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님강론
1. 어제 우리는 모든 성인의 대축일을 지냈습니다. 우리가 기리고 경축한 성인들은 우리에 앞서 신앙의 길을 완주하신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오늘 제1독서가 말하듯이, 의인들이 겪는 단련과 시험을 거치면서 신앙 여정을 끝까지 걸으신 분들입니다. 이제 그분들은 지상 생활을 마치고 천국에 이르러서 예수님이 오늘 복음에서 약속하신 안식을 얻고, 제2 독서가 언급한 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순종 덕분에 가능하게 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계십니다. 성인들이 영원한 생명과 안식을 누리고 있는 천국은 우리 모두 가야 할 곳이며 우리 인생 여정의 진정한 목적지입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천국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그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온전한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순도 100%의 사랑인 하느님과 하나가 되려면 우리도 순도 100%의 사랑으로 변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랑을 키워갈수록 사랑 자체인 하느님과의 일치에 한 걸음 다가가게 됩니다. 그 일치를 위해서는 우리 안에서 사랑과 반대되는 것, 미움, 탐욕, 무관심 등을 다 없애버리는 노력인 보속(補贖)을 열심히 실천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보속을 다 못했으면 죽은 다음에라도 해야 합니다. 죽은 후에 우리 안에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방해하는 ‘불순물’을 걸러내는 ‘정화(淨化)’ 과정을 거쳐야 하는 데 바로 그것이 연옥입니다. 연옥의 고통이란 정화 과정에서 오는 부끄러움과 괴로움을 뜻합니다. 사랑이 부족해서, 사랑을 거슬러서 생긴 허물과 죄를 마주해야 하기에 부끄럽고 괴로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연옥 단련에는 희망도 수반됩니다. 정화 과정이 끝나면 하느님을 만나 안식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
죽은 후의 정화는 당사자가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들이 이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우리 가톨릭교회는 지상과 천상 그리고 연옥에 있는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결합하여 있어서 기도와 희생, 선행으로 서로 도울 수 있다고 믿습니다(성인들의 통공). 그래서 교회는 11월을 위령성월로 정해서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와 희생을 하라고 권고합니다. 또한 11월 2일을 ‘위령의 날’로 정해서 연옥 영혼을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할 것을 촉구합니다.
물론 가톨릭 신자들은 틈틈이 아직 연옥 영혼들을 기억하며 기도합니다. 예를 들면, 식사 후 기도에서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하고 기도하지요. 그래서 연옥 영혼들은 가톨릭 신자들이 식사 끝나기만을 기다린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평소에도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지만, 위령성월에는 좀 더 집중해서 연옥 영혼들이 최대한 빨리 자신의 허물을 씻어버리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들이 우리 기도에 힘입어서 좀 더 빨리 천국에 들어간다면 나중에 우리가 연옥에 있을 때 우리를 잊지 않고 우리를 위해 열심히 하느님께 기도해 줄 것입니다. 연옥 영혼을 위한 기도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보험’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위령성월에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나도 언젠가는 죽을 존재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서양의 공동묘지에 가면 묘비에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라고 쓰인 문구를 가끔 만나게 됩니다. 시차가 있을 뿐 우리 모두 예외 없이 죽습니다. 죽은 후에는 하느님께 나아가서 세상에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이 사랑하였느냐는 기준으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런 엄연한 사실을 잊거나 외면하기 때문에 너무 많이 욕심부리고 미워하며 거짓과 위선 속에 사는 것 같습니다. 나 역시 죽을 운명에 처해 있고 심판받아야 피조물임을 잊지 않을 때 좀 더 착하고 정직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내가 보기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도 결국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덜 미워하면서 불쌍하게 여길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살아생전에 지위가 높아 세도를 부리던 사람도, 돈이 많아 떵떵거리던 사람도 결국은 죽습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아무리 위세를 부리고 살았어도 죽고 나면 하느님 앞에서는 가엾은 죄인일 뿐입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이 오래된 유럽에는 이런 점을 잊지 않게 해주는 관습들이 있는데 제가 오스트리아에 유학하던 시절에 우연히 경험하게 된 것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오스트리아는 세계 제1차 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합스부르크 왕가가 통치했습니다. 그 왕가의 마지막 황후인 부르봉-파르마 치타가 1989년 3월 14일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며칠 후에 치타의 장례식이 빈에서 거행되었는데,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장례식의 한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어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장례식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사실상 마지막 황제였던 프란츠 요셉의 장례식과 거의 똑같이 진행되었습니다. 슈테판 대성당에서 장례 미사가 끝나고 화려한 왕실 문장으로 장식된 관을 가운데 모신 행렬이 근처 성당 앞에 이르렀습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묘인 카푸친 수도회 성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당 문은 굳게 닫힌 채로 있었습니다. 왕실 전통의 복장을 갖춘 인솔자가 성당 문을 두드렸습니다. 성당 문 저편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울려 나왔습니다. “누가 들어오려고 하느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후이며 헝가리의 여왕이며...” 황후에게 부여된 온갖 칭호를 다 붙여서 장황하게 대답했습니다. 긴 소개의 말이 끝나자, 성당 안에서는 이런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나는 그를 알지 못하노라!”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 다시 인솔자가 성당 문을 두드렸습니다. 첫 번째와 똑같은 물음이 들려옵니다. “누가 들어오려고 하느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후 부르봉-파르마 치타가 왔습니다.” 성당 안에서 첫 번째와 똑같은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그를 알지 못하노라!”
다시 잠시 침묵이 흐른 다음에 인솔자가 성당 문을 두드립니다. 세 번째 똑같은 물음이 들려옵니다. “누가 들어오려고 하느냐?”
이번에는 전혀 다른 대답을 합니다. “죽음을 면치 못하는 죄인 치타가 왔습니다.” 그러자 성당 문이 천천히 열리고 장례 행렬은 조용히 성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조용히 열리는 성당 문이 어떤 말이나 설명보다는 힘 있는 메시지를 전해주었습니다. 아무리 살아생전에 부귀영화를 누리던 사람이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불쌍한 죄인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지위가 높든 그렇지 않든 모두 하느님 앞에서는 사랑이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자비를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위령의 달을 지내면서, 또 위령의 날을 맞아 우리보다 먼저 간 이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품 안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하도록 합시다. 또한 나를 포함해서 내 주위에 있는 이들, 내가 알고 있는 이들도 결국은 다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면서 많이 사랑하고, 덜 욕심부리고 덜 미워하면서 살도록 노력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