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떠나는 자와 남는 자.
서양문학의 출발이자 맨 처음 서사시 오뒷세이아는 떠나는 자의 이야기다. 이보다 앞선 시대, 우르크의 왕 길가메시 역시 세상을 떠돌아온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서사무가(敍事巫歌)의 바리데기도 버려짐에서 떠남으로 여정이 확장되는 이야기다. 고타마 싯다르타도 집을 나와 고행을 떠났고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도 갈대아 우르를 떠나 사막을 유랑했다. 예수도 집을 떠나 갈릴리를 유랑하며 공생애를 보냈다. 인류는 떠나는 자를 통해 정신문명의 꽃을 피웠다.
떠나는 자는 자신이 거주하는 세계의 진부함과 상투성에 저항한다. 인간은 병들 때 떠나기를 거부한다. 인간이 병들면 땅도 병든다. ‘사람이 타락하니 땅이 부패하였다’는 창세기의 이야기는 설화적 상상이 아니라 생태적 사실이다. 자신의 위치와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는 1인칭 화법의 삶이 세계와 이웃을 파괴한다는 것을 지금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야훼는 노아에게 부패한 땅에서 떠나 대항해를 시작하라고 명령한다.
보수주의자들은 남는 자들이다. 사람은 그곳에서 안거하며 누릴 수 있는 것이 있을 때 남으려 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여행의 모험으로 안주(安住)의 질서를 깨뜨리려 하지 않는다. 변화산에서 영광에 싸인 예수의 모습을 바라본 베드로가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기에)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라고 했다. 떠나는 자 예수를 그곳에 주저앉혀 종교장사를 해보려는 심산이었다. 보수주의자들은 떠나는 자들의 반동이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들을 위해 모험을 제거한 가짜 여행이 만들어졌다. 그것을 관광(Tour)이라 한다. 하지만 진부한 세계의 문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법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자들의 떠남은 여행(Travel)이라 한다.
일전에 신혜정이라는 젊은 청년을 만났다. 만나보니 수국처럼 풍요롭고 부드러운 품성을 가진 것 같은 젊은 여인이다. 그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거친 길을 다녀왔다는 얘기 하나만 듣고 그를 만나기 위해 토요일에 서울로 모험을 떠난 것이다. 목사에게 토요일은 다음날의 전투를 준비하는 긴장된 시간이다. 하지만 그 시간을 할애해서 만나고 싶을 만한 소스가 나를 자극했다. 그가 중국을 거쳐 베트남, 라오스, 태국, 미얀마, 인도, 파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튀르키예의 이스탄불까지 유라시아 대륙 12,500킬로미터를 자전거로 여행했다는 얘기가 나를 서울로 밀어 올렸다.
그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표정에서 많은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식당 창가에 앉아 측광을 받은 그의 실루엣에서 아직 다 풀어내지 못한 이야기의 실타래를 보았다. 이제 30대 중반의 젊은 사람에게 곰삭은 인생의 깊은 맛을 보게 된 것은 당황스러운 일이다. 떠났다가 돌아온 자의 지혜가 퇴적층처럼 쌓인 모습이다. 떠나는 자에게 떠난 만큼의 지혜가 쌓인다면 그의 여행은 1년 반이 아니라 150년은 족히 되었음 직하다.
용산역 영풍문고에서 그의 자전거 여행기 <이토록 우아한 제로 웨이스트 여행>을 샀다. 계단에 쪼그려 앉아 읽다가 기차를 놓쳤다. 두어 시간 뒤에 입석을 타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게 뭐 대순가. 내게 돌아갈 집이 있고 나를 태워다 줄 기차가 있는데, 조금 늦는다고 내 인생이 폭망하는 것도 아닌데. 용산역 플랫폼에서 그의 자전거와 함께 대리여행을 떠나는 재미가 나를 풍만하게 만들었다. 이십대에 떠돌아다니길 좋아하여 무전여행을 즐겼지만 국경을 넘을 수 있는 시대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떠나는 자에게는 사람과 사건이 얽히며 새로운 문법으로 서사가 생성된다는 것을 짧은 무전여행들을 통해 알게 됐다. 떠나는 자만이 새로운 문법으로 세계를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다.
오뒷세이아 이야기는 돌아오는 것으로 끝난다. 여행자는 돌아갈 곳이 있는 자다. 돌아갈 곳이 없는 자를 여행자라 하지 않는다. 그들은 난민이다. 하지만 떠난 자들이 다시 돌아올 때는 같은 모습이 아니다. 그들은 새로운 지혜에 눈 떠서 온다. 그것을 신화적 언어로 말하면 ‘영웅’이다. 영웅은 떠나고 돌아오는 자들에게 붙여지는 새로운 이름이다. 그래서 길가메시는 왕이고 오뒷세이아는 영웅이며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다.
여행을 특정한 목적을 정해두고 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 근본 원인은 물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왜?, 라는 물음. 세상은 왜?, 나는 왜? 왜 사는가, 등과 같은 근원적인 물음이 다른 원인들을 생성시키고 추동시킨다. 그래서 떠나는 것이다. 저자는 “넓은 세상에서 나와 다른 사람들을 보며 세상과 인생을 배우고 싶었”다고 말한다. 공교육 시스템을 통해 주입된 이미지로서의 세계가 아니라 내가 직접 부딪쳐 맛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떠나는 자의 영혼의 감수성이다.
그가 떠나기 전의 세계는 이데올로기의 프레임 안에서만 볼 수 있었다. 국가와 민족, 문화, 이념의 프레임으로 보도록 강제된 타자의 영역에 직접 들어가기 위해서는 프레임을 깨야 한다. 그 프레임을 깨고 타자의 자리에 성큼 다가갔을 때, 사람을 납치하여 장기를 적출한다는 괴소문이 흉흉한 중국에서 마음이 따뜻한 사람을 만나고, 테러리즘의 프레임에 갇힌 이슬람국가에서 환대와 깊은 호의를 받을 수 있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이 길은 나 혼자 가는 길이 아닌 것 같다”는 것이다.
이기적으로 분열된 개인들이 무한경쟁으로 투쟁하며 살아가는 이 세계를 벗어나 보니 의외로 세상은 따뜻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말로만 듣고 뉴스로만 보던 흉악한 세계가 특정 국가(종교)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된 것이라는 것을 몸으로 겪어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세계는 국경도 종교도 인종과 문화도 사실은 다 허구일 뿐,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그 연결점은 곧 사람이란 사실을 통렬하게 깨닫는다.
그는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라는 큰 타이틀을 가지고 출발했지만 나는 그것에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의 책에서 주의를 기울인 것은 서사(敍事)다. 이야기는 사람과 세계를 치유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 플라스틱과 쓰레기가 넘쳐나는 것은 서사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사용하고 버린 것이 쓰레기가 되어 환경과 인간을 어떻게 파괴할 것인지를 아는 데는 물리학적 지식이 아니라 서사적 상상이 필요하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서사의 자리에 이미지만 남았다. 상품은 사용가치가 아니라 섹슈얼리티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섹슈얼리티는 사유를 거치지 않은 이미지로 사람을 옭아맨다. 그 올무에서 벗어나 서사의 세계로 나아간 그의 여정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다. 지금 여기에서 떠날 때,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떠날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내가 기성 교단을 떠났을 때 비로소 예수가 보이기 시작한 것처럼. 길은 떠나는 자들의 것이다. 실크로드는 여러 나라에 걸쳐 있고 특정 구간은 특정 국가의 소유다. 하지만 그 길은 국가의 소유이기 전에 떠나는 자의 것이다. 길이 있어 떠나는 게 아니라 떠나는 자가 있어 길이 된다. 떠나는 자가 곧 길이다. 그 길은 이야기다. 이야기는 사람과 세계를 치유한다, 천일야화처럼. 그래서 우리 교회 이름이 길 위의 교회(길위의교회)다. 세상의 모든 교회는 길 위에 있어야 한다.
첫댓글 떠나는 자가 있어 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