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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립재활원 재활훈련생의 공간 원문보기 글쓴이: 모니카
국립 재활원의 주요 사업인 사회재활훈련과정이 폐지되었다고 한다.
나는 이를 보고 한참 동안 어안이 벙벙하여 이러면 안 되는데 하고 마음이
‘뻥’뚫리는 허무감에 빠졌다.
나는 국립재활원에 입소한 계기는 한날 장애가 된 이후 남편과 법원리 설렁탕 집을 갔었다.
그때 어떤 군인이 장애된 나를 보더니 서울에 '국립 재활원'에 장애인을 위한 좋은 시스템이 있으니 한번 가보시라고 권유 한다.
그 군인은 보통 사람 같지 않고 나이도 찬 사람으로 점잖고 현명해 보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아마도 의학공부하다 군에 입대 하여 군의관으로 온 모양 이다.
그래서 장애된 나를 알아차리고 말했겠지?
그 뒤 국립재활원와서 나는 ‘삶의 재활의 意志(의지)’가 생겨 열심히 국립재활원에 훈련과정을 마쳤다.
아침 일찍 제일 먼저 일어나 지팡이 짚고 긴 통로를 내려와 아침식사후
넓은 체육관강당으로 와 1시간 동안 아침 운동을 끝낸 뒤
컴퓨터, 도자기, 동료 상담, 음악활동 등으로 많은 시간을 알차고 보람된 생활이었다.
비록 3달이 안된 10주이지만 하루하루가 장애된 몸이지만 많은 것을 배웠네?
하며 마음속으론 흐뭇해 하며 만족해 왔다.
특히 한손으로 컴퓨터 배움으로 인해 세상은 절망으로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오른손 장애로 한손으로 컴퓨터 마우스로 클릭 하여 인터넷을 보기만 했지 이렇게 많은 글을 쓸 줄을 전혀 몰랐다.
한날 국립재활원에서 컴퓨터 시간에 ‘김미경’선생님께 나 “이젠 컴퓨터 못해요, 오른손 장애로 왼손 하나로 키보드를 치지 못하니깐”했더니 컴퓨터 선생은 냉정하게 “노력 하면 다 할 수 있어요.”하고 냉정하게 잘라 버린다.
그러면서 아이디를 하나씩 만들어 주고 비밀번호도 만들어 주면서 몸이 장애인이더라도
컴퓨터로 남들과 얼마든지 소통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서 daum의 예쁜 편지를 가르쳐 주며
마지막 날에 wedding(결혼)편지지를 가르쳐 준다.
그녀는 우리가 수료한 다음 주에 결혼식을 하기로 예정 되었기에…….
난 수료 후 그녀에게 그녀가 가르쳐준 wedding지 로 결혼 축하 메일을 보냈다.
컴퓨터 시간에 한날 같이 배우고 있는 장애우 고승혜가 선생님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에 질문이 있어 부르는데
그녀는 뇌출혈이후 언어의 장벽으로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이점을 잘 모르겠으니 요점을 가르쳐 주세요?
하면 되는데 언어의 장애로 말을 못하니 모니터만 두드리고 “어 어 어”하고 ‘김 미경’씨는 “이것 말이요” 하면 ‘
고 승혜’는 고개를 절래 흔들면서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 ‘김 미경’선생은 “그럼 조것 말이요”하고 또다시 묻는다. 하며 시간을 끌면서 그녀에게만 붙어 있어야 한다.
이러는 동안 컴퓨터를 배우려는 많은 장애우들은 ‘고승혜’질문이 끝나기를 애타게 기다린다.
김미경 선생의 컴퓨터 강좌의 진행에 차질이 생기고
다른 장애우들은 다음 설명의 강의의 정해진 시간에 차질이 있어 다른 장애우들은 말을 안 해도 나름대로 많은 불만을 갖져었다.
나는 이를 눈치 채고 그래서 아예 옆에 앉아 있는 내가 아는데 까지 가르쳐 준다.
그러나 한날 내가 ‘김 미경’선생께 배운 것을 계속 연습 하다가 ‘고 승혜’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응 잠깐 기다려 요것만 하고” 하며 내 것만 했다.
한참 이따 그녀는 갑자가 울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소리 내어 엉엉 운다.
나는 그 우는 소리에 놀라 나가려고 하는데 ‘김 미경’씨는 나보고 그 자리에 앉아 있으라 하며 수업을 계속 한다.
‘고 승혜’그녀는 장애된 처지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恨(한)스러울까?
컴퓨터를 배우고 싶어 ‘이점을 알고 싶은데요?’하며 한번 묻고 싶어도 자기의 뜻을 정확히 나타낼 수 없는
자신의 장애의 안타까운 처지를…….
장애된 몸으로 한쪽몸 팔, 다리를 못 움직이고 언어의 장애로 자신이 알고자 하는 일에
‘말’을 할 수 없고 배울 수 없는 처지가 안탑깝고 절망 스러운거지.
또 다른 장애우 ‘김 신진’그녀는 뇌출혈이후 재발 되여 뇌경색으로 장애 1급으로 하반신을 거의 못쓴다.
전동 휠체어에 얶매이고 살며
그녀도 언어의 장벽으로 말까지 못 하지만 항시 오른손으로 공책에 글을 써 意思(의사) 소통을 하며 산다.
하지만 그녀의 글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을 녹이는 情感(정감)어린 글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녀 역시 자신의 왼쪽 편마비 장애로 고통스럽게 어렵게 사는 여인 이다.
한날 우습지도 아니한 일에 자신의 뜻과 달리 웃음을 制御(제어)할 수 없어
‘성재활’시간에 갑자기 심각한 시간에 웃음을 터뜨려 괴팍한 웃음을 참을 수 없어
전동휠체어를 뒤로 밀어내고 자신은 수업에 빠진다.
재활운동 시간에 이상한 웃음을 지으면서 계속 해서 걷기 운동을 한다.
자신만이 억제 하여야 할 웃음을 억제 못하는 自制(자제)력 기능을 잃은 것이다.
나도 역시 오른쪽 편마비장애로 왼손 하나로 세수 하고 있는데 갑자기 오른쪽 발가락이 오그라든다.
내생각과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고 전혀 다른곳으로 발가락이 오그라들고 경직이 되면서 몸의 중심을 잃을것 같아 한참동안 헤매인다.
이를 제어 할수없는 내머리가 한없이 미워하며 원망하면서 답답해 한다!!!
'김신진' 그녀는 글 쓰는 소질은 탁월 하다.
그녀의 글은 너무도 아름다워 그녀가 장애인이 아닌 비장애인으로 한없이 행복한 여인과 같다.
나는 깜짝 놀라고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그녀는 백일장 대회에서 당당히 1등을 했다.
그녀의 글은 '사회재활훈련 추억론의 우리세상'책을 지금도 보관 하여 가끔씩 읽어 본다.
그녀의 글은 장애인이 아닌 감성이 한없이 부드럽고 행복한 여인으로 생각 된다.
그녀는 지금 어떻게 하고 살고 있을까?
‘김 영하’그는 항시 수업이 다 끝난 후 코끼리 자전거를 탈제
내 오른쪽 팔을 묶어주고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사람 역시 뇌출혈 이후 왼쪽 장애로 왼손과 다리를 못 쓰는 편마비 장애 이지만
수료식이 가까운 날에 내공책에 글을 써줬는데 그 글씨체가 名筆(명필)이다.
문맥 역시 훌륭하고, 마음 씀씀이 역시 글씨만큼 훌륭하다.
그의 글을 지금도 가방에 항상 가지고 다닌다.
아침운동 시간에 ‘고 승혜’가 운동을 게을리 하려면 “고 승혜 운동 안하면 오빠한테 고승해.”하며 달래가며 운동을 같이 한다.
그는 광주 사태때 참여 하여 삼청 교육대에 끌려가서 감옥 생활을 했다고 사람들이 말한다.
이 사람도 수료식때 상을 받았다.
‘김영하’씨는 하루 일과를 끝내고 갈 적에 久成(구성)진 목소리로 노래를 부를 적에 내 가슴이 아려 온다.
‘아 저 사람도 장애의 恨(한)이 많구나!’
젊어선 광주 민중 항쟁 참여 하여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고생도 많이 하였는데
하지만 지금은 장애된 몸으로 병신 소리를 들어가며 살다 죽어야 하는지?
자신의 처지가 한없이 억울하고 한편으론 화가 나 치밀면서 구성진 노래를 부르겠지?
생각 하며 그의 구성진 노래 소리에 따라 나는 국립 재활원의 숙소 길을 따라 간다.
엄밀히 말해서 국립 재활원은 ‘전 두환’이 주관 하여 짓은 것인데
현재는 마음의 안락한 재활의 공간 즉 국립재활원!
무엇인가? 인생의 큰 irony(아이러니:웃지 못할 일)
한날 나는 국립 재활원의 내부 구조의 길을 잃어 한참동안 헤메인적이 있다.
그래서 담당 교사 ‘박 경혜’씨가 나를 한참 찾으러 다닌 적이 있다.
또한 저녁 식사 이후 길을 잃어 한참동안 헤매다 어둑어둑한 저녁에 숙소에 돌아오다 병원 앞쪽의 코너진 저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 쳐다보니 당직인 ‘강 공식’이 나타나 “왜 인제 와요." 하며 호탕 치며 되돌아간다.
아마도 그 사람은 나를 한참 기다린 모양이다.
이 사람은 성질이 무섭기로 유명 하다.
학교로 치면 마치 엄한 사감선생님 저럼…….
내가 전동 휠체어를 사용 할 때 왜? 타냐고 하면서 빼앗으며 지팡이 짚고 걸으라 한다.
내가 퍼포먼스 할 때 그때 맨 앞에서 장애우 동료들과 전동 휠체어를 필요로 할 때 연습 과정에 강당에서 연습 과정이 끝나면 대신 해서 방에 갖다 놓을 터이니 그냥 걸어가라고 한다.
전동 휠체어를 탄 내모습이 보기 싫어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걸으라고…….
아무튼 고마운 사람들이지
난 수료식이 끝나고 집에 올 때 이 사람을 감사의 포옹 하면서 "고마워요" 했다.
‘이 종범’ 이 사람은 나의 딸 과 비슷한 나이로 한없이 가엾은 사람 이다.
한날 밥 먹고 숙소로 오는데 종범이 있기에 머리 한부분이 가라 앉아 움품 파진 모습으로 머리의 뼈가 한 부문 잘려 나간구나.
나의 외삼촌처럼 머리의 뼈를 자르고 봉합 못했구나.
그리고 몇 일후 이름을 소개 할 때 이름이 ‘이 종범’이라 말하여 나랑 같은 항렬이네?
나는 ‘이 종림’ 너는 ‘이 종범’
어쩌면 종범이는 집안네 사람으로 동생일지 모른다.
그래서 ‘종범’에게 특별한 친근감이 있어 관심이 있었다.
하루는 국립재활원의 성당에 불현듯 나타나 “너 성당에 나오니”했더니
종범이는 “예”한다 세례명은 “요셉”이라 한다.
너는 왜 금요일 날 집에 안 가니?
너의 부모님은 왜 너를 만나러 오지 않니?
“수녀님이 엄마 예요”한다.
그래서 너는 고아 이었구나. 짐작 하게 되고
머리는 왜 다쳤냐고 물을 때 중국집에서 배달을 오토바이를 타다 머리가 깨졌다고 한다.
그 뒤부터 도와주고 아껴 왔다.
더운 5월에 반팔을 입어야 되는데 털조끼를 입고 있어 나는 시원한 츄레닝을 사 입히고 모자도 사 머리를 가려 주웠다.
이종범은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리는데 명암이 어느 정도 그리고 했다.
그림의 기본이 깔려 있다.
수료식 가까운 날에 우리 반끼리 회식을 할 때 횡단 보호대 길을 지팡이 짚고 가는데 가는 도중에 걸음걸이 속도가 느려
횡단 보호대 중간에서 파란불이 빨간불로 바뀌어 뒤에서 ‘박 경혜’선생이 “이종림씨 그 자리에 서세요.” 하는 소리에 나는 무시하고 그대로 계속 갔다.
당신 차로 나를 단 한 번에 눈을 감아 버릴 수 있다면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고마워한답니다.
하고 천천히 지팡이 짚으며 계속 갔다.
그러나 정차 하고 있는 운전자들은 그 어느 누구든 한 번도 크락숀 소리를 내는 운전자는 없고 묵묵히 지켜만 보고 지팡이 짚고 천천히 걷고 있는 나를 기다려 준다.
나를 기다려 주는 운전자들의 배려에 감사를 드렸다.
사실은 그때 나는 첫손녀딸의 돌잔치에 참석 하지 않아 마음이 괴로와 했었다.
남편과 딸에게 하얀 거짓말을 했다.
국립재활원의 훈련에 하루라도 빠지게 되면 탈락 하게 되어 퇴소 당해 이엄마는 국립재활원에 끝까지 훈련과정을 마치고 싶어.
하면서 하얀 거짓말을 하고 남편과 딸을 달래놓고 손녀딸의 돌잔치에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장애가 아니었다면 진정으로 외할머니인 내가 제일 먼저 손녀를 사랑하는 마음에 1등으로 달려가겠지?
나의 사랑스러운 내 딸이 장애된 내모습을 가슴 아프까봐 염려스러워 나는 가지 않했다.
다만 나의 사랑스러운 손녀 ‘돌’날 국립재활원에서 수녀님을 만나 붙들고 한없이 울었다.
수녀님은 울고 싶을 때 실컷 울라고 하며 흐느껴 우는 나의 마음과 등 뒤를 어루만지며 감싸 줬다.
그때 마침 ‘박 경혜’선생은 내가 또 길을 잃어 헤메일줄 알고 나를 찾으러 다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수녀님을 붙들고 우는 나를 보고 놀라서 수녀님께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고
손녀의'돌'날 이면 진작 말을 해 손녀딸의 ‘돌잔치’에 가면 되는데 왜 그리하였는지 그녀는 묻는다.
모든 사람들은 할머니가 되어봐서 내 심정을 이해하고 알고 알 것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한테 마음속으로 우리 아가에게 축복 해 주십사 하고 싶어 하얀 백설기 돌떡을 돌렸다.
그러면서 손녀가 앞으로 건강하고 잘 뛰고 밥 잘 먹고 행복하길 빌었다.
국립재활원에서 다른 많은 사람들의 괴로운 장애의 ‘삶’보고
나보다 劣惡(열악)한 장애인들이 자신의 장애의 조건에 屈(굴)하지 않고 묵묵히 사는 사람들을 보고
나는 복지관으로 다시와 컴퓨터를 계속 하여 지금은 자격증도 따고 많은 글도 쓰고 많은 아름다운 풍경도 ‘디카’로 찍어 남기고
동영상도 찍어 편집도 하고 하여 그야말로 한권에 책도 낼 수 있다.
이모두가 국립재활원의 사회재활훈련 과정의 과도기를 걸쳐
이세상은 ‘나’만이 장애의 불행을 슬퍼하지 않고 세상을 열심히 사는 구나~~~
그 뒤 각자의 생활 터전으로 돌아가 전처럼 정상인의 몸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諦念(체념) 하고
현재의 장애의시간에 적응 하면서 열심히 사는구나!!!
물론 사회재활훈련과에 과정에 淘汰(도태)되어 탈락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지만
대다수의 많은 장애인들이 사회재활훈련과에 나 자신보다 열악한 조건에 장애의 고통을 잊고
적극적으로 살고 있다!
국립재활원에 사회재활훈련과 지난 어제도!
현재에 있는 오늘도!
다가올 내일도!
사회재활훈련과의 好意(호의)적인 뜻을 마음속 깊이 새기면서 열심히 사는 장애자가 많을 것이다.
이런 사회재활훈련과정이 없어지다니 한없이 안탑깝고 아쉽다.
동료상담가로 국립재활원에 갔는데 강당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병원이 들어섰다.
병원에 들어 가보니 깨끗한 병원청사에 규모 있는 병원이 참 좋았다.
그렇지만 옛 국립재활원의 장애인들의 재활처 마음을 서로 나누고 대화 할 수 있는
편안한 사회재활훈련과정과 그대로 竝行(병행)할 수 없을까?
하는 깊은 아쉬움에 빠졌었다.
내가 우연한 기회에 법원리설농탕집에서 한사람의 우연한 만남의 계기로 국립재활원을 알게 되고
편마비 장애자라도 컴퓨터를 다시 할수있어 글도 많이 쓰고 사진도 찍게 되고
요즘은 동영상을 만드는 공부를 하는 큰결과를 이루듯...
국립재활원의 사회재활훈련과정이 폐지 되지 말고 그대로 유지 됐으면 한다.
아마도 많은 국립재활원의 사회재활훈련과정을 마친 장애우들도 나와 같이 동감하면서 아쉬워 할것이다.
첫댓글 맞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고요. 무슨연유로 사회재활훈련과정이 폐지 되었는지???
저도 오른쪽마비입니다. 모니카님은 이 글을 쓰기 위하여 한손으로 타자치고 수십번 퇴고하고,
이글을 완성했을 것입니다. 3개월 동안 합숙하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동료상담과목이 제일기억에 남아있고요.
저도 사회재활훈련과정이 폐지 되지 말고 그대로 유지 하기을 바랍니다
좋은글참으로진솔하게쓰신글이감동을줍니다.법원리라면제가군생활한파주쪽에사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