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오류
임병식 rbs1144@hanmail.net
최근 모 방송에서 주 1회 방영하는 역사 프로에서 어제는 ‘14연대 반란사건’을 집중 조명했다. 진행자가 대본에 의한 사건 배경과 전개과정을 풀어나가는 가운데 패널들이 의견을 제시하는 방식이었다. 근자에 진실 화해문제가 대두되고, 국회에서 진상규명 특별법이 논의되던 때라 프로는 이목을 집중 시켰다. 한데, 나는 그 걸 보다가 진행자의 진행이 매우 편파적이고 오류가 많음을 발견했다.
내용 상당부분이 사실과 다름은 물론, 당시 반란에 가담하거나 동조한 자들이 저질은 잔악상은 한사코 축소되거나 희석시킨 반면, 군경에 의한 피해는 악의적이라 할 만큼 과장하여 부각시키고 있었다. 그런지라 시청하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고 당황스러웠다.
이런 다큐물은 누가 보나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사건의 본질은 물론, 전체를 균형있게 다루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청자는 그걸 보고 그릇된 인식과 판단을 할 수 있다. 한데 프로는 그런 균형추가 이루지 못하고 어처구니없게도 일반적이라 할 만큼 한쪽을 편을 드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연히 실망감이 컷다. 그것은 전에 내가 이 사건을 파악하기 위해 상당기간 조사를 하여 아는 부분이기에 지적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팩트책크를 한다는 차원에서 현저히 드러난 오류와 문제점에 대하여 잠시 언급을 해 볼까 한다.
먼저 짚을 부분은 이 프로에서 당시 경찰 구성원이 친일경찰, 일제경찰일색으로 일제 잔재 경찰의 비율이 87%나 되었다고 못 박은 부분이다. 이는 크게 사실과 동떨어지는 부분이다. 내가 조사한 봐도 그렇지만 현직경찰관 봉상수 경위가 학위 논문에서 밝힌 1922년 기준, 전체 경찰관은 2만 785명이었으며 이중에서 일인과 한국인의 비율은 58; 42로 일본경찰의 비율이 6:4정도였다고 한 것을 참고해도 그렇다.
이 통계를 가지고 당시 여수경찰의 실정에 적용해 보아도 다르지 않다. 당시 여수쳥찰은 정원이 200명이었고, 1945년 해방이 되자 일본인 출신 경찰관은 거지반 다 물러났다. 그래서 이후에 부족한 120여명은 모두 한국사람으로 충원하였다.
실제로도 보면 당시 일제 경찰은 과장급 이상 간부와 통신계및 경비정직원 뿐이었다. 그런데 반란당시에 대다수가 일제경찰관이었다고 언급한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나는 이점에 대해서 내가 직접 발로 뛰어 파악한 자료를 제시해 본다. 반란사건 초기 여수경찰은 단 이틀 간 72명이 학살당했다. 사망한 경찰관의 연령분포를 중심으로 해방 당시 20세 이상자인 1925년생을 일제 때부터 근무한 직원으로 간주하여 통계를 내 볼 때, 아무리 높게 잡아도 그 숫자는 50%가 넘지 않는다. 그런데도 친일경찰이 87%나 되었다고 부풀린 것은 대단히 큰 착오와 오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으로 언급할 부분은 반란군이 시가지를 쳐들어 올 때 경찰과 교전을 벌렸다고 말한 대목이다. 이 또한 사실과 크게, 아니 완전히 어긋난 설명이다. 당시 반란군은 거칠 것 없이 시가지로 물밀듯이 진격하여 일시에 경찰관서와 다른 관공서를 접수했다. 경찰은 대항하여 총 한번 쏠 겨를도 없이 당했다. 그리고 화력 면에서도 99식 소총만을 파출소에 한정씩 배정한 상태에서 대적은 어림도 없었다.
그런데도 초기에 상호 교전을 벌렸다고 언급한 것은 완전히 팩트가 어긋난 것이다. 여기서 잠시 반란과정을 되짚어 보자면, 반란군 총책 지창수 상사는 부대원 일부가 제주 진압작전에 투입되게 되자 이를 반란의 빌미로 삼았다. 그는 사전 계획에 의해 ‘같은 동족에서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며 장병들에게 “지금 경찰이 우리를 공격하러 오고 있다”고 선동 했다.
타격 대상을 명확하게 특정한 것이다. 그렇게 일시에 무장한 반란군은 시가지를 진출하여 경찰서부터 접수했다. 그 과정에서 경비를 서던 김기연 순경이 사살되고 정봉묵 순경이 복부에 총상을 입었다. 그랬는데 마치 초기에 전투상황이 전개된 것처럼 '교전 운운' 한 것은 과장도 이만저만 도가 넘는 것이 아니다.
다음으로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만성리 터널 위에 새워진 비로서 비문이 없이 단지 '......'만 새겨진 비에 대하여 어느 페널이 자기도 그곳에다 이름을 새겨 넣고 싶다고 한 대목이다.
그것이 어떤 사람이 죽어서 그 것이 그곳에 세워진 것인지나 알고나 하는 것일까. 그에 대해서는 당시를 생생히 증언한 한 분의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당시 사찰반장 최명균 경사의 증언에 따르면 반란가담자의 일부가 심사를 통해 사살대상으로 분류되어 쓰리쿼타에 태워져 그곳 굴 앞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때 현장에서 군인이 최경사에게 총을 건네며 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최경사는,
“우리 경찰을 인명을 보호한 사람이지 사람을 죽이는 경찰이 아니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니 군인은 그것도 못하냐며 총을 빼앗듯이 가져가 사살을 시켰다는 것이다.
당시 군인이 형을 집행할 때 그중 한사람이 이렇게 외쳤다.
“우리 이왕에 이리된 마당에 만세나 부릅시다” 하면서 먼저 '인민공화국 만세”을 선창하니 다른 사람도 따라서 합창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이 묻힌 곳인데 아무런 개념없이 그들을 기리는 묘비에다가 자기 이름을 새기고 싶다니 경악할 일이 아닌가, 역사의식이 이렇게 결여되어도 되는 것일까.
여기서 14연대반란사건의 성격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반란군들은 왜 무고한 경찰관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는가? 시내를 점령한 단 이틀 만에 경찰관 72명을 잡아들여 학살한 이유는 무엇인가? 친일경찰이며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악질경찰이기 때문에 죽이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얼마나 궁색한 논리인가. 반란치하를 만들기 위한 구실이며 핑계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들 내부의 사정과 움직임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첫째 내부 구성원이다. 14연대는 광주 4연대가 모태가 되었다. 4연대에서 14연대로 분할하여 나올 때 지휘부에서는 사상이 불순한 자들을 우선 선발했다. 건건히 말썽을 부렸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지창수가 있었다.
그는 골수 공산주의자로 차출이 되자 곧바로 인사계를 장악했다. 그는 뜻을 같이한 동료들과 유대를 강화했다. 자기들끼리의 모자 뒤 끈을 일자 형태로 묶어서 서로 교감하도록 했다.
당시 지창수는 특무대로부터 사상검열을 받아 숙군의 명단에 올라있었다. 앞서 14연대는 연대장 최능진과 후임 오동기가 불순세력으로 잡혀가고 하급 장교와 하사관의 체포가 임박해 오고 있었다.
그 즈음 때맞추어 제주 폭동진압의 명령이 떨어진 것이었다. 지창수는 이것을 기회로 삼았다. 그는 정식 계선에 의한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다소 즉흥적이고 우발적으로 일으킨 것은 복기해보면 당시 정황과 심리상태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들이 지리산에 입산했을 때 남부군 군사 책임자 이현상은 즉시 지창수와 김지회의 직위를 박탈했다. 이때 이현상은 이렇게 질책했다고 한다.
“왜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단독행동을 했나?”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애초에 김지회는 처음에 반란대열에 함께 서지 않은 점이다. 그는 나중에야 합류했는데 이는 사전 공모를 같이 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지창수와 김지회의 지휘노선은 달랐다. 김지회는 황해도 군관학교 출신자로 박헌영의 지령을 따로 받고 있으나 지창수의 그 계열이 아니었다.
경찰관의 희생이 큰 것은 당시 14연대가 징병제가 아니고 모병제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들은 좌익활동을 하며 지내가가 입대한 사람이 많았다. 그들 일부는 경찰의 추적을 받자 군에 입대했다.
그런 만큼 경찰이 거주하는 집을 속속들이 알아내어 집에 피신한 직원들을 순식간에 잡아들인 것이었다. 이점은 반란사건을 이해하는데 조금은 참고가 될 것이다.
아무튼 여순사건은 오래되다보니 곳곳에서 진실이 가려지고 왜곡된 면이 없지 않다. 그중에 몇 가지를 들면 ‘산타루치아’를 부르고 죽어간 김창업이란 사람은 우익인사인데 좌익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으며, 경찰관이 민간인을 겁간했다는 것도 터무니없는 유언비어이다.
마치 소설 태백산맥에서 우익인사가 남의 부녀자를 강간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도 다르지 않다. 사람을 파렴치범으로 몰아 매도시키는 방법으로 그 이상 좋은 것이 없는 점을 차용한 것이다.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그 소설에서 반란군과 좌익들이 보성 율어에 해방구를 설치하자 주민들이 환영했다는 것도, 아무리 소설이지만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바로 지척인 인근마을 자모부락에서는 1949년 그들에 의한 집단학살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늦가을 초저녁에 동네사람들을 불러 모아 남녀를 구분해 세워놓고는 뒤에서 총을 쏘아 죽였다. 그때 한꺼번에 15명이 몰살당했다.
그것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니었다. 한 반란군이 고추밭에 숨어있었는데 밭주인 여자가 그것을 지서에 신고를 했던 것이다. 그로 인한 보복이었다.
이런 사실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당대의 비극적 사건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보지 않고서 한쪽 편을 들어 편향되게 제작하여 방영해도 되는 것일까.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끝)
첫댓글 진실이 왜곡된 잘못된 역사는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합니다.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철저한 조사나 고증없이 영상물을 만들어 내보내는지 모르겠네요. 무지한건지 무식한건지..암튼 선생님의 바람대로 시시비비를 따져 옥석구분이 됐으면 좋겠네요..
한국을 대표하는 tv에서 잘못된 사실을 방영하니 기가 막힐 뿐입니다. 이를 바로잡는다는 뜻에서 이 글을 올렸습니다.
질곡의 세월이 흘러왔건만 그때 그 시절 역사의 진실은 오늘도 안개 속에서 표류 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반란을 일으킨 자들은 자취도 없는데 어쩌면 피차간의 피해자들과 유가족만이 아물지 않은 상처의 아픔에 몸부림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실규명에 애써오신 선생님의 노력이 사계의 인정을 받는 날이오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진실을 밝힌다는 차원에서 또다시 아픈 상채기를 건더리게 되었습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수는 없는데 왜 왜곡된 허구가 판을 치는지 모르겠습니다. 돌아가신 선배경찰관들에게 한없이 미안하고 가슴 답답할 뿐입니다.
가슴 아픈 사건입니다. 역사는 청치에 춤추면 안됩니다.
똑 바로 보여져야 후손이 기억합니다.
역사적 진실이 묻혀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2021 경찰문학에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