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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대별 행사 |
비 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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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5 오후9시 이수역 카니발(2011년산) 인수 |
10월 16일(화) |
예스랜트 02-, 22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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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번호 NO |
07:30 교대역 집합 |
교대역 - 병산서원(3시간) |
08:00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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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 원주휴게소 정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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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 병산서원 도착 |
서원답사 (30분 소요) |
12:20 하회마을 입구 점심 |
(1시간소요) |
13:30 하회마을 답사 |
(1시간소요) 서애종택,겸암종택 |
14:30 하회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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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 도산서원 답사 |
(1시간 소요) |
16:30 퇴계종택 답사 |
30분소요, 수월한수정과 사당답사 |
17:20 퇴계묘소 답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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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0 의성김씨 종택 답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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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호계서원 및 임하댐 야월감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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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저녁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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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0 안동역앞 호텔 숙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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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7일(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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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0 기상, 07;30 조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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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안동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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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 영주 소수서원 답사 |
(1시간 소요) |
12:30 부석사 답사 |
(1시간 소요) |
13:30 부석사 관광단지 오찬 |
(2시간 소요) |
16;30 문경새재 답사 |
(1시간30분 소요) |
18:00 문경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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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교대역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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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만찬 후 해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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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파크H 054-853-1501(안동역5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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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성류파크 054-787-3711-5,010-9360-21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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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온천피닉스 054-787-3044,45,47 |
강구 산호대게(최고가) 054-733-4023 / 모텔 |
백암온천 |
대게종가 054-733-38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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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게궁 054-754-5001 |
예스랜트 |
바다소리 054-733-8222 / 민박 |
권영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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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은 유홍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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弟유재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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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사적 제260호, 屛山書院)]
병산서원은 1572년 서애(西厓)류성룡(柳成龍)선생이 31세 때에 건립하여 후진을 양성한 서원으로서, 1614년 선생을 흠모한 사림(士林)들이 존덕사(尊德祠)를 세워 선생을 배향(配享)하였으며, 그 후 선생의 셋째 아들 수암(修巖) 류진(柳袗)공을 배향하였다.
1863년「병산(屛山)」으로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복례문, 만대루, 동재, 서재, 입교당, 장판각, 존덕사, 전사청, 고직사 등이 있다.
병산서원의 전신(前身)은 고려말부터 이어져온 풍산류씨 가문의 서당인「풍악서당」을 선조5년(1572년)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諡號 文忠公 1542-1607년)선생이 31세 때에 후학의 양성을 위해 풍산에서 병산으로 자리로 옮겼다.
광해군6년(1614년)에 선생의 제자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공이 서애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유림(儒林)과 뜻을 모아 사당(祠堂)인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여 선생을 배향(配享)하면서 서원으로 위상이 바뀌게 되었으며, 1629년에 서애 선생의 셋째 아들 수암(修巖) 류진(柳袗, 1582-1635) 공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병산서원의 정문으로 정면 1칸의 대문이다. 복례란 "자기를 낮추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仁)이다"라는 문구에서 따온 말이다.
서원의 정문은 삼문(三門)이 일반적이지만 이 문의 경우는 가운데 칸만 판문(板門)이고, 문의 좌우로 담장과 구분되는 벽채를 한 칸씩 두고 있다.
[입교당에서 바라본 만대루]
만대루(晩對樓)의 만대(晩對)란 이름은 두보(杜甫)의 오언율시(五言律詩)인 제목:백제성루(白帝城樓)의 "…푸른 절벽은 오후에 늦게 대할만하니..."란 구절에서 명명되었다고 하며, 송나라 주희(朱喜)가 경영한 무이정사(武夷精舍)에도 만대정(晩對亭)이 있었다고도 한다.
[병풍을 펼친듯한 병산]
서원 앞에는 노송들과 백사장이 펼쳐져 있으며,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병풍(屛風)을 펼쳐놓은 듯 한 병산(屛山)이 있다.
[충효당 - 서애 류성룡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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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당 - 풍산 류씨 대종가, 입암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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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陶山書院 - 한국정신문화의 聖地]
도산서원 전경
소재지 : 경북 안동시 陶山면 土溪리 680
도산서원은 건축물 구성면으로 볼 때 크게 도산서당과 이를 아우르는 도산서원으로 구분된다. 도산서당은 퇴계선생이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고,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건립되어 추증된 사당과 서원이다.
도산서당은 1561년(명종 16)에 설립되었다. 퇴계선생이 낙향 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을 위해 지었으며 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퇴계선생이 직접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때 유생들의 기숙사 역할을 한 농운정사와 부전교당속시설인 하고직사(下庫直舍)도 함께 지어졌다.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6년 뒤인 1576년에 완공되었다.
1570년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자 1572년에 선생의 위패를 상덕사(보물 제211호)에 모실 것을 결정하였다. 2년 뒤 지방 유림의 공의로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고, 전교당(보물 제210호)과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다.
1575년(선조 8)에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 받음으로써 사액(賜額)서원으로서 영남유학의 총 본산이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사림이 월천(月川) 조목(趙穆,1524-1606) 선생을 종향(從享)했다.
도산서원은 주교육시설을 중심으로 배향공간과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교육시설은 출입문인 진도문(進道門)과 중앙의 전교당(典敎堂)을 기준으로 좌.우 대칭으로 배열되어 있다. 동.서로 나누어진 광명실(光明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로서 오늘날의 도서관에 해당한다. 동.서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건물이다.
동편 도산서당건물을 ‘박약재(博約齋)’와 서편 건물을 ‘홍의재(弘毅齋)’라 하는데 안마당을 중심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 중앙의 전교당은 강학공간과 원장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재 뒤편으로는 책판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 자리하고 있다.
배향공간인 사당 건축물로는 위패를 모셔놓은 상덕사(尙德祠)와 각종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典祀廳)이 있는데 삼문을 경계로 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례를 지내고 있다. 부속건물로는 서원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상고직사(上庫直舍)가 있으며 이는 홍의재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 입구 왼쪽에는 1970년 설립된 유물전시관 ‘옥진각(玉振閣)’이 있는데, 퇴계선생이 직접 사용했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1969년 본 서원을 중심으로 임야 및 전답 19필 324.945㎡이 사적 170호로 지정되었고, 1970년부터 대통령령으로 보수.증축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우리나라 유학사상의 정신적 고향으로 성역화 되었다. 1977년 도산서원관리사무소가 설치되고 관리운영조례를 제정 공포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원짜리 지폐와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
[천원짜리 지폐 뒷면의 계상정거도]
천원짜리 지폐는 2007년 앞면 퇴계 초상은 그대로 두고 뒷면을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로 바꿨다. 이 그림을 두고 도산서원을 그린 것이냐 아니냐 말이 많았었다.
계상정거란 글자 그대로 '계상에 조용히 산다'는 표현인데, 퇴계가 도산서원 자리에 도산서당을 짓기 전 종택 부근에 지었던 계상서당의 이름이다.
최고 선비로 이름 높던 쉰여덟살 퇴계를 스물세살 율곡이 찾아와 만났던 곳이기도 하다.
율곡은 사흘을 머물며 퇴계와 함께 시와 학문을 논했다고 한다. 그러나 계상서당은 시냇물 가에 있는 초가였고 그림속 서당은 낙동강이나 산세, 주변 지형들이 도산서원을 꼭 닮았다.
계상정거도
이것이 겸재의 계상정거도다. 서당 안에 퇴계가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실제 도산서원 주변 풍광과 매우 비슷하다. 겸재가 도산서원 생긴 지 170년 뒤에 그리면서 도산서원의 모습을 빌려와 퇴계의 계상서당을 묘사한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옛 산수화는 서양 풍경화처럼 정확하게 묘사하는 게 아니라 상상화에 가깝게 그린다는 점도 감안해서다. 얼마 전 계상정거도가 들어 있는 화첩 '퇴우이선생진적첩'이 경매에 나와 고미술품 사상 최고액인 34억원에 팔려서 또 한번 뉴스가 되었었다.
[퇴계선생 종택]
퇴계종택/退溪宗宅경상북도기념물 제42호(1982.12.1)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468-2대학자인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선생의 종택(宗宅)이다. 정문에 퇴계선생구택(退溪先生舊宅)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이 건물은 1926~1929년 사이에 선생의 13대손 하정공(霞汀公, 忠鎬)이 옛 종택의 규모를 따라 신축하였다. 정면 6칸 측면 5칸 측면 2칸의 ‘口’자 형태인데 총 34칸으로 이루어졌다. 우측에 있는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추월한수정 마루에는 '도학연원방(道學淵源坊)'이란 현판 등이 게판되어 있다.답사노트도산면 소재지인 온혜리 못미쳐 우측으로(표지판 있음) 난 포장도로를 따라 '상계(上溪)'에 이르면 그 오른쪽에 종택을 만날 수 있다. '퇴계선생구택(退溪先生舊宅)' 이란 현판이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 앞 대문에 게판되어 있다.
퇴계묘소(墓所)
퇴계선생의 학문과 삶의 재조명을 통해 퇴계 선생의 정신과 삶의 소박함을 연출한 편안하고 정다운 공간으로 조성되었다.
선생의 무덤은 종택에서 남쪽으로 약 1km 가량 떨어진 토계리(土溪里) 건지산 남쪽 산봉우리 위에 있다. 도로변에 작은 표석을 세웠으나 지나치기 십상이다. 갑자기 좌우로 갈라지는 도로변에서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 오후의 봄 햇살을 벗삼으며 한가로이 계신 촌로(村老)께 여쭈었다.
"퇴계 선생님 묘소가 어디 있습니까?""저 만디(산꼭대기)에 올라가 보소"
방금 지나친 산을 가리키신다. 도로변에 주차하고 아래로 낙동강 안동호를 바라보는 가파른 언덕을 10분 가까이 올라가니 선생님의 묘소가 있었다. 내 살고 있는 고양(高揚)주변의 크고 잘 꾸며진 능(陵)들을 머리 속에 그리면서 가슴 두근거리며 올라와 만난 선생님의 묘는 분봉이 낮았으며 망주석과 작은 비석만 세우진 아주 검소한 묘역이었다. 보라색 작은 할미꽃과 각시붓꽃이 군데군데 피어 선생님을 벗하고 있다.
퇴계 선생의 유계(遺戒)에 따라 신도비(神道碑)와 의물(儀物) 등은 일체 세우지 아니하고, 오직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는 묘비 만이 서 있을 뿐이다.
묘비에는 선생의 자명(自銘)이 새겨져 있다.
나면서 어리석고자라서는 병도 많아중간에 어찌하다 학문을 즐겼는데만년에는 어찌하여 벼슬을 받았던고!학문은 구할수록 더욱 멀어지고벼슬은 마다해도 더욱더 주어졌네나가서는 넘어지고물러서서는 곧게 감추니나라 은혜 부끄럽고성현 말씀 두렵구나산은 높고 또 높으며물은 깊고 또 깊어라(........)조화 타고 돌아가니무얼 다시 구하랴.
[퇴계선생 일화]
- 퇴계의 둘째부인 안동권씨
- 며느리를 재가시킨 퇴계
- 퇴계와 두향의 러브스토리
[義城 金氏 내앞종택]
의성(義城) 김씨(金氏) 천전종택(川前宗宅)
의성 김씨 천전종택
안동 시내에서 영덕으로 가는 34번 국도를 타고 반변천을 따라 계속 가면 임하댐 보조댐이 나오고, 여기서 1.5km 정도 더 가면 도로 왼쪽으로 고풍스러운 기와집들이 자리 잡은 마을이 나타납니다.
마을 입구에는 사람 키보다 더 큰 자연석에 마을을 알리는 '내앞'이라고 쓴 표지석이 서 있습니다. 이 마을이 바로 의성 김씨 집성촌으로, 반변천 앞이라 하여 한자로는 '천전(川前)마을', 우리말로는 '내앞마을'이라 합니다. 이 마을 기와집들 가운데 가장 웅장한 집이 의성(義城) 김씨(金氏) 천전종택(川前宗宅)입니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은 양반과 선비가 살 만한 영남의 4대 길지의 하나로 이곳을 꼽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말한 4대 길지는 안동의 도산, 하회, 천전, 봉화의 닭실을 말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이곳은 '육부자등과지처(六父子登科之處)'로 소문이 났습니다.
평면도
먼저 의성 김씨 천전종택의 평면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전체적인 집의 구조를 이해하기에 좋습니다. 행랑채에 난 출입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口'자 형태인 안채가 자리하고 있고, 왼쪽으로 '一'자 형태인 사랑채가 자리하였습니다. '口'자형 안채와 '一'자형 사랑채가 행랑채 및 다른 건물과 이어져 전체적으로는 '巳'자형 평면을 이룹니다.
작은 사랑채 역할을 한 별채
의성 김씨 천전종택은 처음 지었던 집이 조선 선조 때 불타 없어지자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16세기 말 북경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곳 상류층 주택의 설계도를 가져와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이 집에서는 대문 역할을 하는 솟을대문이 따로 없습니다. 대신에 행랑채 대문 오른쪽으로 행랑이 있고, 왼쪽으로는 작은 사랑채 역할을 하는 별채가 있습니다.
사랑채는 왼쪽을 돌아들어 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건물은 옆쪽 행랑채와 사랑채를 연결해 주는 건물로, 작은 사랑채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의 팔작지붕집으로, 커다란 사랑 대청과 사랑방·침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방문객이 행랑채의 대문을 거치지 않고 곧장 사랑채로 들어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남자 주인의 거처인 사랑채의 기능이 아무래도 약해 보입니다. 거기에다 사랑채를 안채보다 오히려 더 깊숙이 배치하였습니다.
옆쪽 행랑채와 별채
사랑채에 이어지는 옆쪽 행랑채는 완전한 2층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위층은 서고(書庫)로 사랑채 대청과 이어지고, 아래층은 헛간으로 되어 있습니다.
안뜰에서 바라본 앞쪽 행랑채
대문 안을 들어선 안뜰에서 바라본 앞쪽 행랑채의 모습입니다.
안뜰에서 바라본 옆쪽 행랑채와 사랑채
대문 안을 들어선 안뜰에서 바라본 옆쪽 행랑채와 사랑채의 모습입니다. 안뜰에서 사랑채로 통하는 돌계단이 보입니다.
안채 측면
집 앞에서 볼 때 지붕의 측면만 보이는 가장 높아 보이는 건물이 안채입니다. 안주인이 생활하면서 집안 살림을 맡았던 안채는 다른 집과 달리 안방이 바깥쪽으로 높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안채는 부엌·안방·대청·건넌방(윗상방·아랫상방)과 헛간 등으로 되어 있으며, 안방의 앞면에는 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두었습니다.
작은 사랑채 역할을 한 별채
의성 김씨 천전종택을 둘러보면서 건물 배치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대문 가까이에 있기 마련인 사랑채가 대문과는 거리가 먼 외진 곳에 있고, 가장 깊숙한 곳에 있어야 할 안채가 오히려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있습니다.
이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건물 배치는 건물 배치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근래에 출입문을 지금의 자리로 잘못 내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무라야마 치준(村山 智順)이 쓴 <한국의 풍수(朝鮮の風水)>에 실린 1930년대의 천전종택 사진을 보면 그런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무라야마 치준의 당시 사진에 의하면, 지금의 출입문 앞으로 담장을 둘렀고, 외부에서 천전종택으로 출입하는 길 또한 지금과는 달리 담장과 나란히 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출입문의 위치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는데, 출입문이 사랑채와 연결된 별채 앞으로 나 있었습니다. 즉, 사랑채가 앞쪽에, 그리고 안채가 출입문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건물 배치 구도가 되는 셈입니다. 그러니 천전종택 역시 사대부가의 통상적인 건물 배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虎溪서원]
호계서원(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5호)
안동 호계서원 복설이 추진되는 가운데 영남지역에서 400여 년간 3차례에 걸쳐 이어진 병호시비가 서애 류성룡 선생과 학봉 김성일 선생 문중간의 합의로 병산서원과 호계서원 사이의 의견대립인 ‘병호시비’가 일단락 되었다.
양 문중 류영하 종손과 김종길 종손은 지난 2월말 만남을 갖고 복원될 호계서원의 퇴계선생 위패를 중심으로 왼쪽에 서애선생, 오른쪽에 학봉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기로 합의했다.
호계서원 중건추진위원회(호계서원 원장 이석희)는 최근 호계서원을 복원하기로 하고 사당, 동제, 서제, 누각, 사주문 등 건립비용 12억 8천만원을 안동시에 신청했으며, 안동시에서는 구체적인 내용을 검토 후 7월경에 경상북도에 사업승인 신청할 계획이며 10월경 도비보조사업으로 확정되면 분권교부세 등을 확보해 문화재복원 사업지침에 따라 복설할 계획이다.
영남 3대 시비중의 하나인 병호시비는 1575년 영남 유림이 퇴계선생의 학덕을 기려 건립한 호계서원의 좌배향을 두고 유림들간에 벌어진 분쟁으로 호계서원 중건추진위원회는 사당이 복원되면 퇴계와 서애, 학봉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기로 했다.
호계서원 / 경북 안동시 임하면. 경북유형문화재 제35호. 조선 선조 6년(1573)에 건립되었다. 처음에는 여강서원이라 하였으나 숙종 2년(1676)에 현판을 하사하여 호계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퇴계 이황 선생을 봉안하고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무량수전(국보 제18호)
▲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근본도량(根本道場)이다.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고, 화엄의 대교(大敎)를 펴던 곳으로, 창건에 얽힌 의상과 선묘(善妙) 아가씨의 애틋한 사랑의 설화는 유명하다. 1016년(고려 현종 7)에 원융국사(圓融國師)가 무량수전(無量壽殿)을 중창하였고 1376년(우왕 2)에 원응국사(圓應國師)가 다시 중수하고, 이듬해 조사당(祖師堂)을 재건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와 개연(改椽)을 거쳐 1916년에는 무량수전을 해체 수리하였다.
경내에는 무량수전(국보 18)·조사당(국보 19)·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국보 45)·조사당 벽화(국보 46)·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 등의 국보와 3층석탑·석조여래좌상·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의 보물, 원융국사비·불사리탑 등의 지방문화재를 비롯하여 삼성각(三聖閣)·취현암(醉玄庵)·범종루(梵鐘樓)·안양문(安養門)·응향각(凝香閣) 등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또 신라 때부터 쌓은 것으로 믿어지는 대석단(大石壇)이 있다.
의상은 제자가 3,000명이나 있었다고 하며 그 중에서 10대덕(十大德)이라 불리는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訓)·진정(眞定)·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은 모두 화엄을 현양(顯揚)시킨 승려들이었다.
이 밖에도 《송고승전(宋高僧傳)》에 그 이름이 보이는 범체(梵體)나 도신(道身)및 신림(神琳) 등도 의상의 훌륭한 제자였으며 의상 이후의 부석사와 관계된 고승으로는 혜철국사(惠哲國師)·무염국사(無染國師)·징효대사(澄曉大師)·원융국사·원응국사 등이 그 법통을 이었다.
[紹修書院]
소수서원 입구 노송군락
고려후기의 학자 회헌 안향(고종30년(1243)∼충렬왕32년(1306)이하 회헌이라 함)은 나라가 매우 어려운 시기에 사십여년간 벼슬길에서 두차례나 왕을 수행(隨行), 원나라에 다녀오는 등 국사에 이바지한 공헌도 공헌이려니와, 그 중에도 회헌 선생 다운 바는 문교(文敎)와 유학(儒學) 진흥에 있음은 이를 나위도 없으리라. 당시는 불교 · 신도(神道)의 그늘에 쇠잔해만 가는 유학을 일으킴에 힘써, 퇴락한 문묘(文廟)를 수리, 중국에서 공자와 72제자의 상(像)을 그려다가 모셨고, 교육재단인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여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그리고 중국에서 정주학(程朱學)을 도입하여 연구하고, 장려하는 등, 시들었던 유학에 활력의 샘줄기를 터놓은 분이 회헌이다.
조선 중종 38년(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워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 된 이 서원은 수많은 명현거유 배출은 물론 학문탐구의 소중한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다.
소수서원은 건립 당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으로 불렸는데 그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조정에 건의하여 소수서원으로 사액되었습니다. 사액서원이라함은 나라로부터 책, 토지, 노비를 하사받아 면세, 면역의 특권을 가진 서원을 말합니다. '소수(紹修)'라 함은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닦게 하였음'이란 뜻으로 학문 부흥에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 명종임금은 손수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 글씨를 써서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신재(愼齋)주세붕(이하 신재)은 당대의 석학이며 도학자로서, 선현(先賢) 회헌을 우리나라 도학의 비조(鼻祖)로 우러러 오던 터에, 중종36년(1541)5월, 풍기군수에 부임, 3일만에 회헌의 고향 순흥을 찾았다.(그때 順興府는 금성대군사건으로 폐지되어, 풍기군에 병합되어 있었음) 신재는 그 길에 순흥읍터에서 북쪽으로 약3리쯤인 숙수사지(宿水寺址)에 들렀다. 숙수사는 회헌이 소년시절 글읽던 곳으로서, 신재의 기록에는 폐지(廢址)라 했으니, 그때는 이미 절은 없어지고 빈터만 남아있었던 듯하다. 경내에는 마치 거북이 엎드린 형상으로 자리한 영귀봉(靈龜峰)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숙수사터는 소백산에서 근원한 죽계(竹溪)의 맑은 여울이 바로 무릎밑에 못을 이루고, 동쪽으로 물을 격하여 마주한 연화봉(蓮花峰)기슭 푸른 절벽이 못물에 그림자를 드리워, 그 산수풍광이 중국의 여산(廬山)에 못지 않는다고 신재는 찬탄(贊嘆)했거니와, 거기는 늘 흰구름이 골짜기에 서려있다고 하여, 신재는 이름하여 白雲洞이라 명명 했다.(順興誌엔 「본래는 船乎洞」이었다고 함) 백운동을 거닐면서 거기 회헌을 제사하는 사당을 세우기로 뜻을 정한 신재는 그때 영남에 심한 흉년으로, 어려운 상황임을 무릅쓰고 서원창건 계획을 서둘렀었다.
이듬해(중종37년) 8월 15일 역사를 시작, 土地神에 개기(開基)제사를 지내고 터를 다듬는데, 한자남짓 땅밑에서 놋쇠가 1백20근이나 나오는 기적(奇蹟)이 있었다.(그것으로 祭器와 많은 서책을 마련하여 서원에 비치했다.) 사당이며 강당 등 30여칸이 완성된 것은 그 이듬해(중종38년)였다.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본받아 白雲洞書院이라 이름하고, 그 8월11일 회헌의 위패와 함께 그 영정(影幀)을 봉안했으며, 또 그 이듬해 중종39년(1544)년 9월 1일에 안축 · 안보(安軸 · 安輔:회헌의 三從孫,고려 충렬∼忠穆王때의 학자 名臣)를 배향(配享)하고, 해마다 봄 가을 제사를 받들게 했다.
명종5년(1550) 5월 왕명으로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이 서원의 이름을 『소수紹修』 라 지었으니,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하였음"(기폐지학 소이수지旣廢之學 紹而修之)
이란 뜻이다. 명종임금이 손수 『紹修書院』편액 글씨를 써서 하사 하였으니, 곧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공인된 사립고등교육기관(私立高等敎育機關)으로 인정 받게 되었다.
◆ 예비자료 ◆
[안동 월령교]
** 경상북도 안동시 상아동과 성곡동 일원 안동호에 놓인 목책교 **
2003년 개통되었으며 길이 387m, 너비 3.6m로 국내에서는 가장 긴 목책 인도교이다. 다리 한가운데에는 월영정(月映亭)이 있다. 월영교란 명칭은 시민의 의견을 모아 댐건설로 수몰된 월영대가 이곳으로 온 인연과 월곡면, 음달골이라는 지명을 참고로 확정되었다. 낙동강을 감싸듯 하는 산세와 댐으로 이루어진 울타리 같은 지형은 밤하늘에 뜬 달을 마음속에 파고 들게 한다. 천공으로부터 내려온 달을 강물에 띄운 채 가슴에 파고든 아린 달 빛은 잊혀진 꿈을 일깨우고 다시 호수의 달빛이 되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으려 한다. 월영교는 이런 자연풍광을 드러내는 조형물이지만, 그보다 이 지역에 살았던 이응태부부의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을 오래도록 기념하고자 했다. 먼저 간 남편을 위해 아내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한 켤레 미투리 모양을 이 다리 모습에 담았다. 그들의 아름답고 애절한 사랑을 영원히 이어주고자 오늘 우리는 이 다리를 만들고 그 위에 올라 그들의 숭고한 사랑의 달빛을 우리 의 사랑과 꿈으로 승화시키고자 한다.
위치설명 : 경상북도 안동시 상아동, 성곡동 일원(헬기장↔석빙고)
[봉화 닭실마을]
경북 봉화의 닭실마을은 500년을 이어온 전통의 한과마을로 유명한 곳이다. 부녀회에서 주문을 받아 생산하는 닭실한과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어 한과 수요가 많은 철에는 주문량을 다 생산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충제 권벌 선생의 유적이 남아있는 안동 권씨의 집성촌으로도 유명하며 국도에서 언뜻 보아도 오래된 기와집들이 모여있는 모양새가 오래된 반가의 집성촌임을 쉽게 알수 있다. 현재 닭실마을에는 충제 선생 종택과 청암정, 유물각이 있다. 닭실이란 이름은 이 마을의 지형이 금빛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울진 불영계곡]
불영계곡은 한국의 그랜드 캐년이라고 불리정도로 울창한 수목들이 숲을 이루고, 높이가 40-100m에 가까운 기암절벽과 암석군으로 이루어져 있는 계곡을 따라 톱니처럼 늘어선 협곡에는 사시사철 맑고 깨끗한 푸른 계곡물이 흘러내리며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장장 15km가 되는 장엄한 계곡으로도 유명하지만 계곡 따라 흐르는 각양각색의 빼어난 절경들로 더욱 유명하다. 불영계곡은 태산준령에서 흘러내린 맑은 계류가 오색바위와 어우러져 구비구비 절경을 이루며 펼쳐지는데, 깎아 만든 듯한 온갖 모양의 바위와 빽빽한 나무숲이 시원한 계곡의 물 소리와 조화되어 시원한 명승지를 이룬다.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불영사(佛影寺)라는 이름은 옛날 이 절의 연못에 부처님의 그림자가 비쳤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 불영사는 주차장에서 절로 들어서는 길이 산태극수태극으로 감싸있어서 참 매력적이다. 또한, 비구니 사찰답게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꾸며져 있다. 연못과 꽃 그리고 절 입구의 채소밭 등이 잘 꾸며져 있어, 방문자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준다
[울진 백암온천]
천연알칼리성 라듐성분을 함유한 국내 유일의 유황온천으로 1979년 12월 31일 관광특구로 지정되었다. 무색무취하며 사람 몸에 적당한 53도를 유지하고 있어 온천욕을 즐기기에 적당할 뿐만 아니라 신경통, 만성관절염, 중풍, 신경마비 등에 효험이 있다. 동해안의 대표적인 온천으로 손꼽히며 전국에서 온천객과 휴양객들이 줄지어 찾는 곳이다. 또한, 이 곳은 회전그네, 바이킹, 펌프카 등 다양한 놀이시설을 갖추고 있어 가족단위의 휴식공간으로 더할 나위 없다. 주위에는 동해해수욕장과 백암산의 절경이 있어 해수욕과 등산도 곁들일 수 있다.
위치설명 : 경북 울진군 온정면 온정리
[울진 월송정]
사적지 관동팔경의 하나인 월송정은 고려시대에 창건되었고, 조선 중기 때 관찰사 박원종이 중건하였으나, 낡고 무너져서 유적만 남았던 곳을 1933년 향인 황만영 등이 다시 중건하였다. 그 후 일제 말기 월송 주둔 해군이 적기 내습의 목표가 된다 하여 철거하였다. 1964년 4월 재일교포로 구성된 금강회가 철근콘크리트 정자를 신축하였으나 옛 모습을 살필 길 없어 1979년에 헐어 버리고, 1980년에 고려시대의 양식을 본따서 지금의 건물을 세웠다.
월송정은 신라의 영랑, 술랑, 남속, 안양이라는 네 화랑이 울창한 소나무 숲에서 달을 즐겼다 해서 월송정이라고도 하고, 월국에서 송묘를 가져다 심었다 하여 월송이라고도 한다. 정자 주변에는 해송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 푸른 동해 바다를 바라 보면 금방 가슴이 확트이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월송정의 소나무와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솟아오르는 일출 광경은 널리 알려져서 관광객과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인근에 있는 망양정과 함께 우리나라 동해안에서 몇 안 되는 일출 명소로 유명한 곳이다. 주변에는 백암온천과 덕구온천이 있어, 일출과 함께 겨울철 관광지로 제격이다.
위치설명 : 경북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362-2
[영덕 불루로드 트래킹]
석리~경정리(대게원조마을)~죽도산(축산항) 3.5K/1시간20분
[영양 금강소나무 생태경영림]
본신리 생태경영림은 아름다운 산림과 숲의 미적 가치가 잘 표현되는 산림을 선별하여 단지로 지정, 국민들에게 홍보함으로써 숲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고 보는 이의 정서 순화에 기여를 목적으로 지정하였다. 경북 영양군 수비면 본신리 일대(1,839ha)의 금강 소나무림은 우리 주위의 꼬불꼬불한 일반 소나무와는 달리 줄기가 곧바르고 마디가 길고 껍질이 유별나게 붉은, 소나무 중 최고의 나무로 꼽히는 금강소나무(金剛松)가 자라고 있다.
이외에도 소나무외 27종의 미적 가치가 뛰어난 나무들이 즐비하여 아름다운 숲을 이루고 있어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작은 길을 따라 숲으로 들어가면 자연과의 하나 되어 일상에서 느낄 수 없는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이 곳의 소나무는 궁궐이나 사찰 등의 보수에 사용할 수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로 문화재 복원용 목재생산림(총 700본, 40ha)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금강 소나무림의 후계숲 조성을 위한 시범림으로도 지정되어 앞으로도 많은 후계림 조성을 위한 숲가꾸기 작업들이 이루어질 전망이다. 뿐만 아니라 이 곳 소나무림은 임업장비를 활용하여 임업기계화로 숲을 가꾸고자 정한 기계화 시범 사업장으로도 활용될 만큼 입지여건도 좋으며, 주변에 산더덕재배지가 있어 체험학습장으로도 활용이 가능하다.
[영양 석보 - 두들마을과 이문열 생가]
두들마을은 '언덕 위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1640년 석계 이시명 선생이 병자호란을 피해서 들어와 개척한 이후, 그의 후손인 재령 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왔다. 조선시대 1899년에는 이곳에 국립 병원격인 광제원이 있었다 하여, '원두들, 원리'라 부르기도 한다.
마을에는 석계 선생이 살았던 석계고택과 석계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쳤던 석천서당을 포함하여 전통가옥 30여채를 비롯하여 한글 최초의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쓴 정부인 장씨를 기리는 안동 장씨 유적비, 이문열이 세운 광산문학연구소 등이 있다. 마을 앞을 흐르는 화매천을 둘러친 절벽 바위에는 석계 선생의 넷째 아들인 이숭일이 새겨 놓은 동대, 서대, 낙기대, 세심대 등 유묵도 뚜렷하게 보인다. 1994년 정부로부터 문화마을로 지정되었다.
문학체험프로그램(이문열, 이병각, 이병철), 역사체험, 민속공예품체험, 농촌체험(계절별 수확체험), 음식디미방체험 및 시식, 한옥체험등을 체험 해 볼 수 있다.
위치설명 :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학봉종택 - 김성일 선생 생가]
의성김씨 학봉 종택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살았던 가옥이다. 학봉종택은 원래 지금의 자리에 있었으나 지대가 낮아 침수가 자주 된다며 학봉의 8세손 광찬(光燦)이 1762년(영조 38) 이곳에서 100여미터 떨어진 현재
소계서당(邵溪書堂)이 있는 자리에 옮겨 살고 종택이 있던 자리에는 소계서당을 지었다 한다. 그러나 1964년 종택을 다시 원래의 자리인 현위치로 이건되었다.
학봉은 류성룡(柳成龍)과 더불어 퇴계의 고제(高弟)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27세에 사마시, 1568년(선조 1) 중광문과 병과에 합격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1577년(선조 10)에는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1590년(선조 23)에는 통신부사로 일본에 파견되기도 하였으나 임란때에 왜적과의 전투를 독려하다가 병사하였다.
학봉종택 외에 운장각이 있다. 운장각은 조선 선조 때의 명신이며 학자인 학봉 김성일 선생의 유물을 보관한 곳이다. 선생께서 남기신 서적·물품·친필기록 제초고 및 선조전래의 전적·문서와 후손들의 유품을 영구히 보존코자 건립하였다. 운장각에는 현재 선생이 남긴 서적, 유품, 친필기록, 고문서 56종 261점(보물 제905호), 제초고 및 선조 전래의 전적문서(보물 제906호)와 후손들의 유품 등 500여점의 유적이 소장되어 있다.
[학봉 김성일 선생 일화]
-학봉의 임진왜란 전투와 순절
-재봉 고경명의 셋째아들
-나주군수직과 호남 최초 서원 건립
[안동 관광 안내도]
첫댓글 아주 알차고 환상적인 코스를 다녀오셧군요.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꼭 권하고 싶은 코스입니다.