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나는 누구냐?"
강학종 / 하늘교회 목사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통하여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① 우리가 죄에서 나오는 것이다.
② 우리가 죄에서 최대한 멀어지는 것이다.
둘 중에 어느 쪽입니까?
우리를 죄에서 꺼내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를 죄에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뜨리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죄를 안 짓기에 급급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죄의 반대쪽으로 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은 지 10년 됐다”라는 말은 “죄에서 나온 지 10년 됐다”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쪽으로 나아간 지 10년 됐다”라는 뜻이어야 합니다.
중고등부를 지도하던 시절의 일입니다.
“이런 것도 죄에요?”라는 질문을 가끔 받았습니다.
기왕이면 “제가 무엇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라는 질문을 받고 싶은데, 그런 질문은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어떤 것이 죄인지 아닌지가 궁금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학 신입생이 첫 시간에 교수님께 “수업은 몇 번까지 빼먹어도 F가 안 나옵니까?”라고 묻는 격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은 죄인지 아닌지 아리송한 일에 신경 쓸 이유가 없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자살을 고민하고 있는 자매를 상담한 적이 있습니다.
그 자매가 물었습니다.
“혹시 수녀님은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없나요?”
테레사 수녀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할 만큼 한가하지 않습니다. 그런 미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인도에 와서 저를 한 달만 도와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우리 몸값에 비하면 너무 터무니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일에 신경 쓰는 것이 우리 몸값에 어울리는 일인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에 남녀가 길에서 말다툼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침 횡단보도였기 때문에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느라 본의 아니게 몇 마디를 들었습니다.
둘이 똑같은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남자도 여자에게 “너에게 난 누구냐?”라고 물었고, 여자도 남자에게 “난 너에게 누군데?”라고 물었습니다.
서로 상대방에게 먼저 대답해보라고 다그쳤습니다.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었기 때문에 누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모릅니다.
대신 머릿속에서 다른 상상을 했습니다.
제가 예수님께 “예수님, 저는 예수님께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면 예수님이 저에게 “너에게 나는 누구냐?”라고 반문하는 상상입니다.
제 질문에 예수님이 “너는 나에게 내 생명 그 자체다. 내가 너를 위해서 내 목숨을 내놓았다.”라고 답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소름이 끼쳤습니다.
예수님이 “그럼 너에게 나는 누구냐?”라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수님의 생명인 것처럼 예수님 역시 제 생명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하는 것은 알겠는데, 그런 답을 말하기에는 차마 면목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너에게 나는 누구냐?”라고 물으면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