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7월 마릴린 먼로는 세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상대는 '세일즈맨의 죽음'을 쓴 희곡 작가 아서 밀러였다. 조 디마지오와의 결혼이 전설적인 스포츠 스타와 여배우의 만남이었다면, 아서 밀러와의 결혼은 이 시대 최고 지성인과의 만남이었기에 더욱 화제가 되었다. 어울리지 않아 보인 두 사람은 여러 공식 모임에서 만난 인연을 통해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아서 밀러는 마릴린 먼로에게 팬의 한사람으로서 진심으로 마릴린 먼로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그녀를 위로했고, 먼로는 그의 자상함에 저절로 반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자신을 섹스심벌이 아닌 인격체로 대해준 아서 밀러와 사랑에 빠진 먼로는 결혼을 결심하게 되고, 결혼 이후에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 아서 밀러의 종교인 유대교로 개종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행복했던 순간은 잠시, 아서 밀러는 마릴린 먼로가 스타 시절부터 겪어온 스트레스와 신경쇠약을 받아주는데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관계 완화를 위해 두 사람은 아이를 가지려 했지만, 임신한 지 석 달만에 유산하게 되면서 둘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3년 반 넘게 마릴린 먼로의 정신병을 옆에서 지키기 힘겨워했던 아서 밀러는 결국 그녀와 이혼을 선택하게 된다. 마릴린 먼로가 죽은 이후 밀러는 '전락 이후(After the Fall)'라는 희곡 작품을 발표하게 되는데, 이 작품은 그녀와의 결혼 생활을 바탕으로 완성한 작품으로, 끝까지 먼로는 도와주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담긴 이야기였다.
아이를 낳을수 없었던 이유
세 번의 결혼 생활에도 마릴린 먼로가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이유에는 10대 때부터 거듭된 낙태 수술로 자궁이 엉망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조 디마지오, 아서 밀러와 부부 관계를 유지하면서 몇 차례의 임신이 있었지만, 이러한 문제 때문에 번번이 유산으로 끝나고 말았다.
의외의 지성미를 가졌던 그녀
체파 스타의 이미지가 강하게 베여있지만, 사실 마릴린 먼로는 의외의 수준 높은 지성을 가진 스타였다. 초기 작품들이 그녀의 금발 백치미를 강조한 탓에 주변인들이 자신을 '머리 빈 미녀'로 인식한 탓에 지성 콤플렉스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 때문에 그녀는 배움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며, 스타가 된 이후 자신의 지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을 강행했다. UCLA 대학의 문학 강좌를 듣고,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밀턴 등 당대 최고 문호들이 남긴 수백권의 책을 읽는가 하면, 베토벤의 음악을 주로 들으며 나름의 감성을 키우려 했다. 그 덕분에 마릴린 먼로는 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제작사를 설립하고, 할리우드의 명작가 링컨 스테펀스와 친분을 유지하며, 영화인들과의 지적인 만남과 관계를 이어나갔다. 1956년 출연한 [버스정류장]은 코미디와 오락 영화에만 출연했던 그녀가 처음으로 감성 연기에 도전한 작품으로, 의외의 열연을 펼쳐 평단의 호평을 받게 되었다. 어쩌면 아서 밀러와의 결혼도 그와 대화할 수 있는 지성을 가졌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의 마음을 사로잡다
1962년 5월 19일 마릴린 먼로는 미국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케네디 대통령의 45번째 생일 파티에 특별 출연해 'Happy Birthday Mr President'라는 자작곡을 부르게 된다. 이날 그녀는 속옷도 입지 않은 채 꽉 끼는 금색의 실크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 대통령을 비롯한 좌중을 놀라게 했다. 매혹적인 몸짓과 아름다운 그녀의 목소리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모든 이를 홀리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공연이 끝난 이후 케네디 대통령과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는 마릴린 먼로와 만남을 갖게 되었다. 이 만남은 이후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락 내리는 케네디가 형제와 마릴린 먼로와의 염문설로 발전하게 된다.
엄청난 액수에 팔린 그녀의 의상
당시 먼로가 입은 의상은 실크 재질에 수많은 인조 다이아몬드인 라인 스톤과 금박 장식 수천 개가 달린 의상이었다. 마릴린 먼로의 몸매를 꽉 끼게 만든 의상이란 점에서 수많은 수집 애호가들의 관심을 불러온 이 의상은 1999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대략 14억에 팔렸으며, 2016년 11월 줄리어스 옥션 경매에 다시 부쳐져 57억 원에 낙찰되었다.
비참한 그녀의 최후
전 세계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은 아이콘인 그녀는 1962년 8월 5일 그녀의 방 침대에서 나체 상태로 죽은 채 발견되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36세였다. 공식적인 사인은 수면제 과다복용에 의한 사망이었다. 사건 현장에는 수면제 통이 널브러져 있었으며 전화기를 꼭 붙잡은 채 엎드려 있었다고. 실제로 죽기 직전으로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지인은 그때까지 그녀가 죽을 거라고 예상은 전혀 못 했다고 한다. 약물 과용으로 인한 사망이란 점 탓에 그녀의 죽음이 자살인지, 사고인지 분명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경찰은 그녀의 죽음을 자살로 공식 발표하며 사건을 종결지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을 자살로 정의하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 많았다.
그녀의 미스터리한 죽음과 케네디 가(家)와의 미스터리
마릴린 먼로의 죽음은 공식적으로는 자살로 판명되었지만, 대부분의 사건 전문가들은 그녀의 죽음을 누군가에 의한 타살로 보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당시 사건 현장이 지나치게 훼손되었던 점과 그녀를 처음 발견한 의사들이 도착한 지 30분이 돼서야 경찰에 신고한 점을 의문점으로 내세웠다. 여기에 현장을 최초 발견한 사람들의 증언 또한 수많은 의혹을 불러왔다.
처음부터 현장은 조작되었다. 약물 과다복용 자살인 경우 몸이 경련으로 뒤틀리는데 먼로의 시체는 너무나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리고 당시 최초 목격자인 가정부 머레이는 심문 당시 불안한 모습을 보였는데, 심문한 뒤에는 느닷없이 세탁실에서 세탁을 하고 있었다. 집주인이 죽었는데 세탁을 하고 있다는 게 정상적인 사람이 할 짓일까?"
현장에 최초 도착한 경찰관 클레멘츠 경사
"그녀의 시신을 부검한 원본 파일이 사라졌으며, 자살설을 반박할 그녀의 마지막 메모와 증거물이 있었는데, 그 증거물과 관련 보고서 모두 사라졌다."
당시 그녀의 시신을 부검했던 검시관
"일반적인 약물 과다 복용자와는 달리 먼로는 구토도 하지 않았으며, 입에서 약물 냄새도 나지 않았다. 의식만 없었을 뿐, 숨은 쉬고 있었다. 마릴린 먼로가 최종적으로 사망한 곳은 집이 아닌 병원이었다."
현장에 도착한 구급대원
이러한 의혹 속에도 자살과 타살에 대한 의견이 팽팽한 가운데, 죽음의 배후에는 대통령 케네디 家 가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설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마릴린 먼로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생일 파티에 참석한 이후, 워싱턴 정가에서는 케네디 대통령과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그리고 마릴린 먼로 사이의 은밀한 관계가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특히 먼로는 두 케네디가 형제에게 호감을 느꼈지만, 현직 대통령인 존 보다는 동생인 로버트에 더욱 큰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졌다.
먼로와 로버트 케네디는 자연스럽게 연인관계로 발전했지만, 끊임없는 먼로의 집착에 부담을 느꼈고, 자신의 사무실 개인 전화번호를 바꾸며 마릴린 먼로와의 관계를 마무리하려 했다. 이에 심보가 난 먼로는 "만약 그가 계속 나를 피한다면 내가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무슨 말을 할지도 모른다" 라고 이야기했고, 이에 로버트 케네디가 마릴린 먼로의 살인을 지휘했다는 것이 이 타살설의 내용이었다.
이러한 내용은 한동안 루머로 치부되었으나, 2014년 탐사 보도 기자이자 먼로 전문가인 제이 마골리스와 논픽션 베스트셀러 작가 리처드 버스킨이 내놓은 도서 '마릴린 먼로 살해: 사건 종결'이 로버트 케네디의 관여와 관련한 상세한 정황과 증거를 내세우게 되면서 다시금 탄력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취재를 통해 당시 병원에 실려온 마릴린 먼로를 담당한 의사가 로버트 케네디의 사주를 받은 랠프 그린슨인 것으로 확인했고, 그가 약물을 투여해 마지막까지 숨을 내쉬던 먼로를 사망시켰다고 주장했다.)
이후 2015년 前 CIA 요원이었던 노만 호제스가 정부의 명령으로 마릴린 먼로 살해에 관여했다고 고백했으나, 로버트 케네디 의혹과 거리가 먼 CIA의 자의적인 선택이었다고 주장해 혼란만 부추겼다. 이 밖에 소련 스파이 루머, 존 F. 케네디의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가 그녀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순정남(?) 조 디마지오
이별 이후에도 마릴린 먼로를 사랑해 왔다고 고백한 그의 두 번째 남편 조 디마지오는 먼로의 죽음을 가장 슬퍼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특히 케네디 일가가 그녀를 죽였다는 의혹을 마지막까지 믿어왔으며, 평생 그들을 증오했다고 한다. 오히려 그는 마리린 먼로를 마지막까지 지켜주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며, 마릴린 먼로 사후 매주 세 번씩 먼로의 무덤에 꽃을 바치며 그녀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사후 유언에는 "이제 먼로를 만날 수 있겠군" 이란 말을 남겼다고 한다. 결혼 생활 당시 먼로를 폭행해 왔던 그의 전과를 생각해 본다면 조금은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법한 상황이다.
죽고 나서 12년 후에 출간된 그녀의 자서전
1954년 마릴린 먼로는 남모르게 자신의 이야기와 삶을 다룬 자서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자서전에는 먼로의 어린 시절부터 조 디마지오와의 결혼 생활까지 자신의 일생을 솔직담백 하게 기록하고 있었는데, 먼로가 사망하게 되면서 자서전은 미완성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미완의 자서전을 건네받은 그녀의 사업 파트너 밀턴 H. 그린은 이 도서를 출간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고, 그녀가 사망한 12년 후인 1974년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출간되었다. 자서전은 '마릴린 먼로, My Story' 란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섹스 심벌로 가려진 그녀의 진심 어린 모습이 담겨있었다.
그런데 아카데미상은 받았나요?
애석하게도 마릴린 먼로는 단 한 번도 아카데미 상을 받거나 노미네이트 된 적이 없었다. 대신 아카데미의 전초전이라 불리는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 두 번이나 후보에 오른 적이 있었고, 1960년 제17회 골든 글로브에서 [뜨거운 것이 좋아]를 통해 뮤지컬 코미디 부분 여우주연상을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