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내린 후에 도심에도 낙엽이 수북하다. 날씨가 쌀쌀해졌다. 가을의 끝자락과 겨울의 초입, 만추(晩秋)다. 시월의 마지막 날에 대구 팔공산 동화사를 빗속에 찾았는데 주변
주차장에는 관광버스와 자가용이 그득하다. 대웅전에는 스님의 불경소리와 함께 불공을 드리는 어머니들로 가득했다.
수능시험을 얼마 앞둔 우리 어머니들의 자식에 대한 지극정성이요, 한없는
사랑의 실천이다. 자식은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산다.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고, 우리 집에는 또 다른 어머니인 집사람의 손길로 성장한 자녀들이 있다. 늦가을 우중(雨中)에도 산사(山寺)에서 자식을 위해 지극정성으로 불공을 드리는 어머니들을 보며 대한민국 어머니의 그 위대함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어머니는 위대하고 여성은 강하다. 우리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사랑의 손길을 펴는 여성들도 많이 있다. 한없는 희생과 봉사의 정신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얼굴 없고 이름 없는 기부천사’들의 선행(善行)에는 가슴이 뭉클해진다.
한국 어머니들의 참모습한국의 어머니는 위대하다. 신사임당(申師任堂)하면 우리나라 현모양처(賢母良妻)의 대명사다. 그는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결혼 후에도 강릉에 살면서 아들 율곡(栗谷)을 훌륭히 길러 냈다. 대관령 옛길에 있는 그의 사친비(思親碑)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늙으신 어머니 강릉에 두고(慈親鶴髮在臨瀛)/외로이 서울로 가는 이 마음(身向長安獨去情)/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回首北村時一望)/ 흰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白雲飛下暮山靑).’ 이는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으로 그가 늙으신 친정어머니를 남겨두고, 한양 시댁으로 돌아가던 중 대관령 중턱에서 고향 강릉을 내려다보며 지은 시(詩)이다.
대관령 산아래 마을이 고향인 소설가 이순원의 어머니에 대한 회고는 한국 어머니의 또 다른 위대함을 본다. 그는 중학생 시절 학교 다니기가 그렇게도 싫었다고 한다. 어느 날, 그가 마지못해 책가방을 들고 나오니 어머니가 지게작대기를 들고 마당에 서 계시더란다. 어머니는 아들 앞에 서서 걸으며 산길 풀잎마다 맺힌 찬 이슬을 지게작대기로 털어내 주었다. 아들이 학교 길에 다른 길로 새지 않기를 바라며 아침 등굣길 찬 이슬을 몸소 털어주었던 것이다. 아들 걱정으로 가슴 졸이던 어머니가 할 수 있었던 최대한의 사랑의 손길이었다.
지난 9월에는 ‘어느 치매 할머니의 보따리’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을 울렸다. 어느 파출소에 ‘할머니가 보따리를 들고 서성거린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경찰이 출동했는데, 치매기 있는 할머니가 보따리 두 개를 든 채로 길을 잃은 것이었다. 인근의 할머니일 것으로 생각하고 경로당과 주민센터에 수소문했으나 허사였다. 한참 뒤 할머니가 자기 이름과 사는 동네를 기억해 낸 덕분에 어렵게 가족과 연락이 됐다. 경찰이 할머니를 가족에게 인계하러 모시고 간 곳은 차로 30분 이상 걸리는 어느 병원이었다. 할머니의 딸이 제왕절개로 손녀를 출산하고 입원해 있었다. 할머니의 보따리 하나에는 이불이, 다른 하나에는 밥과 미역국이 들어 있었다. 딸의 산후 구완에 쓰려던 밥이며 미역국이었지만 이미 다 식어 버린 뒤였다. 딸은 말없이 눈물을 흘렸고, 간호사들도 눈시울을 감추며 손뼉을 쳤단다. 치매에 걸렸음에도 자식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 변치 않는 사랑이었다.
‘이름과 얼굴 없는‘ 기부 천사들한국 사회에는 기부 문화가 선진국처럼 발달돼 있지 않다. 그럼에도 각박한 세상에 보이지 않는 사랑의 손길을 펴는 사람들이 있어 가슴이 따뜻해진다. 특히 ‘익명의 기부자들’에게 눈길이 가는 것은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실천자’이기 때문이다.
2010년 1월, 카이스트 교무처장인 이광형(현 미래전략대학원장) 교수에게 모 은행으로부터 “기부를 원하는 할머니가 계신데 한번 만나보라”는 전화가 걸려 왔다. 이 교수와 마주 앉은 여든다섯의 할머니는 평범했고 수수했다. 이름도 밝히지 않았다. 할머니는 “재산이 좀 있는데, 좋은 곳에 쓰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지만, 주위에 맡길 데가 없다는 것이었다. “대학에 맡기면 딴 데 쓸 수도 있어서 재단을 만들까 고민 중”이라고도 했다.
이 교수는 “재단은 떠나시고 나면 누가 운영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면서 “한국의 미래는 과학에 있으니, 과학 인재를 위해 그 돈을 쓰자”고 설득했다. 그해 여름까지 7~8차례의 만남이 이어진 끝에 할머니는 카이스트에 기부를 약속했다. 이때만 해도 기부금이 얼마인지 짐작도 못했다. 같은 해 7월14일 카이스트에 전달된 돈은 현금 100억원이었다. 할머니는 ‘외부에 알리지 않는다’는 조건만 내걸었다.
서남표 당시 카이스트 총장과 이 교수가 “기부는 알려야 확산된다”고 설득한 끝에야 가명으로 기부 사실만 발표할 수 있었다. 가명은 할머니의 성 ‘오’에 호인 ‘이원’을 썼다. 워낙 자신을 숨기다 보니 이 교수나 카이스트 발전기금 관리자들조차 오이원 할머니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다. 카이스트 관계자는 “전남 순천 출신으로 아들 하나 딸 둘을 두신 분”이라면서 “남편이 의사였는데 20년 전 사별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이 교수는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대부분
채권을 사 모으면서 큰 돈을 벌게 됐다고 하더라”면서 “시장에 가서 장을 보고, 손자 손녀들을 돌보는 검소하고 평범한 생활을 하셨다”고 말했다. 카이스트 측도 나중에 알았지만 100억원은 할머니의 전재산이었다.
기부 과정에서 흔히 생기는 가족 간의 잡음도 없었다. 할머니는 “가족들이 동의했고, 손자들도 좋아했다”고 전했다. 오 할머니는 기부 사실이 알려지면서 2013년에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지만, 훈장조차 가명으로 받았다. 카이스트는 기부금으로 할머니의 호를 딴 ‘이원 조교수
제도’를 만들었다. 갓 부임해 기반이 없는 젊은 조교수의 연구비로 1인당 3년 동안 6000만원을 지원하는 제도다. 2011년 3명으로 시작, 2014년에는 수혜자가 20명으로 늘었다. 앞으로도 매년 20명씩의 ‘이원 조교수’를 뽑을 계획이다.
‘이름 없는 기부천사’인 오 할머니는 지난 11월3일 숙환으로 세상과 작별했다. 89세. 카이스트는 교내에 빈소를 만들어 오 할머니의 숭고한 뜻을 기렸고, 학생과 교직원들의 애도 발길이 이어졌다. 이 교수는 “만날 때마다 ‘나라가 발전하려면 기술이 발전해야 한다. 기술이 발전하려면 카이스트가 발전해야 하지 않느냐’고 당부하셨다”면서 “그 뜻이 이뤄지는 것을 하늘에서라도 보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또 다른 ‘얼굴 없는 기부천사’의 사례가 있다. 매년 설과 추석에 해마다 두차례씩 10여년 동안 ‘사랑의 쌀’을 기부하는 충남 논산의 ‘얼굴 없는 천사’의 얘기는 유명하다. 지난 추석 때에도 "올 추석에도 어김없이 쌀을 보내오셨네요. '더 기부하지 못해 아쉽다'라는 말만 전해 달라며…"라는 편지와 함께 10㎏ 들이 쌀 500포대(1천여만원 상당)가 논산시 연무읍사무소 주차장에 도착했다. 이 기부자는 해마다 명절을 앞두고 연무읍사무소에 쌀을 보내고 있다.
미곡처리장 주인 김석겸(60)씨는 "기부자는 읍내의 한 지인을 통해 쌀을 주문하고 송금하는 방법으로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며 "어린 시절 어렵게 살던 고향을 떠나 수도권에서 건설업 관련회사를 운영, 자수성가한 분으로만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얼굴이 알려지면 생색만 낸다는 소릴 들을 수 있어 절대로 기부자를 비밀로 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얼굴없는 천사'의 이같은 기부는 10여년전부터 시작됐다. 가난한 고향 주민에게 보내 달라며 해마다 설과 추석 명절을 앞두고 1년에 두 차례씩 쌀 300포대를 지인을 통해 기부하고 있다. 그동안 연무읍사무소에서는 기부자를 수소문해 신분을 밝히고 이 사실을 알리려 했으나 지인을 통해 '조그만 일에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극구 사양해 기부천사를 찾지 않기로 했다. 전민호 연무읍장은 "기부받은 쌀은 각 마을 이장이 추천한 복지 사각지대 주민과 혼자 사는 노인에게 전달하고 있다"며 "이런 분들이 있어 우리 사회가 훈훈하다"고 말했다.
전주시, '얼굴없는 천사' 축제 개최‘얼굴없는 천사’의 문화적 지역자산을 특화해 발전시킨 대표적 사례가 있어 주목된다. 지역사회의 고유자산인 '얼굴없는 천사'의 기부정신을 테마로 하여 천사 마을의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행사를 기획하고 주도한 '제4회 천년전주 천년사랑 축제'가 지난 10월2일 전북 전주시 시청앞 노송광장에서 노송동 및 중앙동, 진북동, 인후1,2,3동 주민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됐다.
이번 축제는 그동안 노송동에서 매년 연말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14년째 남모르게 이웃사랑을 실천해오고 있는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을 되짚어보고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 주민 주도로 구성된 천사축제조직위원회(위원장 임현)가 주관이 되어 개최한 축제로서 의미가 있다. 천사축제는 이웃 주민 상호간의 소통과 화합을 통해 지역공동체를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역의 크고 작은 문제를 스스로 풀어갈 수 있는 자력재생의 기반을 마련해 가는 동시에 지역의 고유자산인 '기부천사'의 미담을 더욱 더 알리고 뜻을 기리기 위한 마을축제로, 2011년에 처음 개최됐다. 회를 거듭할수록 주민들의 참여가 늘고 있어 지역주민에게는 소통의 장이 마련되고 자긍심을 느끼는 문화적재생의 대표적 시범사례로 의미가 있다. 특히 이날 참석자들이 참가비(1000원)를 내고 등록하면 여기서 모인 기금 전액이 천사동네의 어려운 이웃을 후원하는 천사를 주제로 한 행사가 이목을 끌었다.
전주시 관계자는 "매년 10월4일을 천사(1004)의 날로 정해 지역주민이 주인이 되어 문화적재생의 밑거름이 되는 작은 마을축제가 마련됐으며 익명의 나눔을 꾸준히 실천하는 '얼굴 없는 천사'처럼 자신이 하고자하는 이웃사랑 실천의 장을 주민스스로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한편 전주시는 현재 천사기념비가 설치된 노송동주민센터 건물 옆 부지 2필지를 매입하여 천사마을의 유래, 역사기록, 쉼터 등 천사마을 주민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담아낸 기부천사 쉼터를 조성할 계획으로 추진 중에 있다.
진정한 베풂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 ‘욕망없는 선행’
최근 몇몇 연구에서 남을 위해 돈을 쓴 사람이 자신을 위해 돈을 쓴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고 보고되고 있다. 그중에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에서 행한 실험은 여러 기사와 책을 통해 잘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2008년 ‘사이언스(Science)’에 수록된 이 연구 결과의 교훈은 ‘행복 하고자 하면 베풀어라’였다.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물질적 풍요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예전보다 행복한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심지어 생활고를 비관한 자살이 잇따르고 있다. 얼마전에도 인천의 일가족 3명이 생활고에 시달리다 안타
까운 선택을 했다. 돈이 없어 마이너스 인생이라는 유서 내용은 당사자의 절박한 심정을 대변한다.
평소에 힘들어도 마음 한편에서 희망의 씨앗이 자라난다. 새로운 꿈을 꾸며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다진다. 하지만 계속되는 실패와 그로 말미암은 가족의 어려움이 당사자를 사면초가에 빠뜨린다. 더는 갈 곳도, 피할 곳도 없을 때 그들은 안타까운 선택을 한다.
우리 주변에는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이웃이 의외로 많다. 이에 대한 복지정책의 보완이 절실하다. 국가 차원의 정책과는 별개로 이웃에 대한 개개인의 따뜻한 관심이 때로는 더 효과적이다. 만약 주변을 돌보는 일을 남의 일로만 여긴다면, 마음이 가난하다는 방증이다. 자포자기 상태에 있는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행위는 생명을 살리는 길이다. 이웃도 살리고 나 자신도 산다.
기부와 행복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에서 특징적인 내용이 있다. 첫째, 기부에 의한 행복은 개인의
수입과 무관하다는 점이다. 많든 적든 줄 수 있는 마음이 행복하다. 무엇보다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그냥 돈을 줘버리는 사람이란다. 그런 면에서 익명의 기부자들은 내밀한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2000여년 전
인도에서 성립된 카르마
요가(Karma-Yoga)는 베풂의 방식을 가르친다. 희생과 봉사하는 것이 행복의 길이라 설파한다. 대신에 베풀지 않은 것처럼 베풀라고 한다. 진정한 베풂은 결과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 않는 ‘욕망 없는 선행’이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라는 성경의 말씀과도 같다. 그러려면
성공과 실패에 초연한 평정한 마음, 모든 존재가 곧 나와 같이 소중하다는 자각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이성적인 판단과 선택은 몸과 마음이 건강할 때 가능하다. 그런데 일종의 자포자기 상태에 빠지게 되면 림프구가 현저히 감소한다. 외국의 한 연구에 따르면 이혼 또는
별거한 부부, 주변과 교제가 없는 홀로 사는
노인, 실직자에게서 그러한 결과가 나타난다. 림프구는 백혈구의 한 형태로 신체 내 면역 기능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결국 몸과 마음이 약화되는 악순환에 빠진다. 이성적인 판단력이 흐려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성공과
행복이란 어떤 의미일까.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은 이렇게 단언했다.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평화주의자 스콧 니어링은 100번째 생일날 이웃에게서 짤막한 편지를 받았다. 거기에는 ‘당신 덕분에 세상이 좀 더 나아졌습니다’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날씨가 점점 추워진다. 얼어 있는 이웃의 마음을 남들 모르게 녹여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