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대전작가시선 제9집 [☆질문들☆]의 앞표지(좌)와 뒷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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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들]
2013. 대전작가시선 제9집 / 도서출판 심지(2013.07.25) / 값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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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는 글
시인의 품격을 지켜 냅시다
모름지기 시인의 언어는 품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설령 극한적인 저항과 풍자의 안간힘이라 하더라도, 말장난이나 폭력적인 막말에 그치면 보다 나은 세상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숨쉬기도 힘들던 야만의 시대에 결연히 맞서서 시대의 희망이 되었던 명망 높은 시인이 있었습니다. 영어의 몸이 된 그를 구하고자 두려움을 떨쳐내며 시인에게 자유를 달라고 외치던 문인들에게 그는 매서운 시대의 채찍이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시대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가 앞서간 형극의 길을 따라 많은 후학들이 어깨 걸고 걸으면서 좀 더 너그럽고 넉넉한 세상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는 이제 삶의 예지로 사회의 나침반이 되는 원로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현란하되 공허하고, 그의 분노는 뜨겁지만 거룩함을 잃었습니다.
그의 사상적 스승 해월은 평생을 적빈의 가난 속에 도망자로 살면서도 스승 최제우의 가족을 돌보았고, 방방곡곡을 떠돌면서도 새끼를 꼬고 멍석을 짜며 나무를 심었습니다. 생전에 예수를 보지도 못했던 바울이 텐트를 만들어 생계를 꾸리며 전도여행을 계속했듯이 말입니다. 해월과 바울은 여느 장삼이사와 똑같이 일상의 노동 속에서 자신의 안팎을 성찰하며 이웃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상을 삭혀냈습니다.
해월과 바울은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타자의 입장에서 사유하며 시대의 아픔에 민감하게 감응할 수 있었기에, 자신의 나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이웃을 하늘처럼 섬기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당시 뛰어난 영성을 자랑하며 공동체의 유익에 부합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에 비유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내세웁니다. 이런 겸허함이 그에게 그 유명한 사랑노래를 절제된 언어로 부르게 한 것입니다.
원로가 된 시인은 한때 자신을 돌봐준 선배와 동료를 천박한 언어로 모욕하고 능멸합니다. 그것도 자신만의 주관적인 기준으로 말입니다. 이는 연암 박지원이 자신의 글 서문에서 밝히듯, 마치 귀울이를 앓는 아이가 자신의 귀에서 나는 소리를 남이 몰라주는 것을 탓함과 같다 할 것입니다. 이는 인간관계의 다양한 다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으로, 극단적인 자의식 과잉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연암이 말하듯, 그 자신의 지독한 코골이에 대해서 남들은 다 혀를 내두르는데 자신만 전혀 알지 못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경애하는 대전작가회의 시인 여러분!
나만의 귀울이에 빠져 남들을 탓하지는 않는지, 남들이 다 하는 자신의 코골이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지 스스로의 발밑을 살펴보며, 일상의 노동 속에서 이웃을 향해 열린 마음을 정제된 언어로 우려내 시인의 품격을 지켜 냅시다.
2013년 7월
대전작가회의 회장 김 영 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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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대전작가시선 제9집 [질문들]
[ 차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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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시인은 경주하는 자본의 속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느리게 설어온 순간순간을 다시 걸어보며 감각의 온전한 해방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길섶에서 만남을 기다리는 존재자들의 어느 몸짓도 소홀히 여기지 않습니다. 허공에 길을 놓는 것도 예민하게 감각하는 시인의 일입니다. 이 때 허공의 길에서 많은 존재자들이 만나 생성의 꽃을 피웁니다
- 권덕하「지금, 여기에서 쓰는 시」해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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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작가회
2013. 상반기 제22호
[작가마당]
머리글
《작가마당》22호를 펴내며
지금 희망을 말하는 이유
우리가 한 일은 ‘희망’이라는 단어를 던져놓은 것뿐이다. 희망이라는, 이 무지막하고 실체를 찾기 어려운 단어를 고를 수밖에 없었던 배경은 역시 지난 12월에 있었던 일, 절망이라는 말 외에 달리 표현을 찾을 수 없었던 상황이 그 출발이다.
희망이 탈색되어 절망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 절고 절어 더께로 앉은 절망이 뚝뚝 떨어져 나가고 나서야 희망이라는 속살이 제 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라는 말장난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있었다. 희망은 환상에 가깝지만 절망은 현실이라는 사실, 처연했다.
앞뒤좌우를 돌아보고 위아래를 뒤적여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이 상황에서 우리, 당신과 나처럼 이 시대라는 들판에서 이름 모를 풀들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엇을 인생의 방향으로 삼아 숨 쉬고 있는지, 그래서 궁금해졌다. 막연할지언정 보이는 것이 없기에 움켜쥔 단어가 ‘희망’이다.
그리고 각자 다른 모양으로 다른 삶을 꾸리는 사람들을 찾았다. 아는 이도 모르는 이도 있었다. 돈 걱정은 덜 하는 사람도 있고 돈 때문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었다. 아직 본격적으로 자기 삶을 책임지지 못하는 나이의 사람도 있었고 삶의 고비들을 거의 지난 사람의 낮은 목소리도 있었으며 지금 감당하기 힘든 고비를 오르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남자도 여자도, 주부도 아이도 있었으며 기자가 있고 군인도 있었다. 정치적으로 절망하는 이도, 거기서 다시 희망을 찾는 이도 있었고 법의 논리고 민주주의를 다시 돌아보는 사람과 함께 죽음의 문턱을 돌아 나온 사람의 이야기도 있었다.
물론 지금, 지혜로운 이야기가 듣고 싶고 시대를 관통하는 묵직한 시선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문학 안에서 정신의 지주가 되는 버팀목을 찾아 위안을 삼을 수도 있었지만, 이번 담론은 그러나 우리의 삶으로 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삶은 이어지고 있다는 현상, 그 과정에서 희망의 정체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다소 퇴행적이기까지 한 이번 질문을 삶이 가진 바닥을 똑바로 바라보자는 의도 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다. 달리 말하면 들풀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보는 일이다.
시론詩論은 이번 호부터 새로 시작하는 코너이다. 우리 사회를 직접 들여다보자는 취지이기도 하지만 희망을 구체화하는 방식을 모색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사회적 경제에 관한 관심으로 시작해 정치적으로 연대하고 협력하는 방식을 짚고 있다.
김만중의 다단한 삶과 문학이 현재 우리의 삶에, 특히 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새기는 메시지는 새로 연재를 시작한 민찬 교수의 글에서 읽을 수 있다. 앞으로 고전에서 현대를 읽어낼 수 있는 독법을 제시하리라 믿는다. 인천작가회의에서 보내준 시편들 또한 귀하게 싣는다.
희망은 본디 있다고 할 것도 아니고 또 없다고 할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다. 원래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많은 사람이 다니면서 저절로 생겨난 것처럼(루쉰의「고향」중에서) 등불은 밝은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어둠이라는 배경이 있어야 등불은 등불이다.
편집위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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