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 맺음말
1961년 미국
by온기철 James Ohn방금
공자
1961년의 미국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달 랐다. 나는 보우딘 대학의 운동선수들의 프래터니티(친목회)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프래터니티 는 미식축구팀, 농구팀, 야구팀 전부가 같이
주거 했다. 대학 본부의 요구에 따라, 프래터니티 의 형제들은 고맙게도 나를 그들의 집(기숙사)에서 먹고 자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나는 “손님”이었다. “우리는 유색인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도착 하던 날 그들은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어쨋튼, 그들은 “황인종 달리기 선수”가 그들 운동선수들의 집에 들어 온 것을 무척 기뻐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내가 프래터니티에서 숙식을 할 특권을 가지게 된것은 내가 홍콩의 100m 달리기 기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달리기를 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으로 이용하려고 했다. 프래터니티 회원들은 내가 대학육상팀에 들어가지 않는 다고 아니꼬아 했다.
내가 그곳에 온지 일주일 쯤 되던 어느날, 도서실에서 프레터니티 집으로 돌아오자, 몸집이 거대한 미식축구팀의 라인뱈어가 아주 심각하게, “이봐, 중국사람, 너희 아버지가 세탁소 아니면 찹수이 집(joint) 를 했냐?” 라고 물었다.
나는 어리 둥절 했다. “찹 수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몰랐던 것은 고사하고, “런더리 쌉” 그리고 “조인트”는 나에게 앞 뒤가 안 맞는 말이어서 도대체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이것들이 아버지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 가? 이것은 마치 월가에서 정장 차림의 보행자에게, 당신 아버지는 박트리아 낙타들 아니면 캐시미어 염소를 몰았느 냐?”고 묻는 것과 같은 것 같았다.
무척 혼동 되어, 나는 어떻게 대답할 지 몰랐다. 질문이 농담이었나, 놀리는 것일 까?, 테스트 일까? 아니면 시비를 거는 것일 가?, 모욕 일 까 나는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바바” 스미스는 이마에 점이 있는 근육으로 만들어 진 거대한 정육면체 같았다. 그는 능글맞게 웃으면서 내 대답을 기다렸다. 질것 같으면 저자세로 나가고 입을 다물으라는 중국의 옛 전통에 따라서,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슬슬 피했다.
“엿 먹어라(Fuck), 칭크(중국인을 비하하는 말)!” 내뒤에서 악 쓰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다시 어리둥절 했다. 에프-워드(fuck)도 “칭크”라는 말도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홍콩에서 영어시간에 이말을 배운적이 없고, 영국 저택의 주인이 멸시하거나 겸손을 표시하는 의미로 이 두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다. 바바의 말투는 나에게 그가 친절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적어도 그가 나에게 네 아버지가 세탁소 나이면 찹수이 집을 했느 냐고 물을 때 만큼 친절하지 않았다.
뒤돌아 보면, 1961년의 미국 문화는 아직도 확실하게 1950대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프래터니티 하우스는, 지금도 그럴지 모르지만, 동물이 사는 집이었다. 1961년에는 시민권운동이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했었다. 버클리 대학에서 언론의 자유를 위한 젊은이들의 저항이 막 시작 되던 때이다. 전국을 뒤 흔들고 미국의 가치와 미국 사회에 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 반 베트남 전쟁운동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내가 보우딘에 도착할 때는 대체로 문화와 인종의 다변성에 관대하지 못한 1950년 대 미국이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일주일에 한번씩 편지를 썼다. 메인주 작은 대학 촌에서 좁은 눈으로 본 미국에서의 당황함과 놀라움을 전해 주었다. 나는 영국의 식민지인 홍콩을 싫어 하지만, 최고 학부의 학위만 받으면 즉시 돌아가겠다고 말 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교육을 핑계로 미국의 부와 물질적인 풍부함,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겼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내운명을 결정 했다.
내가 스탠포드 대학원, 그 다음에 버클리에서 대학원 교육을 받으면서, 나는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한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오래 걸렸지만 극적이고 상처받은 변화를 겪었다. 나는 미국에 적응 했고 결국 미국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다른 긴 이야기이다. 다음에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버지는 빠트리지 않고 매주 답장을 보냈다. 훈계, 도덕적인 가르침, 교화하는 이야기, 위대한 사람들의 기록, 기억할 만한 역사적인 사건을 적어 보냈다. 그의 편지는 우아한 필체의 고전적인 한문으로 써 있었다. 편지에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58로 시작 되었다. 4년전에 내가 중국에 갓을 때 시작된 편지 시리즈의 연속이었다.
그의 교훈적인 편지에, 과거에 우리 사이에 있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주제가 나타 났다. 그의 미국의 섹스에 대한 집착이었다. 그는 과도한 섹스로 인한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해로움에 대해서 길게 설명 하면서, 나에게 “미국인의 집착”에 휩쓸려 가는 것에 대한 위험을 경고 했다. 그의 의하면, 과도한 성의 첫번째 증상은 시력이 나빠지는 것이었다. 성에 대한 경고는 그의 가르침의 정기적인 주제 였다. 그는 휴 헤프너, 마릴린 먼로, 제인 러셀, 그리고 할리우드를 건전하지 못한 미국인의 집착으로 성가시게 반복해서 이야기 했다.
한번은, 전설적인 한의사가 중국고전에서 추천하는 20, 30, 40, 50, 60, 70대 남성의 건강한 성교의 횟수를 적어 보냈다. 처방 전체가 영리하게 그리고 기술적으로 완곡 어법을 구사하여 “성”과 “성교” 같은 거치른 말을 전혀 쓰지 않았다. 모든 완곡 어법은 네개의 글자로 되어 있었고, 따라서 4개의 음절이었다.
7개의 완곡어법은 모두 운이 맞았다. 내가 처방을 받아보고 너무나 크게 웃어서 프래터니티 형제들은 잠시 내가 실성 했다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 처방을 보존하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완곡어법은 80대 남성의 성교 횟수 였다: 공-시 파-자이,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 말이다.
San Francisco
1970년, 내가 미국에 온지 9년만에, 내가 비용을 모두 부담하여 아버지를 미국에 한달동안 머물게 했다. 캘리포니아 대학 시스템에서 가르치는 일을 시작한지 일년이 지날 무렵이었다. 내가 샌 프란시스코 공항에서 그를 만났을 때, 웃으면서 그의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그래, 내 아들아, 안경을 끼고 있구나!” 였다.
나는 웃으면서, 근시가 되었음을 인정 했다. 물론 나는 근시안이 과도한 쌕스에서 비롯 되었음을 획인 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 말들은 중국인 아들이 전에 몰랐던, 그의 일면을 들어 내게 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철저한 건강검진을 받게 하기 위해서, 그를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 의대에 데리고 갔을 때, 그에 대해서 더많이 알게 되었다.
그때 까지, 아버지는 거의 30년동안 건강검진을 해 본적이 없었다. 그는 70대이지만 새까만 머리, 운동선수 같은 걸음걸이, 완전한 시력, 그리고 호리호리하고 힘찬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검진이 시작되자, 젊은 의사는 그의 병력을 알기 위해서 긴 일련의 질문을 했다. 검진 동안에 나는 그의 뒤에 앉아 있었다.
“미스터 리. 대변에 피가 나온 적이 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의사 한 테 갔음 니까?”
“아니요.”
“당신은 무엇을 했습니까?”
“나는 피가 멎을 때까지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 있었습니다.”
“왜 의사 한테 가지 않았습니까?”
“왜 내가 의사 한테 가야 해요. 홍콩의 의사들은 내 돈을 빼앗아 가는 데만 관심이 있어요!”
우리 아버지의 대답은 진료하는 의사를 놀라게 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서 잠깐 쉬었다. 비뇨기과 질횐에 대해서도 대강 비슷한 질문를 했다. 그는 소변에도 피가 섞여 나온적이 있었다. 의사 한테 가지 않고 기다렸더나 그쳤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질문이 호흡기에 이르렀을 때, 의사는 기침으로 피가 나온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아니요, 그것은 결핵에 걸린 사람들 한테서 일어나는 일이요. 나는 아니요. 나는 결핵에 걸리기에는 너무나 튼튼 합니다!” 라고 대답 했다.
내가 중국과 홍콩에 살때, 결핵은 가장많은 사망의 원인이었다. 가난 그리고 심한 노동과 연관이 있었다. 이책에서 이전에 이야기 했듯이 내 위 누나 하나가 결핵에 걸렸었다. 다행히 다 나아서 지금 영국에 살고 있다.
의사가 지난 30년 동안에 당신이 가장심하게 앓았던 병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말라리아 입니다. 그것은 지옥 같았어요.”
“무엇을 했습니까?”
“나는 열과 오한이 그칠 때 까지 키니네를 먹었습니다.”
“약을 당신이 직접 사 먹었다구요?”
“물론이지요. 누가 나에게 약을 줍니까? 나는 키니네를 약국에서 샀습니다. 홍콩 사람들은 다 말라리아가 무엇인지 알지요!”
의사가 신경과 영역으로 질문을 바꾸었을 때, 아버지의 대답은 간단한 부정이었다. 그러다가 의사가 물었다:
“마스터 리, 의식을 잃고 쓰러진 적이 있습니까?” 아버지는 의사를 노려보더니, 집게 손가락으로 그의 코를 가리키면서, 날카롭게, “아니요, 다른 사람들을 쓰러트린 적만 있습니다.” 라고 말 했다.
의사는 숨이 막힐 정도로 폭소를 터트렸다. 진료를 마치고 내가 진찰실을 걸어 나올 때, 간호사가 아버지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의사가 나에게 조용히 말 했다. “당신 아버지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는 150세 까지 살 것입니다!”
(Britanica)
그러나, 의사의 진단적인 예견은 맞지 않았다. 1989년, 91세 아니면 92세(아무도 그의 출생 연도를 정확히 모른다)정도 되었을 때에 아버지는 시베리아와 복쪽 중국 사이에 있는 아무르 강으로 순례 여행을 갔다가 비극적이고 불필요한 죽음을 맞이 했다.
이책에서 전에 이야기 했듯이, 아버지는 아무르 강둑의 황량한 지방으로 산동 마을에서 10대일 때 낳은 두 딸을 만나러 간 것이었다. 그들은 러시아 건너편에 있는 공동농장에서 그들의 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었다.
주거 환경이 원시적인 농장에서, 엄동설한에 심한 감기에 걸려 얼마지나지 않아 사망 했다.
그가 죽은 다음, 중국 관리가 보낸 사망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서, 무슨 일이 있었는 지를 짜 맞추어 보았다. 열, 전해질 결핍, 적당한 의료의 부족으로 인해서 아버지는 의식이 왔다 갔다 하는 혼돈 상태에 빠졌다. 의료보조소 직원들은 그의 의식 혼돈 상태를 정신분열증으로 해석하고 그를 원시적인 정신병자 수용소에 가두었다. 다른 환자와 같이 그도 구속복을 입혀 꼼짝 못하게 했다. 얼마 지나서, 병이 나아 혼미한 정신이 돌아 왔다. 그는 풀어 달라고 요구 했지만 직원들은 이를 거부 했다. 아버지는 직원들에게 욕을 하고 침을 뱉었다. 직원들은 그에게 과도한 양의 진정제를 주사 했다. 그는 거의 즉시 사망했다.
우리 아버지는 만주 왕국 시절 검소하고 퇴행적인 마을에서 태어나서 공산 치하의 대동소이한 검소하고 퇴행적인 마을에서 사망했다. 그가 죽기 몇해 전, 내가 미국에서 대학원에 다닐 때, 나는 두가지 정신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공자 철학에 젖은 동아시아 정신과 그리스-로마 문명에서 비롯 된 서양 정신이었다.
아버지는 그가 미국을 방문 했을 때 나의 이중적인 정체성을 재정비 해주었다. 그는 그가 보는 관점에 대해서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나를 중국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중국말로만 대화를 했는 데도 불구하고, 대신에 그는 나를 영어로 “촬스”라고 불렀다. 물론 내가 홍콩을 방문 할 때 마다 였다.
“아, 촬스, 니 레이-레(네가 왔구나)!”내가 홍콩을 방문 할 때마다 항상들었던 나를 반기는 말이었다.
리 나는 그의 아버지를 지칠줄 모르는 투사, 시대의 희생자로 보았다. 그는 20년 동안 아버지에 대한 충효의
표시로 매달 돈을 보냈다. 찰스는 그를 이루지 못한 야망으로 지치고 버려진 자만심이 강하고 투쟁적인 비극의 인물로 보았다. 리 나도 찰스도 모두 옳지 않았고, 둘다 틀리지도 않았다.
온기철의 브런치입니다. 역사를 주제로 한 수필을 쓰고 있습니다. 본직은 의사이고 취미는 골프와 역사 공부입니다. 지루한 역사를 재미있게 이해시키기위한 글을 쓰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