암에서 새천년을 맞아 한 배 한 배 절을 올리고 있었다. 불자로서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그러는 동안 문득 한줄기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호랑나비로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이제는 이 사랑을 세상에 돌려주어야겠다”
이렇게 원을 세운 김 씨는 장학재단을 만들었다. 이름하여 김흥국 장학재단. 그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15년 동안 장학금을 지급했다. 불자로서 회향의 의미를 되새기며 묵묵히 이타행을 실천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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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흥국 씨는 2000년부터 15년 동안 150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왔다. 사진은 15회 장학금 전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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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는 바 없이 나누면 행복해요
“매년 10명~11명의 학생들을 지원해 주었으니 150명 이상이 장학금 혜택을 받았어요. 처음 시작할 때만해도 이렇게 오랜 시간 장학금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 못했어요. 장학금 시즌이 돌아오면, 1년에 한번씩 후원금 통장을 찍어 보는데 15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후원금을 보내주시는 분도 여럿 돼요. 너무 감사한 일이예요. 또한 지인들도 도와주시는 분이 계시죠. 그만큼 이제는 많이 알려져 든든한 후원자들이 생겼어요. 주변에서 법인화를 권하기도 하는데 좀더 상황을 지켜보면서 사단법인으로의 전환을 추진할 생각입니다.”
5년 전부터는 원로가수 후원도 시작했다.
“한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이제는 연로하셔서 거동도 힘들고 세상 사람들의 기억에 잊혀져 쓸쓸하게 남으신 원로 가수분들을 보면서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그분들을 조금이나마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에서 1년에 2명 씩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김 씨는 그동안 각종 홍보대사로도 앞장서 왔다. 사회복지법인 승가원과 생명나눔실천회 등 불교계 활동은 물론 독도 홍보대사, 한국자유총연맹, 2022월드컵 유치위원회, 국방홍보원, 제1회 세계 해병 전우인 축제 등 다양한 홍보대사로도 활동을 해왔다. 특히, 이천 승가원자비복지타운을 지인들과 함께 방문해 승가원 회원들과 축구경기를 하고 중식 요리사를 초빙해 요리한 중국음식을 직접 배식하는 등 장애우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 주목받기도 했다.
이처럼 세상과 나누는데서 행복을 느끼는 그가 자비행을 처음 시작한 것은 3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축구를 포기하고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해병대 전역후 보컬활동을 시작했어요. 없는 돈에 앨범도 몇 장 냈지만 별로 주목 받지 못했어요. 그때 제게 음악을 가르쳐주었던 선배의 딸 정아가 불치병에 걸렸어요.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저도 돈이 많지 않을 때였지만 먹을 거 사가서 노래도 불러주곤 했는데 정아가 너무 좋아했어요. 당시, 배따라기 이혜민 씨가 만든 ‘정아’라는 노래를 부르며 모금 공연도 다녔죠.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MBC 인간시대에 ‘정아의 겨울 일기’라는 제목으로 사연이 방영되기도 했어요.”
이후 그는 이혜민 씨가 작사작곡한 ‘호랑나비’로 일약 스타가 되었다. 사랑을 주제로 하는 노래가 주를 이루던 가요시장에서 호랑나비는 신선한 가사와 특이한 모션으로 대중들의 마음을 한눈에 사로잡았다. ‘호랑나비의 강타’라고 할 만큼 80년대 후반 가요계를 휩쓸었던 그는 호랑나비로 ‘10대 가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눈 뜨고 일어나보니 스타가 되었다는 말이 있잖아요. 당시에 제가 그랬어요. 사람들이 개천에서 용 났다고 그랬어요. 하지만 저희 어머니는 모두가 부처님의 공덕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나에게 불심을 심어준 ‘어머니’
호랑나비 히트 이후 라디오와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가수는 물론 방송인으로서의 자질도 인정받게 된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축구를 너무 좋아했던 저는 축구선수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 그 꿈을 져버릴 수밖에 없었죠. 이후 서라벌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서라벌 예대 선배들의 축제 공연을 보게 됐어요. 또다른 세상을 경험했고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하게 됐죠. 저희 어머니는 보따리 장사도 하고 구멍가게도 하시면서 어렵게 6남매를 홀로 키우셨어요. 어머니는 저한테 칭찬을 많이해주셨어요. 가난해서 해주는 것도 없는데 늘 밝고 긍정적이라며 언젠가는 크게 성공할 거라 말씀하시며 늘 용기를 주셨죠.”
대한불자가수회 초대회장직 제안을 받았을 때 망설이던 그에게 부처님의 은혜를 갚을 좋은 기회라고 적극 권유했던 이도 바로 어머니였다.
“불교방송 개국을 하면서 대한불자가수회가 만들어졌고 회장직을 제안 받았어요. 당시 무명에서 벗어나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 때여서 스케줄도 바빴고 더구나 30대 초반의 제가 회장직을 잘할 수 있을지 고민도 많았죠. 그런데 어머니께서 ‘호랑나비가 잘 된 건 네 덕이 아니라 부처님 공덕이다. 내가 전국 사찰 돌면서 기도 많이 했다. 모두가 부처님 세상 만드는 좋은 기회이자 더 큰 사람 되라고 부처님께서 주신 기회이니 한번 열심히 해보라’며 적극 권하셨죠. 어머니께서는 늘 부처님 백으로 살고 있음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셨어요. 지금도 그 말씀을 늘 가슴에 안고 살고 있습니다.”
그는 대한불자가수회 초대회장은 물론, 4대와 9대 회장까지 역임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특히 9대 회장 취임 당시에는 상임부회장으로 가수 이승철이 자문위원으로 엄정화, 김민종, 옥주현, 장윤정 등 유명 가수들과 함께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또한 군부대와 전국 교도소 위문공연, 불우이웃 돕기와 일일찻집 등을 하며 이웃과 나누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1990대 초 동국대 대학원에 입학해 불교음악을 공부하기도 한 그는 여전히 음악 분야에 관심이 없는 불교계의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불자 가수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무대가 없다고 하는데 사실 불교 방송 매체들이 조금만 신경을 써준다면 충분히 불자가수들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불교방송에서 버스 한 대 정도만 제공해주고 불자가수들 태워서 전국 산사를 돌면서 산사음악회나 사찰노래자랑을 하면 신도님들도 좋아할 것이고 불자가수들도 설 수 있는 무대가 많아지겠죠. 음악 프로그램만 잘 만들어도 방송국이 부흥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불교 관련 방송 매체들이 이런 점을 고민해 보았으면 합니다.”
이렇게 왕성하게 활동하는 동안 그를 불자로 키워준 어머니가 임종을 맞게 된다.
“너무 고생을 많이 하셔서 원 없이 어머니에게 해드리고 싶었어요. 용돈도 많이 드리고 동네 잔치도 해드리고 이제는 마음껏 쉬시라고 했는데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셨죠. 아버지를 성북구 미타사라는 절에 모셔서 어머니도 그쪽에 모시고 싶었어요. 하지만 불심이 깊으셨던 어머니는 자신을 화장해서 뿌려 달라고 유언을 남기셨죠. 어머니의 유훈에 따라 미타사에서 49재를 마치고 인연이 있던 속리산 성불사에서 탈상을 했어요. 당시 집전을 진행했던 스님께서는 이제 어머니와의 인연이 다했으니 잘 보내드리고 앞으로 좋은 활동 많이 하라고 격려해주셨어요. 어머니는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심어주신 불성은 제 마음속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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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구선수 박지성 씨에게 선물 받은 축구 슈즈와 공을 경매에 내놓아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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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나의 힘
김흥국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또 하나 있다. 바로 축구다. 한때 축구선수의 꿈은 접었지만 그는 영원한 응원단장으로 남았다. 특히, 2002년 월드컵 당시 우리 대표팀을 응원하며 봉은사에서 2002배를 하며 대한민국의 승리를 기원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새벽 3시부터 시작해 5시간 동안 2002배를 했죠. 스님한테 죽비로 맞아가면서 2002배를 힘들게 마쳤아요.”
우리 축구 대표팀이 7회 연속 월드컵에 진출하는 동안 그는 빠짐없이 응원을 다닌 것으로도 유명하다.
“축구 선수 가족들도 이렇게 연속해서 월드컵 응원을 다니는 경우는 없었다고 해요. 저는 방송을 포기하면서까지 월드컵 응원을 다녔어요. 물론 아내한테 혼도 났죠. ‘꼭 당신이 가야 하느냐’하고 말이죠. 하지만 저는 정말 제가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바라는 바가 없어요. 대표팀을 응원하고 우리 축구를 응원하는 일이 정말 신나고 보람되고 좋아요. 또 선수들 중에 불자들이 있다면 제가 더 힘을 실어줄 수도 있고 말이죠. 저는 국내 팬들이 우리 선수들 성적을 갖고 비난하는 것이 안타까워요. 사실 7회 연속 월드컵에 진출하는 것만도 대단한데 말이죠. 이제는 제가 안 가면 안 된다는 사명감이 생길 정도로 영원한 대한민국 대표 응원단장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열정적인 축구 응원으로 그는 대한축구협회 회장이자 새누리당 의원이던 정몽준 씨와 인연을 맺었고 오랜 시간 우정을 다져왔다. 하지만 이런 관계가 한때 그에게 시련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가 한창 MBC 라디오 ‘2시 만세’를 진행하던 중 정치적 이유로 하차를 해야했기 때문이다.
“2시대 시청률을 장악해오던 MBC가 SBS에서 밀리면서 오후 2시대를 살리기 위해서 저를 다시 불렀어요. 저는 다른 방송을 접고 MBC로 다시 오게 됐죠. 그런데 느닷없이 개편 시기도 아닌 때에 하차하라는 통보를 받았어요. 황당했죠. 저는 다음 개편 때까지만이라도 기다려 달라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당시 연예인들이 정치적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방송에서 하차하던 때인지라 매우 민감한 문제였죠. 하지만 한 명의 정치인과 오랜 친분이 정치적 입장이 되어 버렸고 그런 이유로 느닷없이 하차 명령을 받으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어요. 저는 부당하다는 이유로 1인 시위를 벌였죠.”
당시 김 씨는 삭발을 감행했다. 대구 남지장사 주지 각운 스님이 직접 삭발식을 진행해 언론의 화제를 모았다.
“주변 사람들이 진행자가 방송사를 상대로 1인 시위를 하는 경우는 처음이라며 걱정 반 우려 반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어요. 저는 결국 삭발을 감행했죠. 기자들한테 앞으로 흥국사 나비 스님이라고 불러 달라고 했어요.”
그는 1996년과 1999년 MBC 연기대상 라디오부문 우수상과 최우수상을 각각 수상했으며, 2010년에는 제17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 라디오진행상, MBC 라디오 골든 마우스상까지 받을만큼 진행자로서 능력을 인정받은 바 있다. 이렇게 아쉽게 라디오를 떠났지만 지금도 가장 하고 싶은 방송이 라디오 진행이라고 한다.
“불교방송 개국 당시에는 108가요라는 가요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어요. 이후 각종 공중파 라디오에서 진행자로 활동하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죠. 그래서 라디오는 제 고향 같은 곳이예요. 지금도 기회가 된다면 라디오 진행을 다시 하고 싶습니다.”
얼마전 캐나다,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을 순회하며 교민초청 공연을 마치고 돌아왔다는 그는 교민들과 만나 공연하면서 너무 행복했다고 말한다. “교민들이 제가 가니까 너무 반가워 해주셨어요. 제 노래를 듣고 고국의 향수를 느낀다고 좋아하셨죠.”
그는 해외에서도 한국 사찰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곧 고등학생이 되는 제 딸아이도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어요. 캘리포니아 얼바인이라는 도시에 살고 있죠. 그런데 근처에 절이 없어요. 아내와 딸은 교회는 못가니 사람도 못 사귀고 집에만 있는데 제가 경전 가져다주면 읽고 그렇게 생활하고 있어요. 해외에서 교포들이 갈만한 절이 많지 않은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앞으로 해외에 한국 사찰들이 많이 생겼으면 합니다.”
“종교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크다. 불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말하는 그는 “항상 마음속에 부처님이 계신다”며 불자로서의 자부심을 드러냈다. 새해에는 신곡 ‘불타는 금요일’로 다시 대중들을 찾아온다는 불자가수 김흥국 씨는 신곡으로 대한민국을 ‘불금’으로 만들고 싶다는 의지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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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가원 회원들에게 짜장면 보시하며 웃고 있는 김흥국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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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좋은 일 많이 하는 가수 김국씨 앞으로도 많은 활동 기대합니다. 불자가수회도 활성화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